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제12번(쇼스타코비치)
정식 명칭: 교향곡 제12번 D단조 작품 112 '1917년'
(Sinfonie Nr.12 d-moll op.112 "Das Jahr 1917"/Symphony no.12 in D minor, op.112 'The Year 1917')
1. 개요
쇼스타코비치의 열두 번째 교향곡. 전작인 11번에 이어 이번에는 세계 최초로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인 1917년 11월의 볼셰비키 혁명을 소재로 한 곡이다. 작곡 시기는 1960년 늦여름 혹은 초가을부터 이듬해 8월까지로 되어 있는데, 초안을 작성하던 중이었던 1960년 10월에 아들 막심의 결혼식에 참석하던 중 넘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이후 다소 느리게 작곡되었다고 한다.
원래 6번으로 예정했던 곡은 레닌을 주제로 한 대규모 교향곡이었다는 인터뷰 자료가 있지만, 결국 이 구상은 파기되었다. 레닌과 1917년 혁명을 소재로 한 곡은 결국 약 20년 뒤에야 작곡된 이 곡이 되었고, 그것도 당시의 구상과 꽤 차이를 보이고 있다.
2. 곡의 형태
11번과 마찬가지로 이 곡도 전통 4악장의 틀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악장들이 쉬지 않고 연주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교향시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다. 각 악장에 작곡자 자신이 표제를 붙인 것도 붕어빵. 다만 거의 1시간을 요하던 전작에 비해, 이번 곡은 전체 연주 시간이 약 40여 분 정도로 약간 작은 규모로 완성되었다.
'혁명의 페트로그라드' 라는 제목이 붙은 1악장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켜며 시작하는 진중한 인트로가 붙어 있고, 여기 사용된 악상들은 이후 4악장 종결부에서도 반복되어 전곡을 아치 형상으로 만들고 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서주가 타악기의 트레몰로로 중단된 뒤, 곧 속도가 빨라져 본론으로 들어간다.
첫 주제는 저음 현이 장중하게 켜던 인트로를 스피디하고 다소 불안정하게 변형시킨 형태로, 바순 솔로가 연주한다. 이 주제 자체만으로 짧은 발전부를 만들어 한바탕 내달린 뒤, 저음 현악기들이 서정적이지만 근엄한 느낌도 주는 두 번째 주제를 연주한다. 이 주제는 2악장에도 등장하는데, 쇼스타코비치 자신은 직접 암시하지 않았지만 레닌을 상징하는 주제로 여겨진다. 역시 그 자체로 발전부를 이루어 작은 클라이맥스를 형성한다.
본격적인 발전부는 바로 뒤이어 나오며, 바순이 다시금 첫 번째 주제를 제시하고 이것을 변형시켜가며 전개한다. 이어 두 번째 주제와 인트로의 악상들도 등장해 얽히면서 한 차례 더 긴박감이 조성된다. 타악기의 강렬한 난타가 곁들여진 전체 총주의 클라이맥스가 끝나면 바이올린으로 두 번째 주제가 재현되고, 이어 금관이 장중하게 인트로의 첫머리 악상을 연주한 뒤 목관이 이어받는 이행부를 거쳐 2악장으로 이어진다.
2악장은 '라즐리프(Razliv)' 라고 적혀 있는데, 페트로그라드 북쪽에 있는 라도가 호숫가에 위치한 마을의 이름이다. 실제로 레닌은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이 마을에 은둔하면서 혁명을 위한 세부사항을 구상하고 입안했다. 다만 혁명 영웅에 대한 거대한 찬가 분위기는 없고, 혁명 전야의 조용하면서도 긴장된 분위기의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여리게 연주하며 시작되는데, 이 부분은 1악장의 두 번째 주제를 살짝 변형시킨 형태다.
이 첫 주제는 마치 리프처럼 이 악장에서 계속해서 나지막하게 깔리며 반복되는데, 그 와중에 두 번째 주제도 호른과 플루트 등의 관악기 솔로에 의해 조용히 제시된다. 이 두 주제를 이용한 짧은 발전부가 이어지고, 중간부에서는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또 다른 형태의 주제를 연주한다. 사실 이 주제는 이어지는 3악장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혁명을 위해 페트로그라드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혁명군이나 레닌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있다.
이어 두 번째 주제를 트롬본 솔로로 다시 재현하고, 아주 조용하고 짧은 이행부를 거쳐 곧장 3악장 '오로라' 에 진입한다. 오로라 역시 페트로그라드의 젖줄인 네바 강에 정박해 있던 순양함의 이름인데, 여기서 함포로 공포탄을 쏘아 혁명군들에게 행동 개시를 알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악기들이 2악장 중반에 미리 소개된 주제를 피치카토로 슬금슬금 도입하기 시작하고, 이어 목관악기와 금관악기가 서서히 추가되면서 1악장의 두 번째 주제가 트롬본을 앞세운 관현악 총주로 강하게 연주된다. 곧 팀파니와 베이스드럼, 스네어드럼 등 타악기들이 거칠게 연주하는 리듬으로 혁명군의 돌입이 묘사되며, 긴장감과 흥분을 그대로 유지하며 4악장으로 이어진다.
'인류의 새벽' 으로 이름붙은 4악장에서는 초반부에서 호른들이 강하게 연주하는 팡파르 스타일 주제가 먼저 제시되는데, 이 주제는 사실 쇼스타코비치의 첫 혁명 소재 교향곡이었던 2번 후반부에서 이미 선보여진 적이 있었다. 긴장감이 잦아들면 바이올린이 가볍고 유려한 주제를 도입하는데, 다만 주제라기 보다는 이행부 성격이 강하고 후반에도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1악장 인트로의 악상들이 조심스레 섞이면서 발전부로 이어지는데, 1악장의 두 주요 주제와 인트로 악상들, 호른이 제시한 악장 첫머리의 주제가 얽히면서 꽤 정교하게 진행된다. 전체 관현악으로 클라이맥스가 연출된 뒤, 팀파니의 강타를 거쳐 꽤 거창한 종결부로 진입한다. 처음에는 1악장 인트로의 악상들이 재현되고, 이어 1악장의 두 번째 주제가 트럼펫을 위시한 금관에 의해 화려하게 연주된다. D장조의 으뜸화음과 감화음이 연속해서 반복되며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하는 발상은 5번이나 7번의 마지막 악장에서도 쓰인 바 있고, 여기서도 충실하게 재현되며 '해피 엔딩' 으로 귀결된다.
악기 편성은 플루트 3(3번 주자는 피콜로를 겸함)/오보에 3/클라리넷 3/바순 3(3번 주자는 콘트라바순을 겸함)/호른 4/트럼펫 3/트롬본 3/튜바/팀파니/심벌즈/스네어드럼/베이스드럼/탐탐/트라이앵글/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3. 초연과 출판
1961년 10월 1일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지휘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초연했고, 같은 해 소련 국립음악출판소에서 악보가 간행되었다. 다음 해에는 서방과 일본 등에서도 초연되었다. 전작인 11번과 마찬가지로 이 곡도 서사적이고 기념비적인 작품을 선호하는 소련 집권층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재연되었다.
4. 평가
하지만 1905년 혁명을 그린 11번과 달리, 이 곡은 냉전 시기의 양대 산맥이었던 소련 건국으로 이어진 사회주의 혁명을 소재로 한 곡이라 서방 측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특히 소련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천조국 미국에서는 쇼스타코비치가 '관제 작곡가' 로 변절했다거나, 어떤 어른의 사정으로 마지못해 쓴 정권 영합용 작품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꽤 많이 쏟아졌다.
결국 이러한 정치적 비평은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고, 소련 붕괴 후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고찰과 재평가가 시작되면서 이 곡에 대한 여론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아무 표제가 없어서 비정치적 혹은 순수예술적으로 곡을 평가하거나 연주할 수 있는 다른 교향곡들에 비하면 곡의 제목이나 악장에 붙은 부제들이 너무 명백하게 역사적 사건을 그리고 있어서,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몇몇 망명 음악가들은 이 곡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그리고 곡에 착수했던 1960년에 쇼스타코비치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점도 이 곡과 종종 연관되는 떡밥인데, 쇼스타코비치가 스스로 입당했는지 아니면 누가 강제해서 입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1] 어쨌든 입당한 것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에, 입당 직후 완성되고 초연된 이 곡이 정말 공산당의 비위를 맞추거나 충성을 증명하는 '보증 수표' 로 쓰였느냐에 대해서도 꽤 논란이 많은 실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안위와 보신을 위한 목적으로 이 곡을 썼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뭔가 설명하기 힘든 후일담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후속 교향곡인 13번이 직접적은 아니더라도 소련 정부의 치부로 여겨지는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해 집권층의 신경을 꽤 거슬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곡 중 소련의 방송 잡지에서 행한 인터뷰를 보면, 쇼스타코비치가 레닌에 대해 느낀 감정이 어느 정도 설명되어 있어서 이 곡의 이해에 어느 정도 실마리를 주고 있다. 1917년에 아직 10대 소년이었던 쇼스타코비치는 레닌이 혁명 실행을 위해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기차역에 당도한 직후 행한 연설을 직접 들었고, 그 장면을 매우 인상깊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 외에도 10대 시절에 구상한 작품들의 '혁명적인' 주제와 표제를 보더라도 쇼스타코비치는 혁명 초기 소련이 제시한 예술의 자유나 차별과 억압 없는 새로운 사회라는 명제에 꽤 열광했던 것 같고, 그런 점에서 그 시절의 열정과 재기를 회고하는 의미로 이 작품을 썼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1] 쇼스타코비치는 첫 아내가 죽은 후 2년 뒤인 1956년에 공산주의청년동맹의 여성 운동가와 재혼하면서 정치적 쉴드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59년에 성격 차이 등의 문제로 이혼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금 모종의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도 입당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추측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