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디우스

 


'''Glad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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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여담


1. 개요


로마군의 보병용 쇼트 소드이다. 로마군의 표준 제식 무장이자 주력 무기였다. 로마군의 주력 무장은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대중에 가장 잘 알려진 무기는 글라디우스이다. 글라디우스라는 말은 라틴어로 '검'을 의미하는 일반 명사이다. 원래는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gladius hispaniensis), 즉 '스페인 검'이란 명칭으로 불렸다.

2. 상세


기원은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곧은 군용 양날검이었다. 포에니 전쟁 전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카르타고에도, 이 검을 사용한 이베리아 용병들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 로마에도 이 검이 전달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수백 년 동안 로마 군단병들의 주무기로 사용되었다. AD 2세기경부터 검의 형상은 유지되되, 점점 길이가 길어졌다. 이후에는 켈트 장검의 영향을 받은 스파타로 교체되었다. 4세기경에는 실전용 도검으로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고대 로마 초기부터 후기까지 사용된 로마군의 표준 제식 무장이었다. 그렇기에 여러가지 형태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한 손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짧고 무게가 가볍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대략적으로, 평균적인 길이는 70cm에 무게는 1kg 미만이었다. 검날은 길이에 비해 넓은 편이었고 형태는 특별한 변화없이 곧게 뻗어 있었다. 검의 가드 부분은 사실상 없는 수준으로 장방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손잡이의 그립은 쥐기 쉽도록 손 모양으로 파여 있고, 끝의 폼멜(무게추)은 타원형의 공 모양이다.
실전용 도검인데도 길이가 이렇게 짧았던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신체적, 기술적 한계와 군사적 문제가 겹쳤기 때문이다. 우선, 당시의 제련 기술로는 튼튼하고 긴 칼을 만들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장장이들이 길이를 짧게 하고 칼날 너비를 넓혀서 검날의 내구도를 높였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은 평균적인 체구도 현대인들보다 작았기 때문에 짧은 칼이 다루기 편했을 것이다.
전술적인 이유도 있었다. 글라디우스는 개인용 결투를 위한 무기가 아니라 로마군의 표준 제식 무장이었다.[1] 즉, 일대일 전투보다는 대군의 집단전을 상정한 용도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로마 군단병은 주로 흉갑을 입고 한 손에는 큰 방패인 스쿠툼을 든 채 촘촘한 방진을 짜서 싸웠다. 그래서 한 손으로 사용하기 힘든 무장은 주력으로 쓰기 힘들었다. 밀집대형에서는 날이 쓸데없이 길면 걸리적 거리기만 했다. 결국 글라디우스의 길이와 형태는 밀집대형에서 찌르기를 펼치기에 최적으로 발달한 결과였다. 이 시대의 "장검"이었던 스파타도 중세시대의 클레이모어 같은 무식하게 긴 검이 아니라 바이킹 소드 정도의 길이었다.
길이가 짧았음에도 검의 강도나 위력은 결코 낮지 않았던 듯하다.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의 격돌에 대한 리비우스의 묘사에 따르면 마케도니아군의 시신들이 "장비들은 모두 찢겨져나갔고, 어깨와 머리는 완전히 절단되어 몸에서 분리되었으며, 내장은 산산조각났다."라고 한다. 이를 보면 당시에는 개인 무장으로서 꽤나 위력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괜히 로마군에 채용된 것이 아니었다.
베고 찌르는 용도로 모두 사용되었지만, 주된 용법은 역시 찌르기였다. 플라디우스 베게티우스가 저술한 '군사학 논고'에도 로마군의 검술 훈련은 찌르기 위주였고, 로마군의 베테랑 병사들은 검의 날로 싸우는 사람을 아예 조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는 동작은 쓸데없이 크고 공격이 적의 방어구에 막힐 가능성이 높지만, 찌르기는 공격이 상대에게 2인치만 들어가도 치명적이고 찌를 때 발생하는 빈틈도 매우 적은 효율적인 공격이라고 묘사되어 있다.[출처] 실제로 검술에서 베기술은 의외로 숙련된 검사만이 할 수 있지만 찌르기는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다. 대규모 징집병을 운용한 로마군에는 당연히 찌르기 위주의 검술이 더 적합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글라디우스가 곧게 찌르는 공격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찌르기를 할 때는 'Handshake grip'이라 불리는 자세로 검을 비스듬히 앞을 향하도록 쥐는 것이 일반적이다. 망치를 쥐듯 검을 잡은 상태에서 검을 앞쪽으로 기울이면 그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엄지와 손목에 힘이 가해지고, 이 상태에서 찌르기를 했다간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는 손목 근육에 큰 충격이 가해지면서 심각한 부상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 하지만 글라디우스는 사용자의 손에 딱 맞게 만들어져 자세를 유연하게 변경하기 어렵다는 것은 다소 의아한 점이다. 이 때문에 글라디우스로 찌르기를 할 때는 앞으로 찌르는 것이 아니라 망치를 쥐듯 단단히 쥐고 적의 복부를 목표로 삼아[2] 아래에서 위로, 혹은 역수로 쥐고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듯 찔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글라디우스는 오른쪽 허리에 차고 오른손으로 뽑아서 사용한다. 칼날의 길이가 짧아서 의외로 잘 뽑히며, 덕분에 왼쪽의 대형 방패로 밀어붙이기할 때 방해가 되지도 않는다.
이처럼 베기 보다는 찌르는 용도이기에 군인 처형 시 사용될 때에도 휘둘러 참수[3]하지 않고 목과 쇄골 사이를 위에서 아래로 깊게 내려 찌르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처형은 십자가형 등 여러모로 고통이 오래 가는 방법이 많았는데 이 방식은 차라리 처형이 빨리 진행되고, 또한 다른 방식보다 겉으로 보기에 신체에 가해지는 상흔이 적기에 전반적으로 선호되는 명예로운 처형방식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계급이 낮거나 중죄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보통의 경우에는 군인이나 덕망이 높은 시민들에게 허락된 방식이었다. 해당 처형 방법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와 HBO 로마 시즌2에서 고증되었다.
글라디우스가 이만큼의 위력을 보인 또다른 이유는 이 무기가 사실상 유럽 최초의 강철 무기였기 때문. 이전까지는 그저 철을 두들기고 갈아 날카로운 형태로 만드는 데 그쳤지만, 글라디우스에는 넓게 펴낸 철을 여러번 접어 '접쇠 공정'을 통해 강도를 높이는 과정이 추가되었다. 이른바 '접쇠 공정'이 일본도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 오히려 몇 세기나 더 빨랐다. 이 제강기법은 나중에 북쪽으로 퍼져 나가 여러 변형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로마 문명을 고평가하고 중세를 암흑시대라며 미친 듯이 까던 근대 유럽에서는 고대 로마의 풍습이나 문물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종종 있었는데 과거 그리스 독립운동 시절에, 로맨티즘에 심취해 여기 참전한 유럽 쪽 지식인들이 그리스 저항세력에게 "왜 그리스 시민군의 전통을 살려 방진을 짜지 않고 게릴라전을 하느냐?!"고 해서 비웃음을 산 일이 있으며,[4] 좀 심각한 경우로 슬슬 정신차릴 때가 되었음직한 20세기 초 스페인 내전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정신 나간 지식인들이 있었다. 글라디우스도 예외가 아니라 프랑스에서는 1831년 Artillery sword라면서 글라디우스 판박이를 만든 적이 있다. 그리고 칼날의 디자인을 본뜬 1966년작 거버 Mark II 파이팅 나이프도 있다. 실전용 도검으로서는 은근히 명줄이 긴 셈.

2.1. 여담


로마 시대에는 글라디우스가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속어였다. 물론 남성의 성기를 칼이나 총 등에 비유하는 것이 로마 시대의 전유물은 아니다. 참고로 여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Vagina는 라틴어칼집이란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일본어에는 L(ㄹ받침) 발음이 따로 없어서[5] '그라디우스(グラディウス)'라고 읽는데, 동명의 게임 제목이 아마 여기서 유래한 듯. 이쪽은 G'''l'''adius가 아니라 G'''r'''adius다.
인터넷에서는 약 2010년경부터 이 무기로 인한 사망자 수가 무려 1억 명으로 역사상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무기로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자료가 떠돌아다니는데, 그냥 헛소문에 불과하다. 기네스북에는 그런 항목이 존재하지도 않고, 윗 항목만 봐도 알겠지만 글라디우스가 로마군에서 쓰인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으며, 1억 명이면 당시 유럽 인구 전체보다 많은 숫자고,[6]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유물로 등장한다.
[1] 물론, 워낙에 로마에서 흔한 무기이다보니 당연히 결투나 호신용으로도 쓰이기는 했다.[출처] 플라이비아우스 베게티우스 저, 정토옹 역 '군사학 논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37p[2] 이는 상당히 효율적인 살상 방법인데, 사람은 팔이나 다리가 잘리면 살 수 있지만 뱃속의 창자 같은 장기가 찔리거나 잘려나가면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3] 참수 시에는 도끼를 이용하였다.[4] 애당초 이 시기는 총기가 주력인 시대로 고대 그리스 시기와는 군사기술력이 하늘과 땅 차이인 데다, 전력상 열세인 독립군에게 방진을 짜서 정면대결을 하라는건 알아서 죽어달라는 거나 다름없다. 단 그리스 독립전쟁은 19세기 중반이니 정규전은 아직 밀집대형 짜고 싸우던 시기가 맞다.[5] 발음(ん), 촉음(っ)이 받침에 대응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받침과 다르며 엄연히 한 박자를 차지한다.[6] 로마 제국 전체의 인구 중 유럽 지역에 해당하는 인구는 약 3500만 명이었다고 한다. 로마 전체의 인구와 함께 로마와 함께 문명화된 지역이었던 파르티아나 사산조의 인구까지 합쳐도 7~8천만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