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리 쿨리크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쿨리크'''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

'''이름'''
러시아어: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
영어: Grigory Ivanovich Kulik
한국어: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쿨리크
'''출생'''
1890년 11월 9일, 러시아 제국 두드니코보
'''사망'''
1950년 8월 24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복무'''
러시아 제국(1912–1917)
소련군(1918–1946)
'''최종 계급'''
육군 원수
'''주요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적백내전
스페인 내전
겨울전쟁
독소전쟁
'''주요 서훈'''
소비에트연방영웅 1회
레닌훈장 4회
적기훈장 4회
1. 개요
2. 생애
2.1. 출생에서 전간기까지
2.2. 독소전쟁
2.3.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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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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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무타구치 렌야, 소련군엔 이 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똥별인 장군.
제2차 세계대전소련군장성이다.

2. 생애



2.1. 출생에서 전간기까지


1890년 러시아 제국 폴타바의 두드니코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 1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포병으로 참전했다가 1917년에 볼셰비키에 합류하면서 적백내전에 참전한다. 1921년 6월에는 북캅카스 군관구의 포병 지휘관에 임명되고 1926년에 3년간 소련군 포병총감을 역임했으며 1932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제 3 소총병 군단의 지휘관이 된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에 군사 고문으로 개입했다.여기까지만 보면 일반 지휘관이겠지만...
대숙청 시기 1937년에 다시 포병총감에 재임하게 되는데, 군 수뇌부들 다수가 사라진 시점에서 최측근만 신뢰하게 된 스탈린은 쿨리크를 적극 신뢰하였고 화력 개발과 포병 전력에 깊게 개입하게 되었다.
숙청당한 고위 장교들에 대해 스탈린에게 숙청을 멈출것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는 하였지만, 이와 별도로 군의 현대화에 반대하며 사사로운 주관을 적극 투영하였다.
셰몬 티모셴코가 이끌고 코시킨 기사가 만들던 T-34를 반대했는데 황당하게도 '''코시킨을 지원하는 리하초프를 싫어해서'''였다. 코시킨 기사의 상관인 리하초프가 자신의 라이벌이라는 이유로 어떻게든 T-34의 채용을 막기 위해 애를 썼는데. "T-34에 탑재될 76.2mm 주포는 너무 약하니 107mm 주포를 탑재하라", "이런 전차보다는 BT 계열의 쾌속전차를 생산하는 것이 낫다!"는 식으로 사사건건 훼방을 놨던 것이다. 이런 상부의 방해와 과로가 겹쳐, 코시킨은 결국 1940년 9월 26일,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 이후 수석 기술자가 된 모로조프가 재설계했지만 쿨리크는 끈질기게 훼방을 놓았는데, 심지어 T-34M(A-43)의 개발이 완료될 때까지 기존 T-34의 생산을 중지할 것을 제의하는 판국이었다.[1]
이렇게 온힘을 다해서 방해하는 쿨리크에다가 여러가지 악재까지 더 겹쳐서 1940년 제183 공장과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서 생산될 약 600대의 T-34/76은 겨우 117대만이 생산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쿨리크가 그렇게 밀던 A-43은 독소전쟁이 발발한 뒤 T-34의 생산라인에 차질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폐기된다.
데그탸료프 기관단총 은 탄약 낭비한다며 개발과 생산 진척을 떨어뜨렸고, 지뢰가 쓸데없다고 반대... 또한 독일군의 전차에 대항해 전차포와 대전차포의 대구경화를 지향해야 한다면서 '''45mm포76mm포의 생산을 모조리 중지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대구경포는 기술적 문제로 2차대전 발발시까지 생산하지 못했다...이는 독소전쟁 대처를 제대로 못하게 하고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로 이어졌다.

2.2. 독소전쟁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6월 23일에 제 3 기계화군단과 제 10 군단을 이끌고 독일군을 저지하려다 오히려 포위되었고, 2주만에 군복에 계급장, 병과장등 모든 표식을 때고 혼자서 겨우 탈출하였다. 이후 레닌그라드 공방전등에 개입하다가 1942년 2월 19일에 소비에트연방영웅, 레닌훈장, 적기훈장등의 수훈을 취소당하고 원수계급도 박탈당한다.

2.3. 최후


이후 스탈린에게 반감을 품은 그는 계속 스탈린의 뒷담을 하는 등 비난을 멈추지 않았고, 전쟁 이후 거리낄 것이 없어진 스탈린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쿨리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굴라그로 끌려간 뒤 1947년 1월 11일에 반혁명적 그룹 가입 등의 날조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8월 24일에 처형당했다.
스탈린 사후 반혁명죄가 날조된 것이 입증되어 무죄판결을 받고, 1957년 9월 28일에 원수계급에 복권되었다.[2]

[1] 사실 A-43은 T-34 초기형에서 단점으로 거론되었던 2인용 포탑 대신 3인용 포탑을 사용하고 여러 가지 설계상의 문제점을 개선할 목적으로 개발되던 것이라 완전히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Zaloga, S., Sarson, P., T-34/76 Medium Tank 1941-1945, 1997, 13) 개발이 T-34의 생산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쿨리크 본인이 사사로운 취향 때문에 T-34의 생산을 완전히 중단시키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었다.[2] 이유는 스탈린 비판을 제창한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하여 스탈린에게 정치적 목적으로 숙청당한 이들 전부 명예회복 대상이 되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