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추일기
1. 개요
조선 후기의 무관이었던 노상추(盧尙樞)가 1763년부터 1829년까지 67년간의 생활상을 매일 기록하여 남긴 일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되어 있으며, 간찰첩과 함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45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의 특징
경상도 선산도호부(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문동골마을)#에서 태어난 노상추가 쓴 18세부터 84세까지의 일기, 67년 분량의 일기이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35세 이전까지는 청년기로 고향인 경북 선산에서 가계를 경영하면서 무과 시험 준비를 하던 시기다. 이때는 주로 가족에 대한 내용, 시험에 대한 고뇌, 농사 상황 등에 대한 내용이 많다. 35세부터 60대 후반까지는 장년기로 무과에 합격한 이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양, 삭주, 홍주 등 타향을 전전하면서 보낸 30여년간의 내용이다. 60대 후반부터 노상추가 사망하는 1829년 9월 10일, 84세까지는 노년기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손자들을 훈육하고 문중의 일을 보는 등 가족에 전념하는 생활을 기록했다.
청년기와 노년기는 가계 경영, 집안의 방문객, 행선지, 가족들의 생노병사 등을 기록한 일종의 개인 생활 일기로 조선 시대 미시사, 민속사, 생활사 연구에 중요하고, 장년기는 관직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접한 관청의 동태, 지방 사리들의 행태, 정치의 향방 등을 기록한 관직일기의 성격을 띄고 있어 조선 후기 사회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3. 내용
원래는 문과 공부를 하였으나 23살이 되던 해, 일기의 표현에 따르면 '붓을 던지기로 결정'하고 이때부터 문관의 길을 포기하고 무예를 수련했다. 다만 문과에 애착이 많았는지 이때 매우 애석함을 토로하고 있다. 문관이 되고 싶어 했으나 영남 지방의 남인 가문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 뜻을 접었는데, 노론이 세를 떨쳐 문과 고위직을 점령하고, 남인 가문에서는 문과에 급제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또한 집안의 경제적 배경이 든든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형님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당시 노상추는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게다가 집안 소유지의 작황이 그리 좋지 않아서 문과만 바라보며 허송세월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무과 응시를 결정하고 급제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영조 47년이던 1771년부터 시험에 응시했으나 결과가 좋지 못했다. 1771년 두번의 정시에서 모두 낙방했고, 1775년에는 영조의 사망으로 정시가 취소되어 시험을 보지 못했다. 1777년 초시에 합격했으나 복시에서 낙방했고, 1778년 알성시와 정시에서 낙방했다. 1779년 9월 식년시에 합격한 후 1780년에 대구에서 선무도시를 치루고 무과에 급제를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무과 시험에서는 경제적 부담이 더욱 컸는데, 시험 도구로 사용되는 활을 응시자인 노상추가 직접 준비해야 했다. 역사스페셜에 따르면, 활 하나에 어린 소 한 마리 값은 족히 됐다고 한다. 노상추의 경우 한해 겨울 동안 화살 5,000발씩을 쏘았다고 하는데, 연습용으로 소비되는 활의 양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응시하고 낙방하는 과정에서 수십차례 조령을 넘어 한양을 왕복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돈을 소비했다. 대신 노상추 개인에겐 비극이었지만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영남 - 조령 - 한양에 이르는 많은 지방의 문물과 경관 등이 이 책을 통해 세세히 기록되었기 때문에 다행인 면이 있다."논 아홉 마지기(1,800평), 밭 90마지기(18,000평), 돈 50냥이(오천 만원) 10년 과거 준비에 모두 들어갔으니 앞으로 굶어죽는 것을 면하기 어려운 것인가. 공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가소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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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추일기, 1782년 5월 7일 [1]
1780년(정조 4)에 서른 다섯의 나이로 드디어 무과에 급제하는 기쁨을 맛보았지만 그 이후로도 4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관직에 임용되지 못했다. 숙종 때 무과 시험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뽑았던 탓이다.[2] 합격자 모두가 관직을 얻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영남 남인 가문 출신으로서의 한계도 잇따른 임용 탈락의 큰 이유였다.[3] 관직 임용을 위해 노상추는 수시로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 올라가 무관 고위직을 찾아다니며 굽신거려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관직에 임용된 이후에는 중앙과 지방의 말단 무관직을 전전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한번은 '갑산(甲山)'이라는 최변방 지역의 말단직을 맡게 되기도 했는데, 일기에는 "신하된 자로서 관직의 우열을 가릴 순 없으나 내가 세력이 없어 변방으로 쫓겨난 것이다(1787년 6월 22일)"라고 적었다.
그럼에도 끝없이 노력했고 결국 그 결과를 받았다. 1792년에 실시된 활쏘기 테스트에서 뛰어난 활솜씨를 보인 노상추가 우연히 정조의 눈에 띄인 것. 정조는 아무것도 안남은 빈털털이에 최하급 무관이었던 그에게 정3품 당상선전관 관직을 부여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한다.[5] 이듬해에는 삭주부사(朔州府使)라는 관직이 제수되었다.(왕명으로) 급히 대궐 밖에 나아가 입시했더니 사알과 별승전 이갑회를 보내 구전으로 하교하시기를,
"선산 사람 노 아무개가 선대왕 초년에 수문장에 제수되어서 절개를 세웠다고 할 만한 일이 있었는데, 표신의 자획이 잘못되었다며면서 표신을 공손히 받지 않고 칼을 빼서 선전관을 쫓아버린 일이다. 너와는 관계가 어떻게 되며, 이 일을 너는 과연 알고 있느냐?"
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제 할아버지가 과연 이 일을 만났으나, 표신의 자획이 잘못되었기 때문인지는 몰랐습니다. 제가 집안에서 듣기로는 표신을 공손히 받으려 할 때에 표신에 흰색의 밀랍이 발라져 있음을 깨닫고 칼을 빼서 선전관을 쫓아버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하교하시기를
"그러면 네가 서울로 가져온 가승이나 문서가 있거든 올리라."
하시니 내가 대답하기를
"제 집안에 문서가 있습니다만 서울로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하교하시기를
"그러면 네가 상세히 알고 있는 일을 기록하여 올리라."
라고 하셨다. 나는 물러나와 별감과 무녀에 대한 일과 칼을 빼서 선전관을 쫓아버린 일의 두 가지를 기록한 뒤에 선전관청의 하방에 들어가서 정본을 직접 써서 승전 이갑회로 하여금 들어가서 올리게 하였다. 내가 입직하는 곳으로 물러나오니 벌써 밤 이경[4]
말이었다. 임금께서 탁월하게 총명하시어 아래로 신하의 옛 일에 미쳤으니 내가 은혜에 감복할 뿐 아니라 할아버님께서도 저승에서 얼마나 기뻐 눈물 흘리실까. 이 날 밤의 순찰은 부장이 대신 행하게 하였다.-
노상추일기 정조 16년 임자(1792년) 11월 초이틀(정유). 볕이 남.
고 병사(兵使) 노계정(盧啓禎)의 손자 노상추(盧尙樞)를 선전관에 제수하였다. 구전 정사(口傳政事)로 차출한 것이다.
○ 전교하기를,
“어제 관궁(官弓)으로 중일 시사(中日試射)를 행한 시기(試記)에서 오위장(五衛將) 노상추가 눈에 띄어 일찍이 병조 판서를 지낸 자에게 물었더니 바로 병사 노계정의 손자라고 하였다. 그의 할아버지의 사적은 비록 알고 있었으나 그 손자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매번 찾아서 등용하려고 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자인데, 그의 이름이 이번 시기에 들어 있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제저녁에 그를 불러서 물었더니, 그의 할아비가 과연 수문장으로 있을 때에 직임을 잘 수행하여 등급을 뛰어넘어서 부망(副望)으로 천망(薦望)되어 병사가 된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의 할아비가 수문장에 제수된 것이 옛 임자년(1732, 영조8) 동짓달이었는데 그의 이름을 또 올 임자년 동짓달에 알게 되었으니 또한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의 인품과 모든 것이 어떠한지 아직 알 수 없으니, 병조 판서로 하여금 불러서 만나 본 뒤에 과연 당상 선전관(堂上宣傳官)의 직임을 감당할 만하거든 가설(加設)하여 의망해 들이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 병조가 노상추를 선전관에 의망하여 들이니, 마침내 비하(批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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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16년 임자(1792) 11월 3일(무술)
이후 한번씩 극심한 당쟁 탓에 관직 생활의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노상추는 비교적 평탄한 무관의 길을 걷게 된다. 삭주부사였을 때 자신이 잡아들인 죄인을 태천군수가 마음대로 석방하자 분노하기도 하고, 대궐과 광화문, 혜화문에서 수비를 맡기도 한다.이 날 이어서 입직하였다. 미시[6]
에 임금의 명이 특별히 내려왔다. 전교하시기를"어제 관궁으로 시행한 중일시사의 시기에서 오위장 노상추의 이름을 보고서 예전에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에게 물으니 병마절도사 아무개의 손자라고 하였다. 그 할아버지의 사적은 비록 알고 있었지만 그 손자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러므로 매번 찾아서 쓰려고 해도 하지 못했는데, 그의 이름이 오늘 시기에 들어 있었으니 그에게 운이 있다고 할 만 하다. 어제 저녁에 그를 불러 물었더니 그의 조부는 과연 수문장 시절에 품계를 뛰어넘어 관직에 발탁되어 부천으로서 병마절도사가 된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 할아버지가 수문장에 제수된 때가 지난 임자년(1732년) 동짓달이었는데 그의 이름을 알게 된 때가 올해 임자년(1792년) 동짓달이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인품이나 범절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니 병조판서로 하여금 그를 불러서 보게 한 뒤에 과연 당상선전관을 감당할 수 있다면 선전관가설[7]
로 의망하여 들이라."라고 분부하셨다. 저물녘에 다시 하교하시니 밤에 구전으로 차출되었다. 삼경[8]
에 당상선전관으로 의망하여 들이자 낙점해 주시니 기뻐 눈물을 흘렸다. 이야말로 천지와 같은 망극하신 임금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이날 밤의 순찰은 초경[9] 에 했고 군호(암구호)는 백설(白雪) 두 글자로 내리셨다.-
노상추일기 정조 16년 임자(1792년) 11월 초사흘(무술). 볕이 남.
전체적으로 양반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고, 후손들에게도 좋은 귀감이 되었다. 눈에 띄는 눈부신 업적을 남긴 무관은 아니었지만 능력만을 보고 인재를 찾으려한 정조 덕에 남부럽지 않은 말년을 보냈고 후대에게 노상추일기라는 방대하고 훌륭한 자료들도 남겨 주었다. 다만 아내들이 자주 요절하고 말년에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말년의 일기를 보면 매우 괴로워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