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키즈 온 더 블록
1. 개요
미국의 보이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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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도니 월버그, 조나단 나이트[1] , 조셉[2] 맥킨타이어, 조단 나이트, 대니 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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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복귀 후
좌측부터 조나단 나이트, 대니 우드, 조단 나이트, 도니 월버그, 조이 맥킨타이어
1.1. 데뷔
1983년 뉴 에디션[3] 이라는 흑인 아이돌 밴드를 데뷔시키며 히트를 맛봤던 프로듀서 모리스 스타는 이참에 백인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 보기로 하고 1984년 자신의 연고지인 보스턴에서 멤버를 꾸려 그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4] 멤버들 중 도니 월버그가 가장 먼저 선발되어 프로듀서인 모리스 스타와 함께 나머지 멤버들을 근처에서 물색하면서, 도니의 동생인 마크 월버그와 학교 친구인 대니 우드, 조나단, 조던 나이트 형제가 가세하게 되지만, 후에 마크 월버그가 마키마크라는 랩퍼로 솔로 데뷔를 위해 빠지고 모리스 스타가 데려온 막내 조이 맥킨타이어가 합류하면서 5인 체제로 데뷔를 하게 된다.[5] 줄여서 NKOTB[6] 로 부르기도 한다.유튜브 영상
데뷔 당시의 에피소드를 보면 묘하게 국내 아이돌 그룹인 god의 데뷔 시절을 연상케하는데, 처음엔 단순히 '스쿠터 한 대 정도 살 돈만 벌 수 있었음 좋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며 연습하던 시절이나, 멤버들끼리 잘 어우러지고 있는데, 어느 날 프로듀서가 데려온 굴러 들어온 돌때문에 나머지 4명이 짜고 막내를 왕따시켰다는 에피소드까지, 국내 1세대 아이돌들이 연습생 시절 겪었던 에피소드를 뉴키즈는 이미 80년대 말에 모두 겪어본 셈이었다.
1.2. 멤버
1.3. 아이돌 시대를 열다
흑인 보이밴드 뉴 에디션을 만든 프로듀서 모리스 스타는 그 성공을 기반으로 백인 보이밴드를 만들 계획을 하고 9명의 소년들을 뽑아 나이누크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그 후 5명으로 라인업을 재편성 후 뉴 키즈 온 더 블록이란 이름과 동명의 앨범으로 데뷔하지만 처참한 결과만 낳았고, 심기일전하여 만든 두번째 앨범이 성공하면서 전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틴팝(teen pop)이라는 용어도 이쯤에 유행하였다.[8] 심지어 미국에서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 시리즈까지 나왔을 정도이다. 현재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나온다.
사실 이런 흐름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던게 60년대의 브리티쉬 인베이젼을 통해 촉발된 개러지 락/하드 락/싸이키델릭 락 열풍, 70년대의 funk와 disco 열풍 속에서 10대는 문화산업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던 계층이었고 [9] 마침 10대 20대를 원류로 하는 힙합,랩 뮤직 문화가 커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모리스 스타는 철저히 이런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뉴 에디션으로 시장을 타진하고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데뷔시키며 성공을 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데뷔 후 수많은 아류 그룹이 데뷔를 했지만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1988년에 발매한 Hangin' Tough는 아메리칸 뮤직어워드 최우수 팝 앨범, 팝 그룹을 수상하면서 그 인기를 증명했고, 1990년에 발매한 Step by Step 앨범은 전 지구급으로 히트를 치며 전 세계 투어를 하기에 이른다.
1993년 모리스 스타와 결별 후 팀명을 NKOTB로 바꾸고 새롭게 활동을 시작했다. 1994년 Face The Music을 마지막으로 그룹은 사실상 해체를 하게 되고 각 멤버들은 영화배우나 솔로 가수로 뿔뿔이 흩어졌다.[10]
1.4. 내한공연 성사, 하지만 대참사
상술한 90년대 초 월드투어엔 대한민국도 포함이 되어 있어서 1992년 2월 17일에 서라벌레코드[11] 의 초청으로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내한공연을 치렀다. 뉴키즈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기 이전 마지막 메이저 팝스타 세대를 장식한 팀이기도 하다.[12]
당시 언론 보도영상들
1990년대 초반이었던 당시는 공연 안전에 대한 개념이 미비할 때라, 주최측의 안일함과 팬들의 무질서함이 겹쳐서, 결국 여고생 한명이 숨지고[13] 약 50명이 기절하거나 부상하여 병원으로 실려가는 참사가 일어났다. 공연은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있었는데, 주최측에서 안전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지 않고 관객을 한 명이라도 더 받을 욕심에 무대 바로 앞까지 빽빽하게 관객을 받은 것부터 문제였다. 게다가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공연시작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아 관객들이 기다리다가 지쳐 불만을 터뜨리며 항의하는 등 공연 전 분위기도 안 좋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등장하자 흥분한 뒷자리 관객들이 한꺼번에 무대쪽으로 몰려가면서, 앞자리 관객들이 쓰러지고 밟히며 눌리는 등 대형사고가 터졌다.
이 소식이 그날 저녁 TV로 보도되자 놀란 부모들이 아이들을 찾아 공연장소로 달려갔지만, 지금처럼 휴대폰 들고다니던 시절이 아니고, 삐삐를 쓸 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 아이 이름만 부르며 무작정 찾아헤맬 수 밖에 없었다. 쓰러져서 신음하는 아이들에, 울면서 자기 아이를 찾는 부모에, 사태수습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119 대원들에, 당시 9시 뉴스에 나온 화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부상자들이 실려간 후에 중지되었던 공연은 재개되어, 어쨌거나 공연을 끝마치기는 했다.
이 일로 인해 정부, 학교, 부모 등 기성세대는 큰 충격을 받았고, 며칠 동안 신문, 뉴스 할 것 없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겨레신문 독자코너에서는 한 교사가 정부의 상업성과 집단이기주의 조장이 큰 피해를 불렀다고 지적하였다.[14] 심지어 전혀 상관없을것같은 모 종교만화지[15] 에서 연재된 한 명랑학습만화에도 일상 파트에 이 사건이 언급될 정도.
한편, 인터넷에는 이 사건 때 소녀팬들이 입고 있던 속옷을 벗어서 집어던졌다는 이야기도 떠돌고 있지만, 당시 뉴스나 신문 어디에도 보도되지 않았던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유언비어. 1969년에 있었던 클리프 리처드 방한공연 때도 소녀팬들이 울부짖다가 기절하는 등 큰 소동이 벌어져서 대서특필 된 적이 있는데, 두 사건이 비슷하다 보니 클리프 리처드 방한공연 때 일부 극성팬이 속옷을 내던졌다는 이야기와 뉴 키즈 온 더 블록 방한공연 이야기가 뒤섞인 것으로 보인다.[16]
이 사건으로 인해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초청해서 공연을 추진한 서라벌레코드 대표 홍현표가 구속되었으며, 서라벌레코드 역시 9월 23일에 부도나고 2004년에 완전 폐업되었다. 또한 다음달에 잡혀있던 잉베이 말름스틴의 내한공연은 취소되고 방한 기자회견으로 대체 되었으며 같은 해 폴라 압둘의 내한공연은 학생의 경우 학부모 동반 관람으로 치러졌다. 이후 1996년 MBC <별이 빛나는 밤에> 우방타워랜드 공개방송, 2005년 가을 경북 상주시민운동장 MBC 가요콘서트 행사장에서도 위와 유사한 인명피해가 재현되었다. 특히 상주 참사 당시 이 사고가 재조명받았다.
비슷한 시기인 1991년 11월 독일 베를린 투어에서도 위와 유사한 사고가 일어나 어린이 1명이 사망하고 청소년 949명이 다치기도 했다.
1.5. 복귀
그러던 중 2008년 재결성하여 The Block이라는 앨범으로 복귀했다. 처음 재결성을 제의한 것도 도니 월버그였는데, 당시 이혼때문에 사적으로 힘들어했던 도니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떠올리며 처음 그룹을 결성했던 그 때처럼 멤버들을 수소문해 오랜만에 다시 만나, 재결성을 제의하고 다른 멤버들이 동의하면서 14년만에 NKOTB가 다시 뭉치게 되었다. Ne-Yo가 프로듀서를 맡아 최신 알앤비 트렌드의 곡으로 복귀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했고, 과거의 명곡들을 가지고 전미 투어를 하거나 후배 보이그룹 백스트리트 보이즈와 콜라보를 하여 같이 앨범도 발매하기도 했으며 다른 가수들과 패키지 투어 등의 활동과 꾸준히 신곡을 내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 디스코그래피
2.1. 앨범
- New Kids On The Block (1986)
- Hangin' Tough (1988)
- Merry, Merry Christmas (1989)
- Step By Step (1990)
- Face The Music (1994)
- The Block (2008)
- 10 (2013)
- Hangin 'Tough(30th Anniversary) (2019)
2.2. 콜라보레이션 앨범
- NKOTBSB (2011)[17]
2.3. 싱글
2.3.1. 빌보드 핫 100 1위
- I'll Be Loving You (Forever) (1988)
- Hangin' Tough (1988)
- Step by Step (1990)
2.3.2. 빌보드 핫 100 2위
- Cover Girl (1988)
2.3.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 Please Don't go Girl (1988)
- You Got it (The Right Stuff) (1988)
- Didn't I (Blow Your Mind) (1989)
- This One's For The Children (1989) - 캐롤 앨범 수록곡
- Tonight (1990)
2.3.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 If You Go Away (1990)
2.3.5. 그 밖의 싱글
- My Favorite Girl (1989)
- Valentine Girl (1990)
- Let's Try It Again (1990)
- Games (1990)
- Call It What You Want (1991)
- Dirty Dawg (1993)
- Never Let You Go (1994)
- Summertime (2008)
- Single (Feat. Ne-Yo) (2008)
3. 투어
3.1. 메인 투어
- Hangin' Tough Tour (1989)
- Magic Summer Tour (1990-92)
- Face the Music Tour (1994)
- New Kids on the Block Live (2008-10)
- South America and Mexico Tour (2012)
- European Tour (2014)
3.2. 서브 투어
- NKOTBSB Tour (with Backstreet Boys) (2011-12)
- The Package Tour (with 98 Degrees and Boyz II Men) (2013)
- The Main Event (with TLC and Nelly) (2015)
- Total Package Tour (with Boyz II Men and Paula Abdul) (2017)
- Mixtape Tour (with Salt-N-Pepa, Naughty by Nature, Tiffany and Debbie Gibson) (2019)
4. 수상
[1] 보통 존 나이트라고 불렀다.[2] 애칭으로 조이라고도 한다.[3] 바비 브라운과 Johnny Gill, Ralph Tresvant등의 성공적인 흑인 솔로 가수들이 솔로 데뷔 전 몸 담고 있던 팀이다.[4] 모리스 스타가 내건 그룹 멤버로서의 최소 요구 조건은 '일단 백인 10대 청소년이고, 노래와 춤, 랩을 잘 할 것'이었다.[5] 처음 기획 당시에는 9인조 그룹이었으나 당시로서는 인원이 너무 많았고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판단하에 5인조로 수정되었다.[6] 당시 한국에서는 NKOB는 무엇의 약자일까요 하는 개그가 잠시 유행했다. [7]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는 전쟁기간 내내 병으로 복무하다가 종전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는 카우드 립턴 역을 담당했다.[8] 실패했던 첫 앨범은 두번째 앨범의 성공 이후 재발매 되어 미국에서만 300만장이 팔려나갔다. 그야말로 원조 역주행.[9] 사실 브리티시 인베이젼을 통해 촉발된 락 음악과 모타운 음악은 1960년대 당시엔 10대 20대들을 위한 음악이었다. 또한 70년대에도 10대들은 하드 락이나 흑인 음악을 주로 들었다. 10대들을 위한 음악은 아니었으나 10대들은 주로 그 당시 유행하던 락이나 흑인 음악을 즐겨 들었다. 80년대 초반 역시 10대들은 뉴웨이브 음악이나 영국에서 건너온 신스팝, MTV를 통해 퍼진 흑인 음악과 락 음악들을 즐겨 들었다. 사실 틴 팝은 10대 전체를 위한다기 보단 10대 여자들을 위한 음악으로, 60년대에는 10대 여자들에게 비틀즈와 다른 영국 락 밴드들이라는 선택권이 있었지만 70년대에는 10대 여자를 위한 스타가 없었다. 80년대 초 마이클 잭슨 전까지 10대 여자들이 빠질 만한 팝스타가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10대는 10대 여자를 말하는 것이다. [10] 참고로 갑작스러운 해체는 아니다. Face The Music 앨범을 제작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앨범이 될 것이란 인터뷰를 했었다.[11] 노찾사 1집, 현진영 1~3집, 시나위 1집, 백두산 1~2집 음반 등도 이 회사에서 나왔다. 그러나 NKOTB 음반은 주로 지구레코드가 수입했다.[12]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전성기를 누리던 그 시절에는 팝과 홍콩가요, 국내가요 그리고 트로트가 거의 1:1:1:1 비율을 이루고 있었으며 현재와 같이 K-POP이 음원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메가히트를 이루고 듀스, ZAM 등이 데뷔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이듬해인 1993년 이무송의 사는게 뭔지, 김수희의 애모를 끝으로 트로트는 서서히 하향세로 접어들고, 김건모의 2집 '핑계'가 대히트를 하면서 음원시장은 완전히 K-POP으로 넘어오게 된다.[13] 사고 당일 중태였으나, 32시간 만인 19일 새벽에 사망.[14] 2020년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공연중 안전조치에 불성실한 사업자 및 이를 감시감독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면 모를까 '상업주의' 에서 '극단적 이기주의', '향락주의'로 넘어가는 논지가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여 생뚱맞아 보이지만, 사실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문화예술, 특히 상업적 문화예술에 대한 비용 지불을 곱게 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고 특히 외국 예술인의 방한공연등에는 '귀한 외화를 쓸데없는데 내다버린다'는 비판이 항상 따라붙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방한공연 역시, 공연중 대참사와는 별개로 애초에 내한공연 계획이 발표된 직후부터 "무슨 외국 가수를 큰돈 주고 불러오냐, 돈(그것도 소중한 외화인 달러)가 썩어나냐, 미친 짓거리다" 라는 비판이 온 사회 전방위적으로 터져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안 그래도 달갑잖은 공연에 청소년들이 열광하고, 기꺼이 고가의 티켓을 사서라도 공연을 보러 몰려들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애들이 타락했다, 퇴폐적 서구문화에 빠져들었다" 라는 개탄도 함께 터져나오고 있었던 것. 이런 식으로 안 그래도 안 좋게 보고 벼르고 있던 사람들이 많던 공연에서 대형 안전사고로 사망자까지 발생하니 말 그대로 온 사회가 달려들어 여론의 몰매를 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인용된 기고문같은 경우도, 21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청소년들이 해외 팝스타 공연을 보러 갔다는 이유만으로 '상업주의 퇴폐향락문화' 와 '극단적 이기주의' 이야기까지 꺼내는 것은 꽉 막힌 꼰대의 정신나간 틀딱질처럼 보이겠지만, 90년대 초반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무조건 타락한 청소년들(말하자면 버릇없고 개념없는 요즘 애들)의 잘못이라고 욕하고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교육계에서 아이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니 저런 것에 빠져든 것이 아니냐" 고 구조적 책임과 개혁 필요성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꽤나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을 보여주었던 것.[15] 하지만 종교계열이라 그런지 그럴줄알았어...라던 반응도 많았었다.[16] 심지어 클리프 리처드 방한 때 몇몇 팬이 속옷을 벗어서 던졌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원래는 손수건을 던진 것 뿐인데 당시 기레기들이 선정적으로 부풀려 썼다는 이야기도 있음.[17] New kids on the block X backstreet boys의 약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