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필리프 라모
'''만일 라모가 독일인이었다면 그는 바흐보다도 더 위대한 음악가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 아르투르 니키슈
'''라모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현대음악의 창시자이며 르네상스 이후의 최초의 프랑스 음악가이다.'''
― 클로드 드뷔시
1. 개요
프랑스의 바로크 작곡가이자 이론가. 15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2. 생애
디종(Dijon) 출신이며 성당 오르간 연주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예수회 수사들에게 음악을 배웠다. 가족들은 원래 음악은 취미생활로만 남기고 음악을 본업으로 하게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지만, 본인은 뜻이 있었기에 18세 때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온 이후 1702년 아비뇽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다가 후에는 클레르몽 페랑 대성당의 음악 감독이 된다. 1706년부터는 파리에 본격적으로 정착했고, 같은 해에 그의 첫 클라브생 작품집을 출판했다. 그 표지를 보면 라모는 동시에 예수회 대학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1709년에는 디종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 직을 물려받게 된다. 5년이 못되어 리옹으로 이사하고 또다시 클레르몽으로 갔는데, 두 곳 모두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봉직했다.
이후에는 점차 유명세를 얻으면서 1722년에 《화성론》(Traize de l'harmonie)이라는 필생의 저작을 내놓았고, 같은 해에 마지막 파리로 이사한다. 바로 이듬해 다시 두 번째 작품집을 내놓았다. 나중에는 프랑스 궁정 작곡가로까지 올라갔으며 노년에는 귀족으로 봉해지기도 했다.
1733년 라모의 첫 서정비극 《이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e, RCT 43》은 초연때부터 굉장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며 흥행에 실패했다. 전체적인 구성과 틀은 륄리 때부터 내려오던 5막 구성과 정교한 화성적 진행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였지만, 거기에 더해 라모 특유의 조바꿈. 난해한 불협화음, 강렬한 오케스트레이션 등으로 륄리빠들로부터 너무 급진적이고 시끄럽다는 엄청난 비판을 받으며 본의아니게 프랑스 음악의 이단아(...)로 찍히게 된다. 이에 대해 2년뒤 발표, 출판된 오페라 발레 《우아한 인도Les Indes galantes, RCT 44》 서문에서 라모는 '위대한 작곡가 륄리의 레시타티브에 나오는 아름다운 낭독과 노래 기법에 사로잡혀, 나는 그를 모방하려 노력했지만 똑같이 따라하려 하지는 않았다. 륄리처럼 지극히 아름답고 단순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았을 뿐이다(Toûjours occupé de la belle déclamacion, et du beau tour de Chant qui regnent dans le Récitatif du Grand Lully, je tâche de l'imiter, non es Copiste servile, mais en prenant, comme lui, la belle et simple mature pour modéle.)'라며 본인을 나름 변호했다.
2.1. 부퐁 논쟁
그러나 생애 말년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2] 를 위시한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 즉 선율 중심적 오페라가 점차 인기를 얻으면서 곧 음악학의 급물살에 마주하게 되었다. 흔히 '''부퐁논쟁(Querelle des Bouffons)'''이라고 불리는 격론이 벌어진 것이다. 당연히 당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던 라모의 오페라에도 공격이 가해졌는데, 옛날에 받았던 너무 급진적이라는 비판과는 정반대로 '너무 보수적이고 쓸데없이 스케일이 크다'(...)라는게 이탈리아 빠들의 의견이었다.
정말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는 '''화성과 선율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데, 라모는 자신의 음악학자로서의 배경지식을 토대로 화성 쪽의 손을 들어주었고,[3] 백과전서파를 비롯한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선율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이 때문에 라모는 그들과 시시각각 충돌했는데, 특히 우리에게는 사상가이자 철학자로 더 유명한 장 자크 루소한테 가장 많이 까였다.(…) 이때의 키배가 얼마나 가열찼는지, 많은 사람들이 편지를 중심으로 하는 필담으로는 분을 못 이기고 실제로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다고.
3. 업적
'''음악의 진정한 목표는 사고와 감정과 열정의 표현이여야 한다.'''
― 라모의 대표 저서 『화성론''Traite de l'harmonie(1722)''』 中
라모는 음악작품 자체로도 그렇지만 특히나 화성학과 같은 음악학적인 공헌이 매우 큰 인물이다. 젊었을 때는 작곡가와 동시에 학자, 평론가의 모습에 가까웠다. 음악적으로는 쟝 바티스트 륄리의 웅장한 화성적 스타일을 이어받고, 건반음악 쪽으로 눈을 돌려 보자면 프랑수아 쿠프랭과 유사하게 표제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위에 소개된 영상의 《암탉》이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사례. 암탉이 꼬꼬꼬꼬 하면서 우는 소리를 건반 악기로 고스란히 흉내내고 있는 걸 볼 수 있다.'''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선율 작법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 낸 후 다른 성부의 선율을 작곡하려면 곧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선율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 (중략) 따라서 우리를 이끄는 법칙은 선율이 아니라 화성이다.'''
― 『화성론''Traite de l'harmonie(1722)''』 中
특히나 라모는 이론가로도 그 이름이 높다. 프랑스의 수학자인 조제프 소베어(Joseph Sauveur, 1653 ~ 1716)가 1701년 발견한 자연배음의 원리에 근거하여 최초의 화성법관련 저작을 1722년 발간하였다.
음악학적으로 보자면 라모는 화성이 음악을 구성하는 가장 구조적이고 일차적인 작곡기법적 요소로 보았고, 3도, 기능화성이나 음조, 심지어는 9, 11, 13화음까지 정의함으로써 근대식 화성 이론을 정립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향으로 인해 프랑스의 극음악(발레음악 및 오페라)이 순식간에 몇 계단 이상 진보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 이렇게 말하면 뭔 재미없는 이야기인가 하겠지만 음정과 음정이 만나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현상, 즉 협화음을 두고 "하모니" 라고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라모다.이는 그의 저작 《화성론》 외에도 《음악 이론의 새로운 체계》(Nouveau système de musique théorique)에서도 확인된다. 아무튼 이 책은 당대나 후대의 이론가들이나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텔레만의 편지에서도 라모의 화성론이 언급되고,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편지[4] 에서 '나와 나의 친애하는 아버지의 원칙들은 라모에 반대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라며 독일 음악이 라모의 음악 원칙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입장을 피력했으나, 반대로 바흐 역시도 라모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4. 작품세계
4.1. 무대음악
라모는 역사적으로 유럽 전체가 배출한 여러 걸출한 작곡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극음악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화성론을 바탕으로, 유려한 선율과, 풍부한 화성, 혁신적 관현악 기법의 3요소로 대번에 널리 알려졌고,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된다. 라모의 극음악들은 그의 제일가는 작품들로 일컬어지지만, 라모의 첫 오페라는 그의 나이 50세에 첫 공연되었다.[5] 1730년대에 라모는 부자이자 징세청부업자, 음악 애호가였던 푸플리니에르(Poupliniere)와 만나게 되는데, 그의 개인 음악감독이 되며, 푸플리니에르의 인맥으로 자신의 오페라 대본을 써줄 많은 작가들도 만나게 된다. 또한 라모에게 대본을 써 준 사람 중 볼테르도 있다.
라모는 평생 30여편이나 되는 다양한 장르들의 극음악을 남겼다. 특히 작곡할 때 식음을 전폐하며 폐인같이(...) 작곡했다고 하는데, 라모를 도왔던 발바스트르는 라모의 작곡과정에 대해서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라모보다는 11살 연하였던 볼테르는 특히 라모와의 협업을 통해 오페라 개혁을 이끌고 싶어했으나, 대본을 써주는 족족 라모가 대본내용을 가지고 볼테르를 하도 갈궈서(...) 결국 볼테르의 목표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그가 작가로부터 대본을 받으면 그는 우선 몇 번이고 대본을 쭉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계속 생각해보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대개 작가에게 가서 어느 부분을 고쳐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과정에서 작가들은 대단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는 보통 바이올린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음표를 그렸다. 때로는 클라브생 앞에서 작곡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작곡하는 동안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때로는 그의 작곡을 방해한 사람이 화를 입기도 했다.'''
《이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e, RCT 43》 초연 당시에는 당시 프랑스 음악계의 살아있는 거장 앙드레 캉프라도 관람했다고 하는데, 선배 음악가였던 앙드레 캉프라는 라모를 '우리 모두를 능가하는 작곡가'라며 호평하였으나 정작 초연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이후 1737년《카스토르와 폴룩스(Castor et Pollux, RCT 32)》와 39년 《다르다뉘(Dardanus, RCT 35)》 등 화려한 서정비극들을 연달아 내놓으며 대중들의 흥행까지 거머쥐게 되고 명실공히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한 것은 단연 이폴리트와 아리시로 이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삼중창의 오싹한 조바꿈, 대위법적 합창, 이폴리트의 슬픈 에어 '아! 하루 사이에 이래야한 하나(Ah! faut-il en un jour)', 5막의 샤콘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카스토르와 폴룩스에서는 라모의 가장 유명하고 감동적인 에어 '슬픈 준비'(Tristes Apprêts)가 있다.
4.2. 클라브생
그의 건반음악 또한 대단히 창의적이고 생기 넘치며 기교를 가지고 있어아만 연주 가능한 부분도 등장한다.그는 하프시코드 독주를 위한 3권의 작품집을 출판했는데, 첫 권은 프랑스 정통 클라브생 악파를 따른 전통적이고 기교적인 춤 모음곡이고 뒤이어 출판한 두 곡은 표제적 제목이 붙어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모음곡이다. 후에 라모는 자신이 쓴 클라브생 곡들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오페라에 사용하기도 했고, 《우아한 인도인들(Les Indes galantes)》같은 오페라의 짧은 춤곡들을 모아 24곡의 클라브생 곡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4.3. 기악곡
라모의 유일한 기악집은 1741년 출판한 《클라브생과 합주를 위한 작품집(Pièces de clavecin en concerts)》이다. 이 악기는 바이올린과 비올과 클라브생의 편성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라모는 몽동비유처럼 단순히 현악을 반주처럼 사용한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고 있다.
4.4. 칸타타
그 세대에 번창했던 프랑스 칸타타(Cantate francaise)를 라모도 7곡 작곡하였는데, 다섯 곡은 1715년부터 1722년 사이에 작곡한 것이고 하나는 1728년, 또 하나는 1740년 중반 의 작품이다. 라모도 프랑스의 섬세함과 이탈리아의 발랄함을 성공적으로 합쳤는데, 종종 기악 오블리가토도 써넣었다. 예를 들면 칸타타 《초조함(L'Impatience, RCT 26)》같은 경우에는 비올라 다 감바의 이탈리아의 활기찬 음형이 붙은 에어 세곡이,
《오르페(Orphée, RCT 27)》에는 신나고 흥겨운 에어와 통절한 모놀로그가 동시에 들어갔다. 초기 작품들이기는 하지만 오페라 기법을 실습해 본 것이 나중에 라모가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4.5. 종교곡
라모의 모테트들은 단지 네 곡만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두 곡만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한곡은 그의 화성 논문에 푸가 작법의 예로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모테트들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는데, 몽동비유나 드 랄랑드의 모테트들에 비해 규모나 음악적으로 봤을 때초라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들은 라모 스스로 자신의 모테트들을 개정하기 전의 비판이라는 점과 당시 라모의 적대자들의 많았다는 것을 감안할때 별로 공정성은 없다.
5. 라모에 대한 말말말
'''전하, 이 작품(이폴리트와 아리시)에는 오페라 10개를 만들 수 있는 풍부한 음악이 들어 있습니다. 라모는 우리 모두를 능가하는 음악가일 것입니다.'''
― 앙드레 캉프라, 고용주였던 콩티 공 루이 아르망 2세에게 보낸 편지 中, 1733년
'''그는 매우 말랐고, 키가 크고 강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처럼 빛이 나는데 이는 그의 영혼을 불태우듯 강렬하였다.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일을 했는데, 그가 작곡한 위대한 작품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뜨거운 열정을 지닌 사람인지 알 수 있다.'''
―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
6. 기타
라모의 작품들 중에 일부는 현대에 들어서까지도 계속 생존해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작품 《탐뷔랭》 의 경우 국내에서 한글 가사가 추가되어 음악시간에 학생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제목은 《우박은 춤춘다》, 장르는 동요, 작사자 순엽.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해당 작품은 2성부의 캐논형식(일명 돌림노래)으로 편곡된 것.
가사는 다음과 같다. 출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오페라 '플라테(Platée)' 중 2막에 나오는 아리아인 '다프네는 아폴로의 구혼을 거절했네', '카스토르와 폴뤼' 중 2막에 나오는 아리아인 '준비된 슬픔이여. 창백한 불꽃이여'가 나왔다.랄랄랄랄랄라 유쾌하게 우박들이 춤을 춘다
랄랄랄랄랄라 우박들의 명랑하고 즐거운 무도회다
제멋대로 춰라 좋다 좋다 제멋대로 춰라 좋다 좋다
지붕에도 들창에도 꽃을 가꾼 뜰에서도
랄랄랄랄랄라 제멋대로 뒹굴뒹굴 돌며 꺼지며
랄랄랄랄랄라 유쾌하게 우박들은 춤을 추고 논다
1906년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는 라모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곡 '라모를 찬양하며(Hommage à Rameau)'를 작곡했다. 이 곡은 드뷔시의 곡집 중 영상 제1권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