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혁(농구)
[clearfix]
1. 소개
한국의 前 농구 선수였고 現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코치로 서울 삼성 썬더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며, 말년에는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서 뛰었다. 픽앤롤 플레이의 달인이었던 선수. 여담으로 엄청난 동안이다. KBO에 박정진이 있다면 KBL에는 강혁이 있다고 할 정도...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삼일상고 3학년때 동기 김성철과 함께 팀을 쌍용기 준우승으로 이끌며 활약했으나, 라이벌인 대전고 조상현-조동현-황성인 트리오나 부산동아고 조우현, 휘문고 최훈석 등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청소년 대표에도 뽑히지 못한다.
김성철과 함께 경희대에 진학한 뒤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뛰면서 1996 대학농구연맹전 1, 2차대회에서 모두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본격적인 "자줏빛 군단" 돌풍을 이끈다. 특히 '''박성배-강혁-손규완-김성철-윤영필'''의 주전 라인업은 대학-실업팀들이 함께 참가하는 마지막 대회였던 1996-97 농구대잔치에서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는데, 당시 루키 정진영이 가세하면서 파죽지세의 상승세로 실업부 2위에 올랐던 현대전자를 6강 플레이오프에서 2승 1패로 꺾는 이변을 일으킨다. 이후 4강에서 만난 최강 연세대학교와도 접전을 벌였으나 1차전에서 연세대 김택훈(F, 192cm)의 팔꿈치 공격에 센터 윤영필이 앞니 3개를 잃으며 응급실로 후송되면서 패배, 2차전에선 역시 김택훈(;;)의 팔꿈치에 강혁이 실려나가면서 아쉽게 2패로 탈락하고 만다. 당시 김택훈의 플레이가 어찌나 심했던지, 대부분 연세대의 호화멤버[2] 를 응원하러 왔던 관객들마저 후반들어 연세대에 야유를 보내며 경희대를 응원할 정도였다.[3]
서장훈(4학년)이 그야말로 대괴수로서의 면모를 보인 1997 시즌에는 연세대가 시즌 전관왕(MBC배, 연맹전, 전국체전, 농구대잔치[4] )을 하는 동안 강혁-김성철-윤영필 트리오의 경희대는 농구대잔치 준우승 포함 2차례 준우승에 머물러야했다. 특히 농구대잔치 예선에선 경희대가 이겼지만, 최종 결승전에서 내리 2패를 당하면서 아쉬움은 더 컸다.
마침내 서장훈이 졸업한 1998 시즌, 강혁은 첫대회인 1998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에서 맹활약하며 1991년 전국체전 우승 이후 7년만의 '''전국대회 우승''' 타이틀을 가져오고, 본인은 '''MVP'''에 오른다. 그러나 골리앗 피하니 주성타 만난다고, 1998년엔 김주성(중앙대), 김태완(한양대), 정훈(성균관대)의 장신 3인방이 입학한 해였고[5] , 이들이 대학농구에 적응하면서 윤영필의 졸업 이후 골밑이 부실해진 경희대는 맥을 못췄다. 이로 인해 강혁-김성철이 이끌던 "자줏빛 군단"의 돌풍은 다소 아쉽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강혁의 4학년 시절 MBC배 제패 및 MVP 등극에는 이러한 카더라가 있다.
MBC배를 앞두고 혹독한 동계훈련을 하던 선수들을 위로하고자 경희대 최부영 감독이 회식을 열었는데, 술이 약했던 강혁이 하필 최부영 감독 옆자리에 앉아 연신 술잔을 들이키게 되고 마침내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강혁은 최 감독에게 "이 xx 죽여버린다"라며 달려들었다고... 최 감독의 무서움을 너무도 잘 알던 선수들은 기겁을 하며 강혁을 말렸고, 다음날 술이 깬 강혁이 최 감독에게 용서를 빌자 최부영 감독은 '''"MBC배에서 우승하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살고 싶었던 강혁은 정말 죽어라고 뛰었고,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가 알아서 먼저 탈락해주는 행운까지 따르면서 1998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에서 극적인 우승 을 얻게 되었다.
3. 프로 선수 시절
1999년, 서울 삼성 썬더스에 드래프트 전체 5번으로 지명되면서 입단했다. 당시에는 외국인 선수를 두 명 쓰던 시절이었고, 또 주전 가드로는 주희정도 있었기 때문에 주로 식스맨으로 뛰었지만, 상당한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삼성의 프로농구 첫 우승인 2000-01 시즌에도 주전 멤버는 아니었지만,[6] 겨우 프로 2년차였던 강혁은 시즌 중엔 평균 17분 정도, 챔피언결정전부터는 25분 이상을 뛰는 키 식스맨으로 활약하며 '''2000-01 시즌 최우수 후보선수상'''을 수상한다. 식스맨으로 두 시즌을 뛴 후,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해서 병역을 해결한 뒤에 다시 삼성으로 복귀하였다.
가장 빛나던 시기는 2005-06 시즌. 정규시즌 2위로 올라온 삼성은 4강 플레이오프에서 오리온스를 3승으로 일축하고 챔피언결정전에서 모비스를 만나 4전 전승으로 우승하며, '''PO 7전 전승 우승'''의 대기록을 작성한다. 이 해 챔프전에서 올루미데 오예데지와 서장훈 더블 포스트의 골밑 공략을 대비하던 울산 모비스 피버스의 허를 찌르고, 네이트 존슨과의 2:2 픽앤롤 플레이로 팀 우승의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챔피언결정전 당시 성적은 '''평균 17.3 득점 6.5 어시스트'''. 이 때의 맹활약 덕분에 '''2005-06 시즌 챔피언 결정전 MVP'''로 선정되었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소속팀에서 오랫동안 식스맨(교체선수)으로 활약하다가 주축가드로 도약하는데 성공한 선수이다. 최고의 식스맨으로 꼽혔음에도 교체선수의 특성상 별 조명을 받지 못했었지만, 챔프전의 활약이 겹치면서 강혁은 선수생활 말미에 주목받기 시작. 특유의 승부욕, 근면성이 비로소 팬들에게도 인정받은 것이다. 이후 2007년에는 남자프로농구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자유투 성공률은 리그 최상위권이며 앞서 2005-06 챔프전에서 언급된 것처럼, 2:2 플레이에 매우 능하다. 수비력도 출중해서 2003-04 시즌부터 4시즌 연속 수비 5걸에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스틸에 매우 뛰어나다.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안내 방송을 맡는 등 삼성 썬더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그러나 2010-11 시즌, 삼성이 6강 플레이오프에서 3연패로 탈락하자 감독 교체 등 대대적인 팀 개편이 있었는데, 강혁이 그 대상이 되었다. 오래도록 뛴 팀을 떠나 이병석, 김태형 등과의 2:1 트레이드를 통해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로 이적했다. 이때 은퇴까지 생각하기도 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전자랜드맨 거듭난 강혁 “팀이 버리기 전까진 배신은 없다” 10년 넘게 한 팀에서 꾸준히 생활한 강혁에게 있어서 선수 생활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임을 짐작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삼성에게 있어서는 '''아주 뼈아픈 실수'''였다. 삼성은 가드진의 부실화로 14연패라는 수모 끝에 꼴찌로 시즌을 마감한 반면에, 강혁을 얻은 전자랜드는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군입대로 빠진 정영삼의 공백을 말끔히 메우고, 후배들을 잘 가르쳐 주면서도 간혹 가다가 20점 이상의 득점을 올리면서 매우 좋은 활약을 보였다.
워낙 한 팀에 오랫동안 있었던 까닭인지 팀을 옮기고 나서도 삼성과의 경기를 했을 때 넘어지거나 하는 경우 룸메이트였던 이시준을 비롯해서 삼성 선수들이 먼저 달려와 일으켜주거나 걱정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데뷔 이후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플레이오프에 결석한 적이 없다.''' 강혁이 입단한 이후 '''삼성이 딱 한 번[7]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강혁은 상무에 있었다.''' 심지어 삼성은 강혁을 떠나보내고 맞이한 첫 시즌에는 아예 꼴찌로 추락해 버렸다. 당시 이정석의 백업 포인트 가드가 아쉬운 와중[8] 에도 굳이 남아도는 포워드를 받아오는 농알못스런 트레이드를 하는 바람에 이정석은 부상으로 몇 경기 뛰지도 못하고 시즌 아웃을 당하자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다. 준비 없는 감독이 팀을 운영하면 어떤 꼴이 되는가를 아주 퍼펙트하게 보여준 사례.
참고로, 입단 이후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가 될 때까지 계속 플레이오프에 개근한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몇 년 전까진 김승현과 함께 유이한 선수였으나 김승현이 오랫동안 모종의 사건으로 몇 년 간 리그를 못 뛰는 바람에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2012-13 시즌에는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식스맨으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하면서 전자랜드를 정규시즌 3위로 올려놓는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친정팀 삼성을 3:0으로 누르고 4강 PO에 올랐지만, 그 과정에서 그만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전자랜드가 모비스에게 패한 4강 PO 3차전에서 은퇴식을 가지고 공식 은퇴했다. 사실 원래 이렇게 급작스럽게 은퇴식을 하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시즌 중에 모교인 삼일공고로부터 코치직을 제안 받았고, 나이가 들면서 체력과 부상재활 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전자랜드측에서는 만류하였다고 한다. 은퇴 당시 이미 나이가 30대 후반에 접어들었으니 당장 은퇴해도 이상할 게 없긴 하였다. 특히 마지막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 의 패스를 받아 클린 3점을 성공시키면서 더 감동을 자아냈다. 그것도 상대가 던지라고 길을 열어준 게 아니라 양동근이 끝까지 수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에서 성공시킨 것이라 더 감동이 있는 마지막 슛이었다.
4. 지도자 경력
은퇴 후에는 모교인 삼일상고의 코치로 지도자 인생을 시작했다.
삼일상고에 부임할 때 한 인터뷰에서 "모교에 대단한 유망주가 입학했다고 하는데, 한 번 잘 키워보겠습니다."라고 했는데, 그 선수가 바로 KBL 최초의 고졸 로터리픽 송교창[9] 이다.
강혁 코치 부임 후 삼일상고는 장신 선수들에게도 게임리딩이나 전문 슈터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는 등 남다른 선수육성책을 보여주어, 송교창 이후에도 장신 중학생 선수들에게 인기가 많다. 2017년 기준 3학년 하윤기(201cm)[10] , 2학년 이현중(197cm)에 삼일중 출신 신입생 여준석(200cm) 등이 기대되는 선수들이다.
2017년 4월 27일 창원 LG 세이커스 코치로 부임하였지만 2019-20 시즌 코로나19로 인한 조기 종료와 조성원 감독의 부임으로 인해 결국 김영만 수석코치와 함께 팀을 떠나게 되었다. 재임 중 당시 LG 선수단 못지않게 억압과 갈굼을 당한 후문이 그 먹방감독의 예능영상에서 나오면서 미끼의 희생양이라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이와는 별개로 LG 가드 선수들은 강혁 코치가 투맨 게임 마스터라는 소문을 현실로 경험하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결국 감독문제)
2020년 5월 15일, 유도훈 감독의 부름을 받고 본인이 은퇴했던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코치로 부임하면서 선수 시절이던 2012-2013시즌 이후 8년만에 돌아왔으며 전자랜드에서의 코치 경력은 처음이다. 이미 유도훈 감독은 2012-2013 시즌 은퇴 이후 코치로 데리고 올 생각을 했는데 그 시기가 2017-2018 시즌이 아닌 2020-2021 시즌이 되었다. 전자랜드에서는 김낙현 선수의 성장을 맡게 되었다. 사실상의 코칭스태프 삼각 트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명지대 감독이 창원 LG 감독이 되고, 창원 LG 코치가 전자랜드의 코치가 되고, 전자랜드 코치가 명지대 감독이 되었다. 또한 2020-21 시즌부터 전자랜드의 D리그 팀 감독도 맡게 되었다.
5. 시즌별 성적
6. 기타
운동선수 치고는 결혼을 늦게 한 편인데, 친분이 있는 정지원 아나운서가 경기 전 인터뷰에서 결혼 언제 하냐고 집요하게 묻자 장훈이 형(당시 삼성 소속) 결혼하면 할 거라고 말하며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서장훈이 결혼한 후에 강혁도 결혼했다! 서장훈은 2009년 5월 23일. 강혁은 2009년 8월 8일. 안타깝게도 한 쪽은 파경을 맞았지만...
동안에 순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 성격이 무난해 보이지만 의외로 한 성깔 하는 선수이다. 굉장히 승부욕이 강하고 그를 표출하는데 스스럼이 없다. 덩치가 큰 선수들과의 말싸움에서도 들이대는 모습을 꽤 보여주었고, 후배선수들에게도 꽤나 엄격한 선수이다. 강혁이 경기 중 진지하게 훈계를 할때 후배들은 각잡고 경청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꽤나 잡혔다.
평소 무표정하고 잘 웃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있는데[11] , 본인은 웃음이 굉장히 많다며 코트에서는 사실 웃긴 일이 없기 때문에 잘 웃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본인 실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기보다는 모자란 점을 먼저 생각하는 타입인 듯. 그리고 딸에 대해 팔불출인 듯하다. 관련 인터뷰
몇 년 간 그야말로 속절없이 무너지는 삼성을 안타깝게 여기는 올드팬들 사이에선 '프랜차이즈 강혁을 버렸을 때부터 팀이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강혁은 썬더스의 라이벌팀인 LG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20 시즌을 끝으로 현주엽 감독의 계약이 끝나면서 같이 갈비탕집을 할 뻔(?) 했으나 다행히(?) 유도훈 감독의 부름을 받아 전자랜드 코치진에 합류했다
7. 관련 문서
[1] 신인 시절. 그 당시 용병이였던 G.J. 헌터가 7번을 사용하면서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2] 황성인-조동현-조상현-김택훈-서장훈[3] 결국 이 때의 연세대는 이상민-김승기-조성원-문경은-김재훈-조동기 등 호화 라인업의 상무마저 잡고 사상 두 번째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한다.[4] 1997-98 대회때부터 대학팀들만 참가하는 대회로 축소되었다.[5] 특히 송영진-김주성 더블포스트에 임재현-황진원-조우현까지 전원 청소년대표 출신으로 구성된 중앙대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6] 당시 주전은 주희정-문경은-이규섭-아티머스 맥클래리-무스타파 호프였다. 주희정이 시즌 MVP, 맥클레리가 외국인 선수 MVP, 이규섭이 신인상을 수상했다.[7] 첫 우승 다음 해.[8] 개중 나은 수준의 이시준은 아예 리딩력이 떨어졌다. 애초에 이시준의 플레이스타일은 슈팅 가드에 가깝다.[9] 2015 드래프트 3순위[10] U-19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11] 경기 중에도 정말 극적으로 득점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웃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