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콩쿠르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2. 출범 배경
2.1. 1회 대회 우승자에 관한 비화
3. 대회 시기와 장소
4. 충격과 공포의 2019년 대회
4.1. 시작부터 가득했던 잡음
4.2. 엉망이 된 결선 무대
5. 역대 수상자


1. 개요


표트르 차이콥스키를 기려 개최한 콩쿠르로, 1958년에 첫 번째 콩쿠르가 개최되었으며 4년에 한 번씩 개최된다.
성악,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의 네 분야가 있으며 첼로는 1962년에, 성악은 1966년에 추가되었다. 2019년부터 목관악기금관악기가 추가되었다.[1]
아래에 설명하지만 대회 창설 배경으로 인해 서양인, 특히 주최국인 러시아 출신 참가자에게 유리한 정황이 있으며, 특히 피아노 부문은 심사위원과 관람객 모두 비서양계에 불리한 경향이 있다.아시아에서 우승은 전 종목을 통틀어 일본이 4번 한국이 2번 중국이 1번이다.[2]
흔히 쇼팽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피아노 콩쿠르라고 일컬어지나, 정작 서양권에서 그런 인식은 없다.[3]쇼팽 콩쿠르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운동으로 치면 올림픽 수준의 명성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지만,할 때마다 온갖 뒷말과 잡음이 오고가는 것으로 유명한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3대에 들어가는 것은 그간 구소련이 이미지메이킹 해놓은 '''거품'''이라는 의견이 사실상의 중론이며,이는 해가 갈수록 (사실 모든 콩쿨이 그런 추세이지만)비리 논란과 더불어 점점 클래식계에서 이 콩쿨이 이슈몰이하는 비중이 적어지는 현상으로 증명되고 있다.

2. 출범 배경


이름에도 나오듯 러시아 출신의 대작곡가 차이콥스키를 기념한다는 취지에서 등장했지만, 콩쿠르의 탄생은 대단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첫 콩쿠르가 열리던 1950년대는 공산/자유진영의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였으며 당시 소련은 자국의 문화예술 수준을 전세계에 선전하고자 야심차게 이 콩쿠르를 창설하였다.
당시 소련은 국가 주도로 체계적이고 치밀한 음악영재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는데,여기서 선별된 최고의 젊은 음악도들을 콩쿠르에 출전시킨 다음 우승시켜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다 소련 음악계의 우월함을 자랑하려고 했던 것.

2.1. 1회 대회 우승자에 관한 비화


하지만 이 야심차게 만든 1회 대회의 우승은 다른 나라도 아니고 소련의 철천지 원수 '''미국'''의 반 클라이번에게 돌아갔다.당시 우승자 결정은 공식 발표하기 전에~ 크렘린의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심사위원단이 우승자를 반 클라이번으로 결정하자 크렘린의 서기장 동지는 '그게 최선인가?다시 한번 표결해 주시오'라며 돌려보냈지만,이후 재표결한 심사위원단의 결정은 여전히 반 클라이번(...).어쩔 수 없이 크렘린은 이 결정을 승인했고 결과적으로 소련은 안방 잔치를 하려다 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으며,당연히 반 클라이번은 미국으로 돌아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환호와 함께 단숨에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3. 대회 시기와 장소


보통 6월에 열리며,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음악학교)에서 진행한다. 피아노부의 경우 발쇼이 짤(대강당,Great Hall 쯤 된다.)에서 진행한다.
'''그런데 여기 에어컨이 없다!!!!!'''덕분에 참가자 전원이 연주하면서 본인의 땀으로 샤워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자리에 앉아있는 청중들도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는데 연주자는 오죽하랴.들리는 말로는 이 건물이 워낙 오래되어,에어컨을 설치하기가 구조적으로 곤란하여 그렇다고 한다.

4. 충격과 공포의 2019년 대회



4.1. 시작부터 가득했던 잡음


2019년에도 대회가 열렸는데 전 종목 통틀어 954명의 엄청난 인파가 참가신청을 하였다.(이중 실제로 대회에 참가할수 있는 사람은 100여명뿐이며 나머지는 서류,비디오심사를 거쳐 다 탈락된다.)그런데, 참가 신청 마감일이 다가오니 대회 측에서는 지금까지 1200명이 넘는 참가자가 몰렸다고 발표했다가 신청기간이 끝난 뒤에는 954명이라고 슬쩍 고쳐 발표하는 행태를 보여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 등 커뮤니티에서 빈축을 샀다.
이외에도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콩쿠르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조차 2019년 1월이나 되어서 내놓고, [4]참가자들을 서류심사로 걸러낸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피아노 부문에서는 합격자의 절반이 '''개최국인 러시아 국적'''이어서 전세계의 사람들은 이 꼴을 보고 차이콥스키 콩쿨도 이제 퇴물이라는 비난을 보냈다.

4.2. 엉망이 된 결선 무대


이렇게 콩쿨 전에도 진행이 엉망으로 진행될 될 조짐을 보이더니 결국 이 콩쿨의 간판급 매치라 할 수 있는 피아노부문 결선에서 '''국제 정상급의 음악 콩쿨이라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사건은 '''최종등수가 정해지는 결선무대'''에서 일어났고,피아노부문의 결선진출자들은 결선무대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국의 '안 톈쉬'는 결선에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먼저 연주하고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이어서 연주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결선 연주장에 입장하기 직전 갑자기 안내방송으로 이 연주자가 연주할 협주곡의 순서가 변경됐다는 방송이 나왔다. 문제는 이 방송을 러시아어로만 하여 중국인 참가자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반면 이를 알아들었던 러시아인 지휘자는 방송에 따라 '''곡의 순서를 바꿔서 라흐마니노프 광시곡을 시작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광시곡은 하필 곡이 시작하고 3초도 안 되어 피아노가 합류해야 하는 협주곡인데, 중국인 연주자는 당연히 당황하여 합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연주가 끝난 후 심사위원단은 회의를 거쳐 해당 참가자에게 한 번 더 연주할 기회를 제안했으나 안 톈쉬는 거절하였고, 결국 이 참가자는 4위에 입상했다. [6]
그런데 최종 순위를 보면, 결선 진출자 전체 7명 중 단독 1위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프랑스)의 뒤를 이어 공동 2위인 드미트리 쉬시킨(러시아), 후지타 마오(일본), 공동 3위가 3명으로 각각 러시아 2명 및 미국 1명이 입상했다. 즉, 실질적으로 당해 중국인 참가자의 순위는 꼴찌인 셈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 순위에 2명이 공동 입상하는 경우는 비교적 흔한 현상이지만, 무려 3명이 한 순위에 공동 입상한 경우는 1990년에 개최된 9회 대회에서의 3위 뿐이다(미국, 벨기에, 구 소련 각 1명). 공동 수상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정확한 실력 판별을 책임지는 심사진의 역량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니만큼, 이러한 결과를 두고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비판이 쏟아졌다.
단순히 공동 수상의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최하급 국제콩쿨에서나 일어날 법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자 과거 세계 최강의 젊은 음악가들이 한데 모여 대련하던 전설 속 차이콥스키 콩쿨의 이미지는 콩쿨 참가를 희망하던 꿈나무들에게나 클래식 팬들에게나 이제 완전히 개박살나버렸다.

5. 역대 수상자



  • 피아노 부문 수상자
반 클라이번 (1958년 피아노 1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존 오그던 (1962년 피아노 공동 1위)
그리고리 소콜로프 (1966년 피아노 1위)
블라디미르 크레이네프, 존 릴 (1970년 피아노 공동 1위)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1974년 피아노 1위)
정명훈 (1974년 피아노 2위)
미하일 플레트네프 (1978년 피아노 1위)
배리 더글라스 (1986년 피아노 1위)
보리스 베레좁스키 (1990년 피아노 1위)
니콜라이 루간스키 (1994년 피아노 1위 없는 2위)
백혜선 (1994년 피아노 3위)
데니스 마추예프 (1998년 피아노 1위)
임동민 (2002년 피아노 5위)
미로슬라프 쿨티셰프 (2007년 피아노 2위)
알렉산드르 루뱐체프 (2007년 피아노 3위)
임동혁, 세르게이 소볼료프 (2007년 피아노 공동 4위)
다닐 트리포노프 (2011년 피아노 1위)
손열음 (2011년 피아노 2위)
조성진 (2011년 피아노 3위)
드미트리 마슬레예프 (2015년 피아노 1위, 2라운드 모차르트 협주곡 최우수 연주 특별상)
루카스 게뉴사스, 조지 리 (2015년 피아노 공동 2위)
세르게이 레드킨, 다니엘 하리토노프 (2015년 피아노 공동 3위)
뤼카 드바르그 (2015년 피아노 4위, 모스크바 음악 비평가 협회상)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미하일 투르파노프 (2015년 피아노 2라운드 최우수 참가자 특별상)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2019년 피아노 1위, 전체 그랑프리상)
  • 바이올린 부문 수상자
발레리 클리모프 (1958년 바이올린 1위)
보리스 구트니코프 (1962년 바이올린 1위)
빅토르 트레챠코프 (1966년 바이올린 1위)
기돈 크레머 (1970년 바이올린 1위)
일리야 그루버트, 엘마 올리베이라 (1978년 바이올린 공동 1위)
빅토리아 뮬로바, 세르게이 스타들러 (1982년 바이올린 공동 1위)
일리야 칼러, 라파엘 올레그 (1986년 바이올린 공동 1위)
아키코 스와나이 (1990년 바이올린 1위)
니콜라이 사첸코 (1998년 바이올린 1위)
마유코 카미오 (2007년 바이올린 1위)
니키타 보리소글렙스키 (2007년 바이올린 2위)
유리 마누엘라 얀게 (2007년 바이올린 3위)
윤소영 (2007년 바이올린 4위)
신지아 (2007년 바이올린 5위)[7]
이지혜 (2011년 바이올린 3위)
클라라 주미 강 (2015년 바이올린 4위)
김봄소리 (2015년 바이올린 5위)
세르게이 도가딘 (2019년 바이올린 1위)
김동현 (2019년 바이올린 3위)
  • 성악 부문 수상자
최현수 (1990년 남자 성악 1위)
샤기무라토바 알비나 (2007년 여자 성악 1위)
침발류크 알렉산데르 (2007년 남자 성악 1위)
박종민 (2011년 남자 성악 1위)
서선영 (2011년 여자 성악 1위)
김기훈 (2019년 남자 성악 2위)
  • 첼로 부문 우승자
제2회 (1962) 나탈리아 샤코브스카야 러시아
제3회 (1966) 카린 게오르갼 러시아
제4회 (1970) 다비드 게링가스 러시아
제5회 (1974) 보리그 페라가멘쉬치코프 러시아
제6회 (1978) 너새니얼 로젠 미국
제7회 (1982) 안토니오 메네세스 브라질
제8회 (1986) 마리오 브루넬로 이탈리아, 키릴 로딘 러시아 (제8회 대회 1위는 2명)
제9회 (1990) 구스타프 리비니우스 독일
제10회 (1994) 우승자 없음    
제11회 (1998) 데니스 샤프발로프 러시아
제12회 (2002) 우승자 없음
제13회 (2007) 세르게이 안토노프 러시아
제14회 (2011) 나레크 하크나자리안 아르메니아
제15회 (2015) 안드레이 이오니차 루마니아
제16회 (2019) 즐라토미르 펑 미국

[1] 2018년 2월에 공식 발표되었다.[2] 하지만 특히 피아노 부문에서의 1위들이 석연치 않은데, 이는 러시아 피아니즘 특유의 강한 자존심에서 기인한다.그래서 피아노 부문만큼의 1위는 웬만하면 러시아 사람에게 주려는 암묵적인 경향이 짙다. 그나마 2015년 대회에서 신설된-각 부문 1등 중에서 선발되는-전체 대상(그랑프리)는 몽골인 성악가에게 돌아갔다.[3] 3대 협주곡, 3대 소나타 운운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4] 이런 수준의 최상급 국제콩쿨이면 못해도 1년 전에는 참가에 관한 모든 정보를 준비해서 공개한다.[5] Special prize for Self-confidence and Bravery[6] 심사위원단은 이 참가자가 안타까웠는지,규정에 없던 특별상을 즉석에서 만들어 이 참가자에게 수여했다.그 특별상의 이름은 무슨 게임 업적 이름도 아니고 ''''확신과 용맹''''(....)[5][7] 당시에는 본명인 신현수로 출전. 동갑인 클라라 주미 강보다 8년 앞서 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