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제동맹
羅濟同盟
'''Silla-Baekje Alliance'''
삼국시대 서기 433년부터 서기 554년까지 121년 동안 지속된 '''신라와 백제의 대고구려 군사동맹'''이다. 다만 가장 길게 잡았을 때 433~554년이지만 그 시작과 중간, 끝에 대해선 이견이 있으며, 중간에 동맹이 약화되는 듯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학자에 따라선 제1차 나제동맹과 제2차 나제동맹으로 나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신라의 '라'와 백제의 '제'를 따와서 붙였으니 '라제동맹'이라고 해야 맞지만 두음법칙에 따라 '라'자가 '나'자가 된다. 일각에서는 백제가 동맹을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제라동맹'''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 동맹의 성격은 장수왕 시절 전성기를 누리며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고구려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세 나라가 있어 삼국시대라고 하지만 5~6세기 때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고구려가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 중 한 나라가 먼저 망하면 동맹군이 없는 다른 한 나라도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는 옆나라 중국의 삼국시대 때의 촉오동맹 구도와도 꼭 닮아있다.
6세기에 이르러 백제와 신라에서 무령왕, 법흥왕과 같은 중흥 명군이 나와 두 나라의 국력이 회복, 신장되면서 고구려는 둘 중 하나조차도 압도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제의 돈독한 관계도 자연히 느슨해져 지원군 파견도 끊기고, 국경선에 방어시설을 늘리거나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가야를 두고 신라, 백제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래도 신라와 백제가 직접 맞붙는 상황은 자제하며 국력을 아끼고 고구려가 둘 중 한 나라로 침공해오면 일단은 함께 맞서 싸우는 형국이 지속된다. 나제동맹은 6세기, 동맹군이 고구려를 무찌르고 북벌에 성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427년 평양 천도'''로 남진정책을 추진하는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대항하기 위해 433년 신라의 눌지 마립간과 백제의 비유왕이 체결한 동맹이 시초이다.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맞붙는 554년까지 근 120년이나 지속됐다. 다만 충주 고구려비의 내용에 따르면 449년까진 고구려와 신라가 형과 아우의 나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나제동맹은 더 나중에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다만 충주 고구려비 자체가 건립년대 논란이 계속 진행중이고(해당 문서 참조) 433년에 맺은 건 고구려 몰래 밀약을 맺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455년 10월 백제에 정변이 일어나 비유왕이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 개로왕도 이어지는 정쟁으로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자, 이틈을 노려 456년 12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해 왔다. 그러나 신라 눌지왕이 백제에 처음으로 군사를 파병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4만으로 백제 정벌에 나서 백제 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개로왕을 처형시켰을 때 신라 자비왕이 지원군 1만을 파병해 도와주었다. 신라 지원군 덕분에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웅진에 천도하여 나라를 이어갈 수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개로왕이 참수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수도 위례성이 함락으로 '''웅진 천도 후''' 493년 동성왕과 소지왕은 혼인동맹을 맺어 종전의 동맹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481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신라를 공격하자 백제가 원군을 파견해 고구려군을 막아내었다.
494년 신라 소지왕은 고구려로부터 빼앗긴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공하여 대동강을 넘어 살수(청천강)까지 진격했으나,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오히려 쫓기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때 백제 동성왕의 지원병력 3천이 도착하여 위기를 모변한다. 그러자 고구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를 공격했고, 이에 소지왕은 지원군을 보내어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백제와 신라는 국력이 신장되었다. 백제는 무령왕, 성왕 시대를 맞아 혼란을 극복하고 국력을 회복했다. 신라는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시대를 거치면서 강도 높은 내정개혁을 실시하여 중앙 집권화를 이루었고, 병부와 병부령을 설치하여 군통제권을 일원화하고 군사력을 더욱 증강시켰다.
6세기 들어 신라와 백제는 가야를 놓고 점차 마찰을 빚는 경우가 늘어났다. 또 백제 동성왕 말년 501년에는 만에 하나 신라가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국경선 근처인 탄현에 목책을 세워 방어선을 보강하기도 했다. 521년에는 백제가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신라 사신도 같이 데려가기도 했는데, 신라는 서해 바다에 항구가 없어서 바로 중국에 갈 수 없으니까 백제 땅을 통과하고 백제 배를 빌려서 같이 간 것이고 동맹국이니까 이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이 때 신라 사신이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것을 이용해 백제는 양나라에다 신라가 백제의 속국이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1]
그러나 고구려에 대해서 공동 대응한다는 나제동맹은 여전히 유효했다. 548년 백제의 독산성이 고구려의 급습으로 위기에 처하자 신라가 신속하게 원군을 보내어 고구려군을 대파(독성산성 전투)하는 등 대고구려 동맹 성격의 나제동맹은 아직도 굳건했다. 결국 나제동맹이란 것은 고구려라는 극강의 위험에 대해 공멸을 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인 성격의 것이었다.
551년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은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북진을 시작하여 한강 유역을 회복한다. 처음에 한강 하류는 백제가, 한강 상류는 신라가 차지했다. 그러나 552년 한강 유역 방어가 힘에 부친 백제가 스스로 한강 장악을 포기하면서 빈 공간을 신라가 장악했다. 553년 신라의 진흥왕이 북한강과 한강 유역 등까지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및 성왕 문서 참고.
그리고 황초령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신라의 강역 확정을 축하했다고 한다. 요동 방면에서 돌궐의 지속적인 침공을 받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나제동맹군의 동시적인 침입을 받은 고구려가 평양성까지 털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나 말고 저기 꿀땅 먹으라고 신라의 중부지방 장악을 조장, 묵인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자기들끼리 다투면 가장 이득인 건 고구려일텐데, 정작 고구려는 원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관산성 전투에 이르는 한강 유역 쟁탈전의 일련의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
이런 와중에도 백제의 성왕은 혼인동맹으로 나제동맹을 지키려고 했으며, 신라군에 한강 유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신라가 이를 묵살하자,[3] 얼마 뒤 성왕이 대가야와 왜를 끌여들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승성 3년(554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남녀 3만 9천 명과 말 8천여 필을 빼앗아가자(삼국유사), 분노한 신라는 백제와의 전면전에 나섰고 그나마 형식적으로 남았던 나제동맹은 완전히 파토났다.
끝내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와 일대 격전을 벌였고, 그것이 관산성 전투와 성왕의 전사로 이어졌다. 백제의 성왕이 가다가 잡힌 경로가 전장이 아닌 경계라인이었고, 데리고 간 부하 수가 수십명 남짓이란 점, 매복해있던 신라군에 급습당했단 점에서 볼 때 당시 성왕은 신라와 전투를 하러 가던 길이 아니라 함께 참전했던 아들을 독려해 주려 가던 길이란 설이 제기되었다.
관산성 전투 패전 이후 백제편에 섰던 반파국은 562년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에게 멸망했으며, 왜는 가야 멸망 이후로는 백제 멸망 이전까지 다시 신라와 부딪히지 않았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로도 신라를 몇 차례 공격하다가 7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여제(麗濟)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동 압박했고, 660년 삼국통일전쟁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는 그 날까지 신라와 불구대천의 원수로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중국과 직접 왕래할 수 있는 서해안 항구를 얻어 향후 백제, 고구려 정벌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동시에 진평왕대부터 무열왕 시기까지 이어진 고구려, 백제와의 양면 전쟁으로 존망의 위기에서 사투를 벌였다.
이후 고구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에서 나제동맹과 같은 강력한 동맹관계는 등장하지 않으며,[4] 삼국은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기 전까지 서로가 서로를 견제, 적대하는 혼란스런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Silla-Baekje Alliance'''
1. 개요
삼국시대 서기 433년부터 서기 554년까지 121년 동안 지속된 '''신라와 백제의 대고구려 군사동맹'''이다. 다만 가장 길게 잡았을 때 433~554년이지만 그 시작과 중간, 끝에 대해선 이견이 있으며, 중간에 동맹이 약화되는 듯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학자에 따라선 제1차 나제동맹과 제2차 나제동맹으로 나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신라의 '라'와 백제의 '제'를 따와서 붙였으니 '라제동맹'이라고 해야 맞지만 두음법칙에 따라 '라'자가 '나'자가 된다. 일각에서는 백제가 동맹을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제라동맹'''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 동맹의 성격은 장수왕 시절 전성기를 누리며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고구려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세 나라가 있어 삼국시대라고 하지만 5~6세기 때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고구려가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 중 한 나라가 먼저 망하면 동맹군이 없는 다른 한 나라도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는 옆나라 중국의 삼국시대 때의 촉오동맹 구도와도 꼭 닮아있다.
6세기에 이르러 백제와 신라에서 무령왕, 법흥왕과 같은 중흥 명군이 나와 두 나라의 국력이 회복, 신장되면서 고구려는 둘 중 하나조차도 압도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제의 돈독한 관계도 자연히 느슨해져 지원군 파견도 끊기고, 국경선에 방어시설을 늘리거나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가야를 두고 신라, 백제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래도 신라와 백제가 직접 맞붙는 상황은 자제하며 국력을 아끼고 고구려가 둘 중 한 나라로 침공해오면 일단은 함께 맞서 싸우는 형국이 지속된다. 나제동맹은 6세기, 동맹군이 고구려를 무찌르고 북벌에 성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2. 동맹 결의
'''427년 평양 천도'''로 남진정책을 추진하는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대항하기 위해 433년 신라의 눌지 마립간과 백제의 비유왕이 체결한 동맹이 시초이다.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맞붙는 554년까지 근 120년이나 지속됐다. 다만 충주 고구려비의 내용에 따르면 449년까진 고구려와 신라가 형과 아우의 나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나제동맹은 더 나중에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다만 충주 고구려비 자체가 건립년대 논란이 계속 진행중이고(해당 문서 참조) 433년에 맺은 건 고구려 몰래 밀약을 맺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3. 5세기
455년 10월 백제에 정변이 일어나 비유왕이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 개로왕도 이어지는 정쟁으로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자, 이틈을 노려 456년 12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해 왔다. 그러나 신라 눌지왕이 백제에 처음으로 군사를 파병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4만으로 백제 정벌에 나서 백제 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개로왕을 처형시켰을 때 신라 자비왕이 지원군 1만을 파병해 도와주었다. 신라 지원군 덕분에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웅진에 천도하여 나라를 이어갈 수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개로왕이 참수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수도 위례성이 함락으로 '''웅진 천도 후''' 493년 동성왕과 소지왕은 혼인동맹을 맺어 종전의 동맹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481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신라를 공격하자 백제가 원군을 파견해 고구려군을 막아내었다.
494년 신라 소지왕은 고구려로부터 빼앗긴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공하여 대동강을 넘어 살수(청천강)까지 진격했으나,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오히려 쫓기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때 백제 동성왕의 지원병력 3천이 도착하여 위기를 모변한다. 그러자 고구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를 공격했고, 이에 소지왕은 지원군을 보내어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4. 6세기
6세기에 접어들면서 백제와 신라는 국력이 신장되었다. 백제는 무령왕, 성왕 시대를 맞아 혼란을 극복하고 국력을 회복했다. 신라는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시대를 거치면서 강도 높은 내정개혁을 실시하여 중앙 집권화를 이루었고, 병부와 병부령을 설치하여 군통제권을 일원화하고 군사력을 더욱 증강시켰다.
6세기 들어 신라와 백제는 가야를 놓고 점차 마찰을 빚는 경우가 늘어났다. 또 백제 동성왕 말년 501년에는 만에 하나 신라가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국경선 근처인 탄현에 목책을 세워 방어선을 보강하기도 했다. 521년에는 백제가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신라 사신도 같이 데려가기도 했는데, 신라는 서해 바다에 항구가 없어서 바로 중국에 갈 수 없으니까 백제 땅을 통과하고 백제 배를 빌려서 같이 간 것이고 동맹국이니까 이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이 때 신라 사신이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것을 이용해 백제는 양나라에다 신라가 백제의 속국이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1]
그러나 고구려에 대해서 공동 대응한다는 나제동맹은 여전히 유효했다. 548년 백제의 독산성이 고구려의 급습으로 위기에 처하자 신라가 신속하게 원군을 보내어 고구려군을 대파(독성산성 전투)하는 등 대고구려 동맹 성격의 나제동맹은 아직도 굳건했다. 결국 나제동맹이란 것은 고구려라는 극강의 위험에 대해 공멸을 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인 성격의 것이었다.
5. 551년 북진 (한강 유역 탈환)
551년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은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북진을 시작하여 한강 유역을 회복한다. 처음에 한강 하류는 백제가, 한강 상류는 신라가 차지했다. 그러나 552년 한강 유역 방어가 힘에 부친 백제가 스스로 한강 장악을 포기하면서 빈 공간을 신라가 장악했다. 553년 신라의 진흥왕이 북한강과 한강 유역 등까지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및 성왕 문서 참고.
그리고 황초령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신라의 강역 확정을 축하했다고 한다. 요동 방면에서 돌궐의 지속적인 침공을 받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나제동맹군의 동시적인 침입을 받은 고구려가 평양성까지 털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나 말고 저기 꿀땅 먹으라고 신라의 중부지방 장악을 조장, 묵인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자기들끼리 다투면 가장 이득인 건 고구려일텐데, 정작 고구려는 원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관산성 전투에 이르는 한강 유역 쟁탈전의 일련의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
이런 와중에도 백제의 성왕은 혼인동맹으로 나제동맹을 지키려고 했으며, 신라군에 한강 유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신라가 이를 묵살하자,[3] 얼마 뒤 성왕이 대가야와 왜를 끌여들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승성 3년(554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남녀 3만 9천 명과 말 8천여 필을 빼앗아가자(삼국유사), 분노한 신라는 백제와의 전면전에 나섰고 그나마 형식적으로 남았던 나제동맹은 완전히 파토났다.
끝내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와 일대 격전을 벌였고, 그것이 관산성 전투와 성왕의 전사로 이어졌다. 백제의 성왕이 가다가 잡힌 경로가 전장이 아닌 경계라인이었고, 데리고 간 부하 수가 수십명 남짓이란 점, 매복해있던 신라군에 급습당했단 점에서 볼 때 당시 성왕은 신라와 전투를 하러 가던 길이 아니라 함께 참전했던 아들을 독려해 주려 가던 길이란 설이 제기되었다.
6. 동맹 파탄 이후
관산성 전투 패전 이후 백제편에 섰던 반파국은 562년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에게 멸망했으며, 왜는 가야 멸망 이후로는 백제 멸망 이전까지 다시 신라와 부딪히지 않았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로도 신라를 몇 차례 공격하다가 7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여제(麗濟)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동 압박했고, 660년 삼국통일전쟁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는 그 날까지 신라와 불구대천의 원수로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중국과 직접 왕래할 수 있는 서해안 항구를 얻어 향후 백제, 고구려 정벌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동시에 진평왕대부터 무열왕 시기까지 이어진 고구려, 백제와의 양면 전쟁으로 존망의 위기에서 사투를 벌였다.
이후 고구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에서 나제동맹과 같은 강력한 동맹관계는 등장하지 않으며,[4] 삼국은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기 전까지 서로가 서로를 견제, 적대하는 혼란스런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7. 관련 문서
[1] 신라는 서해바다와 거리가 멀어 중국과 직접 교류하기 어렵다보니, 중국에 사신을 보낸 건 부견의 전진에 사신을 보낸 이후 140년만이었다.[2] 하지만 개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나제동맹의 한강 점령 시기는 비록 장수왕이 승하한지 반 세기 정도 밖에 안 지났으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안장왕의 승하 후 안원왕-양원왕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왕위 계승과 귀족들의 정치싸움으로 인해 수도 평양과 황해도의 한성 지역을 방어할 군사력은 됐을지 몰라도 한강 지역까지 영토를 유지할 역량은 안되었던 것. 무엇보다도 당시 고구려는 북방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돌궐의 침입을 막아야 했다.[3] 진흥왕의 방심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있음[4] 나당동맹에 대항한 여제동맹도 있었지만 이는 늦게는 640~650년대에 잠깐 유효했을 뿐, 고구려와 백제는 고국원왕과 개로왕을 서로 죽인 이후로 삼국시대 내내 거의 사이가 안 좋은 쪽에 더 가까웠다. 고구려-수 전쟁에서도 위덕왕이나 무왕은 말뿐이지만 수나라 편을 들었고 고구려가 이 소식을 입수해 백제에 보복할 정도였다. 후삼국시대때 후백제를 상대로 서로 손을 잡은 고려와 신라 같은 사례도 있었지만 이때는 이미 신라 자체가 무너져가던 상황이어서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