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1. 개요
壬午禍變
1762년(영조 38년) 윤5월 13일,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만든 사건이다.''' 그래서 비상식적인 재난, 변괴를 뜻하는 '화변'으로 명명되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명령했고,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엄밀히 말하면 뒤주에 갇힐 당시 폐서인이 됐기 때문에 사망했을 때 신분은 세자가 아니었다.
사실 조선 역사에서 국왕이 아들인 왕자를 죽인 사건이 이 사건 이외에도 중종이 서장자인 복성군을 사사한 선례가 있긴 했다.[1] 복성군 사사도 매우 심각한 일이었으나, 임오화변의 그것과는 사건의 심각함이 매우 다르다. 물론 역으로 동생인 광해군이 형인 임해군을 사사한 게 이보다 더 쇼킹한 선례이긴 하지만, 임해군의 경우는 조선 왕실 최악의 문제아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2. 전개
국사편찬위원회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13일
세자 시절의 후반부에 부자 관계가 파국에 치달으면서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 38년(1762년) 영조에 의해 기습적으로 폐위되어버리고, 28살의 젊은 나이에 뒤주에 갇혀 8일만에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정황은 이렇다. 윤 5월 13일 영조는 창덕궁에서 갑자기 사도세자를 불러내었다. 이에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의 관원들과 세자와 동궁을 호위하는 익위사 관원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사도세자도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아내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학질(말라리아)에 걸렸으니 세손(정조)의 휘항[2] 을 달라"고 하며 그것을 쓰고 영조에게 자신이 병이 있음을 어필하려 했지만, 혜경궁은 "작은 세손의 것을 어찌 쓰겠냐"며 세자의 것을 가져왔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그토록 아끼는 세손의 휘항을 쓰고 나가 "내가 바로 당신이 그리 아끼는 손자의 아버지요!" 라는 것을 내세워 살아보려 한 것이었지만 혜경궁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의도적으로 막았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남길 리가 없어 단순히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의향을 몰랐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영조는 세자를 데리고 경화문을 지나 숙종의 위패가 모셔진 선원전으로 갔다. 당시 영조는 평소에 만안문으로 자주 다녔고 흉한 일을 할 때만 경화문을 썼는데, 세자를 데리고 굳이 경화문을 통과했다는 것은 흉한 일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영조는 창덕궁 선원전에서 절을 올린 뒤 다시 세자와 창경궁[3] 휘령전[4] 으로 간 뒤 휘령전에 있던 정성왕후 서씨의 신위에 영조가 행례를 하고 사도세자가 사배례를 한다. 그 직후 영조는 갑자기 손뼉을 치고는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군사들을 시켜서 4겹, 5겹으로 전문을 막고 총관을 시켜 군사들을 배열하여 칼을 뽑고 궁의 담을 겨누게 했다. 영조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자 영의정 신만만이 겨우 들어왔을 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제가 죄는 많지만 죽을 죄는 무엇입니까?"라고 하기도 하고, 한중록에 따르면 "아버님,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글도 잘 읽고 말씀도 잘 들을 테니 제발 이러지 마소서!"라고 애걸했지만[5] 영조는 요지부동이어서 세자에게 자결을 강요했고 세자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나 영조는 차갑게 거절하며 자결하라며 매섭게 하자 견디다 못한 세자는 자결을 시도한다. 하지만 세자의 스승 임덕제와 춘방의 신하들이 달려와서 이를 막은다음 영조한테 세자를 용서해 달라고 간언한다. 영조는 세자의 자결 시도가 임덕제와 춘방의 신하들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자 크게 화를 내며 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내렸다. 그리고 군병들을 시켜서 세자 폐위에 반대하며 세자를 변호하는 춘방의 신하들을 내쫓았고 임덕제에게 "세자가 폐해졌는데 사관이 왜 있는가?"라며[6] 역시 붙들어 내보냈다. 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대마저 나가면 난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인가?"하고 울부짖었고 임덕제도 나갈 수 없다고 버티면서 끝까지 세자를 변호했으나 영조의 명이 서슬퍼런지라 결국 근위병들한테 끌려나갔고 이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7]
2.1. 뒤주에 들어가다
세자는 춘방의 신하들에게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물었고, 사서 임성이 "처분을 기다리시라"라고 대답했다. 세자는 곡하면서 엎드려서 개과천선할 것을 호소했지만, 영조는 세자를 죽여야 한다는 영빈 이씨의 말을 옮기면서 세자를 죽여야 함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도승지 이이장이 "어찌 여인의 말을 듣고 국본을 해치려 하십니까?"라고 항의했고 영조는 격노하여 도승지를 방형하라 했다가 곧 취소했다. 그외에도 한림 윤숙(尹塾)이 홍봉한을 면전에서 비난하고 울부짖은 일로 다음날 해남으로 귀양을 간다.세자를 폐하는 반교문
왕은 이르노라, 세자의 광패함이 전에 없던 일이라 종사를 위하여 어찌 한번 깨우쳐주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여전히 노심초사하는 것은 내가 세자를 자애하는 뜻이다. 지금 만고에 없는 윤상의 변고를 당하여 오늘 휘령전에 이미 패악한 아들 모(某)를 우선 안에 엄중히 가두고 세자의 직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전교를 아뢰었다. 그 본래의 일이야 중외에서 어찌 알겠는가. 한건의 글을 내려 널리 반포하노라.
아! 모(某)가 광패하여 밤낮으로 종사와 백성을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나와는 부자의 윤리가 있으니 생각해보면 어찌하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지금 영빈(세자의 생모)이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말하기를
"세자가 환관, 나인, 노비 등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8]
이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참혹한 형상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것으로 수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하는 내관을 내쫓고 어린 환관, 별감들과 밤낮으로 함께 어울리며 궁중의 물품을 두루 나눠어주었습니다. 이 무리는 기생, 승려들과 밤낮으로 음란한 짓을 일삼았으며, 제 시종들을 불러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근자에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꾸미는 것이 심해져 한번 아뢰고자 하였으나 모자 간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요즘 궁궐 후원에 무덤을 만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분을 묻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중드는 사람에게 머리를 풀고 날카로운 칼을 옆에 두게 하여 예측할수 없는 일을 행하려 하였습니다. 지난번 창덕궁에 갔을 때 거의 죽을 뻔하였다가 가까스로 모면하였습니다. 제 한몸이야 비록 돌아볼 것이 없다 해도 우러러 생각건대 주상의 옥체야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저번 어문의 노상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마음 속으로 기원하기를
'주상의 옥체가 평안하다면 3일 안에 비가 내릴 것이고, 패악한 아들이 뜻을 얻게 되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과연 비가 내리니 이로부터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옥체의 위기가 경각에 달렸으니 어찌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아뢰지 않겠으며 이러한 때 어찌 화평한 모습으로 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영빈은 말을 마치고 비 오듯 눈물을 흘렸다. 아. 저 푸른 하늘이 나로 하여금 모면하게 하고자 이러한 거둥이 있게 하였고 이러한 말을 듣게 되었는데, 오늘 행차함에 일의 기미가 먼저 새어나갔다. 아. 말로 하기 어려운 변고가 있어서 기우제를 핑계하고 이곳에 오게 된 일을 휘령전에 이미 상세하게 아뢰었다. 아! 백발의 늙은이가 말년에 지난 역사에 없던 일을 만났으니, 무슨 얼굴로 절을 하겠는가. 비록 미쳤다고 하나 종사와 백성을 위해 어찌 처분을 내리지 않으리오. 내가 친히 반교문을 쓰고 눈물로 적삼을 적시며 휘령전으로 온 것은 이 처분을 또한 정성왕후와 함께 한다는 뜻이다.
아! 이미 내린 처분은 일종의 호령의 일이다. 여러 신하는 낙선당의 일을 보지 않았는가. 이 때문에 세자를 안에 엄히 가두게 한 것이다. 생각이 엄중한 곳에 미치니 온몸이 얼어붙는 듯하다. 아! 대리청정 14년 만에 부득이하게 정사에 복귀하며 초심을 돌아보니 눈물을 삼키며 탄식하게 된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명하였을 때 널리 알리지 않아 지금 다시 알리지 않을 수 없으니 일체의 내용을 온 나라에 알려 모두 알게 하라.
이어서 영조는 세자를 깊이 가두었다. 세자를 가둘 뒤주는 밧소주방에서 가져왔고, 뒤주에 가두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후술할 혜경궁의 기록으로 보아 세자는 큰 저항없이 들어간 것 같다. 혜경궁은 세자가 '대 처분'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안절부절못하다 오후 3시에 밧소주방의 뒤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칼로 두차례나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에서 칼을 빼앗아 실패했다. 혜경궁은 세자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으나 들어가진 못하고 사도세자가 울부짖는 소리만 들으면서 "그리 힘도 세신 분이 어째서 뒤주에 들어가란다고 그냥 들어가셨단 말인가?"하고 울었다.
이후 혜경궁은 내시를 시켜서 영조에게 죄인의 아내가 어찌 궁에 있겠냐고 친정으로 갈 것을 허락해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세손을 지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잠시 후에 혜경궁의 오빠 홍낙인이 혜경궁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동궁을 폐위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하니, 빈궁도 더 이상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라. 위에서 본집으로 나가라 하시니 가마가 들어오면 나가시고, 세손은 남여(藍輿)[9] 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그것을 타고 나가시리이다."라고 했고 혜경궁도 통곡했다.
영조는 세손과 혜경궁을 홍봉한의 집으로 보낼 것을 조치한 다음에 밤이 반이나 지난 시점에서 사도세자의 폐위를 선포하는 전교를 내렸으나 사관들이 감히 아무도 그 내용을 기록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들 세자를 며칠 있으면 풀어줄 것으로 생각했는지 감시가 엄격하지 않았다. 세자는 갇힌 지 얼마 안 되어 뒤주 밖에 나와서 바람을 쐬다가 영조가 꾸짖을 것을 두려워하여 뒤주로 돌아갔고, 궁인들이 세자에게 제호탕[10] 을 주기도 했으며 부채와 음식도 제공되었으나, 이를 안 영조가 격노한 뒤 뒤주는 꽁꽁 묶였으며 그 위에는 풀이 덮였다고 한다. <대천록>에선 이를 홍인한이 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며, <임오일기>에선 뒤주 위에 큰 돌을 올렸다고 한다.
영조는 포도대장 구선복을 시켜서 뒤주를 지키게 했고 세자의 생사 여부를 알기 위해서 말을 걸게 했다. 세자가 누군지를 묻자 구선복이 자신의 이름만을 말했고 세자는 어찌 직함은 말하지 않느냐고 꾸짖어 구선복은 그제야 자신의 직함까지 말했다. 일설에 따르면 구선복과 병사들은 뒤주 옆에서 밥을 먹고 술과 떡을 먹으며 방자하게 굴었고 세자에게 "좀 줄까?" 하고 물으며 놀렸다고 한다. 하지만 설마 아무리 영조가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해도 그들이 세자에게 그렇게 방자하게 행동했을지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11]
2.2. 8일 후의 죽음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둔뒤 뒤주를 둔 창덕궁에서 머무르며 하루에 한번 뒤주를 흔들어 생사를 확인했는데 7일째 되는 날부터 세자가 반응하지 않았다. 이어 세게 흔들자 세자는 희미하게 "흔들지 마라, 어지러워 못 견디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 8일만에 죽었지 실제론 세자는 전날에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고, 시체를 꺼내 확인한 것이 8일째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사도세자는 감시가 엄해지기 전에 받은 부채를 반으로 쪼개 그것으로 오줌을 받아 마신 흔적이 있었다.
5월14일 영조는 여승 가선과 환자 박필수, 평양 기생 5명을 세자를 타락시킨 죄로 처형했고, 홍봉한, 신만, 김성응 등의 청으로 세자의 스승인 윤숙, 임덕제를 유배했다. 윤숙과 임덕제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다음날에 울부짖으면서 홍봉한 등을 꾸짖어 거조를 잃었다고 한다.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모두 유배되었다. 그 후 선인문 앞에서 세자의 개인물건들을 태우라고 지시했는데 여기서 "유희하는 기괴한 물건" 등이 나와 영조가 분노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5월 15일 공식적으로 세자의 폐위를 공포했고 같은날 서필보, 정중유 등이 세자를 타락시킨 죄로 처형됐고, 이후로도 엄홍복, 조재호[12] 등을 각각 처형 / 유배형에 처하고 세자의 궁노들을 민가에 폐단을 끼친 죄로 다스렸다.
결국 윤 5월 21일에 세자가 숨을 거두자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자의 위호를 회복시켜 주었다. 다음은 사도세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영조가 한 말이다.
흔히 알려져 있기로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실 시호 자체는 그런 심정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시호를 정하는 '시법(諡法)'에서 나온 것이다.“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 복제(服制)의 개월 수가 비록 있으나 성복(成服)은 제하고 오모(烏帽)·참포(袍)로 하며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으로 1달에 마치라. 세손은 비록 3년을 마쳐야 하나 진현(進見)할 때와 장례 후에는 담복(淡服)으로 하라.”
즉, 영조는 세자의 과오에 대해 다른 것도 아닌 '''자신이 죽음으로서 과오를 뉘우쳤다'''고 판단했으며 세자가 죽은 것이 영조 38년 윤 5월 21일(1762년 7월 4일)인데다 사망 당시 나이가 28세 정도였기 때문에 걸맞는 시호를 내린 것일 뿐이다.'''追悔前過曰思. 思而能改.'''
(추회전과왈사. 사이능개)
이전의 과오를 뉘우쳤을 때는 '사(思)'로 한다. 사(思)는 (그런 과오를) 능히 고친 것이다.
'''年中早夭曰悼. 年不稱誌.'''
(연중조요왈도. 연불칭지)
연중[13]
에 일찍 죽었을 때는 '도(悼)'로 한다. 그 해가 아니라면 칭하거나 부를 수 없다.
윤 5월 25일에는 세손이 영조에게 문안을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다만 실록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기록이 없고, 뒤주에 물이나 음식 등이 들어갈 틈이 있으면 영조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이유로, 뒤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였고 실제로는 골방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실록에는 굶겼다는 말도 없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고만 적고 있다. 하지만 뒤의 무수한 기록이 뒤주에 가뒀다고 적혀 있으며, 후에 홍봉한도 '뒤주를 바친 죄'를 운운했고, 세자가 들어갈 수 있는 뒤주를 찾기 위해 밧소주방을 뒤졌다는 기록도 한중록에 남아 있으니 억측이라 하겠다. 게다가 처음에 엄중하지 않은 감시로 세자가 밖을 배회하고 음식물도 받아먹었다는 기록과 이에 노한 영조가 구선복을 시켜 지키게 했단 기록으로 앞의 의문은 설명된다.“처분한 후에 답이 없었으니, 네 마음이 어떠하였겠느냐? 한쪽 청구(靑丘)[14]
에 단지 나와 너뿐이니 인사(人事)를 닦아 너를 돕겠다는 자를 너는 모름지기 물리치고 네 할아버지를 생각하여 마음을 편히 해 잘 조처하라.”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약이나 교형도 아닌 뒤주에 가둬서 죽인 이유는 훗날의 세손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함일 확률이 높다. 그 근거로 영조가 세자를 살려둘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정황과 처음에 영조가 세자에게 자결을 종용한 것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약이나 교형은 엄연히 죄인에게 내려지는 공식적인 형벌이다. 영조는 세손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컸고 세손을 후계로 삼으려 했다. 이에 있어 세자는 방해가 될뿐만 아니라 세손이 왕위에 오를 경우 세자가 대원군으로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지 모를 노릇이기에 영조 입장에서는 연산군과 같은 폭군을 만들지 않으려면 세자를 죽여야만 했다. 그리고 부전자전이라고 안그래도 세자가 광증에 시달려 의심이 많아지고 난폭해졌는데 영조 자신이 죽으면 자기와 비슷하게 세손인 정조를 해코지할 게 분명하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는데 그 학대를 똑같이 자신이 아끼는 손자에게 학대할 것인데 이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겸해서 벌인 것이다. 그런데 세자가 공식적인 형벌로서 죽게 될 경우 세손(훗날의 정조)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의 모든 자식들은 죄인의 자손으로서 정통성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될 경우 사실상 왕위 계승자는 사라지게 되고 인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왕족을 찾아서 왕을 옹립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데 원래 왕족도 9촌이 넘어가면 왕족의 지위가 사라지기 때문에[15] 이씨 왕조는 이어진다 쳐도 사실상 효종으로부터 이어져온 왕조가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렇기에 처음에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종용했고 신하들의 반대로 여의치 않자 뒤주에 가둔 후 법적인 형벌이 아닌 훈육 과정에서의 사고사로 덮으려고 한 것이다. 실제로 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이틀 전 세자는 칼을 들고 수구(수로 입구)를 통해 경희궁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는데, 이러한 소문이 퍼지고 영빈 이씨가 이를 공론화하여 '대처분'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자가 공식적인 형벌을 받고 죽으면 세손을 비롯한 왕손들은 단순한 죄가 아닌 역모죄에 연좌되게 된다.
3. 해석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 역사상 최고의 논쟁거리 중 하나다. 여러 가지 정치적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평가 또한 여러모로 엇갈린다.
이렇게 기록이 엇갈리게 된 이유는 당시 상황을 가장 잘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승정원일기가 세손 시절 정조의 요청으로 당대에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승정원일기가 복수의 도구로 이용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품고, 또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에 폐기해달라고 영조에게 청했다고 한다.
정조 또한 본인의 일기인 일성록을 임오화변 전후를 포함해 2개월 이상 쓰지 않아서 정확한 상황이나 정조 본인의 심정도 파악하기 힘들다.
3.1. 노론의 음모인가?
가장 보편적으로 대중에 알려진 가설이 노론의 음모라는 것이다. 여기서 노론은 막대한 힘을 자랑하는데, 정순왕후 김씨와 김귀주, 홍봉한 등 노론들이 그가 친소론인 것을 두려워해 모함해 죽였다는 것이다.[16]
단, 노론에 의해 죽었다는 설은 이덕일 등이 혼자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부터 세자가 당쟁에 죽었다는 말이 떠돈 바가 있지만, 이때 소론들이 공격한 것은 노론 벽파들이고 홍봉한에 대해선 우호적이었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도 1960년대부터 이은순 교수 등에 의해서 주장된 바가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들은 사도세자 행장이나 한중록 등에 의존한 주장이어서 후일에 조선왕조실록까지 참조한 주장들에 비해서 설득력이 약하다. 심지어 이은순 교수조차도, 자신의 논문은 하나의 가정적 추론일 뿐이며 직접적인 근거가 없고 더 연구가 필요한 주제라는 것을 명시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모두 친노론, 식민 사학적 시각으로 몰아붙이며 매도하는 건 이덕일 정도다.
노론 음모론은 결정적으로 근거가 희박하다. 우선 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근거로 제기되는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 어렸을 때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이 그의 궁인이 되어서 소론에 유리한 얘기를 했다는 것.
- 나주 벽서 사건 등에서 소론에 대한 처벌을 거부했다는 것.
-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소론 조재호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
소론을 편들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보기에서 제시된 것과 달리 사도세자는 이인좌의 난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사도세자 항목에서도 나와 있지만 대리 청정 과정에서 세자는 "알았다", "안 된다", "대조께 아뢰어 처리하겠다." 수준의 대답만 했다. 허울뿐인 대리 청정인 셈. 그나마도 영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조가 크게 화를 냈기에, 세자가 독단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종사와 관계없는 사소한 일만 해도 그랬고, 역모와 형벌에 관한 문제는 아예 영조가 전담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으로 크게 배신감을 느끼던 상황에서도 이광좌 등 소론 계열 인사들을 보호했고, 훗날 심정연 등의 시험장 테러에도 박문수를 비롯한 소론 신하들에게 매우 굳건한 신뢰를 보여주었다.[17]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역적에 대해서 사도세자가 영조의 뜻에 거스르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과를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실록에서 소론의 처벌에 대해 "불허한다"는 말만 했던 세자이지만, 당시 상황을 보자면 세자의 의중이 반영된 게 아니라 영조의 뜻을 따랐다고 봐야 된다.
죽기 직전에도 마찬가지다. 세자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홍봉한은 그 순간에 세자를 포기한다. 그런 상황에서 세자가 기댈 곳은 조재호 뿐이었다. 정병설 교수는 조재호를 부른 것을 가지고 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데, 세자가 친소론이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세자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소론과 조재호 뿐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건 음모론 수준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데, 세자가 아무리 친소론이었다고 해도 당시 영조에겐 아들이라곤 사도세자 뿐이므로, 아무리 영조가 노론에게 크게 기댔다고 해도 신하들이, 사실상 하나뿐인 왕의 후계자를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으로 음모를 꾸몄다고 단정하기엔 지나친 감이 있다. 조선 같은 전제 군주정 국가에서 왕의 유일한 후계자를 모함하는 미친 짓은 자살보다도 더한,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숙종 말기에 당파 싸움의 일환에서 일종의 택군 현상이 있었지만 이건 당시 숙종의 장성한 아들이 2(경종/영조)명이었기 때문에 세자를 지지하는 당파와 다른 당파가 다른 왕자를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조에게는 살아 있는 아들이 세자뿐이고, 세자는 영조가 42세에 겨우 얻은 늦둥이였으니, 영조가 계비를 들인다고 해도 새 왕자를 얻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고 실제로 영조의 정비/계비 소생 자녀는 없다. 그런데 왕의 유일한 후계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나마도 사도세자가 친소론이라 노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근거도 없는 얘기지만) 세자를 없애려고 한다면, 지금 당장 신나게 세자를 핍박해서 영조의 신임을 얻는다고 치더라도 훗날 세자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말 그대로 모든게 망하기 때문에 상식적이라면 세자에게 아부를 해서 그제서라도 세자의 눈에 들어서 반대파를 몰아낼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 시기 즈음엔 영조의 나이가 당시로선 상당히 고령에 속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영조의 어진은 51세의 사진이다. 이미 그때 흰 수염이 치렁치렁했고, 실제로 사도세자가 사망했을 때 영조는 69세였다. 당시의 일반적인 수명이나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46세)으로 본다면 (솔직히 지금 상황으로 보아도) 충분히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조선시대 왕의 평균 수명은 '''영조 때문에 올라갔다.''' 대부분의 국왕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고, 조선에서 장수한 왕들은 대부분 죽기 전에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인물들이다(태조, 정종, 광해군이 장수한 편에 속한다.). 영조 이전에 재위한 국왕으로서 가장 오래 산 왕은 60세에 사망한 부왕 숙종 정도였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을 당시 영조는 55세라 충분히 조정에서는 영조의 죽음 이후를 생각할 만한 때라, 영조의 총애를 받던 옹주들마저 사도세자의 눈치를 봤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노론 입장에선 상식이 있다면 궁지에 몰기보다는 도리어 잘 보여서 차기 왕이 될 세자가 자기네들을 좋게 보게 하는 게 더 이익이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사실, 대신부터 대간에 이르기까지 온 조정이 계속 영조에게, 세자에게 너무 엄격히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홍봉한은 대놓고 '세자 저하가 잘 하시는데 왜 자꾸 갈굽니까?'라고 했고 김재로를 비롯한 노론 명문가 대신들도 영조가 세자를 갈굴 때마다 세자를 거들었다. 후일에 세자의 원수라고 선포된 홍계희나 김상로조차도 세자를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벌 받은 적이 있다. 이간질의 대표주자로 거론되는 김상로는 영조가 '세자가 자신을 1년이나 찾아뵌 일이 없다'고 하자 그런 일이 있었냐고 하면서, 잘 타이르면 세자 저하가 다신 안 그럴 거라고 오히려 세자를 옹호했다. 또한 홍봉한은 사위인 세자의 비행을 나경언의 고변 때까지는 숨겼는데, 단적으로 나경언의 고변이 있었을 때 영조가 한 말을 상기해보자. "오늘날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죄인이다. '''한 사람도 내게 고한 이가 없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였다. 세자를 비호했던 신하 중엔 영조가 후에 '''세손의 원수라고 했던 김상로도 있었다.'''[18] 세자가 죽을 무렵 김상로는 세자를 옹호했다는 죄로 파직된 상태였다. 그리고 홍봉한의 경우, 영조는 이후에 매번 이것 때문에 화를 내고 파직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번 그를 등용했다.
또한 '''풍산 홍씨 가문과 경주 김씨 가문은 당파만 같은 노론일 뿐이지 서로 죽일 듯이 으르렁거린 철천지 원수였다.''' 영조 시절 은언군 사건 때 김귀주는 정후겸과 연합해서 홍봉한을 역모로 공격하고 한유를 사주해서 공격하는 등[19] 결국 홍봉한을 실각시켰다. 정조의 즉위 이후에도 줄곧 홍봉한의 처벌을 요구하다가, 정조가 세손 시절 홍봉한을 죽이기 위해 자신까지 위협에 빠뜨렸다며 정조에 의해 도리어 귀양가게 된다.
또한 사도세자 생전 평양 서행 때도 김귀주는 이를 막지 못하고 감춘 홍봉한과 정휘량을 공격하는 상소를 밀봉해서 영조에게 올렸을 정도로, 이미 사도세자 생전부터 두 가문은 적대적인 관계였다. 이 밀봉 상소 이야기는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 8년 실록에서도 정조가 잠깐 언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사이좋게 손잡고 세자를 제거했을까? 정상적으로 보자면 서로가 세자의 진정한 보호자라고 자처하여 세자에게 붙으려 했을 것이다. 실제로 두 가문은 서로가 세손, 즉 정조의 보호자라고 자처했다.[20] 굳이 따지자면 세자의 비행을 감추다가 나경언의 고변 등으로 영조에게 걸려서 자신들까지 작살나게 생기자 사도세자가 아니라 영조에게 죽을 판이라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합세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자기랑 친해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자를 없앤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하다. 물론 노론이 명백히 친소론 임금인 경종을 세자 시절에 해코지하려고 숙종과 결탁한 사례나 소론 준론이 친노론 임금인 영조를 없애기 위해 위의 김씨 성의 궁인을 찾는 옥사를 확대하라고 한 전례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나마도 세자를 직접 공격하지도 비방하지도 않는 형태로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었고, 세제가 명목상 반역 수괴였다던지 하는 명분이라도 나름대로 있었다.
반면 친소론이라는 증거도 없는 세자를 친노론이 아니니까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을 가능성도 없고, 만약 그렇다면 그 뒤의 정조가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14년간 대리한 세자도 없앴는데 세손을 못 없애겠으며 자기네들이 죽인 세자의 아들이 승계하는 것을 미쳤다고 지지하겠는가. 훗날 홍인한, 정후겸이 대리청정을 막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조가 노골적으로 척신인 풍산 홍씨를 멀리하는 행보를 밟아서 그랬던 거고, 정조가 장성하기 전까지는 풍산 홍씨를 비롯한 노론 조정은 정조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세손과 잘 지냈다. 그리고 탕평당 소리까지 들으면서 영조의 말에 굽신대느라 당색이 별로 없던 풍산 홍씨와 적대한 후에도 정조는 정작 같은 노론이면서 의리를 내세우며 당색이 매우 강했던 경주 김씨들과는 무척이나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정조 즉위 과정의 최측근 세력인 김종수를 중심으로 하는 청명당이 그 노론 벽파의 전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노론 = 反사도세자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리고 사도세자를 변호하다가 자살한 스승인 이천보 이후 민백상도 당론으로 보면 노론이었다.
그리고 영조가 고령이었다는 점을 다시 감안해야 한다는 것인데, 사도세자가 내일 왕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저질 사극 보고 사람들이 영조 시절에는 당파 싸움이 잦았고, 변란이나 옥사가 끊이지 않았으며, 정국이 불안정한 시절로 오해한다. 하지만 실제로 영조 시절에는 대규모 옥사나 반란이 거의 적었던 시절이었고, 끽해야 이인좌의 난이나 나주 괘서 사건정도다. 이 시기에는 중종, 광해군, 숙종 시절처럼 대규모 옥사나 환국이 자주 일어나거나, 선조나 인조 시절 처럼 대규모 외침도 없었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노론이나 소론도 과거와 다르게 많이 변했다. 노론의 경우에는 삼수의 옥으로 인해 노론 강경파가 사라졌고, 소론도 마찬가치로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 이후로 소론 강경파가 없어진 상황에서 당시에는 노론이나 소론 모두, 영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탕평파들이 집권한 상태였다. 그런 판국에 세자를 흔들려 하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행위였다. 세자가 공부를 안 한다고 비판하는 대간들이 영조에게 말 잘 했다고 칭찬받고 상을 받아도 노소남북의 당색에 관계 없이 대신들이 '''"저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하고 오히려 상을 받은 대간들을 동정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도세자의 광증이 심해져서 궁인들을 마구 베어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찾아가서 대체 어쩌면 좋겠냐고 울면서 묻자 영빈 이씨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냐고 통곡했고 영조에게 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는데 혜경궁이 대경실색하며 '''"세자 험담을 왕에게 한 것을 세자가 알면 살아남지 못한다!"'''라고 미친 듯이 뜯어말렸다. 아내까지 저러는 판국인데 신하들은 오죽했을까.
또한 영조가 노론의 모함을 듣고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것은 영조의 지성을 매우 폄하하는 소리다. 영조가 노론의 이간질에 함몰될 사람이었다면 그 전에 정미환국이니 쌍거호대 정책을 비롯한 완론 탕평책을 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인좌의 난이 터지고 나서도 소론 대신들을 계속 중용한 사람이 영조다. 영조는 숙종 때 역당으로 찍힌 남인 체제공조차도 중용했다. 게다가 남구만, 유상운까지 거론하며 "헤헷, 소론은 역적이고 우리가 정의라니까요!" 라고 주장하는 노론을 개발살내고 "니들이 내 칼에 죽고 싶구나."라고 일갈하여 온 노론들에게 다신 당파 싸움 안 하겠다는 내용의 반성문까지 받아낸 왕이 영조다. 자신과 노론의 결백을 주장하는 천의소감을 편찬하면서도 당론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했을 정도. 그런 영조가 노론들의 싸바싸바에 넘어가 세자를 죽인다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해 보인다. 만약 세자가 죽은 시점이 영조가 나이를 먹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70대, 80대 시절이라면 납득은 가겠는데 사도세자를 본격적으로 갈구던 시절의 영조는 아직 정신이 온전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다 양보해서 노론이 사도세자를 싫어했다고 쳐도, 사도세자를 몰아내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가의 기록이 전혀 없다. 이간질을 했다는 소리는 이미 나경언의 고변과 영조의 반응을 통해 관서행과 같은 세자의 실제 비행조차도 보고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반박이 되었다. 그리고 노론 대신들은 표면상으로라도 사도세자를 옹호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험악해지기 시작했을 때도 신하들은 당파를 막론하고 '세자 저하에게 조금만 더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 '힘들더라도 주상 전하를 뵙고 노력한다면 주상께서도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라고 권고하며 관계를 풀어주려고 했다. 신하로서의 의무도 의무지만, 이런 식으로 현재 권력인 영조와 미래 권력인 세자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 지 알 수 없었다. 신하들로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런 노력을, 하다못해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했다.
게다가 당시 영조가 정말로 세자를 죽이면, 말 그대로 당장 왕실이 위험할 수 있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세자를 죽인 뒤 영조도 곧 죽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었다. 임오화변 당시의 세손의 나이는 11세로 몇 년 뒤면 조선 시대엔 명목상 성인이라고 하나 그래도 한동안 영조의 지원이 필요한데, 이게 몇 년이나 갈 수 있을지 당시로선 도저히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세손이 미처 장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조가 죽을 경우 수렴청정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를 해야 할 왕실의 큰 어른인 정순왕후 김씨도 정작 세손과 겨우 7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어린 나이이고 정치 경험도 짧다. 세손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는 왕비가 아닌 세자빈인데다 명목상 폐세자의 아내라는 신분상 함부로 정치 일선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며,[21] 이쪽 역시 나이가 많지 않아(임오화변 당시 기준으로 28세) 왕실을 장악하기가 쉽지 않다. 사도세자의 친모이자 세손의 친할머니인 영빈 이씨는 후궁이어서 처음부터 제외. 실제로는 세손이 장성할 때까지 영조가 충분히 오래 살아줘서 망정이지, 차기 국왕의 나이가 어린데 이를 뒷받침해줄 어른이 마땅치 않다면 왕실의 안위는 지극히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인조 대에서 갈라져서 8~10촌이나 되는 소현세자계나 인평대군계를 쉽게 옹립하기는 어렵고. 단종 대에 왕실 어른이 모두 사라져서 의정부가 황표정사로 위태위태하게 국정을 운영하다가 계유정난으로 피바람이 일어난 선례가 이미 있었다. 그 당시의 노론 신하들도 이를 무시할 정도로 바보들은 아니었다.
이상적인 방법으로 신하들이나 왕실 사람들이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거나 사도세자의 정신을 치료하려 하고, 이게 성과를 거뒀다면 가장 좋은 결과를 낳았겠지만, 이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당시 조선은 엄연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고, 일개 신하나 왕실 사람들이 나라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국왕과 왕세자에게 직접적으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아니었다. 그나마 사도세자를 달랠 수 있었고 영조를 상대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왕실 어른인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생존했을 때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22] 남은 건 위에 언급한 신하들의 원론적인 충고 정도가 고작인데 이걸로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18세기 중반 조선.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이란 개념 자체가 없던 시기이다. 기록에서 등장하는 각종 증상들을 보면 현대의 유능한 정신과 전문의 및 심리치료사들도 쉽게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데, 아예 이런 개념이 없던 시대에는 더더욱 해결이 불가능했다.
정리하자면, 신하들이 줄을 설 수 있는 게 지금 왕(영조), 차기 왕(사도세자), 차차기 왕(정조) 뿐인 상황에서, 안 그래도 지금 왕과 차기 왕의 관계가 시한폭탄이라 어느 한 쪽을 밀어주기는 지나치게 위험부담이 컸고 그럴싸한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예로 임오화변의 흑막으로 의심받는 홍봉한조차도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분명 알았음에도(사도세자가 직접 약을 구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입다물고 있었다. 결국 이 일을 영조 앞에서 입에 담은 건 나경언과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게다가 이 세명은 관계가 먼 방계지간도 아니고 심지어 3대 친부자지간이다. 더군다나 이 음모가 성사된다고 해도, 뒷일을 장담하기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여차하면 왕실 자체가 박살나 판이 깨져버릴 상황이었다. 나경언이 이 일을 터트리자 대신들이 입을 모아 나경언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기어코 사단을 내버린 게 못마땅했기 때문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으로 일이 터지면서 결국 노론이든 소론이든 빨리 입장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 친아버지가 교지를 내려 친자식을 죽인 일이 벌어졌으니, 세자를 죽인 것을 옹호했다가는 훗날 영조가 후회하거나 세손이 즉위하면 뒷감당이 안되고, 세자를 죽인 것을 비판하고 나서자니 당장 길길이 날뛰며 친자식도 죽여버린 영조가 무서운 상황이었다.
혜경궁 홍씨나 정순왕후 김씨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남편이 잘못되면 혜경궁 홍씨는 당장 자신의 처분부터 걱정해야할 판이었다. 설령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훗날 즉위한다 해도, 당장 혜경궁 홍씨 자신이 궁에서 쫓겨날 가능성은 넘치고도 남았다. 특히나 사도세자가 사사되고 폐위된다면 연좌제가 존재하는 당시 상황상 정조가 즉위할 가능성도 멀어진다. 후에 영조가 바로 사도세자를 복권해준 것도 이 때문. 효장세자의 장자로 입적되었다 한들 친부가 죄인이면 정통성에 흠이 남을 수 밖에 없고, 정통성 때문에 한평생 치를 떨어야 했던 영조가 아끼던 세손에게 그런 멍에까지 남겨줄 이유는 없었다.거기에 정조가 성장 과정 중 잘못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시에도 영조에게 아들은 없어도 손자는 더 있었다. 그나마 영조가 정조를 매우 총애하고 세손으로 확실하게 인정해주었으며, 혜경궁 홍씨를 보호해서 자궁(慈宮)이라는 어정쩡한 위치로나마 궁에 남은 것이다. 만약 영조가 조금 더 냉혹했다면 정통성과 연좌제를 명분으로 홍씨를 폐출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정순왕후도 마찬가지. 정순왕후 김씨도 자신에게 후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만약 사도세자를 노려 밀어내려 했다면 서슬퍼런 영조가 아끼는, 세손까지 제거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오히려 정순왕후 입장에서는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게 현명했고 훗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사실 그 이전에 사도세자 사사 당시 정순왕후 김씨는 어린데다 왕후 자리에 앉은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친정도 큰 권력이 있지 않았다. 굳이 꼬아서 생각해보자면 혜경궁 홍씨의 친정을 밀어내려고 사도세자를 밀어내려 했다고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임오화변 당시 정순왕후는 아예 개입한 흔적이 없다. 혜경궁 홍씨가 정순왕후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에조차 임오화변 당시에 그런 기록은 없는 것을 보면 의심할 만한 근거가 없는 셈. 다만 훗날 정조를 둘러싸고 두 가문이 으르렁거리게 되긴 한다. 영조 성격과 당시 국정 장악력을 볼 때 궁중 여인과 그 친족들이 세자와 세손까지 좌지우지하도록 놔둘 사람도 아니었다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3.2.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을 앓았는가?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쓴 책 한중록은 세자가 화병으로 인해 미친 거라고 묘사하고, 영조실록도 기본적으로 한중록의 묘사와 거의 일치한다. 심지어 소론 측의 기록인 현고기에서도 사도세자의 정신병이나 살인은 부인하지 않으며 한중록의 주장과 배치되지 않는다.[23] 반면, 정조의 주장이나 고종실록에 의하면 신동이라거나, 차기 군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로 표현된다. 실록의 경우, 조선 전기에선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고 한 게 큰 문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왕이 사초를 만들 때 마음대로 관여할 수 없었지만 이 시대엔 그렇지 않았다. 영조 대와 정조의 사관들은 이상할 정도로 왕의 말을 잘 따라서, 기록하지 말라는 건 기록하지 않고 빼버렸다.[24] 실록이 이럴 진데 승정원일기는 정조의 명령으로 세초된 부분이 더더욱 많고. 영조 실록 또한 정조 즉위 후 편찬하면서 대신 한 사람에게 사도세자 죽음 전후 십 년 정도의 기록을 맡겨서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사도세자 처분 때 실록을 보면 사관이 영조가 직접 지은 폐세자반교문마저 내용이 심해서 싣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그러니 한쪽만 믿기보다는 각각 비교해보면서 복합적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영조 31년부터 세자가 병에 걸렸다는 것이 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세자의 광증이 실록에는 보이지 않고 한중록에만 발견되니 그를 몰아내려는 음모였을 거라는 말이 있는데 아닐 개연성이 크다고 추측된다. "발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라고 적힌 부분은 최소한 그의 정신적 압박감이 크다는 점을 나타내고, 소론 측 기록인 현고기에서는 세자가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철편을 휘둘러 사람을 때려죽인 일화를 싣고 있다. 실록에서도 "병이 있지만 봐 줄 수 없다"고 했다. 한편 정조가 김조순에게 한 비밀 얘기를 적은 영춘옥음기에서도 사도세자의 병을 말했다. 장인인 홍봉한에게 세자가 직접 "내가 병이 있으니 약을 구해 달라"고 쓴 편지도 있다. 이덕일은 혜경궁이 한중록을 쓴 이유가 자기 친정을 위해서고, 세자를 일부러 미친 것으로 묘사했다고 하고 있지만, 세자의 병에 대해서는 실록에서도 아들 정조도 아버지 영조도 장인 홍봉한도 심지어 소론들까지 모두 긍정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평 역시 행장에 나온 것뿐이다. 그것도 온양 온천에 행차했을 때 딱 한 번. 문제는 이 때 그를 따랐던 사람은 500명 수준이었고, '''세자의 스승을 1명도 안 데려갔다'''고 한탄하는 게 실록에 남아 있다. 근데 행장에는 온양으로 가서 매일마다 서연을 열었다고 한다. '''가르쳐 줄 사람이 1명도 없는 상황'''에서. 이것 역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혜경궁 홍씨의 말대로, 아버지 영조의 병적인 괴롭힘으로 인해 우울증과 화병을 앓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쓴 편지에 가슴이 답답하며 울음이 나고 마음이 아프니 약을 찾아봐 달라고 호소하는 글이 있고, 실록에 나타난 영조와의 대화 또한 미치기엔 충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조는 웃으면서 대화하다가 돌연 태도를 바꿔 세자를 죽일 듯이 혼냈고, 그때마다 세자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심지어 대답을 잘 해도 "조사하면 다 나와"하는 식으로 세자를 불신하며 혼냈다.
워낙 민감한 문제라 당대에도 기록하기 껄끄러운 문제였고, 파기된 기록도 있는데다, 남아있는 기록도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다. 다만 남인 계열 시파인 박하원(朴夏源)이 지은 대천록(待闡錄)이라는 책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광증으로 죽인 사람의 수를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드러난다. '세자가 중관, 내인,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라고 적고 있으며 이는 한중록에서 생모 영빈 이씨의 내인마저 죽이고 내관 등을 처참하게 살해한 정황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증언과 합치된다. 단순히 이게 어느 남인 학자의 연구에서 그쳤다면 모르지만 문제는 그가 이 책을 '천유록(闡幽錄)'이라 이름 지어 정조에게 올렸고, 정조는 '''그 내용에 동감하면서도''' 곧바로 세상에 내놓지 못할 것을 알고 '대천록'이라 이름을 고치게 하여 저자에게 다시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25] 나경언의 고변에 등장하는 사도세자의 후궁인 수칙 박씨도 그가 의대증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죽인 것이다. 당시 영조가 세자를 꾸짖을 때 처음으로 한 말이 수칙 박씨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실록에 적혀 있는 기록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汝搏殺王孫之母),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2014년에는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의 정신과 의사들이 한중록을 분석한 결과, 한중록의 내용은 현대의 정신 의학 지식이 없이 허구로 지어냈다고 보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한중록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묘사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연구 결과이다. (본문에서 인용한 글의 Lee DI은 물론 '이덕일'을 의미한다.)정축년·무인년(영조 33년 ~ 34년) 이후부터 (사도세자의)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사도세자가)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 《영조실록》, 영조 38년 윤 5월 13일자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친정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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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관서행의 목적은?
실록의 기록에 사도세자는 영조 37년(1761년) 4월 2일부터 22일까지 관서 지방을 여행하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관서행의 목적은 임오화변 관련 논쟁의 키 포인트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세자가 평양으로 놀러간 것이 영조에 대한 반발로 쿠데타를 시도하려 했다고도 한다. 평양은 평안도의 요충지로 조선 북방군의 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며, 사도세자의 외삼촌과 화완옹주의 시숙인 정휘량이 그 지휘를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조가 즉위 후 이 부분을 실록에서 날려버림으로서 진실은 미궁 속으로. 결정적으로 평안도 군대와 사도세자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사료가 없어서 더 이상의 추론이 불가능한 상황.
뒷날 정조는 사도세자의 지문을 지으면서 관서행의 목적은 역적들의 모의를 저지하기 위함이었으며, 홍계희가 병란을 일으키려 하자 관서 지방에서 급히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적었는데, 실록의 기록과는 많이 다른 내용이며 즉위 초기부터 아버지의 반대파를 숙청한 정조의 입장상 아버지를 나쁘게 쓸 리가 없기 때문에 신용하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정황상 말이 안되는 부분이 더 있다. 우선 변란을 막기 위함이라면 그냥 저런 일이 있다고 영조에게 보고하면 세자로서 임무는 끝이 난다. 자기가 평양까지 갈 일은 없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실수도 꼬투리를 잡고, 없으면 자기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극도의 모욕을 주고 괴롭힌게 영조이다. 그런데 세자가 변란의 조짐이 있다고 '자기 멋대로' 요충지인 평양까지 굳이 가서 일을 처리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의도적이지 않지만, 역도를 놓치거나 모의가 발전해 실제 군사적 변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하는 잘못이라도 저지른다고 생각해보자. 영조가 대체 세자를 어떻게 대할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영조를 극도로 두려워한 세자가 이러한 '모험'을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실록을 보면 관서행을 안 영조의 대응이 생각 외로 온건해서 단순 유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의 쿠데타 설대로라면 사도세자에 대한 처벌은 영조가 이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나타났을 텐데 영조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거기다 세자가 평양에서 돌아온 날인 4월 22일 유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유람'''을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며 주변에서 놀자고 꾀는 무리들을 물리치라고 한다.[26] 5월 초까지 유생과 신하들의 이런 잔소리는 계속된다.
단 이 시점에서 유생과 신하들이 모두 세자의 관서행 자체를 확실히 알고 있는지는 조금 불확실하다. 실록의 표현을 보면 '여항(閭巷. 일반 백성들을 표현함)에서 근거없이 지껄이는 말이 있다', '감히 떠도는 말에 대해 모두 믿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모두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다'라고 나오기 대문이다. 물론 관서행을 알았더라도 예의상 직접적으로 세자를 추궁하지 않고 이런 소문이 나돈다는 식으로 돌려서 말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자가 정말 관서에 다녀왔는지 확신하지는 못하고 '평소 세자께서 바깥으로 자주 놀러 나가다 보니, 이젠 관서까지 가신다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처신을 잘하십시오'라고 단순한 충고를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자는 그게 아버지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홍봉한에게 의논한다. 결국 진현(임금을 만남)을 하는데 이게 1년 만에 아버지에게 간 거다. 이런 모습은 뭔가 큰일을 한 다음의 모습이 아니라 '''큰 잘못'''[27] 을 저지르고 그게 알려질 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세자가 진현했을 때 영조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세자는 자신의 관서행이 들키지 않은 것을 알고 기뻐했다. 이 일이 영조에게 알려진 건 5개월이나 지난 9월 때. 유람을 다니면 안 된다고 비판하는 소를 대간들이 올리자 세자는 "야, 내가 진작 반성했는데 어찌 내 마음을 몰라주고 이런 글을 올리냐?"라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은 이런 글이 올라갔다는 글이 조보에 실리고, 그 조보를 영조가 보고 격노해서 승정원일기를 가져오라고 명하면서 관서행이 들키고 말았다.
그런데 영조는 그러고도 세자를 직접 꾸짖지도 않고 관련자들만 처벌하고 조용히 묻었을 뿐이다. 세자의 대죄에도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비교적 부드럽게 넘어갔고, 덕분에 세자는 정말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러니 박시백 화백은 세자의 관서 행에 대해서는 역모나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순한 유람이었다고 보았다. 정말로 사도세자 역모설이 떠돌기 시작한 것은 노론의 사주를 받았으니 하는 낭설이 떠도는 나경언이 고변서를 전달할 때였는데, 그는 자신이 바치려는 글이 사도세자의 반란 고변이라고 강조했지만 정작 그가 바친 소는 세자의 비행을 나열한 것일 뿐이었으며, 결국 그는 동궁을 모함하려 한 것이라고 실토하곤 처형된다. 또한 사도세자 죽음의 결정적 계기가 된 영빈 이씨의 말은 사도세자가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 아니라, '제정신이 아니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반란 시도가 있었다면, 그리고 편집증 강한 영조가 그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면 그 관련자들이 임오화변 이후에 대거 처형되었어야 하는데, 임오화변 이후 죽은 사람은 사도세자를 모시던 궁녀, 내시, 여승 등이 전부였고, 기껏해야 나중에 이 일을 뒤집으면 괜히 우리만 역적으로 몰린다는 홍봉한의 주장에 따라 사사된 조재호가 전부다.
3.4. 나경언의 고변
세자가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나경언의 고변이 있다. 그는 "반란 고변"이라고 하며 영조와 직접 만나게 된 뒤 품속에서 다른 종이를 꺼내는데, 그건 반란이 아니라 '''세자의 비행'''을 적은 것이었다. 총 10개 항목이 있었는데, 경빈 박씨 등 사람을 죽인 것, 북성(북한산성)으로 놀러 간 것,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안 갚은 것 등이었다. 나경언이 직접 쓴 글은 홍봉한과 윤동도(당시 우의정)가 돌려 본 뒤, 홍봉한이 이런 글을 남겨두면 안된다고 말해서 영조가 불태우게 했다. 다만 저 내용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직접 따지면서 언급한다.
영조는 이 글을 보고서 크게 분노하여 "지금 조정에서 사모 쓴 이들은 다 죄인이다! 한 사람도 세자의 비행을 내게 고하지 않았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조정을 질타한 다음에 세자를 불러 세자의 각종 비행, 그 중에서도 수칙 박씨를 때려죽인 것을 가지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고 매우 엄히 꾸짖었다. 사도세자는 나경언의 모함이라고 울며 주장하고, 나경언과 대질시켜 달라고 요구했지만 영조는 "대리하는 저군이 대질을 해? 이 무슨 나라 망칠 소리냐?"라고 엄히 꾸짖으며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세자는 자신의 비행을 인정하고 만다.
이 부분에서 노론의 모함이란 주장은 완전히 현실성을 잃게 된다. 세자가 실제로 저지른 비행조차 신하들과 왕실 사람들이 영조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쉬쉬하며 숨긴 결과 일개 백성인 나경언이 고변한 뒤에야 비행이 드러날 정도의 상태인데, 노론이 거짓으로 모함해서 세자를 비방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영조는 국고를 풀어 세자가 시전 상인들에게 빌린 돈을 갚게 했는데, 그 양이 엄청나서 또 분노한다. 실록에 따르면 잔치와 하사품 구입 때문에 세자궁의 예산이 텅텅 비어서 빌린 돈이 적지 않았다고. 그리고 영조는 나경언이 용감하게 말했다고 칭찬했지만, '세자의 비행'을 '역모'로 과장하여 조정을 어지럽힌 죄가 크다는 신하들의 비난이 커서 네 차례 매를 때리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결국은 나경언을 참수한다.[29]"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28]
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중
3.5. 선희궁(영빈 이씨)의 고백
이런 상황에서 세자는 매일 석고대죄를 했지만 영조의 반응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사도세자는 영조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고 "기어이 없애겠다." 등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말이 많다. 세자가 정신병에 걸려서 횡설수설했다는 얘기도 있고, 부왕을 죽이겠다는 말인데 차마 이 말을 그대로 적을 수 없어서 주어(세자)와 목적어(영조)를 빼고 기록했다는 얘기도 있다. 왕조 시대에 대놓고 왕을 죽이겠다는 말을 기록이나 할 수 있을까. 왕이자 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을 기어이 없애겠다고 말한 게 진짜라면 한중록에 나온 것처럼 궐 안이 흉흉해질 만하다. 이즈음 사도세자의 친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영조를 만났는데, 그건 종사를 위해 세자를 죽이라는 말이었다. 영조는 이 말을 들은 다음 날 세자를 죽인다.
그녀가 말한 것은 세자가 아버지를 죽이겠다느니 하는 말을 했다는 것,[30] 그러니까 세손과 혜경궁을 보전하여 종사를 안전케 하려면 '''병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는 세자가 영조 뿐만이 아니라 세손까지도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도 내재되어 있는데 한중록의 기록에 따르면 자녀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극진히 모시던 어머니에게까지도 불손한 모습을 보이는 등 병증이 더 심해진 모습을 보인다. 기록을 보면'''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사오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을 정리에 못 하올 일이오되, 성궁을 보호하옵고 세손을 건지와 종사를 평안히 하옵는 일이 옳사오니 대처분을 하오소서. 부자의 정으로 차마 이리하시나 병이니, 병을 어찌 책망하오리까. 처분은 하오시나 은혜는 끼치오셔 세손 모자를 편안케 하오소서.'''
이는 세자로 인해 삼종(효종, 현종, 숙종, 영조는 숙종의 아들)으로 이어지는 왕통이 끊어지고 왕실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에 영조는 '대처분'을 감행하지만 이에도 반발이 있었다. 도승지 이이장 등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직전에 어찌 아녀자의 말만 듣고 국본을 해칠 수 있냐는 것인데, 영조는 반발한 자들을 모조리 처벌하며 강행했다. 대의를 위한 결단이라고 해도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섰다는 증거도 없이 단지 그 말만 가지고 죽인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것은 어머니의 말은 그저 명분 찾기일 뿐[31] 영조가 진작부터 세자를 폐하는 수준이 아니라 죽일 것을 계획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부분이다.[32]'''경진 탄일에 또 무슨 일로 격화가 대단히 오르셔 그날부터 부모 위하시는 공경하시는 말씀을 못하시고, 상말로, 천지를 분리하지 못하듯이 노엽고 서러워 하셨다. "살아서 무엇 할까. 살아서 무엇 할까. 살아서 무엇 할까." 선희궁께 공손하지 못한 말을 많이 하시고, 세손 남매 문안하니 크게 소리 지르시며, “부모 몰라보는 것이 자식은 알아보랴! 썩 물러가라." 하시니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어린 아들들이 아버님 생신이라 인사하여 뵈려 하다가 엄한 호령을 듣고 크게 놀라던 모습이 오죽하리오. 병환이 심하시되 나에게나 괴로이 구셔도 어머님께는 그리 못하시더니 그 날에는 병환을 감추지 못하셨다. 전일 선희궁께서 비록 병환 말씀을 들으셔도 혹 과한 말인가 의심도 하시다가 처음으로 보시고 크게 놀라 아무런 말씀도 못하셨다. 병환이 점점 깊어지셔서 칠순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시고 자녀를 사랑하시던 것을 잊으시고, 그리하셨다.'''
그러나 어쨌든 이 일에 대해 담담하고 후회없는 반응을 보였던 영조에 반해 영빈은 아들의 죽음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 한탄하다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난 바로 다음날 사망했다. 어찌 보면 아들에 대한 죄 값을 치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조는 종사를 위한 결단을 한 공이 크다 하여 그녀에게 '의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사도세자계를 제외한 그녀의 후손들은 대부분 불우했다. 성년까지 살아서 작호를 받은 것은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3명이었으나, 앞의 두 옹주는 일찍 죽었다. 아들인 사도세자도 결국... 그나마 오래 살았던 게 화완옹주.[33] 또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남성 직계는 헌종 때 끊기고 사도세자의 다른 아들계는 정치사에 얽혀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등 박살날 뻔했다가 어찌어찌 복위되었지만, 결국 철종 이후로 사도세자의 남자 쪽 후손은 실질적으로 단절됨으로써 효종의 남성 직계는 끊어졌고 이후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후손인 고종이 조선 왕조를 이어간다.
3.6. 보충
영조가 세자 생전에 벌인 선위 '''쇼'''만 3번이다. 그 중 한 번은 세자가 가만히 있자 '''"넌 왜 가만히 있느냐"'''면서 화를 냈고, '''"내가 시를 읽을 테니 울면 효성이 있는 걸로 알고 선위 명령을 거두겠다"'''고 했다. 세자가 제대로 거부하는 퍼포먼스를 보이지 않으니까 이런 것이다. 다행히 세자는 눈물을 흘렸지만, 영조는 약속과 달리 선위를 거두지 않았다. 그 후 며칠 동안 생난리를 쳤는데, 세자는 이번엔 제대로 반응을 해줬다. 하지만 영조는 계속 선위하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세자가 '''매일마다 닫힌 문을 밀치고 들어가야 했다.''' 안 하면 또 불효 자식이라고 욕할 게 뻔하니... 이 정도면 미칠 만하다.
물론 세자가 병이 있든 없든 세자 스스로도 공부를 정말 안하긴 했다. 신하들의 요구는 단 하나, 공부하라는 거였다. 하지만 세자는 병을 핑계로 거부했다(이게 꾀병이라는 시각도 있고, 마음의 병이 신체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물론 진실은 사도세자만 알겠지만). 영조가 웬일인지 딱 한 번 세자에게 잘해준 적이 있는데, 역시 반 년 만에 돌아섰다. 그 이유 역시 공부를 안 한다는 것. 그러면서 세자의 스승들을 모두 파직했다.
중요한 건 이렇게 세자에게 화를 내며 그 스승들을 파직했던 때와 세자의 어린 아들을 세손으로 책봉하고 스승들을 정한 후 심심하면 불러서 공부 상황을 물어봤던 시기가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것. 물론 세손은 정말 대답을 잘했다. 이후 영조는 그를 계속 부르는데, 정작 세자의 진현은 거절한다. 말로야 세자가 아파서 그렇다 하지만 정작 세손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불렀다. 어느 날 영조는 세손과 문답을 한뒤 이를 칭찬하며 이런 말을 한다.
이 시기는 관서행이 있기도 전이다. 이 때 영조의 마음은 이미 세손에게 가 있었다. 세자 역시 그걸 알았는지 한중록에는 그에 관련된 얘기를 하고, 세자의 예상대로 영조는 사도세자 사후 세손을 효장세자에게 입적시킨다.임금이 여러 강관(講官)에게 앞으로 나아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지금 세손(世孫)을 보니, 진실로 성취(成就)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命脈)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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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97권, 영조 37년 1월 5일 을사 2번째기사, 주강에서 왕세손과 공을 성취하는 것 등에 관하여 논의하다
관서행은 물론 각종 비행은 몇 달부터 1년이나 지나서야 영조의 귀에 알려졌으며, 그게 알려진 후에도 신하들은 계속 세자를 옹호했다.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보호하는 신하들이 많았고, 이 때문인지 영조는 기습적으로 세자를 죽였다. 영조가 세자를 역모로 몬 핑계는 앞서 본 바와 같다.
'''정성왕후의 혼령이 내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고 했다'''. 세자의 역모를 알린 사람은 죽은 아내의 혼령[34] 이라는 얘기. 이 정도로 세자를 죽일 명분이 없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점인데, 어쨌든 세자를 죽이길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세자가 영조의 명령을 버티다가 결국 포기하고 자결하려고 할 때도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도승지 이이정 등 주변 신하들이 막았다(매우 소극적인 태도긴 했다). 신하들은 아예 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받아쓰길 거부했다. 뒤주가 나온 이유 역시 이것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아마 신하들은 영조에게 다른 아들이 없으니 오래 가야 이틀 정도 가둔 후 풀어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끝내 그를 풀어주지 않았고, 근처에 계속 머물면서 세자가 죽기를 기다렸던 듯하다.
세자를 모함한 사람 중 하나란 평을 듣는 정순왕후 김씨는 세자가 죽기 2년 전에야 궁에 들어왔다. 이때는 이미 세자와 영조간에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황이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들이 쟁쟁한데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그녀가 저 당시 비정상이란 소릴 들었다 해도 세자, 그것도 영조의 외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아들을 폐서인시킬 정도로 큰 힘을 가졌을 거라 보기는 힘들다. 거기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쓴 건 세자가 죽고 10년은 지난 후였다. 더군다나 당시 조정은 사도세자의 후원자인 홍봉한이 완전히 틀어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순왕후 김씨가 권력을 확보한 것도 오히려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킨 후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가능했다.
게다가 그들이 사도세자를 음해할 생각이 있었다면 일개 유생도 아는 세자의 비행을 왜 영조에게 일러바치지 않았을까? 이걸 알리기만 해도 이간질 효과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10년 후에 홍봉한을 공격하는데, 세자를 죽이려 했고 세손을 위협하려 했다는 거였다. 문제는 이 출처가 세손, 즉 정조가 직접 정순왕후 김씨에게 한 얘기였다는 것. 나중에 정조가 이걸 문제 삼으며 김귀주를 귀양 보내지만, 자기가 정순왕후에게 그 얘기를 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았다. 이를 본다면 정조가 정순왕후와 동맹해서 홍봉한을 공격했다가 나중에 김씨 가문의 힘이 커지자 정순왕후와 김귀주를 배반한 것이 된다.
결국 주원인은 영조에게서 찾아야 된다. 이 사이에서 이간질이 있다 하더라도 영조와 세자 간의 연결이 튼튼했다면 막을 수 있었다. 오히려 임오화변 때 영조는 세자를 옹호하는 신하들을 몇 번이고 내쳤고, 더 이상의 반대를 막기 위해 그것도 자신보다 사도세자와 친했던 첫 번째 아내 정성왕후의 영혼을 핑계댔다. 얼마나 친했냐면 당시 정성왕후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게 사도세자다. 정성왕후가 세자를 친자식처럼 아꼈기 때문이라고. 정성왕후를 찾아가 "소자가 왔습니다."라고 울부짖고 정성왕후가 토한 피를 의관에게 보이며 인사불성이 되도록 오열했다고 한다. 참고로 정성왕후는 늙은 자신보다는 앞으로 태어날 왕손이 중요하단 이유로 평소에 기거하던 대조전[35] 에서 무리하게 서쪽의 관리각으로 옮겼는데, 이게 그녀의 건강을 악화시켰다고 한다.
또 영조 자체에게도 정신적인 문제가 보인다. 출생과 즉위 과정이 과정이니만큼 주변에 의심이 많았고, 비천한 어머니의 출생 때문에 열등감도 심했다. 첫 번째 아내 정성왕후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열등감 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다. 게다가 자신을 여러 차례 비호해준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며 그것을 명분으로 삼는 반란도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심했다. 자식들에 대해서도 편애가 심했던 사실이 기록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다.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즉시 물을 가져오게 하여 귀를 씻고 그 물을 사도세자의 거처 쪽에 버리게 했다.
영조의 모습을 현대 정신의학 진단 기준에 비춰보면 '''편집성 인격 장애''' 진단이 나온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실록의 내용을 토대로 사도세자와 영조의 정신 건강을 분석해 재구성한 논문이 있다. #. 현재 정신의학계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편집성 인격 장애가 있던 영조의 핍박에 의한 중증 조울증[36] 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러한 '''영조의 정신적 문제와 기질, 정치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도세자를 막다른 길로 몰고 갔고, 사도세자 역시 아무리 부친의 심한 홀대를 받았다고 해도 지나치게 파탄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써 파국을 불렀다고 볼 수 있겠다'''. 사도세자의 경우와 반대로 자신을 학대하는 부친 아래서도 잘 버텨내어 훌륭한 군주가 된 경우도 세계사적 사례로 나름 존재하기에 영조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프리드리히 대왕은 아버지와의 성향 차이가 영조와 사도세자의 차이만큼 극단적이지 않았던 점은 감안해야 한다. 허나 다른 누가 견뎌냈다고 (나)도 견뎌야 한다는 변명은 말이 안된다. 사람마다 다 개개인의 차이가 있고 위에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버티어 뛰어난 군주가 될 수도, 아니면 부서지어 사도세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영조는 문제가 있다, 위에 서술한대로 영조의 개인적인 편집증적인 권력의 탐욕과 세자를 도구로 사용하고; 명백히 유교국가에서 사대부에 으뜸인데, 지 아들을 비정상적으로 갈구고 후에 굶겨죽이는 패륜적인 일을 인물이다. 사도세자는 명백히 멀쩡한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영조의 학대 이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는 영조가 사도세자가 자질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정신병까지 있었으므로 영조가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비극적인 결단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커밍스는 한국 근현대사 관련해선 큰 권위를 가진 대학자지만, 전근대 조선사에 대해선 특별한 권위를 내새울 만한 학술, 대외 활동은 보여준 적 없다. 상술한 정보를 총합하면 사도세자는 사실 자질이란 면에선 다른 조선의 세자들에 비해 특별히 모자랄 것도 없었고, 정신병은 누가 뭘로 봐도 학대 가해자인 영조 본인이 초래한 것. 임오화변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아는 상태에서 본인 추측만으로 했을 발언일 가능성이 크다.
3.7.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의 원인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원인을 찾자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선천적인 기질의 차이, 하나는 두 사람이 처했던 성장 환경과 정치적 환경의 차이다.
사도세자는 할아버지 숙종이나 아버지 영조와 달리 무골이었다. 영조부터가 세자가 비대하다고 언급하고 대신들에서 사도세자의 체격이 크다는 점을 강조했고, 영조 실록에서 효종과 닮았다는 기록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못 들던 효종의 무기를 15세에 들기도 했다. 본인의 신체도 건강했고 무예를 좋아하고 사냥도 나갔던 점을 보면 세종이나 경종처럼 운동 부족으로 비만인 경우가 아니라 태조 이성계나 정종, 태종처럼 다부진 몸이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그 체격에 걸맞게 운동과 무예를 좋아하고 보다 활달하고 과감한 성격을 타고났다.
영조는 반대로 어진만 봐도 왕이 되기 전이나 왕이 된 후나 둘 다 가늘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보여주었다. 일단 조상 핏줄 덕분인지 본인이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고 운동도 싫어하진 않았고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서 승마, 달리기, 국궁 같은 격한 운동을 했고 이런 점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영조에게 이것은 운동이었지, 그걸 넘어서 무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영조의 주요 관심사는 글 공부였으며, 무예는 부가적인 것이었다. 성격도 영조와 사도세자는 확연히 달라 활달하고 과감한 사도세자와 달리 영조는 조심스럽고 신중하지만 기민하고 민첩한 성격이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영조가 대리 청정을 하는 세자에게 너무 과감하고 조심성 없이 일을 처리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37]
이런 영조에게 자라면서 자신을 닮기는커녕 외양부터 자신과 다르고 거기다 글 공부보다 무예를 더 즐기는 모습에 못마땅했을 터였다. 그냥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자신과 안 닮거나 마음에 안 들면 관계가 불편해지는데 영조 입장에서는 자신을 계승해야 할 아들이 생긴 것부터해서 하는 행동까지 마음에 안드니 싫어질 수 밖에 없었다. 둘이 타고난 기질 차이가 큰데가 이런 점을 관대하게 넘어가기엔 영조의 성격이 용납하지 않았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고집이 강하고 자기 방식에 자부심을 느끼는 특성도 있었지만, 숙종 때부터 이어져온 이 고집 세고 기가 센 성격은 심지어 정조 때까지도 이어진다.
여기에 두 사람이 처해있던 환경도 너무 달랐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부터 어머니가 인현왕후 복위에 힘을 보태면서 태생적으로 노론에 속했다. 숙종과 노론이 장희빈 소생인 경종을 대신해서 자신을 차기 왕으로 밀기 시작하자 왕위 경쟁자로 경종이 세자 시절부터 줄곧 경쟁 관계였다. 거기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기록도 빈약한 격이 낮은 집안이었다. 이러다보니 흔히 받을 수 있는 외가 쪽 정치적 지원이 하나도 없는 고립무원의 신세였다. 노론도 연잉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관계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노론 쪽 어머니를 가졌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이었다. 경종도 부왕과 노론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지만 영조 역시 연잉군 시절 경종이 세자로 대리 청정하던 10년의 기간과 경종에게 세제로 책봉받은 뒤 왕이 되기까지 5년간 불안한 환경에 있었다. 나약한 성격의 경종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숙청도 있었고... 신임옥사 참조.
더군다나 즉위 후에는 전국적인 반란까지 겪고 재위 내내 반역과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다. 이처럼 영조의 생애는 태어나면서부터 궁정 암투 한복판에 있었고 신분과 목숨을 신하들에게 위협받는 판이었다. 이래서 영조는 군 시절부터 세제 시절까지 책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정치적인 행동이나 튀는 걸 자제하고 공부에 매진하면서 모범적인 세제로 행동해야 했다. 만약에 무예를 좋아한다거나 무기를 모으거나 무사를 만난 정황이 보이면 역모로 몰리기에 딱 좋았다. 여기에 숙종에게 물려받은 온화하지 못하고 극도로 불같은 면이 맞물려서 상당히 편협하고 마음에 안 들면 꼬장피우면서 끝까지 싫어하고 의심하는 성격으로 뒤틀린다.
사도세자는 영조와는 딴판이었다. 우선 잠재적인 경쟁자인 남자 형제가 하나도 없었다. 이복형 효장세자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그 이외에는 전부 여자 형제 뿐이었다. 서자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라지만 효장세자도 후궁 태생의 서자였고, 적자가 없는 이상 어차피 법적으로 문제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세자가 될 왕자가 한 명 뿐이니 노론과 소론이 각자 왕자를 밀어주려야 밀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당파를 초월해서 지지를 받았다. 여기에 영조는 숙종이 불지른 환국 정치의 후유증으로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으로 엉망이 된 정치적 혼란에서 성장했지만 사도세자는 영조가 반역 진압과 탕평책으로 신권과 당파 싸움을 약화시켰고, 사대부가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임오화변 때까지 사도세자의 비행을 대신들이 감추거나 일단은 영조를 말리려고 하는 등 유일한 왕위 계승자라는 신분 덕에 신하들에게 보호를 받았다. 반대 상황인 사도세자는 훨씬 행동 거지에 자유가 많았고 대신들도 딱히 사도세자가 무예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지 않았고 정통 왕자에 경쟁자도 없는 사도세자는 공부 좀 덜하더라도 문제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영조처럼 목숨마저 위험한 절실한 환경이 아니였다. 사도세자가 영조가 보기에는 공부를 안했지만 총명했던 건 사실이고 국방이나 무예에 관심이 많았고 이는 분명히 왕의 덕목 중 하나였다. 단지 두 사람의 방향성이나 관심사가 달랐다. 이러한 신하들의 비호에는 이처럼 유일한 왕위 계승자라는 점도 있었지만, 또 하나의 이유로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나이였다. 사도세자가 변을 당하기 이전부터 이미 영조는 '''역대 왕 중에 최고령'''이었던 것. 신하들 입장에서는 당장 내일 왕이 승하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인데 미래의 왕이 될 세자의 비행을 고자질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문제는 피비린내 나는 환국 정치 끝자락을 경험했고 본인이 그 영향으로 당파 싸움에 말려서 죽을 뻔했던 영조에게 있어서 세자의 이런 행동은 결단코 용납되지 않았다. 부실한 정통성과 보복이 이어지는 정치 환경을 타파하고자 영조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노론의 끊임없는 토적(=소론 처벌) 요구를 거부했다. 이런 영조에게 자신의 탕평책을 이어가고 정치를 안정화 시키기 위해서는 복잡한 당파 관계를 조율할 정치적 안목과 유학자인 사대부를 찍어누르고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학문적 기량을 갖춘 후계자가 필요했다. 만약에 자칫 잘못하면 탕평책은 무산되고 보복 정치와 환국이 재현될 터였다. 사도세자의 자질이나 관심사는 만약에 조선 초였다면 가산점이 되었으면 되었지 감점 요인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효종만 해도 전후 왕으로써 국방 강화와 함께 무예에 관심을 보였지만 딱히 왕으로서 부족함은 없었다. 하지만 효종같이 무예 못지않게 공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모를까, 사도세자의 행동은 극도의 위기감을 가진 영조가 보기에는 너무나 수준 미달이었다. 또한 영조의 고령은 영조에게도 압박이었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을 제외하더라도 50대에 죽는 게 흔했고 왕들은 평균적으로 40대에 훙서했다. 그런데 영조가 사도세자를 얻었을 때 영조 나이가 42세. 영조도 조바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2살 때 동궁으로 책봉되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38] 반대로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 영조의 압박은 지나치고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도세자도 대리 청정을 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낸다고 자부했지만 영조의 타박은 끝이 없었다.
만약에 사도세자가 그 복잡한 정치적 환경에 안 놓이고 안정적인 환경이었다면 영조의 기대치도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아무래도 훨씬 수월하게 세자를 보내고 왕위에 오르거나, 아니면 영조가 진짜 성격이 좋아서 사도세자를 이해하고 그 자질을 좋은 쪽으로 가져가게 해주려는 좋은 아버지였다면 부자 관계도 좋고 계승도 안정적이었을 터였다.[39] 하지만 하필이면 당대의 정치 환경은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하는 상태에 아버지 영조는 엄격하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조바심까지 있었다. 부자 간 성격의 차이와 그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의 결과는 결국 임오년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다.
4. 관련 창작물
4.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그린 만화가 박시백은 사도세자에 이런 견해를 제시했다. 사도세자가 보인 정신적 이상에 대한 부분은 윗부분과 동일하게 보지만, 정신 이상으로 인해 시전 상인들에게 거액을 빌리고 이를 체납한다든지, 사람 마구 죽이는 등의 기행으로 이어져 영조나 신하들이 그를 부적격자로 분류했다는 것. 박시백은 이를 근거로, 세자의 죽음 원인이 당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다. 만약 당쟁이 원인이면 세자가 저지른 비행만으로도 충분히 폐세자 감이니 신속하게 고발하는 게 정상 아니냐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당시 영조가 너무 고령이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신하들은 일단 세자 말고는 후계자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어 사도 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데 소극적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평양 유람도 사건 발생 후 한참이 지나서야 영조에게 들어갔을 정도다. 당시 노론과 소론은 삼수의 옥, 이인좌의 난, 나주 괘서 사건으로 강경파가 전멸되고 영조의 탕평책의 영향으로 탕평파만 집권한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이전에 숙종과 노론의 세자(경종) 폐세자 기도와 노론과 소론의 연잉군(영조)을 둘러싼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논쟁으로 인해 서로에게 피바람을 경험했다. 그래서 폐세자 건의는 목숨을 담보로 잡는 논제이며, 까딱 잘못했다가는 반란죄, 역모 죄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박시백은 저서를 통해, 신하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즉위할 수 있는 '미래의 국왕'인 사도세자의 비행을 알리기 꺼려했을 것이라 분석했다. 특히 사도세자의 정신이상 증세와 폭력적 행동은 역사에 기록만 안되었다뿐이지 당대 고위직 신료들은 다 알고 있었을텐데 이런 상황에서 괜히 사도세자의 비행을 깠다가 덜컥 영조가 승하라도 해버리면 이를 고발한 신하는 바로 왕을 능멸한 신하가 되는 것이었다. 이게 정말로 벌어졌던 사례가 연산군이었는데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악행을 아버지 성종에게 일러바쳤다는 점을 바탕으로 '위를 능멸했다'는 죄목을 붙여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고문하고 때려 죽였다. 이에 대해 실제 모함을 저지른 것은 아니고 연산군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적어도 연산군 본인은 그렇게 여겨 죄인 취급을 했다.
그나마도 이는 왕의 어머니였지 이 경우는 사도세자 본인이 문제였으니 더 심각했다. 쉽게 말해 신하들은 '연산군 시즌2의 1호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아 했다는 것. 그리고 어찌보면 연산군보다 더 심각한 케이스인게, 연산군은 즉위 초반까지는 멀쩡하게 집무를 수행했고 다소 과격한 언행을 보인 적은 있으나 그냥 좀 거친 성격 정도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이미 세자인 그 당시에도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였고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악행을 신나게 일러바쳤다가 덜컥 세자가 즉위라도 하는 날에는 즉위 당일날 바로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셈. 이러니 신하들이 사도사제의 악행을 고발하기 꺼려했던 것.
이런 상황에서 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태어났고, 덤으로 이 세손이 매우 똑똑해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어릴 때부터 증명했다.[40] 나이도 사도세자가 사망할 때를 기준으로 11세로, 몇 년만 더 지나면 조선 시대에는 명목상 성인으로 봐도 될 정도라서, 영조로서는 세손을 정식 후계자로 바꾸어도 충분했다. 실록을 보면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영조가 세손에 대한 편애를 시작한다.
세자가 몇 달 동안 진현하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는 반면, 세손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불러서 만나고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을 방문하는 등의 대외 행사에도 세손을 함께 참석시킬 때가 많았다. 결정적으로 영조 본인이 후계자 교체를 암시하는 발언을 하고야 만다. 세손을 불러다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한 뒤, 훌륭하게 대답한 세손에게 '''"300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는 발언[41] 을 한 것. 아무리 세손이 영특해도 세자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마당에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이미 영조는 세손으로 후계자를 교체하기로 했음을 신하들에게 알리는 행위였다고 박시백은 보았다.
또한 문제의 관서행에 대해 의외로 영조가 온건하게 대응한 것은, 세자가 단순히 유람을 다녀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자를 완전히 포기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관서행을 계기로 세손을 공식 후계자로 결정하는 생각을 굳혔다는 셈이다. 다만 관서행 자체는 군사 반란과 같은 심각한 사항이 아니라서 그것만으로 당장 폐세자를 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고 나경언의 고변과 영빈 이씨의 발언이 영조에게 가장 결정적인 명분을 주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박시백은 굳이 그를 죽인 이유는 단순히 부적격자인 사도세자를 단순히 폐위만 했다가는, 후에 세손이 즉위한 후 사도세자가 그의 친아버지라는 이유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거나, 양위 형식으로 왕이 돼서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즉 광인이 임금이 돼서 미래의 폭군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 똑똑한 세손을 후계자로 만들고자 벌인 일이라는 게 박시백의 주장이다.
실제로 사도세자도 부왕 영조가 세손을 훨씬 아낀다는 것을 알았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궁합이 어긋났고, 자신이 인정했듯 영조는 성격이 괴팍하고 편벽되었다. 그리고 영조가 질책을 거듭하면서, 사도세자는 갈수록 비뚤어졌다. 더구나 사도세자는 이미 많은 비행을 저지르고 광증을 보였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자기 운명이 이미 글러먹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영조가 서명응의 상소로 인해 그의 관서행을 알면서, '(나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불안감을 내비쳤다는 이야기가 <한중록>에 전한다. 부인 혜경궁 홍씨에게 "아무래도 내 아들(세손)을 더 귀여워하시니 날 없애도 상관없지 않겠느냐"고 운을 떼었는데, 혜경궁은 단호히 '세손이 당신의 아들인데, 부자는 화복(禍福)이 같지 않겠느냐'는 일반론적 근거로 세자를 안심시키려 했건만, 사도세자는 "나를 내치시고 난 후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버리면 어쩌겠는가"라 하였다고. 혜경궁이 그럴 리 없다고 하였지만 사도세자는 '아버님께서 (며느리인) 자네는 귀여워하시지만 나는 이토록 미워하시니 나를 살려두시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사도세자가 했던 말은 전부 적중했다. 실제 임오화변 당일조차 상술했듯 세손의 휘항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가 세손을 더 아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다. 임오화변 직전에 세자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며 흉흉한 유언비어가 궁중에서 나돈 것도, 세자가 아버지 영조는 물론이고 아들인 세손까지 해치려는 듯한[42]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란 설. 더 나아가 박시백은 '세자만 없애고 세손으로 후계를 삼는다.'는 계획에 영조와 신하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다고 본 것이다. 박시백은 태종이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으로 후계를 수정한 경우에서 보듯, 대안이 아우였다면 폐세자 정도로 그쳤겠지만 하필이면 대안이 그의 아들이었기에 후폭풍을 우려하여 그냥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임오화변 당시 후일 정조의 건의로 '삭제된 기록'에 대해서도 추측을 했는데 더이상 자신이 살아날 길이 없음을 직감한 사도세자는 정신이상 증세가 극에 달해 궁중에서 칼을 들고 "아버지와 세손을 죽이겠다." 수준의 난동을 부린 것은 아닐까하고 추측했다. 단순 유람과 달리 이는 명백히 안으로는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패륜이고 밖으로는 국가의 지존인 왕을 시해하겠다는 선언이었으므로 '선을 넘은 행동'이었고 영조와 신하 모두 '''제2의 연산군을 만들어선 안되겠다'''는 합의점에 도달하여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내용이다. 또 15권 영조 실록 말미에서는 한유라는 사람이 홍봉한을 죄줄 것을 상소에 관한 내용을 그렸었다. 홍봉한에 대한 죄목에 '일물(뒤주를 일컫는 말)을 갖다 바친 죄'가 있었는데, 이 때 영조는 '''"저가 비록 ‘홍봉한(洪鳳漢)이 바친 물건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미 바친 후에 이 물건을 쓴 사람은 어찌 내가 아니었던가? 천하 후세에서 장차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발언했다. 즉, 홍봉한이 도와줬어도 사도 세자를 죽이는 데 있어 영조 자신이 주도했다는 것을 인정한 셈. 결국 한유는 영조의 분노를 사서 처형당했다.
박시백은 역사학자가 아닌 만화가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의견은 '''박시백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다'''. 해당 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43] 하지만 박시백 본인도 영조가 사도 세자를 그렇게 처참한 방법(뒤주)으로 살해해야 했는지는 의문이 있었는지 작중에서 백성들의 뒷담화로 표현했다.[44]
- 김백철 연구원
- 함규진 교수
- 정병설 교수
4.2. 영상물
조선 왕실에서 벌어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고 영조 및 정조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보니 직접적으로 다루거나 배경 설정으로 언급할 때가 많다. 특히 정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창작물에서는 거의 반드시 언급되는 사건. 하지만 노론 음모론에 오염되어서 노론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리는 창작물이 많다.
- 하늘아 하늘아
-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9부 한중록 : 사도세자역을 최수종이 연기했는데, 최수종이 연기한 몇 안 되는 조선시대 인물 중 한 명. 훗날 SNL코리아 최수종 편에서도 '사극왕 최수종' 에피소드 중 태조 왕건, 대조영, 해신 등과 함께 아주 오랫만에 언급되기도 했다.
- 붉은 달(드라마): 노론 음모론을 배제하고 사도세자의 정신 질환 및 광기에 초점을 맞춘 단막극. 다만 정통 사극은 아니고 사도세자의 광기 원인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는 사극 공포물이다. 보통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갈때 뚜껑을 열고 위로 들어가는 데 비해, 여서서는 가마처럼 옆문을 열고 들어간다.
4.3. 소설
- 충신: 임오화변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5. 사건 당사자 일람
- 폐세자 이선(사도세자) - 사건의 피해자.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국왕 이금(영조) - 사건의 가해자. 항목 참조.
- 세손 이산(정조)
- 영빈 이씨
- 혜경궁 홍씨
- 인원왕후 - 영조의 적모이자 사도세자의 의붓할머니. 정확히 말하면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인 사도세자의 범죄가 인원왕후(와 정성왕후)의 죽음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 정성왕후 - 영조의 정비이자 사도세자의 적모. 살아있었으면 임오화변을 막을 수도 있었던 인물.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는 정성왕후와 달리 사도세자와 인연이 깊지 않고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임오화변 당시 정순왕후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입궁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터라 권위가 약해서 영조를 막을 명분과 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