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기

 

조동기의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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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농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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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동기(趙東紀)[1]
생년월일
1971년 5월 21일 (52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학교
강원사대부고 - 중앙대
포지션
센터
신체조건
197cm, 96kg[2]
프로입단
1994년 기아자동차
소속팀
기아자동차 (1994~1995)
상무 (군복무) (1995~1997)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1997~2001)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2001~2002)
등번호
13
국가대표 경력
1995 서울 ABC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지도자 경력
부천 신세계 쿨캣 코치 (2006~2012)
부천 하나외환 감독 (2012~2014)
중국 NBL[3] 산시 시다 수석코치 (2014~????)
춘천시장애인체육회 휠체어농구단 (2019~)
수상내역
FIBA 아시아선수권 준우승 1회 (1995)
1. 개요
2. 선수 생활
2.1. 고교-대학시절
2.2. 실업 및 프로 시절
2.3. 국가대표
3. 은퇴 후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 및 지도자. 포지션은 센터.

2. 선수 생활



2.1. 고교-대학시절


강원사대부고 3학년 시절 1년 후배 정병호(G,180cm), 신입생 김희선(G,186cm) 등과 함께 만년 하위권이었던 강원사대부고를 1989년도 전국대회에서 2차례(동국대총장기, 쌍용기) 4강까지 올려놓으며 주목받았다. 김유택, 한기범 등을 제외하면 190만 넘어도 센터로 뛸수있던 시절, 마른 체구이지만 장신(197cm)에 기동력까지 좋던 조동기는 금세 손꼽히는 센터 유망주가 되었고, 이른바 "센터 사관학교"로 불리던 정봉섭 감독의 중앙대로 진학하게 된다.
1990년 조동기가 입학할 당시, 중앙대는 센터 사관학교답게 4학년 김영래(192cm), 3학년 표필상(200cm), 양형석[4](195cm), 2학년 정경호(202cm) 등 쟁쟁한 장신센터들이 이미 포진해있었고, 조동기는 2학년때까지 후보선수에 머물렀다.[5] 3학년때부터 4학년 정경호, 2학년 안병익과 함께 번갈아가며 더블포스트를 이루었으며, 1992년 가을, 정봉섭 감독이 물러나고 28세의 강정수 감독이 부임하면서 중앙대는 팀컬러가 장신군단에서 속공과 강압수비의 팀으로 바뀌게 되었고, 기동력이 가장 뛰어났던 조동기는 정경호를 밀어내고 일약 주전센터로 등극하며 활약, 동기 백코트인 김승기-홍사붕 및 후배 김영만- 등과 함께 1992-93 농구대잔치에서 마침내 중앙대의 6강 진출을 이끌어낸다. 졸업반이던 1993년엔 서장훈이 입학한 연세대, 양희승, 박재헌이 가세한 고려대의 골밑과 치열하게 대결하면서 중앙대를 1993 대학농구연맹전 2관왕(2차연맹전 공동우승, 전국체전 우승)에 올려놓았고, 1993-94 농구대잔치에서는 리그 7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라 8강전에서 전대회 우승팀 기아자동차를 2승 1패로 누르고 4강까지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하기도 한다.[6] 당시 꽃미남 군단 연세대나 아직은 오빠였던 오성식, 정재근의 불사조 군단 상무가 여성팬이 많았다면, 가드부터 센터까지 전방위로 압박하고 뛰어다니는 중앙대 농구는 남성팬들의 유입을 이끌었다.

2.2. 실업 및 프로 시절


국가대표슈터 문경은이나 대학동기 김승기에 비해 다소 조용한 스카웃을 통해 중앙대 선배들이 많았던 기아자동차에 입단하였다. 한기범이 무릎부상으로 인해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데다 김유택도 이미 30대의 노장이 된 상황에서[7], 조동기는 기존의 조현일(195cm)과 함께 기아자동차 세대교체의 기수가 될 것으로 보였으나... 이게 웬일!!
1994-95 농구대잔치 중반에 들면서 갑자기 회춘하신 쌍돛대는 플레이오프부터는 연신 맹활약을 펼치기 시작했고, 플옵 4강전에서는 고려대의 국가대표 콤비 현주엽-전희철을 상대로 오히려 우세한 경기력을 펼치며 팀에 승리를 안겼다. 덕분에 조동기는 벤치에 자주 있어야만 했고, 농구대잔치 종료후 상무 입대를 선택한다.
상무에서 90학번 김승기, 조성원, 문경은, 김재훈에 91학번 이상민까지 "역대 최강의 군인팀"이라 불리는 호화멤버들을 입대동기로 만났고, 상대적으로 단신팀[8]인 상무에서 김재훈과 트윈 타워를 구축하며 중앙대시절처럼 달리는 농구의 중심이 되었다. 조동기를 비롯한 호화 멤버들의 활약속에 상무는 1995-96, 1996-97 농구대잔치에서 연속으로 결승전까지 진출하지만 각각 - -[9]이 건재했던 기아자동차와 서장훈의 연세대에 무릎을 꿇으며 2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2년간 상무에서 주전으로 활약한 후 프로화된 기아로 복귀하며 골밑에 큰 힘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97-98시즌 개막을 앞두고 심각한 무릎부상을 입으면서[10] 플레이오프를 앞두고서야 프로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97-98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센터 저스틴 피닉스가 부상 으로 벤치를 달구자 김유택과 함께 사실상의 주전 센터로 나서며 시리즈를 7차전까지 끌고 가는 등 활약했고[11], 1998-99 시즌에도 센터 제이슨 윌리포드의 부상 공백을 열심히 메우면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가 3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오르는 데 기여한다. 이후 박수교 감독이 부임하면서 팀이 무너져가는 와중에도[12] 백업 빅맨으로서 꿋꿋이 팀을 지켰으나 출장시간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2001-02 시즌에는 단 5게임밖에 못 뛰었고, 2002-03 시즌을 앞두고 최희암 감독이 부임하면서 옛 기아 출신 선수들( , 김영만)을 대거 정리할 때 이미 부상으로 신음하던 조동기는 겨우 30세에 은퇴를 선택한다.

2.3. 국가대표


상무에 갓 입대한 1995년 여름, 서울에서 열린 1995 아시아선수권대회 대표팀의 센터자원으로 처음 선발되나 우즈베키스탄, 아랍에미리트 등 약팀들과의 게임에만 나설뿐 정작 중요한 게임에서는 현주엽-전희철-정재근 등 주전 빅맨에 밀려 많은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기억남는 장면이라면 대회 개막전이었던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문경은의 3점이 림을 한참 돌다가 막 들어가려는 참에 뛰어올라 팁인덩크(;;)를 꽂아넣으면서 3점을 2점으로 만들었던(;;;) 플레이 정도였다.
상무 시절의 맹활약 덕분에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에도 합류하나 대표팀의 7연패 행진은 막지 못하고, "마르고 힘없는 센터는 국제무대에서 소용이 없다"는 교훈만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3. 은퇴 후


미국으로 지도자 유학을 다녀온 후 2006년 WKBL 부천 신세계 쿨캣 코치로 부임했다. 2012년 신세계가 여자농구팀 해체를 발표했을 때 앞장서서 팀원들을 추스르면서 훈련을 지속하던 중, 팀이 하나금융지주로 인수되면서 부천 KEB하나은행의 초대 감독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2013-14 시즌 팀이 압도적인 꼴찌로 시즌을 마감함에 따라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팀에서 물러났고, 이후 중앙대 선배 강정수 감독과 함께 중국 프로농구 2부리그인 NBL의 산시 시더팀 코치로 부임하여 활동하였으며, 2019년 12월부터 춘천시장애인체육회 휠체어농구단에서 감독로 활동중이다.

4. 여담


2001~2002 시즌이 한창이던 2002년 2월 25일, 압구정동에서 음주상태로 "엔터프라이즈"를 몰다가 단속에 적발, 면허취소된 적이 있다. 부천 신세계 쿨캣 코치 시절이던 2007년, 36세의 나이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11살 어린 신부와 결혼에 골인하며 "도둑"소리를 좀 들었다.

5. 관련 문서


[1] 풍양 조씨 평장사공파 24세손 기(紀) 항렬[2] KBL 데뷔 시즌 몸무게로 보인다. 대학 및 상무 시절엔 너무도 마른, 거의 스몰 포워드 수준의 몸매였다.[3] 2부리그[4] 현 중앙대 농구부 감독[5] 정봉섭 감독은 김유택-한기범 시절부터 장신 더블포스트 신봉자였다. 이들의 졸업후 스카웃한 표필상과 정경호가 고교시절까지 특출난 기량을 보이지 못했음에도, 정봉섭 감독은 이미 한번 성공했던 김유택-한기범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들을 금방 성장시킬수 있다고 보고 끊임없이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이 시기 중앙대의 성적은 매번 아쉬웠는데, 대학연맹전에서는 2관왕, 3관왕을 쉽게 하면서도 농구대잔치에 나가면 실업 3강(기아, 현대, 삼성)은 물론 금융팀들에게조차 번번히 깨지고 말았다. 라이벌 연세대가 1991-92, 1992-93 농구대잔치에서 연이어 4강에 오른것에 비하면 투자(?) 대비 소득이 너무 적다는 평가였고, 정봉섭 감독은 성적에 대한 압박으로 인해 경기중 심판에 대한 무리한 항의와 폭언을 자주 하곤 했다.[6]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중앙대의 4강 진출은 허재가 졸업한 1988년 이후 중앙대의 최고 성적이었다.[7]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31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서도 은퇴했다.[8] 당시 병역규정상 맨발 196 이상은 현역 입영대상 제외였고, 이로 인해 신발신고 197이었던 조동기가 팀 내 최장신이었다. 이 바람에 당시 상무에선 문경은도 가끔씩 4번으로 뛰어야 했다. [9] 이때는 김영만까지 가세하여 "허동만"으로 불리기도 했다.[10] 프로 데뷔를 앞두고 외인들과의 몸싸움을 대비해 체중을 갑자기 불린 것이 원인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체계적인 웨이트트레이닝 같은 게 없던 시절이라 그냥 체지방(...)만 늘린 것이라 해도 무방했고, 조동기 특유의 운동능력만 잃고 말았다. 비슷한 케이스로 같은 중앙대 출신 송영진이 있다.[11] 그 유명한 허재의 부상 투혼 경기[12] 1999-2002 3시즌동안 6위 → 9위 → 1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