괴팅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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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팅겐
Götting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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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

'''괴팅겐의 위치'''
'''행정'''
'''국가'''
독일 [image]
'''시간대'''
(UTC+1/+2)
''''''
니더작센
''''''
괴팅겐 군
'''인문환경'''
'''면적'''
116.89km²
'''인구'''
118,911명(2019년)
'''인구밀도'''
1,017명/km²
'''정치'''
'''시장'''
롤프게오르크 쾰러

1. 개요
2. 역사
3.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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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ie Stadt der Wissenschaft'''

학문의 도시[1]

독일 니더작센에 위치한 도시. 인구는 13만 가량으로 비교적 소규모의 도시이지만 괴팅겐 대학교로 대표되는 뛰어난 교육과 연구기관으로 유명하다.

2. 역사


고고학 발굴 결과 서기 7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또한 이 일대에 10세기 무렵 구팅기(Gutingi)라는 명지명이 기록에 언급되지만, 일반적으로는 하인리히 사자공[2]이 12세기 후반에 마을을 세운 것이 오늘날 괴팅겐의 출발점으로 이해된다.[3] 명목상 하인리히 사자공의 가문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4]이 대대손손 소유하기는 했으나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했으며, 독일 남부와 북부를 오가는 교통로의 가운데에 있다는 이점[5]을 활용하여 한자동맹에 가입, 직물과 양모 무역을 통하여 중세 말기 경제적 번영을 누린다.
하지만 16세기 초반 칼렌베르크 공작 에리히 1세[6]의 간섭에 반발하여 그에게 충성 맹세를 거부하였다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무법 도시로 명명되는 홍역을 치르면서 그 세가 빠르게 악화됐고,[7] 엎친데 덮친 격으로 16세기 후반 급성장한 영국의 모직물 산업에 밀리면서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이후로도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8] 1692년 하노버 선제후가 이 곳을 차지한다.
1737년 하노버 선제후이자 영국의 국왕이었던 조지 2세의 명령에 의해 괴팅겐 대학교가 건립된다.[9]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 군이 이 곳을 점령하면서 일시적으로 베스트팔렌 왕국의 영지에 편입되었다가[10]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하노버 왕가의 소유지로 넘어온다. 하지만 하노버 왕국은 7주 전쟁 당시 줄을 잘못섰다가 공중분해되어버렸고, 하노버 일대가 프로이센 왕국에게 흡수되면서 괴팅겐 역시 프로이센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이후 독일 제국 시기에도 괴팅겐 대학교의 학문적 성취에 힘입어 괴팅겐은 독일 내에서도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맡았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암운이 드리운다. 당시 괴팅겐 대학교에는 무수히 많은 유대인 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대거 쫓겨났던 것. 특히 에드워드 텔러를 비롯한 유대인 학자들이 많았던 물리학 계열에서 타격이 컸다. 당시 나치는 이른바 아리안 물리학을 내세우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주창한 상대성 이론 등을 유대인 물리학이라고 배척했기 때문.[11] 결국 물리학과를 포함한 대다수의 유대인 교수들이 193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교직에서 쫓겨났고, 괴팅겐과 괴팅겐 대학교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학문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다.[12] 그래도 다행히도 2차 대전 중에는 교육 산업 중심의 소규모 도시라는 점 덕분에 폭격을 피했고[13] 종전 이후 새로이 편성된 행정구역인 니더작센에 편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3. 출신 인물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오토 한
  • 다비트 힐베르트
  • 막스 플랑크
  • 크리스티안 뷔트너 (TheFatRat)[14]

[1] 괴팅겐의 캐치 프레이즈. 혹은 이를 약간 비틀어서 Die Stadt, die Wissen schafft(지식을 창조하는 도시)라고 쓰기도 한다.[2] Heinrich der Löwe. 작센바이에른의 공작을 겸했으며, 동방식민운동에도 많은 기여를 한다.[3] 사실 하인리히 사자공이 세웠는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그 당시 일대에서 그 말고 도시 건설과 같은 정책을 펼칠만한 세력을 갖추고 있던 사람이 없기 때문에 추측되는 것일 뿐.[4] 훗날 세를 키워 하노버 왕국의 왕실이 되었으며, 현재 영국 윈저 왕조의 조상이기도 하다.[5]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이 무렵 독일의 양대 상업 거점이던 뤼벡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중간지점이었다.[6] 괴팅겐을 다스리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의 대가 일시적으로 끊긴 이후 새로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한 인물이다.[7]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 홍역을 치른 뒤 칼렌베르크 공작과 괴팅겐 사이의 사이가 막상 꽤나 우호적이었다는 점이다. 칼렌베르크 공이 괴팅겐에게 금전적으로 많이 의존했기 때문(...) [8] 애초에 오늘날 니더작센 일대가 중세-근대 시기 독일 문화권 내에서도 가장 군소공국이 난립하던 지역이었다. 니더작센이라는 지명이 등장한 것은 빨라야 19세기 후반 독일 제국의 성립 이후이며, 늦으면 1920년대까지로 그 시기가 밀린다.[9] 참고로 하노버와 영국의 동국 연합은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끝이 난다. 살리카 법에 따라 독일에서는 여자 군주가 즉위할 수 없었기 때문.[10] 이 때 나폴레옹이 전투를 수행하던 도중 괴팅겐을 포격하려다가 가우스가 이 곳에 머무른다(당시 괴팅겐 대학교에 교수로 재직중)는 소식을 듣고는 포격을 포기했다는 카더라도 있다.[11] 여담이지만 순수 독일인이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나치 독일 집권 직후 무심코 상대성 이론을 인용했다가 게슈타포로부터 코시지를 먹을 뻔 했다.[12] 이건 단순히 괴팅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독일 학계 전체가 나치로 인하여 겪어야 했던 댓가였다.[13] 이따금 도시를 지나가는 철도에 대한 폭격이 가해지기는 했지만 도시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버린 함부르크드레스덴과 비교하자면 조족지혈. 야사에 따르면 케임브리지를 폭격하지 않는 조건으로 딜을 했다는 도시전설이 있다.[14] 일렉트로닉 뮤직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