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하포 사건
1. 개요
1896년 황해도 안악에 있는 해안 지역인 치하포(鵄河浦)에 있는 주막에서 조선 청년 김구[1] 가 일본 상인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를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끝내 살해한 사건.
2. 배경과 내용
1896년 1월부터 을미사변, 단발령의 강제시행 등으로 분격한 유생들이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을 축출하고자 을미의병을 조직하여 수도권 및 충청권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1896년 1월 중순부터는 경기, 충청, 강원 및 함경도 북부까지 의병이 확대되었다. 이에 전국적으로 친일파와 일본인에 대한 상해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1896년 5월 30일 일본 공사가 외부대신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총 일본인 피살인원은 43명, 부상자 및 피학대자가 14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 이러한 전국적인 소요에 대해 일본정부에서도 심히 우려스럽다는 것을 알고 일본인행상자 여행금지 및 재조선 거류민 철수를 실시하였다. #
일본 경찰의 보고에 따르면 쓰치다 조스케는 이즈하라 항의 무역상 오쿠보키(大久保機)의 고용인으로서 1895년 10월에 평안남도 진남포에 도착하여 11월 4일에 장사를 하러 황해도 황주로 갔었다고 한다.[2] 그 또한 각지에서 벌어지는 일본인에 대한 소요사태에 따른 철수명령을 받고 인천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이때 그는 치하포구 주인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김구의 눈에 띄었고 말을 건네본 김구는 그가 일본인인 것을 알고서 그를 국모시해의 범인으로 추측하였고 설사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하다는 이유로 살해하여 국모의 원수와 국가의 수치를 갚고자 하였다.
상술하였듯이 김구는 치하포 사건을 국모가 시해당한 국가의 치욕을 씻기 위한 거사로 생각하고 있는데, 즉 이에 따라 이 사건은 당시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반일 소요사태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3. 논란
치하포 사건의 특징은 《백범일지》와 후에 김구를 체포하여 신문하고 기록한 대한제국의 조서와 신문 보도 등이 상당한 내용의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다만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라는 건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이다. 1997년부터 김구 전문가인 도진순이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란 건 보고서로 작성했다.
3.1.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의 신분과 살인의 동기
3.1.1. 백범일지
'단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한명이 같이 앉은 나그네와 인사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성은 정이고 사는 곳은 장연이라 했다. 말투가 장연 말씨가 아닌 경성 말씨였는데도 시골 노인들은 그를 조선 사람으로 알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만약에 저자가 보통 장사치라면 조선인 행세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그렇다면 혹시 미우라 고로(명성황후 시해범)가 아닐까? 공범일 수도 있다. 공범이 아니라도 '''칼을 차고 다니는 왜놈은 우리 민족의 독버섯'''이다.'[3]
'나는 왜놈의 소지품을 뒤지게 하였다. 소지품을 조사해 보니 왜놈의 이름은 쓰치다 조로이고 직위는 육군 중위이고 엽전이 800냥 있었다'[4]
3.1.2. 조서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근본을 알아본즉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라고 생각이 되자 가슴의 피가 뛰었다. 그러한 때 그 일본인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발길로 차 거꾸러뜨리고 손으로 패 죽여서 얼음이 언 강에 버렸다.'
조스케가 육군 중위라는 기록은 현재까지 백범일지에서만 발견되었다. 일본 측 기록엔 약장수로 등록이 되어 있었다. 사건 10년 후 쓰치다 조스케의 유족은 대한제국에게서 배상받았다.[5]
3.2. 사건과 그 후
3.2.1. 백범일지
'내 발에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검광을 번쩍이면서 달려들었다. 나는 면상에 떨어지는 칼을 잽싸게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걷어차서 거꾸러뜨리고는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았다. 칼이 저만치 떨어져나갔다. 나는 그 칼을 집어들고, 왜놈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마구 난도질을 쳤다. 피가 샘처럼 용솟음쳐 마당에 흘렀다. 나는 손으로 피를 움켜 마시고, 얼굴에다 처발랐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아까 이 왜놈을 위해 달려들려던 놈이 누구냐'라고 엄포를 놓자 결국 여러 사람들이 나를 장군님이라고 부르며 용서를 빌었다. 800냥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라고 했다.'
3.2.2. 조서
백범일지와는 정반대로, 쓰치다가 칼을 뽑아들고 덤볐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3번의 공판에서 김구의 진술에 차이점이 있다. 1차 신문에서는 발로 차고 돌로 때렸다고 2차에서는 처음은 돌로 때리고 다시 나무로 때리자 그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도망하기에 강변까지 쫓아 따라가서 몽둥이로 거듭 구타하여 죽였다. 3차에서는 자신이 돌을 던져 쓰러뜨린 후 모든 투숙객이 분격하여 함께 찔러죽였다고 하였다.
'금액량은 잘 모르게, 동행인의 노자로 얼만가를 주고 당나귀 한 마리를 엽전 일흔다섯 냥에 사서 타고 왔으므로 대략 전액은 엽전 백냥가량으로 안다.'(김구)
'그대가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재물을 탐하여 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재물을 탈취하였는가?'(신문)
'동행한 세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를 달라고 애걸하므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줘서 보내고 난 뒤 나머지 돈 팔백 냥은 점주에게 맡겼다.'(김구)
'그래서 몹시 놀라 달려가 본즉 김창수가 일본인을 붙들고 마구 때리고 있기에 만류하려 하였으나 벌써 일본인을 죽여서 끌어다 강변에 버리고 환도 한 자루를 탈취하여서는 자기가 차고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타고 떠났습니다'(주막 주인)
3.3. 그 외의 논란
- 《백범일지》에서 이 일화는 젊은 날의 이야기 치고는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 체포 후 수감 시 동료 수감자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정확하다.
- 주막 주인이 증언한 바로는, 당시 한밤중이어서 캄캄했는데도 일지에는 장황한 묘사가 가득하다.
- 통역을 데리고 다녔다는 쓰치다 조스케가 일지에서는 경성 어투를 쓰면서 조선말을 유창하게 한다.
- 주막 주인과 쓰치다 조스케가 대화한 적도 없는 김구가 쓰치다 조스케를 무참히 죽인 후 주막 주인에게 '너는 어떻게 저 자가 왜인인 걸 알았느냐?'라고 갑자기 묻는 뜬금없는 장면이 나온다.
- 《백범일지》를 보면, 주막집 주인은 김구가 풀어 주라고 해서 석방된 것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1896년 10월 2일 법부에서 인천감리서로 보낸 전보에 이화보는 무죄로 방면하라고 내려와서 풀어 준 것이다.
- 《백범일지》에는 김구가 사형 직전에 고종이 전화로 칙명을 내려 사형을 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6] 서울(외부)과 인천감리서간 시외전화를 사용한 기록은 1898년 1월 24일,25일,28일 등 다수 존재한다(외기,규17838), 이외에도 1897년도에 전화를 가설한 기록(1897년 11월 29일 승정원일기 3090책, 1897년 12월 14일 독립신문)들이 새롭게 발견되어 고종의 전화사용은 신뢰성을 갖게 되었다.
- 신문 때 배석한 조선인 경무관의 성명도 잘못되어 있다.
4. 종합 검토
일제의 기록이 침략국의 기록이라는 점을 보아 전체에 걸쳐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도 역시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어렵다는 점에서, 어떤 경우든 간에 사료 검토는 교차 검증이 기본인데 《백범일지》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논란 항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침략국의 편향된 기록 운운 하기 전에 기본적인 사실 기록에 대한 백범일지의 정확도 자체가 상당히 떨어진다. 사료의 신뢰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 현재까지도 백범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부족한 것에 대해, 혹자는 그 당시 재판까지 이루어져 투옥되었다가 탈옥하여 독립운동을 한 김구에게 유리한 증거를 일본이 남겨두었을 리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근거가 없는 단순 추론에 불과하다. 결국 남아있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명성황후 살해범들은 일본으로 옮겨져 수감되어 있다가 치하포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몇 주 전에 석방되었기 때문에 쓰치다 조스케가 명성황후 시해에 개입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기도 한다.
김완섭은 2003년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과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내용의 인쇄물을 배부하였다가 사자 명예훼손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을 근거로 쓰치다 조스케가 일본제국군이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김완섭의 주장 중 '허위'로 드러나 유죄를 인정받은 부분은 김구가 중국으로 가게 되는 과정 부분뿐이다.
재판부의 에서 쓰치다 조스케의 신분에 대하여는 '쓰치다 조스케가 명성황후 시해에 연관 된 일본제국 군인인지, 무고한 상인인지 판단할 아무런 증거도 현출되지 않았기에 허위 사실 판단이 무리이다'라고 쓰고 있다.
"김구 선생이 1896년 2월 황해도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 조스케’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제국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 조스케를 죽이고서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를 적시했다” 라는 부분은 김완섭을 고소한 '검찰'의 주장이지, 역사에 관계된 사실이 아니다. 재판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위장한 일본제국군' 부분은 허위 사실 판단 무리[7] , '망명을 도주로 표현한 부분'은 허위를 인정한 셈이다.
5. 결과
1896년 9월 10일 '삼초'가 작성된 이날 인천항재판소 판사이재정은 심리 후 살인죄로 교형을 선고(사형선고 판결)하였다.
9월12일 일본영사대리 적원수일은 '대명률의 인명모살인죄'로 참형(목을 벰)으로 처단하라는 의견서를 이재정 에게 제출했다. 법부를 거쳐 고종에게 상주하는 보고서(수사기록 및 재판기록)에 이를 첨부케 하여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9월 13일 이재정은 법부에'조율재처' 바란다는 보고를 하였고, 처리(고종의 사형집행명령)가 지연되자 10월 2일 법부에 김구에 대한 조속한 처리(속판)를 전보로 독촉하였으나 법부에서는 임금에게 마땅히 상주하여 칙명을 받아야 할 사안(주당훈)이라는 답전을 보냈다. 그로부터 불과 20일 뒤인 10월 22일 법부는 김구에 대한 교형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이 상주안건을 재가하지 않았고, 이후 12월 31일 상주안건을 거쳐, 김구가 제외된 1897년 1월 22일 세번째 최종 상주안건에 대하여 재가함으로써 김구는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사형선고는 받았으나 사형집행명령을 받지 않아 일시적으로 사형집행을 면한 것'''으로 특사 등 사면되어 석방ㆍ방면되었다거나 유배나 무기징역으로 감경받은 것이 아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만약 전화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후로 김구는 감리서 책임자 경무관 김윤정과 '''현지 투전판 두목 김주경의 비호'''로 감옥 내에서 대접이 좋았다고 《백범일지》에서 회고하고 있다.
그렇게 2년간의 투옥 생활 후 탈옥에 성공하여 떠돌게 된다.
5.1. 비판
많은 한국 측 미디어에서는 쓰치다 조스케를 바람직하지 않게 본다. 만화가 오세영 화백의 김구 위인만화(월간 보물섬 연재)에서는 조선인으로 위장하던 걸 이상하게 여겨 덮치는데 쓰치다 조스케가 숨겨둔 칼을 꺼내 공격하는 걸 빼앗아 벤다. 이렇게 보통 쓰치다 조스케를 간첩으로 많이 보고 있다. 솔직히 조선인 흉내를 내는 만큼, 간첩이라고 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왜 쓰치다 조스케가 조선인으로 위장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을미사변 직후의, 대도시도 아닌 시골에서 일본인이 일본인인 거 티내고 다니는 것도 미친 짓이다. 당시 일본인을 향한 조선인들의 일반 감정을 안다면 이런 짓한다는 건 죽여 달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 행위.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듯 실제 당시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분노로 일본인들이 살해당하기도 했고, 《백범일지》에서조차도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한양에서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가옥을 부수고 일본인들을 때려죽였다는 기술이 되어 있다. 그리고 백 번 양보해 이게 사실이 아니라 쳐도 조선 내에서 일본인들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면,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인들이 이런 소문을 못 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이 가능하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했을 때, 조선 복장을 했던 것은 조선에서 상업 활동하려고 굳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혀 불이익당하기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 추론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일본제국의 공문에서도 상인들에게 주의를 당부하였다.
김구가 전후에 저지른 백색테러[8] 가 밝혀지면서 퍼진 경향이 있다. 치하포 사건만 놓고 봐도 아무 죄 없는 일본 민간인을 잔인하게 죽였으니 이것만 놓고 봐도 이상한데 여기에 더하여 독립 운동 중, 그리고 해방 후 김구가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상대로 테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같이 퍼지게 되었다. 특히 김구가 현재처럼 추앙받는 이유는 전후에 소위 "더러운 정치"질을 했던 이승만과 김일성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고 여겨졌기 때문인데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 차츰 밝혀지자 그 배신감 때문에 유독 최근 들어 까이기 시작했다.
밤섬해적단은 "백범살인일지"라는 노래로 이 사건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승만을 비판하기 위해 김구를 대책없이 미화하는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조롱이 주제다.
5.1.1. 킬구 드립
내용의 가독성을 위해 링크 따로 표시
[주의]
이후 역사 갤러리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하고 만화로까지 패러디하면서 김구를 '킬구'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만 이 만화는 일부러 김구를 비판하는 시각에 초점을 맞춰 쓰치다 조스케의 처지에서 기술한 감성팔이가 섞여 있다. 이 만화는 역갤러에서 어그로를 잘 끌기로 유명했던 '황룡'[9] 이라는 갤러가 원작자이니 일부러 일뽕 시늉을 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여러 역갤러가 패러디하고 올리고 있으며 역갤 이외의 커뮤니티에도 조금씩 퍼지고 있다. 당연히 역갤에서의 사건 진상 논쟁이 먼저고 만화는 아주아주아주 후에 그려졌다.
6. 사회·문화에서
1932년 김구가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알리려고 『도왜실기』란 책을 중국어로 냈고 이걸 엄항섭이 1946년 3월에 언역해서 한반도에 소개했고, 이 책에 이승만이 서문을 썼는데 치하포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김구가 급히 귀국해 황후 시해범을 죽였다거나 원수를 갚아 줬기에 고종이 살려 줬다는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반 공산주의, 반 안창호, 임정정통론이라는 같은 스탠스를 취하는 같은 편이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사이를 보나, 21세기 들어서도 과연 쓰치다 조스케가 누군지도 똑바로 모르는 실정으로 보나,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대충 김구의 주장만 듣고 써준 발간사라고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동지들과 함께 왜적에 복수할 것을 맹약하였고 삼남지방에 의병이 봉기했다는 소식에 '''급히 귀국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장교를 손수 죽여 국모의 원한을 갚은 것이 선생의 21세 때 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민중이 충의의 선생을 구하고자 들끊자 이 소식은 마침내 궁중으로 들어가 고종께서 친히 제물포에 전화를 걸어 각별히 사형 집행을 연기케 하여 선생은 사지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국모의 원수를 갚았기 때문에 위기에 빠진 선생을 국왕께서 몸소 살려 준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나 어찌 기이한 인연이 아닌가.」
'''이승만''', 「발간사」, 『도왜실기』, 범우사, 2002
사실 지금도 당시 일본 검찰은 쓰치다를 일반 일본 민간인이라고 했으나 여론이 이를 침략국의 기록이라며 부정하면서도 백범일지와 당시 조사중 진술을 보면 진술번복이 끝도없는걸 보아 정황상 쓰치다는 그냥 민간인은 맞는데 그걸 인정하면 안두희를 때려죽여도 다수의 국민이 용서하고 사법부가 법정형보다 적은 형을 선고할 정도로 명망높은 민족의 큰 어르신 취급받는 김구의 평판이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리므로...''' 의도적으로 김구의 과오를 감추는 것에 가깝다.
백범을 다룬 극화물에선 비중 있게 다뤄지는데, 피살자인 쓰치다 조스케 역은 1973년작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선 배우 김기범,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장효선이 각각 연기했다. 2017년에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영화 〈대장 김창수〉가 제작됐다. 2017년 9월 8일 기준으로 줄거리에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감옥에서 대장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려낸 ''''감동 실화''''"라는 설명이 붙어있었으나 현재는 여론을 의식했는지 "1896년 황해도 치하포, 청년 김창수가 '''일본인을 죽이고 체포'''된다. 그 사람은 재판장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았을 뿐'''이라고 소리치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라며 한발 뺀 상황이다. 하지만 여전히 쓰치다 조스케를 '''짐승 한 마리'''에 비유하는 등 여전히 불안한 요소는 남아 있어서 사건의 진상을 아는 사람들이 걱정했었다.
7. 학계에서
-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라는 건 이미 2000년대가 되기 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이다. 김구를 다룬 대표 학자로 유명한 도진순이 그 예. 도진순은 1997년에 보고서를 작성하여 치하포 사건 분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도진순, 1895-96년 김구의 연중 의병 활동과 치하포사건, 한국학술진흥재단, 1997 여기서도 이미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라고 적어 놓았다. 이후 도진순의 논문도 동일하다.# 쓰치다 조스케가 일본제국 중위가 아니라는 건 애초에 신선하거나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 배경식이 풀어 쓴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너머북스, 2008)에선 치하포 사건의 실체가 그대로 써져 있다. 김구가 아무 죄도 없는 멀쩡한 일본인을 잔혹하게 죽였는데 이걸 《백범일지》에서 사실과 다르게 썼다고 적는다. 다만 이 사람도 최초는 아니다.
8. 그외
《백범일지》 관련해서 손충무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10] 이 손충무는 김구의 암살 사건을 다루던 기자였는데 특파원으로서 오래 생활하면서 김구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이 손충무는 쓰치다 조스케 사건에 관한 자료를 신문사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손충무가 제시한 자료에도 쓰치다 조스케가 일본제국 중위라는 기록은 없었다.
고재열이라는 기자는 민간인 살해를 '''미러링'''이라고 분석했다.
출처: #복각본 <백범일지>를 읽고 놀랐던 적이 있다. 초판본을 그대로 재현한 것인데 내용이 너무나 적나라해서다. 젊은 시절의 백범은 혈기방장했다. '''주막에서 한국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을 발견하고 그를 맨주먹으로 때려 넘어뜨린 후 난도질해 죽였다'''. 엽기적인 것은 그 다음이다. 그는 그 일본인의 피를 마셨다. 일본이 우리의 국모(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에 대한 '''일종의 ‘미러링'이었던 셈이다.'''
백범일지에는 비슷한 사례가 많다. 이런 책을 어린이들에게 읽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백범의 행위를 '''맥락과 떼어 놓고 행위만 봐서'''는 문제가 될 것들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 백범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그의 행위만 나열한다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간사하고 잔혹한 범죄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라 백범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의 행위를 시대적 배경을 통해서 이해해주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가 이뤄낸 성숙을 존중해서일 것이다.'''
물론 사건과 관계없는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는 것은 피해자의 국적이나 시대상황, 배경 등과 관계없이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그리고 《백범일지》에는 시대 배경을 감안해도 문제인 게 있다. 그게 바로 김립 피살 사건과 옥관빈 피살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