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제5번(쇼스타코비치)
파보 예르비 지휘, 파리 관현악단
정식 명칭: 교향곡 제5번 D단조 작품 47
(Sinfonie Nr.5 d-moll op.47/Symphony no.5 in D minor, op.47)
1. 개요
쇼스타코비치의 다섯 번째 교향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에 속하며, 동시에 가장 치열한 논쟁을 지금까지도 불러오고 있는 문제작이다. 전작인 4번이 소련 집권층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비판 대공세로 인해 오랫동안 발표되지 못했기 때문에, 1961년까지 사반세기 동안 이 곡은 그의 네 번째 교향곡으로 통용되었다.(...)
1936년 소련 공산당 기관지로부터 사상 비판을 받은 후 1937년 4월부터 7월까지 넉 달이 안되는 짧은 시간에 작곡되어 그 해 11월에 초연되었다. 그 동안 전위적인 실험성을 많이 추구해오던 쇼스타코비치 음악은 이 곡을 기점으로 전통과 '사회주의 사실주의' 를 버무려낸 노선으로 변경되었다.
뭐든 제목 붙여대기 좋아하는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한 때 이 곡을 '혁명' 이라는 부제로 부르기도 했지만, 혁명과 연관된 키워드는 곡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서구에서 발매된 어떠한 음반이나 공연 포스터에도 '혁명'이나 이와 연관된 부제가 붙어있는 경우는 없다. 작곡가가 직접 붙인 이 곡의 부제는 "'''당국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이다.
2. 작곡 배경
1930년대 초반 쇼스타코비치는 당으로부터 '소련 국민작곡가', '천재작곡가' 칭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6년 1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을 관람하던 스탈린이 공연 도중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시하며 자리를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소련의 기관지 '프라우다'는 스탈린의 지령으로 이 작품에 대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어긋나며 지극히 부르주아적이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는 혹평을 실었고, 이후 공연 금지 처분을 내려진다. 소련 당국의 비판이 이어지며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히며 정치적으로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되었다.
1937년은 스탈린의 대숙청이 절정에 이르며 소련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까지 마구잡이로 끌려가 처형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몇몇 친척들과 가까운 지인들도 "숙청"당했고, 1937년에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비밀경찰로부터 취조를 받아야만 했다.
체제로부터 생명의 위협 속에서 쇼스타코비치는 1937년에 완성한 교향곡 4번 C단조의 초연을 포기해야만 했다. 짙은 고독과 염세적인 분위기에 싸인 이 곡은 '타락한 부르주아 음악'으로 평가될 게 예상됐고, 그것은 곧 작곡가의 신변을 위협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교향곡 5번을 써내려갔다. 이 교향곡의 부제는 "당국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이었다.
3. 악기 편성
피콜로/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E♭클라리넷/바순 2/콘트라바순/호른 4/트럼펫 3/트롬본 3/튜바/팀파니/베이스드럼/스네어드럼/심벌즈/탐탐/트라이앵글/실로폰/글로켄슈필 또는 튜블러 벨/하프/첼레스타/피아노/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오보에만 두 대를 쓰는 변칙 3관 편성이고, 4번에서 이상할 정도로 거대했던 스펙보다는 많이 축소되고 일반적인 형태라 일반 관현악단도 연주에 큰 부담이 없다. 이런 점 때문에도 대중적으로 많이 연주되는 듯.
4. 곡의 형태
1번처럼 다시 고전적인 4악장 형식으로 돌아간 것에서부터 전통 회귀의 자세가 보이는데, 스케르초와 느린 악장이 각각 2악장과 3악장에 들어가고 모든 악장이 제대로 분리가 되어 있다. 그리고 4악장 엔딩도 단조 교향곡의 전통적인 '해피 엔딩' 인 장조 조바꿈으로 끝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1악장은 별도의 서주나 인트로 없이 현악 파트가 거칠게 부점 리듬이 가해진 첫 번째 주제를 내놓으며 시작되는데, 격한 흐름이 진정되면 부점 리듬을 다소 변형시켜 유지하며 바이올린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대선율을 추가한다. 이어 첫머리 후반부의 8분음표 위주 리듬이 다소 건조하게 반복되는 가운데 바이올린이 긴 음가로 다소 들쭉날쭉한 음역을 보이는 두 번째 주제를 켠다.[1]
고전 소나타의 발전부에 해당하는 섹션은 비올라의 두 번째 주제 연주로 시작되고, 이어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에 피아노의 저음부까지 가세해 다소 묵직한 리듬형이 나오며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한다. 속도도 점차 빨라지고, 첫 번째 주제의 조용했던 대선율이 강렬하게 내지르는 금관악기들에 의해 변형되어 나타나는 등 주제들 외에 대선율이나 특정 리듬도 집요하게 반복되면서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부분은 전작인 2번이나 4번에서처럼 서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악구들을 비논리적으로 나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때처럼 무절제 혹은 무질서하게까지 보이지는 않고 악장 첫머리로 돌아가는 고전적인 재현부까지 자연스레 이어져 첫 번째 클라이맥스를 형성시킨다. 하지만 이 재현부처럼 보이는 부분도 사실은 재현부스러운 작은 발전부로 볼 수 있고, 이전 주제들을 내놓되 여러 가지로 뒤틀어 놓거나 아예 변형시켜 내놓으면서 기분나쁠 정도로 고요한 종결부로 이어진다.
2악장은 4번의 같은 악장에서처럼 말러의 영향력을 강하게 내비치는 스케르초인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다소 무뚝뚝하게 내뱉는 듯이 연주하는 주제로 시작된다. 여기에 화답하는 목관과 호른의 연주는 다분히 쇼스타코비치의 신랄함이 더해진 말러풍 악구로 만들어져 씁쓸한 아이러니를 더하고 있다.
대신 형식의 경우 4번에서보다 훨씬 전통적인데, ABA' 아치형 3부 형식을 상당히 규칙적으로 준수하고 있다. 중간부에서는 쇼스타코비치가 초기에 장기로 했던 왈츠의 리듬을 타고 진행되지만, 마냥 우아하지는 않고 중간중간 거칠게 튀어나오는 신랄한 악구를 넣어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반복되는 A 부분에서는 실로폰이 더해지고 코데타(짧은 코다)가 붙는 것 외에는 크게 다른 점이 없다.
느린 템포의 3악장에서는 금관악기를 모두 배제하고 현 파트를 일반적인 5분할 방식보다 더 잘게 쪼개놓고 있는데, 바이올린은 세 그룹으로, 비올라와 첼로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매우 섬세하고 정갈한 음색을 들을 수 있다. 한동안 현악 파트로만 진행되다가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악기들이 가세하고, 점차 음량을 더해 첫 번째 클라이맥스가 조성된다.
이어 다시 조용한 분위기로 돌아가면 템포가 약간 빨라져 오보에 독주가 나오는데, 플루트가 악장 맨 처음에 연주한 선율의 단축형이다. 이후 목관악기가 주축이 되어 선율을 반복하며 점차 변형시키고, 첼로가 가세하면서 갑자기 텐션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다른 현악기군의 거친 트레몰로를 배경으로 바이올린과 첼로가 악장 첫머리에 제시된 악상을 힘차게 켜고, 피아노와 실로폰까지 가세해 매우 강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곧이어 첼로가 오보에의 연주로 나온 선율을 마찬가지로 받아 억세게 연주하며 이 악장의 진짜 클라이맥스를 마무리한다. 긴장감이 차츰 풀리고 나면 다시 첫머리처럼 현악 파트 주도로 섬세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하프와 첼레스타가 오보에 선율의 단편을 띄엄띄엄 연주하며 조용하게 마무리짓는다.
마지막 4악장은 관악기의 크레센도(점점 세게)로 시작되며, 팀파니가 거칠게 두드리는 가운데 트럼펫과 트롬본이 강한 추진력을 보여주는 첫 주제를 연주한다. 아주 섬세하고 내성적이었던 이전 악장과는 거의 상극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칠게 밀어붙이는데, 템포도 점점 빨라지며 트럼펫의 자극적인 독주 악구가 더해져 첫 번째 클라이맥스가 연출된다.
잠시 진정 기미를 보이며 호른이 트럼펫의 강렬했던 악구를 부드럽게 연주하고, 이어 현 파트의 지속적인 반복 음형을 뒤에 깔고 관악기들이 조용하게 이어받으면서 중간부를 마친다. 다시 스네어드럼과 팀파니가 약하게 리듬을 깔아주는 가운데, 첫머리에 억세게 나왔던 선율이 목관악기들에 의해 다소 약하게 재등장한다.
일종의 재현부 성격이지만, 1악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첫머리의 충실한 반복이라는 도식은 피하고 있다. 다른 악기들이 가세하고 타악기의 강한 연주가 더해지면서 장대한 코다로 이어지는데, 트럼펫을 비롯한 금관악기들이 아주 끈질길 정도로 D장조의 1도 화음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해피 엔딩' 으로 전곡을 마무리짓고 있다. 다만 이 곡이 정말로 긍정 속에 끝났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5. 초연과 출판
이 곡은 스탈린의 악명높은 대숙청으로 소련 전국이 공포에 떨고 있던 1937년 11월 21일 ‘당국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조적인 답변’이라는 명목으로 발표되었다. 예브게니 므라빈스키가 이끄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초연을 맡았다. 전통 교향곡 형식론과 '고통을 넘어 환희로'라는 베토벤풍 도식을 취한 이 곡은 '당의 입장' 에 부합한 것으로 여겨져 초연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초연 때 청중들은 광란에 가까울 정도로 기립 박수를 쳤는데, 기립박수가 무려 4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광기에 가까운 반응은 당시 대숙청에 대한 공포 또는 반발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소련 언론과 공적 단체들의 태도도 크게 바뀌었다. 비평가들은 쇼스타코비치가 1936년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뒤에 ‘교화되고, 개선되고, 또 명확해졌다’고 평했다.
출판은 1939년에 소련 국립음악출판소에서 행해졌다.
6. 해석과 수용
어둡고 음울한 1악장을 거쳐 환희에 차오르는 4악장에 이르는 구성을 가진 이 곡은 초연 당시 빛나는 승리의 쟁취, 투쟁 등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 찬사를 들으며 소련의 사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여겨졌다. 일 년 전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공연 때 '타락한 부르주아 음악'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곤경에 처했던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5번을 계기로 ‘인민의 작곡가’로 추앙받게 되었다. 다만 일각에서는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골계미가 남아 있고, 기존 형식미에서도 다소 일탈한 성격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사상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 자신은 생전에 이 곡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특필할 만한 의견을 내놓지 않았고, '나의 음악이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다' 라는 뭉뚱그림식 발언으로 더 이상의 논의를 피했다.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가 살아있는 동안 소련 체제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선전되었으나, 쇼스타코비치 사망 후 반전을 맞게 된다. 쇼스타코비치가 만년에 솔로몬 볼코프라는 젊은 음악학자에게 구술한 원고가 쇼스타코비치 사망 후 회고록으로 출판한 것이었다. 이 책은 기존의 곡 해석과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았는데, 이 곡에서 느껴지는 해방감과 환희는 '소련 정권으로부터 강제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정치적 논쟁까지 유발했을 정도로 파급 효과가 대단했고, 이 해석을 받아들여 곡의 절정감과 기복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냉정하게 조망하는 듯한 연주가 서방에서 한때 대세가 될 정도였다.
소련 붕괴 후 해외에서는 좀처럼 접근하기 힘들었던 러시아 음악계와 교류가 다시 활발해지자 이런 류의 해석도 다시금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쇼스타코비치를 지나치게 '반공 투사'화한 볼코프의 책이 신빙성과 증거를 결여하고 있다고 반박하는 자료들도 일부 발굴되면서 쇼스타코치비를 '정권의 희생양'으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도 이 곡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소련 정권의 해석도, 그렇다고 볼코프 류의 해석도 아닌 순음악 개념만으로 접근하는 시도도 나오고 있고, 소련 시절 활동했던 지휘자나 망명해 활동한 지휘자, 서방에서만 주로 활동한 지휘자에 따라 이 곡을 바라보는 시각도 천차만별이다.
7. 한국에서의 연주
80년대에 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중에 고전음악을 좋아하였던 유기화학 교수님이 강단에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에 관한 음악인데 대한민국에서는 들을 수 없는 금지곡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반공이 투철한 시기여서 공산주의에 관한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정말로 ‘'''혁명'''’이라는 제목으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 담긴 카세트테이프가 은밀히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활발한 논쟁과 더불어 이 곡은 현재 가장 자주 연주되고 있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상당히 늦게 연주되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쓰라린 경험 때문에 반공을 사실상의 국시로 삼고 있던 남한 군사 정권은 1980년대말 5공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될 때까지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하차투리안 같은 소련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를 금지곡으로 지정하여 연주, 음반 판매가 모두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 곡을 접하는 길은 불법 수입한 LP를 카세트 테이프로 비밀리에 복사하여 헤드폰 끼고 몰래 듣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한다. 80년대에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혁명'이라는 제목의 녹음 라벨이 붙은 테이프로 비밀리에 복제, 유통되어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필청곡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위의 일화에 나와 있는 것처럼 곡 자체를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은밀히 유통되던 카세트 테이프 가운데 ''''혁명''''이라는 게 있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교향곡 5번 D단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 사람의 작품으로 제목까지 불온하기 짝이 없으니 당시에는 몰래 들어야 하는 음악이었다.
은밀한 호기심으로 이 곡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곡을 '인터내셔널가'에 버금가는 이념 음악으로 신비화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감상하는 쪽이든 감시하는 쪽이든 음악 자체에 대한 이해는 뒷전이었다.
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쇼스타코비치가 금지곡이어서 몰래 들어야 했다는 내용이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고 당장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이에 관한 일화들이 몇 개 나오지만, 결론적으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전두환 정권 당시인 1982년 2월 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시향 274회 정기연주회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친아들과 친손자인 막심 쇼스타코비치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내한하여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과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직접 지휘, 협연한 바 있다. 당시 정기연주회는 아예 "쇼스타코비치의 밤"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음악회였다. 관련자료. 당시 이 공연 소식은 일간지 등을 통해 널리 홍보되었다. 관련기사. 이보다 이른 1979년 6월 29일 뉴욕 필의 내한 공연 때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 곡을 지휘한 바 있고, 1980년 4월 24일 조선일보 초청으로 내한한 로스트로포비치와 워싱턴 내셔날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도 쇼스타코비치 5번이 공연되었다. 관련자료. 관련기사. 80년대에 이 곡은 LP로도 발매되어서 시중에서 구매할 수 있었다. 당시 국내의 대표적인 클래식 음반사인 성음에서 베르나르드 하이팅크와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데카 음반을 라이센스로 발매, 유통하고 있었으며, 1983년에는 무려 소련의 국보적 위치에 있던 예브게니 므라빈스키가 지휘하고 소련을 대표하는 교향악단인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여 소련의 국영 음반사 '멜로디아(Мелодия)'가 발매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음반이 국내에서 정식 라이센스 발매되기도 했다. #
그러나 80년대 이전으로 돌아가면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아도 그간 국책으로 제한되어 있던 쇼스타코비치 연주를 번스타인의 1978년 7월 8일로 예정된 뉴욕 필 공연을 계기로 초연하게 된다고 소개한다. 관련기사. 세종문화회관 측에서 초청한 번스타인과 뉴욕 필이 쇼스타코비치 5번을 고집했기에 프로그램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전에는 1964년 서울 국제음악제에서 서울 시향의 연주로 한국 초연되기로 했던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공연이 취소되고 멘델스존 g단조 협주곡으로 프로그램이 바뀌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부터는 쇼스타코비치의 곡이 사회주의 예술 사조에 들지 않다는 음악학자들의 비판이 나오고 음악사적으로 연주가 시작되면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78년 6월 7일에는 정명훈 지휘의 국립교향악단이 정명화의 독주로 소련 국적 작곡가인 드미트리 카발렙스키의 첼로 협주곡을 한국 초연했고, 동년 10월 20일에는 첼리스트 윤영숙이 쇼스타코비치 첼로 소나타 d단조를 한국초연했다[* 모두 . 따라서 번스타인의 뉴욕필 연주 허가 이후로 소련 작곡가들의 곡들이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상기한 동아일보 기사와는 달리 1978년이 아니라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의 뉴욕 필하모닉이 1979년 6월 29일에 연주한 것이 이 곡을 한국 초연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번스타인과 뉴욕 필은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으로 초청되었으나 번스타인의 부인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의 사망으로 에리히 라인스도르프로 지휘자가 바뀌었고, 프로그램 역시 라인스도르프의 취향에 따라 베토벤, 멘델스존, 바그너, 슈베르트, 드보르작 등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9년 뉴욕 필하모닉이 아시아 순회 공연 차 세종 문화회관에서 이틀간(6월 29일, 30일) 공연을 했을 때 이곡이 국내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이 때 일정이 매우 빡빡해서 내한공연 당일 연주가 끝나고 바로 악기를 싸서 그날밤 김포공항으로 출국해서 다음날 일본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 어쨌거나 1979년 번스타인과 뉴욕 필은 이미 쇼스타코비치 연주 허가를 미리 받았고, 별 다른 행정적 문제없이 쇼스타코비치를 연주하고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당시 번스타인이 공연이 끝나고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출국할 때 심기가 불편해 보였고 출국 수속 중에 공항 관계자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는데, 한국 정부와의 마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뉘앙스의 글이 국내 음악잡지에 실리기까지 했다. 공연이 끝나고 이 공연에 대한 평은 이상할 정도로 적게 나왔고 이 곡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없었다. 사실 뉴욕 필은 이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말고도 훨씬 더 인지도 있는 곡인 말러 교향곡 1번도 연주하고 갔는데, 두 곡 다 별다른 언급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쇼스타코비치는 물론이고 말러도 상당히 드물게 연주되는 난해한 곡에 해당했기 때문에 당시 청중들이나 비평가들이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은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2]
그런데 당시 번스타인과 뉴욕 필은 내한공연에서 거의 앙상블이 엉키는 수준의 재앙적인 연주를 하고 갔다고 한다. 당시 한일 아시아 투어에 대한 미국쪽 매체 자료를 보면 번스타인은 아시아 투어 초반에 뉴욕 필의 연주 수준에 크게 실망하여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고 한다. 심지어 단원들에게 "내가 없는 사이 왜 이렇게 망가졌느냐"면서 공개적으로 질책했다는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바로 그 초반의 첫 연주회가 서울에서의 공연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도 뉴욕 필의 실망스러운 연주력에 대한 성토가 있었다. 당시 일부 클래식팬들은 일본 공연을 위해 한국에서 연습하고 갔다고 뉴욕 필을 성토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정부와의 마찰 때문에 번스타인이 짜증낸 것일 수 있다던 당시 일부 언론의 보도는 음모론적 소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엉망이었던 연주 퀄리티 때문에 무척 심기가 불편했던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항 관계자들에게 짜증냈던 것도 공연 직후 뉴욕 필 단원들에게 일부러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참고 당시 뉴욕 필은 세종문화회관 공연이 끝나고 밤 11시에 특별기편으로 일본으로 출국했기 때문에 당시 김포공항에는 번스타인과 뉴욕 필 단원, 관계자들만 별도로 수속을 밟았다고 한다.
따라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이 이미 미국에서 연주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초연도 허가되었고 번스타인도 별 다른 문제 없이 연주를 하고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연주 자체는 엉망이었고 관중들에게도 생소한 곡들이었기 때문에 언론에서 언급을 하지 않고 지나간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등 일간지들은 유명 연주자 내한 시 짧게라도 언급했기 때문에 보도하지 않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고, 이로 인해 정부와의 마찰이 크게 있었던 것처럼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어려운 경제 여건상 70년대말까지만 해도 클래식을 향유할 수 있는 인구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일반 서민들은 평생 베토벤 교향곡 5번 한번 제대로 들어볼 기회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 소개된 클래식 음악이 상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브루크너,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도 극히 제한적으로 연주되던 시기였고 음반을 구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종로, 명동, 서대문 등 나름 유명한 레코드 가게에서도 말러 교향곡이나 슈트라우스 교향시 음반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외국에 출장 나갔을 때 사서 들어오는게 이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들에 비해서도 듣보잡이라 할 수 있는 쇼스타코비치가 거의 연주되지 않고 음반으로도 구하기 어려웠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79년 번스타인이 이 곡을 연주하기 전에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연주되지 않았던 것은 이 곡이 소련 작곡가가 작곡했기에 왠지 꺼려지기도 했겠지만, 당시에 유럽 기준으로도 분명히 비인기곡이고, 당시 국내 오케스트라 기준으로는 연주 불가 수준으로 연주 난이도가 높았던 현실적인 측면도 컸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1990년대말 부천 필이 국내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을 공연했을 때 국내에서 그동안 어려워서 국내에서 거의 연주되지 못했던 말러 전곡을 연주한다고 난리가 났었다. 그런 말러 교향곡보다도 더 어려운 곡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이 당시에는 쉬이 연주할 수 있는 곡은 분명히 아니었다.[3]
게다가 당시 일단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의 음반 녹음 자체가 없었다. 80년대까지 우리나라 클래식 음반 대부분은 성음사에서 라이센스 발매되고 있었는데, 성음사는 도이체 그라모폰(DG), 데카(DECCA), 필립스(PHILPS) 3사와 제휴하여 라이센스로 음반을 발매했다. 그 밖에 EMI, CBS(SONY), RCA 등은 국내 유통 업체가 없어서 직수입이 유일한 경로였는데, 당시 성음사 라이센스 LP보다 약 5배는 비쌌기 때문에 국내에서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4] 80년대 이전 국내에서 클래식 음반을 정식으로 발매하던 사실상 유일한 회사였던 성음과 제휴를 맺은 3개 회사의 디스코그라피 아카이브를 보면 1980년 이전에 발매된 음반으로는 비톨드 로비치의 지휘로 바르샤바 국립 필하모닉이 연주한 음반(1959년 발매) 단 한 가지에 불과했는데, 워낙 듣보잡이어서 DG에서도 금방 폐반된 듯하다. 따라서 당시 성음에서 이 곡을 발매할래야 음원 자체가 없어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성음에서 발매하지 않는다면 국내 정발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다만 해외에서 유통되는 음반을 직수입하는 방법이 있으며, 이러한 경로로 쇼스타코비치의 음반을 당시에 아무 문제 없이 구매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당시 국내 클래식 저변상 쇼스타코비치의 음반 수요자는 거의 없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한번 들어보면 너무 지루하다고 느껴서 끝까지 듣기도 전에 그만듣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5][6][7]
냉전이 종식된 직후인 1990년에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지금은 상트 페테스부르크 필하모닉으로 원복했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이후 심지어 강남 심포니 오케스트라나 마산시립교향악단이 CD도 내는 등 국내에서도 심심치 않게 연주되는 교향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90년대에 어떤 록 음악 잡지에서는 이 곡을 메탈리카의 전성기 앨범에 버금가는 포스의 곡으로 추천하기까지 했을 정도인데, 격세지감이 확실히 느껴지는 대목.
8. 기타
- 한국에서는 4악장이 대중적인데 모 TV광고에서 4악장을 배경음악으로 써서 그랬다. 그런데 광고 내용이 중세 기사가 말타고 성에 들어가서 칼싸움하는 것(...)
- 은하영웅전설/애니메이션에서는 자유행성동맹이 멸망하는 대목에서 4악장이 쓰였다. 어떤이는 동맹에게 너무 과분한 음악이라고 말하기도. 또한 시바 성역 회전에서도 이 곡이 사용되었는데 제국군에 최후의 공격을 퍼붓는 이제르론 공화정부군의 비장한 모습에 잘 어울린다. 의도적인지는 불분명하나 원곡에 대한 논쟁이 매우 치열한데다 전함 포템킨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전례를 볼 때 생각하기에 따라선 매우 의미심장한 사용.
- 일본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에서도 4악장이 자주 들린다. 작중에 클래식 매니아인 주인공이 집에서 자주 틀던 곡이다.
[1] 이 선율은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에 나오는 유명한 하바네라 댓구와 비슷한데, 사실 이는 쇼스타코비치가 사랑했던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인데, 한때 쇼스타코비치가 이 여인에게 홀딱 반했지만 그녀는 쇼스타코비치의 청혼을 거절하고 얼마 뒤 스페인으로 이주해서 로만 카르멘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2] 유사한 사례로 훗날인 1996년 빈 필이 내한했을 때를 보면 당시 국내에서 상당히 난해하게 여겨졌던 바그너의 역작 신들의 황혼을 모음곡 형식으로 공연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로 당시 음악 저널들은 1부 장영주 협연에 대해서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을 뿐 2부 신들의 황혼에 대해서는 청중들이 난해하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식으로 짤막하게 언급되었을 뿐 신들의 황혼 연주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평도 없었다.[3] 다만 일본은 쇼스타코비치에 일찍 관심을 가진 편인데 일본의 거장 지휘자 아사히나 다카시가 1960년 일본 초연을 했고 1962년 이슈트반 케르테츠-런던 심포니, 1973년 아르비드 얀손스-레닌그라드 필, 1974년 예브게니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 등 국내외 연주자들의 공연이 잇따랐다.[4] 명동이나 종로의 일부 레코드 가게에 주문을 넣으면 주인이 일본에 갔다오면서 사오는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겨우 구할 수 있었다.[5] 사실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유럽에서도 자주 연주되는 곡이 결코 아니었다. 1980년대 이전에 녹음된 음반의 대부분은 소련의 국영 음반사 멜로디아에서 므라빈스키, 콘드라신 등이 녹음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서방에서 유명 지휘자나 오케스트라가 이곡을 연주하는 것도 매우 드물었다. 특히 당시 성음이 라이선스로 내놓던 3사를 보면 카라얀, 뵘, 쿠벨릭, 오이겐 요훔, 페렌크 프리차이,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아바도, 오자와 세이지 등 여러 거장 지휘자들을 거느려 지휘자 왕국이라 불리던 유명 클래식 음반사인 도이체 그라모폰(DG)사에서는 이곡에 관심이 거의 없어 비용 절감을 위해 비톨드 로비치라는 무명 지휘자를 섭외해서 당시 서독과 사이가 매우 안좋았던 적성 국가인 폴란드 바르샤바까지 찾아가 이 곡을 녹음했을 정도였다. 다른 유명 음반사인 데카(DECCA)에서도 1980년 베르나르드 하이팅크가 지휘한 음반을 내놓기 전까지는 디스코그라피에 이 곡이 없었다. 필립스에서는 더 늦어져서 1987년 발매된 비쉬코프 지휘의 음반이 최초였다.[6] 반면 EMI, CBS-SONY, RCA, BMG 등의 영미권 음반사에서는 일찍부터 음반이 나왔다. 유명 지휘자들 음반으로는 51년 미트로풀로스(CBS), 52년 호렌슈타인(VOX), 54년 로진스키(웨스트민스터), 59년 번스타인(CBS), 61년 스크로바체프스키(머큐리), 65년 프레빈(RCA), 오르먼디(CBS), 77년 프레빈(EMI) 등이 70년대까지 발매된 대표적인 음반들이었다.[7] 서유럽 오케스트라에서도 이곡을 자주 연주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영국에서는 이따금 연주 기록이 발견되나 독일(서독) 등지에서는 이 곡을 연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 빈 필이나 베를린 필도 그랬다. 일례로 빈 필도 1979년 5월 25일 빈 예술 주간에 번스타인의 지휘로 5번 교향곡을 연주한 것이 처음이었을 정도이다. 심지어 이 연주회조차도 번스타인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공연하자는 제안을 빈 필 측이 처음에 거절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것이었다. 상술한 아시아 순회 공연 바로 직전 시기이다. 베를린 필도 좀처럼 이곡을 연주하지 않아서 1985년 소련 출신의 신예 지휘자 세미욘 비쉬코프가 베를린 필에서 이 곡을 지휘했을 때 센세이션이라 표현될 정도로 크게 화제가 되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