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농구)

 

'''김희선의 수상 및 영예 '''
[ 펼치기 · 접기 ]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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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희선(金熙宣)
'''생년월일'''
1973년 6월 29일 (51세)
'''출신학교'''
춘천근화초
춘천중
강원대사대부고
중앙대학교
'''포지션'''
슈팅 가드
'''신체'''
187cm, 91kg
'''프로입단'''
1996년 삼성전자 농구단
'''소속팀'''
'''수원/서울 삼성 썬더스 (1996~2003)'''
안양 SBS 스타즈 (2003~2005)
부산 KTF 매직윙스 (2005~2007)
'''지도자'''
부천 하나 외환 여자농구단 코치 (2012~2014)
1. 소개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3. 실업, 프로 선수 시절
4. 지도자 경력
5. 관련 문서


1. 소개


'''남자''' 농구인으로, 부천 하나 외환 여자농구단의 코치였다.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중앙대학교 출신으로 일명 마지막 승부 세대 멤버이다. 187cm의 신장에 포지션은 슈팅 가드였다. 2학년까지 식스 맨 역할을 했는데, 당시 중앙대의 주전이던 3, 4학년의 자리가 너무 확고했고,[1] 본인의 기량도 터지기 전이었다. 그래도 이 때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를 통해 김승기, 홍사붕의 백업가드로, 또한 허재의 전담 마크맨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농구대잔치가 끝난 후 김승기, 홍사붕이 졸업하면서, 공석이 된 주전 포인트 가드 자리를 꿰차면서 중심멤버로 자리잡고 4학년 때는 팀 주장을 맡는다. 3학년 때는 김영만, 양경민 쌍포가 건재하여 3옵션 정도의 위치였지만, 4학년 때 중앙대의 간판스타는 '''누가 뭐래도 김희선이었다.'''

3. 실업, 프로 선수 시절


삼성전자 농구단에 입단하며 역시 백업 가드로서 활약했다. 2000-01 시즌 당시 챔피언결정전에서 수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팀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챔피언결정전 4차전에서 95-95 동점 상황에서 조성원의 공을 가로채 그대로 결승 레이업슛을 넣은 것. 큰 키를 바탕으로 한 수비력도 좋은 편이었고, 괜찮은 외곽슛을 가진 가드라서 비교적 오래도록 뛸 수 있었다.
FA 자격을 얻은 후, 억대 연봉을 받으며 SBS로 이적해 초반에 좋은 모습을 보였다가, 점차 비중이 줄어들면서 다시 식스맨이 되었다. 이적 첫 해에 평균 12.4점을 넣으면서 맹활약한 것. 그 뒤로는 황진원, 이정석 같은 신예 가드들이 들어오면서 비중이 줄어들었다. 사실 삼성에서도 FA 당시 잡으려고 했지만, 본인이 주전으로 뛰고 싶었기에 이적한 것. 쏠쏠한 가드로서 효용성이 높았다.[2]
그리고 SBS에서는 양희승의 연봉을 맞춰주는 상황에서 김희선을 샐리러캡을 줄이기 위해 현금 트레이드 형식으로 KTF로 보냈다. 부산에서 김희선은 말년 2년간 팀의 고참이자 식스맨, 주장으로 충실히 뛴 후, 다시 잡은 FA 때, 은퇴를 선언했다. 후배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라고.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KTF도 예우를 잘 해줘서, 2년 밖에 뛰지 않은 그에게 은퇴식을 열어 주고, 팀의 코치로 임명했다.

4. 지도자 경력


2012년까지 kt의 2군 코치이자, 유소년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9월 신세계 쿨캣을 인수해 새로 출범한 구단으로 고교 및 대학 선배인 조동기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된 부천 하나 외환 여자농구단의 코치로 부임했으나 2013-14 시즌이 끝나고 성적 부진의 책임으로 물러난 조동기 감독을 따라 함께 사퇴하였다.

5. 관련 문서


[1] 김승기(4학년)-홍사붕(4학년)-김영만(3학년)-양경민(3학년)-조동기(4학년). 이 라인업은 농구대잔치를 기아자동차가 석권하던 당시 유일하게 우승하지 못한 1993-1994년 대회에서, 그 기아자동차를 8강에서 무너뜨렸다.[2] 당시 삼성주희정, 강혁이 있던 시절이라 주전으로 뛰기는 조금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