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고로스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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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4]
1.1. 축구 선수
1.1.1. 어린 시절
고로스티사의 아버지는 의사였던 터라 어린 시절 제법 유복한 생활을 했다. 고로스티사는 그의 부모에 의해 고등학교를 고향이 아닌 곳에서 기숙학교로 다녔는데 공부보다는 축구에 관심을 보였다. 결국 학교를 중간에 그만 두고 세스타오의 해군 관련 공장에서 일을 했다.
고로스티사는 차바리 데세스타오(Chávarri de Sestao)라는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수가사라테 데게초(Zugazarte de Guecho)에서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정착했다. 그 기간에 그는 잠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친척집에 머무르기도 했다.
1.1.2. 클럽
고로스티사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병역을 마쳤는데 페롤에서 선원으로 복무했다. 라싱 페롤에서 있던 고로스티사는 라푸엔테의 추천으로 아틀레틱 클루브에 입단했다. 이적 과정에서 원소속팀이 지역 라이벌로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아해서 잡음이 좀 있었지만 빌바오 측에서 2만 페세타와 한 차례의 친선 경기로 갈등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이적 첫 해, 빌바오는 무패 우승을 포함한 더블, 고로스티사는 리그 득점왕을 차지해 팀과 개인 모두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5] 이것을 시작으로 당시 아틀레틱 클루브는 7시즌 동안 리그와 컵에서 8차례 우승을 차지하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의 전성기는 스페인 내전으로 끝나버렸다. 고로스티사는 처음엔 스페인 공화정의 편을 들었고 다른 바스크 선수들과 함께 유럽 투어를 다녔다. 하지만 고로스티사는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팀을 떠나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스페인국의 편으로 전향했다. 이런 그의 행보에 스페인국 측은 그를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1년을 더 뛴 후 발렌시아 CF로 이적했다. 발렌시아에 처음 왔을 때 발렌시아 서포터들은 5만 페세타를 주고 사온 31살짜리 윙어의 능력에 의구심을 표했다. 하지만 발렌시아에서 그는 곧 서포터들의 의심을 응원과 찬사로 바꾸었고 팀은 그가 있을 때 2차례의 리그 우승과 1차례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다. 발렌시아의 리그 500번째 득점도 그의 몫이었으며 1946년에 고로스티사가 발렌시아를 떠날 때 팀에서 고별 경기를 치러주기도 했다.
1946년, 37세의 고로스티사는 발렌시아를 떠나 바라칼도, 후벤시아를 거쳐 로그로녜스에서의 선수 겸 감독 생활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1.1.3. 국가대표
고로스티사는 1930년 6월 14일의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스페인 대표팀 멤버로 첫 선을 보였다.
그는 1934년 월드컵 본선에서도 1라운드 브라질전과 8강 이탈리아전에서 활약했다.
고로스티사는 1941년까지 대표팀에서 총 19경기, 2골을 기록했다.
1.2. 이후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보낸 고로스티사였지만 그는 젊은 시절부터 생활 패턴이 불규칙적이고 자유분방했다. 이는 결국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어졌고 선수 생활 말기로 갈수록 심해졌다. 경기를 며칠 남겨두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하면 발렌시아 CF 시절에는 술에 취한 채로 경기를 한 적도 있었다.
그가 40세까지 선수 생활을 한 것도 축구 자체에 애착이 있어서가 아니라 돈 관리를 못해서였다. 말년의 그는 폐에 문제가 생겨 빈사상태까지 간 적도 있었으며 1966년, 그의 사망을 얼마 안 남기고 출연한 다큐멘터리, Juguetes rotos(망가진 장난감)에서 보인 그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고로스티사는 1966년, 빌바오의 한 결핵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유품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온갖 경제적인 압박 속에서도 하나의 물건에 큰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발렌시아의 전 회장 루이스 카사노바가 그에게 선물한, 은으로 된 담배 케이스였고 케이스 안에는 '역대 최고의 레프트 윙어에게'라는 한 줄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6]
고로스티사는 빠르고 직관적이며 용감한 윙포워드였다.
그는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임에도 득점에 능해 Bala Roja(붉은 총알)로 불렸고 아틀레틱 클루브와 발렌시아 CF에서 기록한 리그 내 득점만 해도 180골에 이른다.
발렌시아 시절에는 나이가 들어 스피드가 좀 주는 바람에 다소 폭발적인 면은 사라졌지만 상대 수비수들을 제치는 데엔 큰 무리가 없었다.
3. 수상
3.1. 클럽
-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6회 1929–30, 1930–31, 1933–34, 1935-36(이상 아틀레틱 클루브), 1941–42, 1943–44(이상 발렌시아 CF)
- 코파 델 레이 우승 5회: 1930, 1931, 1932, 1933(이상 아틀레틱 클루브), 1941(발렌시아 CF)
-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31–32, 1932–33(아틀레틱 클루브)
- 코파 델 레이 준우승 3회: 1944, 1944–45, 1946(발렌시아 CF)
- 바스크 챔피언십 우승 7회: 1927–28, 1928–29, 1930–31, 1931–32, 1932–33, 1933–34, 1939-40(아틀레틱 클루브)
3.2. 개인
-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회: 1929-30 (아틀레틱 클루브)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5] 이후 고로스티사는 1931-32 시즌에 피치치 트로피를 한 번 더 탔지만 실제 득점은 팀의 센터 포워드 바타가 더 많은 괴상한 결과도 나왔다. 그래서 피치치 트로피 수상자는 고로스티사, 최다득점자는 바타라는 기묘한 기록으로 남아있다.[6]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