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농구)
1. 소개
대한민국의 농구인.
현역 시절에는 사마귀 슈터라는 별명이 있었는 포워드 출신.
본래 센터 출신인 만큼 스몰 포워드로서는 대단히 우월한 하드웨어를 가진 선수였다. 단순히 스팟업 슈터라기보다 혼자 힘으로 다득점을 올릴 수 있던 선수인데, 가벼운 페이크 동작만으로 슛 공간을 확보하여 우아하게 올라가던 미드레인지 점퍼는 알고도 못 막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격도 공격이지만, 수비수로서도 KBL 스몰 포워드 중에선 최고로 평가받던 선수이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끈기도 있었으며, 거듭 이야기하는 크고 강한 육체로 밀어붙이는 수비로, "김영만을 막는 것보다 김영만에게 수비당하는 것이 더 괴롭다."는 평가도 받았다.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마산고등학교 시절까지 포지션은 센터였고, 졸업학년 당시에는 인사이더들 가운데서도 최대어 중 하나였다. 당시만 해도 지금만큼의 장신화도 이루어지기 전이라, 190cm 초중반의 선수들은 대부분 센터로 뛰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 김영만은 고려대학교로 갈 예정이었는데, 고려대학교가 김영만의 졸업 동기 6명 중 4명을 받는 것과 달리, 친구 6명 모두가 갈 수 있는 대학교라면 좋겠다는 뜻에 중앙대학교가 덜컥 응하면서, 김영만은 중앙대학교에 진학했다.
결국 이 선택은 김영만 본인에게도 최선의 선택이 되는데, 그가 포지션을 포워드로 바꾸게 된 계기가 당시 중앙대학교 감독이던 정봉섭의 권유에 의해서기 때문이다. 당시 중대는 고교 센터 3인방으로 불리던 김영만, 양경민, 안병익을 모두 잡는 데 성공하였다. 게다가 당시 중앙대는 197cm의 조동기가 이미 그들의 1년 선배로 센터를 책임지고 있었고 202cm의 정경호도 백업센터 또는 더블 포스트를 구축한 상태다. 2m의 표필상도 있었고 1990년대 초반 농구대잔치 당시 중앙대학교는 장신군단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정봉섭 감독은 이 셋을 모두 활용하여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복안으로 셋 중에 키가 가장 큰 안병익은 센터로 두고, 김영만과 양경민에게 외곽 슛을 집중적으로 연습시키면서 포워드로 변신시킨다. 결과는 대박. 김영만과 양경민은 졸업할 때까지 팀의 주전 포워드 라인을 책임졌고, 특히 중앙대학교 4학년 때에는 당대 최고의 원투펀치였다.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센터들이 몇명을 제외하곤 용병에 밀려 급속도로 몰락하고 쩌리화된 것을 감안하면, 이 포지션 변화는 김영만과 양경민 개인으로서도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특히 졸업반 시절인 93-94 농구대잔치에서 8강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기아자동차를 탈락시키면서 주가를 높였다.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가 대학 농구를 제패하던 시기에, 명가 중앙대학교의 자존심으로 자리잡았다.
3. 실업 선수 시절
3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선배들이 많던 기아자동차로 입단했다. 사실 이것도 원래 기아자동차에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노리기는 했지만, 애당초 김영만이 선배들이 많아 자리 잡기가 쉽지 않던 기아보다는 자리 잡기가 더 쉬웠던 현대전자로 갈 생각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현대전자 감독이자 국가대표 감독이던 정광석이 국가대표 경기에서 김영만을 불러놓고 단 한 경기도 출전시키지 않자, 열받은 김영만은 진로를 급선회해서 기아자동차로 갔다.[6]'''달려라 김영만'''[5]
"대학에서는 최고였지만, 과연 실업 무대에서도 최고일까?" 라는 질문에 김영만은 농구대잔치 신인왕과 팀의 우승으로 간단히 답했다. 당시 기아 하면 나오던 허재- -김유택의 이른바 허-동-택 트리오는 김영만의 가세로 허-동-만 트리오로 변했을 정도.[7] 그 정도로 김영만의 기세는 무서웠다. 95-96 농구대잔치에서 상무와의 결승전은 김영만의 존재를 새삼 깨우쳐 준 무대였다. 이상민-문경은을 뚫고 1차전 전반에만 20점이 넘는 득점을 올리는 등 에이스 기질을 확실하게 보여주는데, 당시 김영만의 맹활약을 기점으로 최인선 감독은 애틀랜타 올림픽 음주 파동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허재 대신 강동희-김영만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한다.
4. 프로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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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이자 에이스였던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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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LG 세이커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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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동부 프로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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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생활 마지막팀인 전주 KCC 이지스 시절.
김영만이 실업 기아자동차에서 보여준 기세는 프로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김유택의 노쇠로 주축이 허동택에서 허동만으로 바뀐 기아자동차는 허재가 나래와의 결승전에 배제된 상황에서 강동희, 김영만의 맹활약으로 1997년 프로 원년의 우승을 차지했고, 97-98시즌 준우승, 98-99시즌 준우승의 순항을 이어가게 된다. 현대에 빼앗긴 두 차례 준우승이 뼈아픈데, 사실 강동희-김영만의 백코트는 이상민-추승균에 그다지 밀리지 않았고 3번만 놓고보면 김영만이 추승균을 압살했으나, 현대 맥도웰의 인사이드가 워낙 강한 나머지 김유택이 은퇴한 자리에 나래에서 준우승 주역이었던 윌리포드를 야심차게 보강했으나 98-99시즌에도 밀리고 말았다.
김영만의 기세는 프로 초기 5년간 그야말로 3번 자리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5년 간 평균 15점 이상을 기록했고, 이 중 4시즌은 평균 20득점 이상, 세 시즌 연속 평균 20득점 이상을 기록했다. 와 호흡을 맞춰 팀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비록 우승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지만, 기아자동차를 KBL의 정상권 팀으로 남기는데 큰 공헌을 했다. 수비력도 극강이라서 같은 포지션의 선수들은 도저히 김영만의 수비를 뚫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김영만의 적수는 거의 없었다. 추승균[8] , 문경은[9] , 우지원[10] 모두 김영만에게 잡혔었다. 하지만 양경민[11] 에게는 이상하게 약했다.[12]
하지만 김영만의 기량은 이 프로 초기 5년을 후에는 끝없이 하락한다. 이미 1999-2000 시즌에 무릎 부상을 당하며 평균 20득점이 넘던 기록이 17점대로 하락했는데, 2000-01 시즌에 다시 평균 22.8점을 찍으며 부활했다. 그러나 그 부활은 무릎의 제대로 된 재활 없이 거둔 위험한 부활이었다. 그 후유증은 그 이듬 해 그대로 나타났다. 무릎이 다시 고장났고, 여기에 허리 부상까지 겹치면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팀 성적도 마찬가지로 곤두박질쳤다.
사실 99-00시즌 플옵에서 강동희 김영만이 모두 빠진 채 개망신을 당한 나머지, 재활이 덜 끝난 김영만을 다음 시즌이 되기 무섭게 불러낸 박수교 감독이 문제였다. 결국 2002년 박수교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퇴진하고, 기아자동차에서 구단 간판도 모비스로 바뀐 상황에서 새롭게 부임한 인물은 연세대학교의 전성기를 이끈 최희암 감독이었다. 그는 부임하기 무섭게 구 중앙대 출신 멤버들을 퇴출하고 팀을 연세대 라인으로 싹 갈아치우는데, 이는 후일 유재학 감독이 연착륙하는 계기가 된다. [13] 그리고 최희암 감독 체제 아래서 기아자동차의 흔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는 팀을 떠났고, 김영만도 우지원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서울 SK 나이츠로 이적, 옛 스승인 최인선 감독 밑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김영만 입장에서는 배신인 것이 2001년 연봉 삭감도 감수하면서까지 팀에 남았던 상황에서 트레이드로 뒤통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SK에서 복수를 다짐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기량은 나오지 않았고, 여기에 팀원들과의 불화설까지 나오면서 김영만의 입지는 좁아졌다.
결국 중앙대학교 출신 선수들이 많던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했고, 조우현과 함께 트리오를 이루면서 전성기만큼은 못해도 팀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김태환 감독이 팀을 떠나는 시기와 함께 김영만의 전성기도 완전히 끝났다, 중앙대학교 출신 선수들이 많던 팀 색깔도 신선우 감독의 등장 이후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FA를 선언하며 현역 시절에 전성기를 함께한 가 코치로 있는 원주 동부 프로미로 이적하여 재기를 모색했지만, 이것도 실패하자 시즌 도중 전주 KCC 이지스로 3:3트레이드[14] 되어 이번에는 허재 감독과 함께 재기를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모교인 중앙대에서 코치 제의를 받자 시즌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에서 은퇴식을 치르고 은퇴했다.
부상이 아니었다면, 버림받지 않았다면 더 잘 했을 수도 있었던 선수. 전성기는 정말 공격과 수비 모두 3번 자리에서 최고였던 선수다. 1:1에 능했던 거의 최후의 국내 3번 선수가 아닐까 싶을 정도 개인 기량도 뛰어났다. 물론 부상 이후에는 저니맨으로 전락해서 커리어의 오점이 되지만.
부산 기아자동차 시절에 국내선수 역대 최다득점 '''49득점'''을 기록했고 22년이 지난 2019년에 서울 SK 나이츠의 김선형이 49점으로 타이기록을 세웠다. 우지원과 문경은의 기록은 조작된 기록으로 인정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김영만과 김선형이 최다득점기록.
5. 지도자 시절
5.1.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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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은퇴 후 곧바로 모교인 중앙대학교 코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08년 여자 농구 팀 국민은행의 코치를 맡으면서 프로의 지도자를 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현역 시절 라이벌이었던 조성원 감독이 직접 요청을 했다. 하지만, 조성원 감독은 성적부진으로 인해 자진 사퇴를 하면서 잠시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다. 후임인 정덕화 감독을 보좌하면서 남게 되었다. 2년간 여자농구의 코치를 맡게 된 격이다.
하지만, 강동희가 새로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 원주 동부로 부르면서 천안 KB 세이버스를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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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11 시즌부터 원주 동부 프로미의 수석코치로 영입되었다. 참고로 선수 시절 재테크의 귀재로도 불려서 농구 안 하고도 먹고 살 돈은 충분히 마련했다고 한다.[15]
2012년 레전드 올스타전 베스트 5로 선정되었다.
대선배인 강동희 감독과 간판인 김주성 선수의 뒤를 잘 받치면서 수비에서 3-2 드랍존 전술을 세밀하게 가다듬으며 윤호영 선수를 KBL 최고의 스몰 포워드로 키우면서 2011-2012 정규리그 MVP로 만들면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된다.
추가로 2011-2012 시즌 팀의 4년만에 KBL 정규리그 우승에 공헌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던 중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으로 감독이 구속되어 아웃되자, 2012-13 시즌 감독 대행으로 잔여 경기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추가로 2013년 6월 11일 오후 5시 의정부 지방법원으로 출석이 예정되어 있는데 감독 측의 증인으로 출석해서 증언하게 되었다. 출석해서는 '''"선수 몰래 승부를 조작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플레이오프가 결정되면 의례적으로 주전들을 쉬게 하는 불문율이 농구계에 존재한다고 증언했으나 검찰 측은 김영만의 증언을 묵살하고 녹취록만 채택했다.
원치 않게 대선배인 를 잃게 된 원주 동부 프로미는 역대급 참사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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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희 감독이 임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수석코치직을 유지하게 되었고 이세범 코치 등과 함께 팀에 잔류하였다. 그리고 이충희는 2013-2014 시즌 9승 31패라는 대구 오리온스 시절에 이에 또 하나의 역대급 흑역사라는 성적 부진으로 이어지게 된다.
2010-2011 시즌부터 원주 동부 프로미의 코치를 맡았다가 2014년 2월 1일, 이충희 감독은 자진 사퇴를 하면서 2년 연속으로 다시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열성적이지만 알고 보면 강성인 원주 팬들은 강한 불만과 함께 현수막을 내걸면서 이충희 감독의 자진사퇴를 요구했는데 공교롭게도 윤호영의 상무 전역 복귀 이후 정말로 자진사퇴를 하게 되었다. 다시 한 번 감독대행을 맡았는데, 선수단에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원주 홈 경기에서 극적인 버저비터 승리를 만들면서 강성의 원주 팬들에게 잠시나마 위로할 수 있는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5.2. 동부 프로미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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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배였던 강동희의 뒤를 받쳤던 수석코치였지만 강동희가 불의로 떠나면서 빈자리에도 불구하고 감독대행을 거쳐 구단의 두터운 신뢰와 함께 이충희 감독 밑을 수석코치로서 지키면서 마침내 성인완 단장은 오래전부터 보았던 그를 동부 프로미의 감독으로 정식 승진을 했다. [16]
2013-2014 시즌 종료 후 2014년 4월 8일에 잔여 시즌을 잘 이끈 공로를 인정받으며 원주 동부 프로미의 제4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정식 감독으로 취임을 했다.
역대 동부-DB 사령탑 중 선수-코치-감독을 모두 한 첫번째 주인공이다.[17]
2014-2015 시즌 개막전에서 허재의 전주 KCC 이지스를 상대로 정식으로 데뷔전 승리를 하게 된다.
2014-2015 시즌 전 에어컨 리그 동안 동부 종특이던 수비농구를 살리는 데 힘을 기울여 감독 데뷔 첫 시즌 개막 후부터 내세운 이른바 '''동부산성 리턴즈''' 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질식 수비를 부활시켰고, 시즌 막판까지 SK와의 치열한 순위 싸움 끝에 37승 17패로 울산 모비스 피버스에 이어 팀을 정규리그 2위, 4강 플레이오프 직행으로 이끌며 초보 감독답지 않은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같은 1년차 감독인 이상민(삼성), 이동남(인삼공사)이 리그 하위권으로 미끄러진 것에 비해 굉장히 탁월한 성적. 더구나 지난 해 전임 감독이 말아먹다 시피한 팀을 이렇게까지 반전시켜 놓을 줄 아무도 예상 못했고, 그만큼 팬들의 칭송도 자자하다.
특히 팀 내 최고참인 김주성과 박지현은 경기 초반 쉬게 하며 후반에 출전시켜 경기력을 극대화 하는 작전이 먹히면서 정식 감독 데뷔 첫 해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위에도 서술했지만 김영만은 현역 시절 공격력도 뛰어났지만 수비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선수였던 바, 수비 중심으로 풀어가는 플레이에는 능한 것으로 보인다. 윤호영의 경우는 시즌 초반 혹사 논란이 있었지만 한정원, 김종범, 김창모, 박병우 등의 백업 멤버들 기량이 올라오면서 적절하게 출장시간이 조정되고 있다. 그리고 외국인 선수 데이비드 사이먼과 앤서니 리처드슨도 각자의 몸 상태나 상대 팀 스타일 등을 보면서 상황에 따라 번갈아 가며 출장시켜 재미를 보고 있다. 무엇보다 사이먼과 리처드슨 둘 다 이기적인 성격이 아니라서 출장시간이 다소 줄어도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점도 김영만 감독의 용병술을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14/15 시즌 막판 운영은 아쉬운 점이 있다. 시즌 내내 노장 체력 비축에 힘쓴 김영만이었지만, 막상 정규리그 1위가 가시권에 있으니 욕심이 든 것. 6라운드 후반부 경기에 주전을 양껏 갈아넣은 동부는 결국 정규리그 1위도 못 했고 플레이오프에서 전자랜드의 돌풍에 고전한 뒤 챔피언결정전에서 모비스에게 체력적으로 완전히 밀려 스윕당하고 만다. 모비스 유재학 감독이 동부 선수들이 데드볼 상황에서 똑바로 서질 못하고 손을 무릎에 댄 채 헐떡이는 장면에서 승리를 장담했다고 할 정도. 체력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전술적으로도 완패하며 아직 완성된 감독은 아님을 보여주었다.
2015-16 시즌에는 초반 단신 용병인 라샤드 제임스가 한국 농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시아선수권에 김주성이 차출되는 상황속에서 패승패승을 반복하며 버티는 모습을 보였다. 2라운드부터는 비시즌 동안 가드진들의 성장과 포워드진들의 3점슛 성공률이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언더사이즈 빅맨인 웬델 맥키네스, 그리고 김주성의 합류가 더해져 전력이 단숨에 급상승했다. 하지만 5라운드부터 윤호영의 시즌아웃, 로드 벤슨의 족저근막염 부상으로 인한 부진, 김주성의 부상결장, 올스타전 이후 허웅의 버로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4강 직행에는 실패했다. 특히 김주성의 대체전력을 육성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이 비판을 받고 있다.[18] 급기야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김주성이 부상을 안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였으나 외국인 선수들의 게임 멘탈 관리 실패와 외곽 슛터들의 집단 버로우로 인해 0:3으로 스윕을 당하고 말았다. 김주성, 박지현을 제외하면 선수들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큰 경기에서의 경험과 강심장을 갖추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김주성의 대체전력 육성'''을 해야하는 것이 비시즌의 최대 과제로 떠올랐다.
2016-17 시즌을 앞둔 신인드래프트에서 7순위에 걸리는 바람에 동부산성의 내구연한(...)이 도래하여 큰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올해 드래프트에선 가드들이 빈약한 팀이 많아 장신선수들을 뽑을 수 있는 확률이 없진 않다. 꿩 대신 닭으로 이득을 창출할 수 있을지가 주목되었으나... 최성모, 맹상훈이라는 가드 두 명만 보강했다. 분명 박지현의 노쇠화, 허웅과 두경민의 군입대를 생각한다면 가드 쪽도 보충할 필요가 있긴 했지만, 과연 김주성과 윤호영의 백업보다 시급한 부분이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더군다나 앞으로 2~3년간 쓸만한 빅맨 신인이 없다고 평가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김주성과 윤호영만 믿고 갈 수 있을지..
특히 KGC를 비롯해서 선수 역량에만 의존하거나 몰빵농구라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는 시점에서 김영만도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초반에 선두싸움을 하던 팀이 벤슨, 맥키네스, 김주성, 윤호영, 박지현 등 주축/노장 선수들의 체력관리에서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DTD를 줄기차게 시작해 5위까지 미끄러졌으며, 7위 창원 LG와는 고작 3경기 차이가 나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물론 리그에서 '''공산주의 농구를 유일하게 구현할 수 있는''' 고양 오리온을 빼고는 이런 경향을 다 드러내고는 있지만 김태홍, 이지운을 FA로 영입해 놓고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쓰지를 않으니 동부 팬들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 결국 기어이 윤호영이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면서 이런 몰빵농구가 현대 농구에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그래도 6강 PO에 간신히 진출했지만 울산 모비스에게 3:0 셧아웃당했고 플레이오프 최다 연패 기록인 10연패를 갈아치웠다. 동시에 특정 팀 최다 연패 타이기록(LG의 삼성전 7연패 )을 갖게 되었고, 박지현은 은퇴를 선언했다.
결국 시즌을 마친 후 김영만 감독은 2016-2017 시즌을 앞두고 성인완 단장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고려대 출신인 신해용 단장의 부임과 함께 3년 연속 6강과 부임 초기 KBL 파이널 진출이라는 초보 감독으로서도 준수한 성적을 내었음에도 불구하며 구단의 쇄신과 함께 재계약에 실패하며 기아에 이어 정들었던 동부를 떠나게 되었다. [19]
역대 KBL 감독들 중 강을준과 함께 '''재임 기간 동안 모두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 감독이다.'''
5.3. 다시 코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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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고향팀인 창원 LG 세이커스의 수석코치로 내정되었다. 기사 LG 구단에서는 현주엽 신임 감독의 요청으로 영입했다고 발표했지만, 감독 출신이 코치로 가는 케이스는 한국 문화의 특성상 희귀한 케이스여서 농구팬들은 현주엽이 바지사장이 아니냐는 억측까지 제기했다. 하지만 NBA에선 드물지 않은 케이스인 만큼 코칭스태프들도 선진적인 문화로 바뀌어가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대체로 지도자 경험이 전혀 없는 현주엽을 보완하기 위한 선임이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실제로 구본준 LG 전자 부회장이 직접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 보세요."''' 라고 현주엽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는 멘트를 던져준 것도 있었다.
과거 WKBL KB 시절과 역시 동부의 지도자였는지 대선배였던 강동희 감독의 영향으로 그 선을 잘 지키면서 색을 유지하는 건 잘했다. 비록 강동희는 여린 마음에 의해 감독직에서 물러났지만 불명예의 사임 이후에서 변호까지 했으며 그 아픔이 있었는지 유지하면서 선수단을 잘 꾸려왔다.
이충희를 원치않게 선임했는데도 성인완 동부 단장이 수석코치직을 유지한 것도 그런 부분이 있었으며 그렇게 못하던 이충희도 선을 지키면서 자신이 감독대행과 내부승진으로 동부 프로미의 감독이 되어서 선수단에 쌓였던 아픈말을 마치 사마귀처럼 쓴소리를 통해 동부 선수단의 분발을 유도를 했다.
무색무취의 현주엽호에서 마치 이충희 시절처럼 전술과 전략만은 잘 제공했다. 하지만, 동부 감독 시절에 보여주었듯이 주전의존도를 개선하기에는 보직상 자신도 수석코치를 오래했는지 단점이 그대로였는데 어떻게 되었든 신분이 있으니 선을 스스로 지켰다.
그 속에서도 2018-2019 시즌에는 자신의 대학 후배로 대선배인 허재와 김승기가 지도했던 강병현 선수의 트레이드 영입 뒤 부활을 이끌었으며 이와 함께 잠시 지쳐있었던 영원한 전창진 감독의 분신인 조성민 선수의 회복을 잘 유도하면서 2014-2015 시즌 정규리그 3위와 플레이오프 4강의 숨은 공신이라는 평도 있었다.
동부 감독 시절에 보았듯이 수비 전술은 좋았지만 공격 전술이 단순했으나 적어도 자신도 스윙맨 출신인지 이 출신 선수들의 부활을 하는 건 적어도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감독이 역대급 무능이었는지 한계가 드러났다.
2017-2018 시즌 구단 창단 역대 최저성적 동률인 17승 37패를 선수에 이어 코치로 또 굴욕을 당했고 김종규의 FA 이적으로 인해 또 아픔을 당했다. 공교롭게도 김종규는 자신의 친정팀인 원주 동부 프로미의 후신인 원주 DB 프로미로 떠났다.
결국 성적부진이라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2019-20 시즌 코로나19 때문에 시즌이 조기 종료되었고, 성적부진으로 인한 책임론과 함께 내부승진을 잘 하지 않는 LG답게 이번에도 인연 또한 현역 시절 라이벌이자 한 때 청주 KB 스타즈(전신인 천안 국민은행 세이버스) 시절 자신을 불렀던 조성원으로 인해 쓸쓸히 떠나게 되었다.
반대로, 현주엽호의 보조격이었던 강혁과 박재헌은 운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강혁 코치는 은퇴팀이었던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가드 코치로 12-13 시즌 이후 7년만에 친정으로 돌아갔다. 박재헌 코치는 예상대로 조성원 감독을 직접보좌할 수석코치로 승진하면서 팀에 유임되었다.
6. 야인 생활
이후 근황의 금방 나왔다.
허재에 이어 대선배이지만 친한 형과 같았던 강동희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자신은 창원 마산이 고향이지만 프로의 데뷔는 부산 연고였던 기아 엔터프라이즈 출신이라는 색이 짙다.
2015-2016 시즌 동부 프로미 감독 재임 시절에도 자신은 6강 플레이오프에서 대선배인 추일승 감독의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와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 전패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농구장에서 현장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대학 동문으로 1년 선배인 김승기 감독의 안양 KGC 인삼공사의 4강 플레이오프 게임을 직관하기도 했다.
보통 상대팀의 전력분석을 위해 가지 않는 편인데 플레이오프 탈락 이후 직관을 하기 어려운데 농구를 보고 있다.
김영만 감독은 지독한 ‘농구광’이다. 농구 감독이 농구광인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는 좀 유별나다. 김 감독은 KBL 경기뿐만 아니라, NBA, WKBL 경기도 가리지 않고 본다. 하루 종일 농구와 씨름하고 들어와서도 또 농구경기를 볼만큼 그의 열정은 대단하다.
특히 KBL 감독이 WKBL 경기를 찾아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아무래도 그가 WKBL에서 코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보고 도움이 되는 부분을 찾기 때문인 듯하다. 천안 국민은행 세이버스에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2년간 코치를 맡았던 경험이 있다. 농구 외에는 특별한 취미도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그 무대가 여자프로농구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한국농구의 무대인 남자프로농구와 여자프로농구 그리고 대학농구를 포함해서 대다수 한국농구의 영상을 시청하면서 현장을 찾는다. 심지어는 NBA도 보신다. 이 정도면 농구학자다.
참고로, 부산에는 그 동안 여자프로농구 팀이 없었다.
실제로 김영만 감독은 천안 국민은행 세이버스의 수석코치 겸 공식 발표는 아니지만 감독대행이었다.[20]
참고로, LG 세이커스 출신 역대 코칭스태프를 보면 WKBL 출신으로 볼 때 고려대 농구인들을 살리는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출신보다 청주 KB 스타즈 출신들이 꽤 있는 편이다.
2019-2020 시즌을 앞두고 WKBL 여자프로농구는 사상 처음으로 경남권 도시인 부산을 연고지로 삼은 부산 BNK 썸이 인수 창단되면서 부산 연고를 기본으로 제2연고인 창원 마산에도 경기를 하는 김영만의 고향에 새로운 농구를 보게 된다.
부산 BNK 썸 코칭스태프와 여자 선수단을 대상으로 농구 원 포인트 레슨을 진행하면서 여전히 농구인으로서 다양한 농구를 보고 계신다.
즉, 다양한 농구경험이 풍부한 준비된 지도자라는 농구계의 긍정적인 평이 있다.
2020년 09월에는 자신의 대선배인 강동희의 사면과 용서를 위해 같이 활약했던 대선배였던 허재 그리고 동부 프로미 수석코치-감독 시절에 함께했던 박지현과 함께 용서를 구하는 자리에서 방송출연을 하기도 했다.
7. 시즌별 성적
8. 관련 문서
[1] 동북초등학교 3학년 때 농구부에 들어왔지만 불과 1년만에 해체되는 바람에 상명초로 전학을 갔다. #[2] 2008-2009 시즌 감독대행 포함[3] 2013년과 2014년 감독대행 포함[4] 중앙대 3학년 시절 처음 선발되었다. 당시 대표팀 정광석 감독(현대전자)이 문경은만 줄창 쓰고 김영만에게는 출전기회를 거의 주지 않아, 빡친 김영만이 나중에 현대행을 거부하고 계약금을 조금 덜 주는 (3억원) 기아자동차로 틀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5] 1990년대말 사직체육관에 걸려있던 응원 문구. 이외에도 부산기아의 주전선수 5인 모두를 응원하는 현수막이 하나씩 걸려있었다.[6] 뭐 기아자동차 입단할 때 "전 형들이랑 같이 농구하고 싶어서 왔어요."라는 말을 한 걸로 봐서는 기아자동차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듯 하지만.[7] 김유택이 나이가 들면서 식스맨 롤로 밀리는 시기와 자연스럽게 겹치기도 했다.[8] 하지만 몇 년 후에는 김영만을 잡기 시작한다.[9] 무득점으로 묶인 경기가 유독 많으며 김영만 밥으로 불리우기도...[10] 아예 공을 못잡았을 정도...[11] 보통 한자리수 득점으로 묶이면서 두자리수 득점을 허용하였으며, 양경민에게 무득점으로 묶인 경기도 있었을 정도... 하지만 그 양경민은 추승균에게 약했다. 추승균>김영만>양경민>추승균같은 뫼비우스의 띠...[12] 크고 강한 육체로 밀어붙이는 전법이 1cm가 더 큰 양경민에게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양경민은 본인보다 약간 빠르고 체력이 엄청난 추승균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 원리는 김승현>신기성>이상민>김승현의 뫼비우스 띠에도 적용된다.[13] 유재학 입장에서는 중앙대 출신들 등쌀에 밀려 조기 은퇴한 부분도 있는데 결국 돌아와 자기의 고토를 차지한 그림이 됐다. 이런 환경 속에 허재는 친정으로 오지 못하고 용산고 라인이 잡고 있는 KCC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14] 전주 KCC get: 김영만, 정훈, 배길태 ↔ 원주 동부 get: 표명일, 변청운, 백주익[15] 인터뷰에 따르면 은행에 다니는 누나 덕분에 일찍 재테크에 눈을 떴다고.[16] 멘토였던 전창진 감독은 수석코치 출신을 소중하게 여겼고 구단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강동희에 이어 동부-DB의 이름으로 역대 두번째 내부 승진이었다.[17] 현재 DB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김주성 또한 선수-코치는 같이 했지만 감독은 시간이 필요해보인다.[18] 김주성은 최고의 피지컬과 함께 탁월한 BQ, 그리고 봄농구와 국대에서의 산전수전을 다 겪고 이를 경험으로 승화시켜 국내 최고 센터의 반열에 든 선수다. 이런 선수의 대체전력을 육성하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특히 BQ는 단기간에 육성을 한다고 느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농구에 대한 센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론. 예로 뛰어난 BQ를 자랑하는 애런 헤인즈를 왜 8시즌째 막지를 못하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19] 후임 감독은 원주에 비수를 꽃았던 이상범 감독이었다.[20] 이 사실은 LG 시절에 한솥밥을 먹었던 후배지만 고려대의 색깔이 짙은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멤버이자 창단 주장이었던 박재헌 코치는 한 때 라이벌이었던 조성원 감독의 부임과 함께 팀에 잔류하면서 코치가 아닌 수석코치로 승진했다. 박재헌 코치 또한 KB 스타즈 시절 KT 소닉붐 감독으로 떠나게 된 대학선배인 서동철 감독을 직접 보좌했던 여자농구 수석코치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