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 人生
1.1. 개요
말 그대로 인간의 삶. 인간이 생명으로서 생을 받고 희비의 과정을 거쳐 사로 마무리되는 것. 사자성어로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도 한다. 대비어는 축생(畜生, 동물의 삶).
과학적인 관점에서 물리적, 화학적인 분자들의 정밀하고 간단한 화학작용에서부터 출발하여, 세포, 기관, 기관계로 이루어진 거대한 유기체이며, 스스로 사고 및 자각, 자신의 삶을 논할 수 있는 수준의 고등한 인격체, 즉,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삶을 말한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매 순간마다 선택의 결과물을 쌓아올려 만든 지금의 "당신"라는 존재의 결과물을 말한다.
1.2. 창작물에서의 표현
창작물에 나오는 이종족(엘프, 드래곤, 네코미미 등)이면 이것을 '인생'이라고 불러도 될지 망설여질 수 있다. 그런 이종족에도 '등장인물'과 같은 표현은 가능하므로 큰 무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창작물에서는 흔히 이걸 다 걸고 뭔가를 하는 때가 많은데, "목숨을 바쳐..."와 같이 죽음을 말하면 비장미를, "평생 동안..."과 같이 삶을 말하면 애틋함을 낼 수 있다.
영화 빠삐용에서는 인생을 허비한 죄가 가장 크다고 한다.
1.3. 각종 오해와 통념들
- 저출산으로 인해 한 민족이 멸망하게 되는 것은 대한민국이 최초가 된다.
- 꼭 그렇다고 장담하기도 어려운 것이, 스파르타의 경우 저출산 문제가 이 도시국가의 멸망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으며, 미얀마 북부의 트릉(T'rung 혹은 Taron) 족은 유전병이 문제가 되자 부족 원로들이 결혼 금지령을 내려서 부족원이 5명으로 줄었다. 다행히 인류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중국 국경지역에 이들과 유사한 다른 부족들이 존재함이 밝혀졌고, 이들 학자들은 최후의 부족원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사례들을 미루어 보면 저출산으로 인한 공동체의 멸망이라는 것은 인류 역사에 아주 그렇게 전무후무한 초유의 사건은 아닌 셈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인구수 자체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그렇게 적은 편이 아니다. 인구 5,000만인 대한민국이 저출산으로 멸망한다면 그보다 인구가 훨씬 적은 아일랜드가 먼저 멸망해야 한다. 물론 아일랜드의 출산율은 1.9명으로 0.9명인 우리나라보다는 꽤 높지만 말이다. 저출산으로 인한 멸망은 현재와 같은 출산율이 계속 이어지거나 향후 더 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미 폭증한 인구가 워낙 많기 때문에,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나타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스파르타 역시도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한건 맞다. 심지어 전쟁까지 겹쳐 멸망에 가까울 정도로 약해졌다. 하지만 망하지는 않았다.
- 웃기는 소리인 게 대한민국은 방글라데시, 대만에 이어 인구밀도 3위의 국가[1] 이다. 되려 당분간 저출산을 해야 다른 어지간한 국가들과 인구밀도를 비슷하게 맞출 수 있다. 다만 저출산 추세가 완만한 것이 아니라 매우 급격하게 추락하는 형세라 장기적인 관점에선 필히 주의해야 할 부분은 맞다. 출산율과 인구에 관한 통계청의 관측이 1~2년 정도도 아니고, 5년 내지 10년 정도 가까이 틀려가고 있어서 예측이 힘든게 가장 큰 문제.
- 유산의 위험은 만삭의 임산부가 가장 크다.
- 반대로 임신 초기일수록 위험이 크다. 태아가 충분히 성장한다면 어지간한 비극적 사고가 아닌 이상 위험 자체는 줄어든다. 지하철에서 "임신 초기 임산부들을 배려해 달라"는 안내방송을 그렇게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다.
- 인간의 태아는 모체에서 세상으로 나올 모든 발달적 준비를 마치고 나서 출산되는 것이다.
-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준비 완료!"의 통념은 갓 태어난 동물들이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반면 갓 태어난 인간은 머리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무시하고 있다. 실제로 태아의 눈동자는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출산을 겪고, 이로 인해 신생아기에는 부모님의 얼굴조차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다.[2] 또 다른 예로, 인간의 신경계는 그것이 "완전히 발달" 했다거나 "준비가 끝났다" 고 말하기 위해서는 출산 시점은 둘째치고 적어도 20세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사춘기에 충동적인 경향이 강한 것도 충동을 다스리는 뇌의 전전두피질이 미발달한 상태이기 때문. 사실 인간의 출산은 9개월쯤 되면 다 준비가 되어서라기보다는, 자칫 그 이상으로 기다리다가는 머리가 너무 커져서(...) 출산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3] 더 늦기 전에 부랴부랴 짐 챙겨서(?) 나온다는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그 신생아기에 양적 및 질적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부모 양친 모두의 관심과 지원과 양육을 필요로 하는 종이라고 할 수 있다.
- 유치원생의 어린 남자아이들은 항상 색색깔의 프로펠러 모자를 쓰고 다닌다.
- "아직 세상 살아보지도 않은 어린애가 스트레스는 무슨 스트레스냐? 쪼끄만 게."
- 어린이들에게도 시상하부(hytothalamus)와 뇌하수체(pituitary)와 부신(adrenal gland)은 다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어린이들의 몸도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킬 능력을 갖춘 건 당연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스트레스라는 용어 자체가 학술적으로 정의할 경우 "외부 환경의 위협적 변화에 대한 신체적인 저항 반응" 정도로 설명되는데, 위 말대로라면 어린이들은 이런 반응 능력이 없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 물론 어른들이 더 빈번하게 "세상 살기 참 힘들다" 같은 의사표현을 하는 건 분명하다.[4] 그러나 어린이들도 자기 나름의 힘든 일을 만나면 어른들과 똑같이 느낀다. 이들은 단지 자신이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어른들처럼 정교하게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또는 한번 표현했다가 "흥, 쪼끄만 게 잘도 맹랑한 소리를 하네" 같은 어른들의 비아냥을 듣고 좌절당한 것일 수도 있다.
- 갓난 아이들이 사랑을 알아!? 아이들은 사랑따윈 몰라!!
- 오히려 유치원생들이 이성 간에 서로를 그리워하고 만나면 얼싸안고 뽀뽀하고(…) 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물론 이 연령대에서는 "○○(이)가 좋아요" 정도로만 표현하거나 어른들이 쟤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몸을 비비 꼬거나 하는 반응으로만 나타나겠지만, 넓게 치자면 어린이들도 이성에 대한 이끌림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생식 내지 재생산을 위한 성적 이끌림(sexual attraction)이 아닐 뿐. 성적 이끌림만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상당한 오산이다(…). 이건 무성애자들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도 된다. 사랑을 구성하는 3가지 조건은 우애, 열정, 그리고 헌신이다.
- "우리 아이가 벌써 거짓말을…?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고 벌써 이러지?"
- 사실, 부모가 막장부모가 아닌 전제하에서 대부분의 경우는 기뻐할 일이다. 거짓말을 또래들보다 일찍 깨우쳤다는 것은 그만큼 인지적으로 발달과 성장이 빠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아이들이 1~2년 후에 선의의 거짓말도 더욱 일찍 깨우치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부모의 적절한 훈육과 교정을 잘 받아들인다면 차후 사회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 단, 이 거짓말이 너무 상습적으로 반복되고, 매번 혼내는데도 일말의 반성도 죄책감도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요주의. 이러한 태도는 그 아이의 향후의 비행 및 일탈을 강력하게 예측한다. 특히나 동물을 잔혹하게 괴롭히거나 의도적으로 타인의 재산 및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말썽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에 아이를 데려가서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볼 것. 심각할 경우 품행장애의 증후일 가능성이 있다.
- 동심은 무지 상태이니, 가급적 어릴 때부터 과학적 사실들만을 알려주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동심은 무지 상태가 아니다. 애초에 인간은 자기 연령에 맞는 정상적 발달단계를 자연스럽게 거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취학 전 연령대 특유의 환상적 사고[5] 와 상상력들은 전세계의 발달심리학자들에게 가열차게 연구되어 왔으며, 향후 성인이 되어서의 건강한 세계관과 타인에 대한 신뢰, 강인함(hardiness)과 같은 내적인 자질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적응적 역할이 밝혀져 있다. 뒤집어 말하면, 애를 위한답시고 억지로 매섭고 냉혹한 시궁창급 현실을 비아냥 섞어서 냉소하는 것은 그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짓거리다. 도리어 동심이라는 단계를 정상적으로 거쳐 올라간 개인이 향후 더 균형잡히고 건강하며 심사숙고하는 이성을 갖추는 데 더 유리하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긴 하지만, 일부 고2병 환자들이 그리도 추앙(?)하는 세계적인 지식인들과 과학자들도, 알고 보면 유년시절에 푸른 자연 속에서 뛰어놀면서 자연 세계에 대한 다양한 상상과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향후 그들이 자연과학에 매혹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 어린이들의 동심은 언제나 아름답고 밝고 명랑하며 맑고 투명한 것이다.
- 그렇지 않다. 물론 어른들에 비해 어느 정도 더 그런 면이 있긴 해도, 이는 존재를 기초로 한 설명이기보다는 당위를 기초로 한 설명에 가깝다. 즉 선진 후기산업사회의 어린이들은 정상적인 사회화(socialization)를 위하여 "밝고 아름답고 명랑하며 맑고 투명할"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삐딱하게 도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옳다고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긍정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어린이들은 "순수해야 한다" 보다는 "순진무구하다"로 설명되는 심성을 갖고 있어서, 종종 섬뜩할 정도로 잔인한 말을 하는[6] 등의 사례 역시 정상적 발달과정이라고 설명될 수 있으며, 악당의 팔을 잘라 악어에게 던져주며 낄낄거리는가 하면 "죽음이란 정말 짜릿한 모험일 거야"(!!) 등의 어록을 남긴 바 있는 《피터 팬》 동화의 주인공 피터 팬은 역설적으로 동심의 세계를 아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옛날 어린이들은 순수하고 착한 동심을 갖고 있었는데, 요즘 어린이들은 말끝마다 욕을 하고 어른들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일종의 추억보정. 옛날에는 "이것이 어린이들에게 교육적인가, 유해한가"에 대한 인식 자체가 어른이건 어린이건 간에 상당히 희박했으며, 교육수준도 높지 않았고 일제 강점기, 6.25 전쟁, 군부 독재정권 등... 당시 제대로된 인권이 보장되기 이전이였고 국민들이 충분한 시민의식을 배양하고 건전한 가치관을 가질 기회가 없었던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여러번 거쳤다. 그 이전 기성세대들의 젊은시절이 어느 때였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당시의 사회가 어떠했는지 답은 나온다. 그 때문에 실제로 당시 아이들은 집에서부터 체벌이 없었던 집안을 찾기가 힘들었고, 현재 기준으론 아동학대로 걸릴 만한 가정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신체적 폭력이 없었다 치더라도 "오라질 놈, 가난을 대물림할 놈, 도야지 새끼 같은 놈, 똥물에 씻겨 나온 놈, 확 나가 죽어버려라" 같은 동심파괴급 저주와 개새끼, 씨발새끼 등의 심한 욕설들을 다름아닌 부모님들에게서 항상 듣고 살아야 했다.[7] 그게 여자아이라면 두 배로, 딸부잣집 막내딸이라면 세 배로.[8] 즉 매스미디어나 다른 무언가가 문제가 되기 전에, 이미 가정환경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것.
- 요즘 어린이나 옛날 어린이가 어차피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점을 생각하면, 일부의 사례만을 보고 그 세대 전체를 일반화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위키러 여러분과 동갑이면서도 행실 불량한 개인들은 여러분의 기억 속에서 숱하게 찾을 수 있듯이, 요즘 아이들도 그런 개인차는 마찬가지다.
- 서구 선진국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조사에 따르면, 실제로는 최근 10~15년 동안 서구권의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은 도리어 점차적으로 행실이 반듯해져 왔다. 다시 말해, 술에 덜 취했고, 성관계도 덜 했으며, 부모님과 대화가 더 많아졌다. 반대로 외로움은 점점 더 많이 호소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이런 국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옛날 애들은 착했는데 요즘은..." 같은 한탄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국민일보 또한 2018년 현재, 영국 젊은이들의 20%는 아예 금주를 하고 있으며 영국 전역에서 펍이 줄줄이 폐점하고 있고, 최근 10년 동안 스웨덴과 아이슬란드에서는 금주자가 각각 31%와 61%(?!)로 폭증했으며, 유럽 전역의 청소년 수감자는 10년 전에 비해 3분의 1로 감소했다. 미국은 50년 전에 비해 미성년 성관계 경험자의 비율이 8.9%p 감소했고, OECD 국가들의 청년층에 있어서 학사 이상의 고학력자 비율은 16년 전의 26%에서 43%로 증가했다. #시사인
- 비슷한 것으로, 요즘 아이들이 자꾸 XX충, XX거지 같은 혐오 표현들을 배워서 쓰고 있다는 식의 뉴스보도에 대해서도, 그것이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목적이 있긴 하지만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예를 들어 《교육희망》 에 현직 초등학교 교사가 그려 올린 만화에 따르면, 실제 초등학생들은 월급으로 200만 원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백충', '삼백충' 같은 표현을 쓸 가능성이 낮으며, 전월세 개념도 그저 막연히 '주기적으로 이사가는 것' 정도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전거지', '월거지', '빌거지' 같은 표현도 쓰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오히려 부모가 "17평 사는 애들이랑은 놀지 마라!"라고 말하면 자녀가 학교 선생님에게 너무하지 않냐며 그걸 고발(…)하는 경우도 있다고.
- 참고 항목으로는 바보멍청이해삼멍게말미잘(…),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 좋았던 옛날 편향을 볼 것.
- 청소년 시기에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상적인 발달과정이다.
-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정체성의 위기는 사회가 개인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정체성이 개인이 그 스스로에 대해 갖는 자기개념(self-concept)과 충돌할 때에만 나타나며, 그러한 충돌이 없는 청소년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는다.
- 모든 부모들은 자녀가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분가해 나가면 소위 "빈 둥지 증후군"(empty-net syndrome)을 경험한다.
-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빈 둥지 증후군은 자녀의 존재를 자기정체성에 포함시킨 부모들[9] 이 주로 겪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모들은 자녀 양육의 책임에서 벗어나서 비로소 배우자와 함께 자유로운 생활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10] 특히 개인주의적 문화가 두드러지는 서구권에서는 성인 자녀가 부모에게 의지하거나, 나이든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얹혀 사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게 보기도 한다. 꼭 문화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부모의 신념이나 성격, 세계관, 가치관에 따라서는 자녀를 독립시킨 후 전혀 허탈함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오늘날의 "낀 세대" 들은 자녀가 독립해 나간 이후 허탈감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병든 노부모를 봉양해야 할 책임에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부모 봉양이 선택적이게 되면서, 이런 개인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 모든 중년의 개인들은 중년기 위기(midlife crisis) 혹은 속칭 "오춘기"(...)를 겪으며 방황한다.
- 중년기는 생각보다 부정적이지 않으며, 서구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중년기의 이미지는 실제보다 더 부정적이다. 중년기를 생물학적, 사회문화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영미권 대중들의 고정관념에 기대고 있으며, 이 인식은 일본이나 인도 등과의 교차문화 연구를 통하여 지지되지 않는다.[11]
- 단, 중년이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일생을 중간점검하게 되고, 비로소 죽음이란 개념을 자신의 삶과 의미 있게 연결하는 경향은 있다. 유념할 것은, 영미권 대중들 외에도 그들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현대 한국사회 중년들 역시, "내가 지금껏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 왔지? 내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문화적으로 학습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 노인이 되면 수면시간이 줄어든다.
- 수면패턴이 바뀌어서 갑자기 아침형 인간이 되거나 낮잠이 많아지거나 하는 변화는 있지만, 개인차가 너무 커서 수면시간 자체가 줄어든다는 설명을 일반화하긴 어렵다. 단, 거의 모든 노인들이 예외 없이 얕은 수면인 1단계 수면의 비율이 급증하고 깊은 수면인 4단계 수면의 비율이 급감한다. 즉, 노인들은 쉽게 뒤척이며 잠도 쉽게 깨고, 충분히 수면을 취하더라도 푹 쉴 수 없다.
- 모든 노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부정적인 정서를 보이고 우울해한다. 즉, 노인들은 젊은이들에 비해서 덜 행복해한다.
- 그렇지 않다. 노년기 발달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노인들이 감정 조절의 전문가가 되어 있으며 수많은 부정적 사건들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지켜내는 비결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높은 각성수준의 긍정적 정서[12] 보다는 낮은 각성수준의 긍정적 정서[13] 에 주로 치우친 상태로서 꽤 자주 "기분이 좋다"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을 당황/불안/걱정하게 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재빨리 다른 쪽으로 주의를 돌려 버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젊은이들은 뉴스에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인이 나오면 욕을 퍼부으며(…) 물고뜯고 하지만, 노인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정치인이 뉴스에 나오면 아예 채널을 돌려 버리고 만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극소수의 언론사들만을 선택적으로 골라서 그것 이외에는 절대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올바르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 전략이 그들의 감정 조절에 꽤나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타인과 사소한 시비가 붙더라도 이를 재빨리 잠재우려 하거나 아니면 속으로 삭이는 경향이 있다. 노년기 인간관계는 극도로 선택적이며, 그 선택의 기준도 몹시 까다로워지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노인들은 자신의 기분을 정말 좋게 만들어 주는 극소수의 타인과만 극히 간단한 사회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그 외의 사람들과는 피상적으로만 접촉하면서 가급적 회피하려 한다.
- 노년기의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지극히 적응적이어서, 그들이 인생의 황혼을 나름대로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젊은 시절에 자신의 발달과업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불행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노인들은 젊은이들보다 뛰어난 감정 조절 테크닉을 구사하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한다. 사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들이 더 많다. 평생을 몸바쳤던 회사에서 물러나서 느끼는 공허함, 성인이 된 자녀들의 독립, 가문의 최고 원로가 되었다는 책임감,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돌아보게 하는 성찰, 가까운 친우들이 하나 둘씩 죽음을 맞았다는 부고(訃告)의 연속, 일상을 영위하기 힘들 만큼 나날이 몰라보게 감퇴되어 가는 기력과 감각, 나날이 추한 모습으로 쭈그러드는 신체[14] 와 그 고린내[15] , 무엇보다도 배우자와의 사별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 그리고 특히나 앞으로 살 날이 불과 몇 년밖에는 남지 않았다[16] 는 것은 평범한 젊은 사람들이라면 몇 번씩 멘탈붕괴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들이 나름대로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감정 조절 능력 때문이다. 즉, 이들에게는 처절할 정도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 연구자들 중 일부는 이에 대해서 "앞으로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인식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이들에게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일희일비가 의미가 없으며, 전부 사바세계의 부질없고 무의미하며 헛된 것들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설령 시비가 붙더라도, 그런 일상의 문제들로부터 초연한 관점에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감정이 크게 상하지 않은 채 수월하게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노년기 초월"(gerotranscendence) 상태라고도 부른다. 단, 이 가설에도 약점은 있는데, 노년기 감정 조절이 의외로 인지적 수준에까지 관여되어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례로, 노인들은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 사진 속에서 "화난 얼굴"을 젊은이들보다 더 못 찾아내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노년기 초월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 노인들은 그저 옛 것만 고집하고 보수적인 성격이다.
- 반대로 20대 들의 젊은 층들은 모두 진보적이라고도 한다. 일부 진실. 이건 한국뿐만이 아니라서, 세계 대다수의 당파에서 보수당이 20대 층에서 인기가 없다. 그렇지만 노인임에도 젊게 살거나 청년임에도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사실 각자의 처한 성향 및 신념이 더 크게 작용한다.
-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채현국이나, 반대로 젊은데도 보수성향을 지닌 윤서인같은 사람을 봐도 이런 편견은 틀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한국의 경우,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 속해있던 70대의 회원이 보수 성향을 띤 단체의 2,30대 회원들에게 구타를 당한 사례도 있다.
- 노인들이 보수적인 데에는 역사적인 이유도 한몫을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독재 정권 시절이거나, 냉전 시기여서 이념에 따른 색깔론 때문에 매우 극단적인 시각을 가지면서 살아온 것일 수 있는데, 이것이 이렇게 살아온 이들이 늙어서 노인이 된 현재에 이른 결과일 수도 있다.
- 2020년 총선 결과, 50대 이상 60대의 정치 성향이 진보 쪽으로 기울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진보 세력의 주측인 386 세대이 이미 6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으로,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20-30대 젊은 층보다 40대 중반 이상~70대 미만이 오히려 더 진보 성향이 강하며, 시간이 갈수록 전체 인구 중 그 비율도 높아질 것이다. 당장에 60대인 문재인 대통령만 해도 군사 정권 하에서 인권 변호사를 했고 진보 성향이다.
- 오래 사는 것은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이다.
-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어떻게 오래 사느냐가 중요하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신체는 30대부터 이미 노화가 진행중이며, 75세가 되면 그때부터는 신체적, 인지적 기능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죽음을 향해 치달아가는 기관차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일부 노인심리학 등의 연구자들은 75세를 전후로 해서 노년기 전기, 노년기 후기로 나누기도 한다. 노년기 전기는 주로 사회적으로 새로운 역할을 갖게 됨을 강조하는 반면, 노년기 후기는 신체 전반적인 감퇴에 방점을 찍는다. 사회적으로 보면 "제2의 시작"이라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와는 다르게 현실은 시궁창이며, 은퇴 이후의 노후보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노인들도 굉장히 많이 있다. 그렇다고 정년을 늦추자니 이번엔 일자리 부족해진 청춘들이 울고... 종합하면, 자신의 발달과제를 충분히 달성하고, 적절한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며, 기력의 감퇴에 대비한 준비가 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이런 많은 조건들 하에서만 오래 사는 것이 의미가 있다. 실제로 트랜스휴머니즘 같은 분야에서도 단순히 생명공학적 진보를 통해 장수를 달성하는 것 외에도 장수에 필요한 여러 개인적/사회적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 가는 상태다.
- 간혹가다 일부 대범한 사람들은 "나는 짧고 굵게 살다 갈 거야!"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무작정 오래 사는 것을 모두가 바라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 모든 사람은 죽음을 꺼리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
-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하나의 궁극적인 스트레스원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이 지나치게 서구 특정적인 문화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아프리카/남미의 인류학적 부족사회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할지는 의문이다. 즉, 죽음은 곧 자연과의 합일(合一)이라고 믿는다거나, 저 바이킹들처럼 죽음 이후에 발할라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도 계통이나 도 계통의 문화권에서도 죽음을 하나의 주어진 것 내지는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거나, 내지는 죽음 이후에 인간을 초월한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불로불사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죽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의외로 거부감을 보일 만한 여지도 꽤 있다. 실제로 많은 대중매체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케이스도 많이 있으며, 무조건 좋은 것처럼 묘사되는 것을 지양하는 편.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죽음 그 자체를 영원히 피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생의 목표를 충분히 달성하고, 자신과 타인을 위해 충분히 공헌한 다음,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작별을 받으며, 될 수 있는 한 존엄하고 고귀한 모습으로 고요히 잠드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웰빙"(well-being)이 아니라 이제는 "웰다잉"(well-dying)이 중요한 시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웰다잉은 극히 힘든 것이다. 최악의 경우 독거노인으로 지내다가 고독하게 죽거나, 병원 중환자실에서 온갖 참혹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손들에게 물적/정신적 고통을 끼치다가 보기 흉한 모습으로 숨이 끊어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 그렇게 죽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많이 있다. 여러분을 포함하여, 누구라도 이런 식의 죽음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1.4. 관련 어록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복하고 평안하라.''
- 붓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데 옛날 신이 동물을 만들어 그들의 수명을 50년씩으로 정해 주었다. 그러다 맨 나중에 인간의 차례가 왔을 때는 25년 밖에 줄 수 없었다. 인간이 불평하자 신은 인간더러 다른 동물한테서 조금씩 꾸어보라고 했다. 인간은 동물들을 찾아 다니면서 말과 개와 원숭이한테서 각각 25년씩을 받아냈다. 그랬더니 신은 인간에게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는 25년은 인간으로 살되 그 다음 25년은 말처럼 일하고, 다음 25년은 개처럼 짖고, 나머지 25년은 원숭이처럼 웃음거리가 될 거라고 말했다.
To live is to suffer, to survive is to find some meaning in the suffering.
사는 것은 고통 받는 것이고, 살아남는 것은 고통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모든 남자와 여자는 배우에 불과하다. 그들은 퇴장하고 또한 등장한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 동안 여러 편의 연극을 연기한다.'''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C('C'hoice)[17]
가 있다.'''
'''인생은 다음 두 가지로 성립된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19]
- 찰리 채플린
'''인생은 연극과 같다. 훌륭한 배우가 걸인도 되고, 삼류 배우가 대감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지나치게 인생을 거북하게 생각하지 말고 솔직하게 어떤 일이든지 열심히 하라.'''
- 후쿠자와 유키치
'''아닐세, 불가능한 것이야. 개인의 존재에 있어 특정 시기의 삶의 감각을, 곧 인생의 진실이며 의미이자 인생의 미묘하고도 예리한 에센스라고 할 삶의 감각을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네. 그건 불가능해. 우리는 꿈꿀 때처럼 그렇게 살아간다네... 홀로......'''
의 등장인물 말로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렸네.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 살게 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은 신이 주신 보너스 게임[21]
입니다. 모두들 그저 아프지 말고 건강만 하세요.'''
잠자는 시간 26년, 식사시간 6년, 세수를 한 시간 228일, 넥타이를 맨시간 18일, 다른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기다린 시간 5년, 혼자 멍하니 보낸 시간 5년, 담뱃불을 붙이는시간 12일, 그리고 그중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 46시간'''
- 스위스의 80세 노인이 시간으로 계산한 자신의 인생
'''당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요.(Don't waste it. Don't waste your life).'''
- 호 인센
'''시한부 성병'''[22]
- 어반 딕셔너리
'''인생이 달콤하단 말 한 놈 데려와 봐 실험 삼아서 까 버리게'''
'''전치 4주 나오고 나서 웃나 보자'''
(중략)
'''서민의 삶은 곧 교대 근무야 제자리 걸음이 되기 너무나도 쉬운 삶'''
(이하 생략)
마카오: '''얘야, 인생이란 원래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란다.'''
조마: '''그래서 인생이 재밌는 거 아니겠어?'''
1.5. 기타
리뷰 블로거들이 은근히 자주 쓰는 접두어이며 대략 "생애 최초로 훌륭한 ~"의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어느 선수가 '''인생경기'''했다.", "어느 가수의 '''인생곡'''이 나왔다." 또는 "저번에 토익 시험 봤는데 700점도 안되었다가 1달만에 900점을 찍어서 '''인생점수''' 만들었다."등 이 있다.
2. 영화
2.1. 중국의 영화
2.2. 프랑스의 영화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1980년작 프랑스 영화. 원제는 Sauve Qui Peut.
2.3. 스웨덴의 영화
리처드 호버트 감독/각본의 1997년작 스웨덴 영화. 원제는 Spring för livet.
3. 카와기시 오우교의 라이트 노벨 인생
가가가 문고 (대한민국 정발은 L노벨) 에서 출간하는 라이트 노벨. 자세한 내용은 인생(라이트 노벨) 문서 참고.
4. MC 스나이퍼가 2012년 발표한 노래
5. 김준기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2003년 작. 제7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애니마시아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제16회 자그레브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전작 '등대지기'로 받은 상금과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받은 사전제작지원금 1000만원을 투자하여 1년 8개월 동안 혼자 만들었다고 한다. SICAF, 서울독립영화제, 프랑스 앙시에서 상영되었으며 SBS 애니갤러리를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아버지는 커다란 짐과 함께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끝이 보이지 않는 탑을 오른다. 세월이 지나 아들이 성장하고, 젊은 아들은 늙은 아버지와 함께 탑을 오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기력이 다하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짐을 넘겨받고 여정을 계속한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늙었을 쯤, 드디어 탑의 정상이 보이고 정상에 도착한 아들은 짐을 푼다. 짐 안에는 탑을 쌓아올릴 돌조각이 들어있었다. 지금껏 아버지와 아들이 올라왔던 탑은 조상대부터 수많은 세월을 거쳐 쌓아올린 탑이었던 것. 아들은 정상 귀퉁이에 조각을 채워넣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내려간다.
작은 돌조각 하나 때문에 그 힘든 세월을 견뎌냈다는 반전은 허무하고 충격적이고 씁쓸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드래곤볼을 본 사람들은 카린탑을 떠올리기도. 2014년에 네이버 목요애니극장에도 소개되었다.링크
6. 위화의 장편소설
위화의 소설. 문서참고
7. Stray Kids의 정규 1집 리패키지 앨범, 《IN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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