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모

 


'''김건모의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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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모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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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대상 대상'''
김수희
'''애모'''
(1993년)

'''김건모
핑계
(1994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핑계'''
(1994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스피드'''
(1996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스피드
(1996년)'''

임창정
'''그때 또 다시'''
(1997년)

'''가요대상 대상'''
김수희
'''애모'''
(1993년)

'''김건모
핑계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
'''Come Back Home'''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
'''Come Back Home'''
(1995년)

'''김건모
스피드
(1996년)'''

H.O.T.
'''행복'''
(1997년)

''' 스타상 가수부문 대상'''[56]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김건모
핑계
(1994년)'''

룰라
'''날개 잃은 천사'''
(1995년)


'''음반 대상'''
신승훈
<널 사랑하니깐>
(1993년)

'''김건모
<핑계>
(1994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핑계>
(1994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스피드>
(1996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스피드>
(1996년)'''

H.O.T.
<행복>
(1997년)

[image]
'''서울가요대상 대상'''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김건모
<핑계#s-2>
(1994년)'''

룰라
<날개 잃은 천사>
(1995년)
조성모
아시나요
(2000년)

'''김건모
<미안해요>
(2001년)'''

BoA
<No.1>
(2002년)





<colbgcolor=#283593><colcolor=#FFFFFF> '''김건모
金健模 | Kim Gun Mo'''
'''출생'''
1968년 1월 13일[1] (56세)
(정부 직할) 부산시
(現 부산광역시)[2]
'''출신'''
서울특별시 강서구
'''국적'''

'''본관'''
김녕 김씨
'''신체'''
165cm, 57kg[3], O형
'''가족'''
아버지 김성대(1941년 ~ 2019년)[4]
어머니 이선미(1944년 1월 16일생)[5]
3남 중 둘째(형 김경모, 친동생 김현모[6])
장인 장욱조, 처남 장희웅
'''배우자'''
장지연(1981년생, 2019년 ~ 현재)[7]
'''학력'''
서울신월초등학교 (졸업)
화곡중학교 (졸업)
화곡고등학교 (졸업)
[image]서울예술대학교 (국악과 / 전문학사)[8]
'''종교'''
개신교[9]
'''병역'''
[image] 해군 병장 만기전역
'''소속사'''
건음기획[10]
'''데뷔'''
1992년 정규 1집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별명'''
'''국민가수''', 한국의 스티비 원더, 김건반, 깜상, 연탄, 마른털,[11] 쉰건모, 쉰둥이, 흑(黑)기사[12]
'''취미'''
RC카, 드론, 게임, 킥보드,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종이접기
'''링크'''
[13]
1. 개요
2. 역량
3. 가수 활동
3.1. 1~3집: 김창환 사단, 대한민국을 뒤흔든 국민가수
3.2. 4~6집: 성공적인 홀로서기, 하지만 떨어지는 뒷심
3.3. 7, 8집: 제2의 전성기, 마지막 불꽃
3.4. 9~13집
6. 수상 내역
6.1. 가요 프로그램 1위
7. 여담
8. 방송 활동

[clearfix]

1. 개요


1990년대를 대표하는 대한민국 가요계 아이콘 중 한 명으로 '''국민가수'''로 불렸던 가수다. 대한민국 최단 기간 최다 음반 판매량 기네스 기록 소유자였다. 골든디스크 최초 3회 연속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며, 1994년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와 서울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시상식까지 5대 가요 시상식에서 모두 대상을 수상했다. 지상파에서 가요대상 시상이 사라진 현재 시점에서 이 기록을 보유한 가수는 김건모가 유일하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인기를 얻거나 또는 노릴 기회를 얻었다 하면 병역을 기피해서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면서 2000년대 이후 팬들의 반감을 샀던 다른 연예인과는 달리, 비교적 어린 나이에 당시 육군과 해병대처럼 26개월도 아니고 그보다 2달이나 복무기간이 길었던 해군을 만기 전역으로 마쳤다.[14]
지상파 3사 연말 가요 시상식이 있던 시절 이에 근접한 기록을 가졌던 가수들은 1997년과 1998년의 H.O.T., 1999년과 2000년의 조성모, 2001년의 god 등이 있다. H.O.T. 같은 경우에는 1997년은 MBC, SBS,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을 석권했지만 KBS는 임창정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고, 1998년은 KBS, MBC, SBS, 서울가요대상(젝스키스와 공동으로 수상)을 석권했지만 골든디스크는 김종환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또 다시 실패하게 된다.
조성모 같은 경우에는 1999년은 KBS, MBC,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핑클과 공동으로 수상)을 석권했지만 SBS는 핑클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게 되고, 2000년은 MBC, SBS,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을 석권하였지만 KBS는 god가 대상을 수상하면서 또 다시 실패하게 되고, 동시에 한 해 지상파 3사 그랜드슬램의 기록도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된다.
god는 2001년에 KBS, MBC, SBS, 골든디스크를 석권했지만 서울가요대상은 바로 김건모가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게 된다. 이외에도 2005년의 김종국은 KBS, MBC, SBS 지상파 3사 대상을 동시에 석권했지만 골든디스크 대상을 SG워너비가 수상하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서울가요대상은 아예 개최되지 않았다.
그 외 2005년까지 뮤직비디오 위주 시상식이었던 MKMF에서도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을 동방신기,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드렁큰 타이거가 수상하면서 김종국은 2005년 지상파 3사 이외의 시상식에서는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대신 김종국은 지상파 3사 가요대상 최후의 그랜드슬래머로 남아 있다.[15]
그 이유는 KBS와 MBC는 2005년 가요대상을 진행한 후 시상식이 폐지되었고, SBS도 2006년 가요대상을 진행한 후 더 이상 지상파 3사 가요대상 시상이 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16]
1990년대 레전드 3인방 중에서 가장 후배[17]지만, 1968년생으로 이제는 나이가 상당해서 가수들 중에 고참급이다.
핑계는 전국적으로 한국에 레게 음악이 유행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잘못된 만남은 역대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역사적인 기록을 올렸고, 그 외에도 히트곡이 즐비하다. 작곡가 윤일상은 자신의 책 <나는 스무살이다.>에서 그가 음악적 능력에 있어서 '''조용필 다음으로 대단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수라고 평가했다.

2.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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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et Legend 100-보컬_Legend 김건모]'''

흑인 음악이 생소했던 90년대 초반, 자메이카 댄스리듬의 레게장르를 내세워 등장.

매력적인 비음과 그루브한 창법의 절묘한 조화.

한국적 블랙 뮤직을 대중음악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보컬리스트.

장난기 어린 무대매너와 삐딱한 제스처,

음악으로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는 무대위의 광대.

목소리로 세대를 아우르는 이 시대의 가수. 위대한 광대 뮤지션, Legend 김건모.

'''"제가 우리나라에서 노래를 제일 잘 하는 가수 그러면 처음 꼽는 사람이 김건모예요"'''

신승훈

'''"가장 존경하는 대한민국 뮤지션은 김건모 선배님"'''

나얼

보컬, 작곡, 편곡, 피아노 등 다방면으로 어마어마한 실력을 갖춘 뮤지션. 하이톤의 까랑까랑하면서도 부드럽고 간드러지는 바이브레이션이 들어간 독특한 목소리 때문에 데뷔 때부터 주목을 받았고, 지금도 그의 목소리만 듣고 음색발이라며 보컬 실력을 폄하하는 사람들도 왕왕 있다. 김건모의 노래를 불러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의 노래를 완벽히 소화하기에는 힘든 경우가 매우 많다.
특히 2집 '혼자만의 사랑'의 인트로에서 3옥타브 도 음도 피아노 치면서 흔들림없이 라이브로[18] 선보일 정도의 넓은 음역대에 뛰어난 가창 테크닉이나 특유의 음색과 창법이 더해져 국내 역대 보컬리스트 순위를 매길 때 항상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실력을 갖춘 보컬이다.[19] 서울예술대학 재학 당시 천재로 불렸다는 증언도 있다.[20]
그의 영혼의 파트너 김창환이 옛날에 무릎팍도사에서 회고하기를 "너무 천재적이다보니 자기가 얼마나 노래를 잘 하는지 잘 모른다. 그는 스스로 노래 부르는 건 숨 쉬듯이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고 말하기도 했다. 한때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 불렸을 정도로 스티비 원더 모창을 정말 비슷하게 한다.#[21]#[22] 단순히 목소리나 창법 때문이 아니다. 그만큼 역량이 받쳐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스티비 원더를 모창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김조한과 같이 lately를 부른 영상도 있는데,김조한이 아마추어로 보일 지경이다. #[23]
레게나 소울 방면의 창법에 능하며 초기 히트곡은 소울이었으나[24] 점점 레게나 하우스 쪽으로 가다가 2000년대 들어서 소울이나 R&B로 방향을 틀었다. 신승훈과 함께 프로듀서 김창환의 대표적인 아티스트 중 하나. 피아노 솜씨도 수준급이며[25], 많은 자작곡을 가지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나가수 출연이나 각종 예능 활동 등으로 인해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김건모 앞에서 실력으로 고개를 뻣뻣이 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역대 가수 순위를 선정해도 언제나 열 손가락 안의 순위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올타임 레전드'''급으로 실력과 커리어를 가진 대가수다.
자작곡 중에선 본인의 히트곡도 꽤 많이 들어 있다.[26] 나는 가수다에서 미션곡으로 선정되었던 '''미련'''과 '''사랑이 떠나가네'''는 둘 다 김건모가 직접 작곡한 곡이다.

3. 가수 활동


김건모의 음악 인생은 '김창환 사단'의 첨병으로 국민가수급 인기를 얻은 1집에서 3집까지의 전기, 김창환을 떠나 역량있는 솔로 아티스트로 성장했던 4집에서 6집까지의 중기, 대중성의 제고를 위해 최준영과 손을 잡고 다시 반등한 7, 8집 이후의 후기로 나눌 수 있다.

3.1. 1~3집: 김창환 사단, 대한민국을 뒤흔든 국민가수



1999년 스타데이트 김건모편 일부
서울예대 86학번 국악과였던 김건모는 졸업 후, 같은학교 선배인 박미경의 소개로 프로듀서 겸 작곡ㆍ작사가인 김창환을 만나게 된다. 6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혹독한 프로듀싱을 받은 김건모는, 1992년 10월 무렵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27]'''를 타이틀로 1집 앨범을 발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디오에서는 그의 노래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뛰어난 노래실력만큼이나 독특한 음색에, 대중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음반판매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인기에 TV프로그램에서도 섭외전화가 쇄도하자, 그는 기쁜 마음으로 방송에 출연하기로 했는데...
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방송이 TV에 나오자 '''갑자기 음반판매량이 수직상승이 아닌, 수직하락을 하기 시작'''했다.
원인은 바로, 가창력과 음색에 비례하는 외모를 상상했던, 대중들의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상대적으로 못생긴 얼굴 때문... 하지만 그는 낙심하지않고 계속해서 각종 오락프로그램에 열심히 출연하여 예능감각을 뽐냈고, 방송사를 오갈 때마다 타 가수와 직원들에게 꾸준히 인사하며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다져갔다.
결국 그는 멋진 외모가 아닌, 친근감과 가창력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다시 끌어모았고, 이로서 앨범판매량 또한 다시 상승하게 되었다. 덕분에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에서 이어지는 같은 앨범의 후속곡 '''첫인상'''이 1993년 11월 가요톱텐 5주 1위 골든컵을 수상하면서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이것은 외모 공개 한 번 잘못했다가 묻힐 뻔 한 그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였으며, 데뷔한지 13개월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그의 음악은 가요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음색과 노래였으며, 당시에만 해도 생소했던 재즈와 소울을 기반으로 힙합, 레게가 가미된 '흑인 음악' 그 자체를 흥겨운 멜로디에 녹여내 대중음악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 1집 앨범은 70만 장이 팔리며 신인치고는 상당히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방송 3사의 신인상, 10대 가수상, 신세대가수상을 석권하며 크게 주목받았다.

1993년 7월 21일 KBS 가요톱텐
1집 때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1993년 12월쯤 '''2집''' 앨범을 발표했다. 후속작의 타이틀곡은 '''혼자만의 사랑'''이었지만 레게 리듬을 도입한 하우스 댄스곡 '''핑계'''가 소위 길보드차트라 불리는 불법테잎 노점을 통해 입소문을 타고 대박을 쳤다.[28] 이 곡 하나로 단숨에 '노래좋은 인기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위상이 급상승했다. 가요톱텐 골든컵을 또 다시 차지하는 건 물론이고 1994년 초반을 사실상 그의 독무대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발매하려던 수많은 인기가수들의 음반이 연이어 미뤄진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에 불과할 정도다.
1집에서 '재즈'와 '소울'을 알렸다면 2집에서는 자메이카 '레게'를 전국에 알리면서 이후 1994년을 '레게 열풍의 가요계'로 만들만큼 대중음악사에 미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29] 타이틀곡 핑계로 골든컵을 또 다시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후속곡 혼자만의 사랑으로 김건모표 발라드를 세상에 널리 알리면서 애절한 발라드도 잘 소화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후 앨범마다 유명한 발라드곡[30]을 매 앨범마다 남길 정도로 이후 그의 음악 커리어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앨범으로 '''180만장'''을 기록하면서 '''1994년 음반판매량 전체 1위'''를 차지했음은 물론이요, '''방송 3사 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에서 모두 대상 수상'''이라는 영광스러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31]그의 커리어 하이는 3집이었지만, 1위와 대상 수상에 있어서는 2집의 기록이 오히려 더 많을 정도였다.[32] 이때 10대부터 40대까지 트렌디를 쫒는 신세대와 트로트, 성인가요를 즐겨듣는 구세대까지 골고루 인기를 얻으면서 본격적으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이 인기는 다음 해인 1995년 2월 발매된 '''3집'''까지 이어져 공전절후의 히트를 쳤으며,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 바로 '''잘못된 만남'''.[33] 이번에는 강렬한 유로비트하우스 장르를 들고 왔는데, 엄청나게 빠른 비트에 말하듯 외치는 랩과 사비의 숨쉴틈 없는 고음 폭풍이 쉴새없이 몰아쳐, 이후 1990년대 말까지 전국에 하우스 열풍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 곡이었다. 이 곡 역시 KBS 가요톱텐 5주 1위 골든컵, SBS TV가요20 6주 1위,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2주 1위라는 기록을 달성했고 KBS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잘못된 만남의 인기야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엄청났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에 ''''너에게'''', ''''드라마'''', ''''넌 친구? 난 연인!'''', ''''아름다운 이별'''' 등의 앨범 수록곡들까지 많은 인기를 끌게 되면서 1990년대 초중반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한국 가요계를 양분했다시피 했다.
이 당시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1994년에는 영화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믹스'라는 제목으로 김건모가 미국 공연 도중 폭력조직에 납치됐다가 기지를 발휘해 탈주하는 과정을 엮은 '''코믹액션물'''. 미국 현지 로케까지 해가며 절반 가까이 촬영했지만[34] 도중에 상대 여배우가 교체되었고 영화 완성도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는 등 잦은 마찰로 결국 엎어진 망작이다. 그의 여러 큼직한 흑역사 가운데 손꼽히는 사건이지만 개봉은커녕 촬영 중에 중지된지라 천만다행으로 잊힌 흑역사.
그 전까지 가수들은 대부분 예능 출연을 자제했지만, 이와 달리 김건모는 예능 출연에 적극적이었고 특히, 당시 예능이 개그에서 토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에 편승하여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3집 잘못된 만남은 골든컵은 물론이거니와 무려 '''286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35] 그 당시 대한민국 인구가 4500만 명이었으니 단순 계산으로 할 경우 적어도 16명당 김건모 음반 1장은 사갔다는 소리가 된다. 이 대기록은 한국 기네스에까지 당당히 올라가, 가요계의 명예의 전당의 정점에 손꼽히는 앨범으로 남게 되었고, 팬들과 평론가, 대중성까지 모두 잡은 불후의 명반으로 인정받게 되었다.[36]
다만 1~3집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것과는 별개로 김창환의 혹독한 프로듀싱과 사생활 관리, 김건모의 유별나게 자유분방한 성격이 부딪히며 불화가 겉잡을 수 없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성격이 둘 다 불과 같은데, 한번 뭉쳐진 응어리가 결국 맞불로 번지면서 더 이상 김창환 사단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한 리스크가 그에게 찾아왔던 것이다.
결국 3집 활동을 끝내고 최정상에 올랐을 때 그를 정상에 올려준 은인이자 가장 많이 괴롭히고 혹사시켰던 김창환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다. 김창환 역시 공개적으로 그를 저격하면서 섭섭한 감정을 아낌없이 드러냈지만 워낙 오래된 일이고 나중에 와서 다시 화해하면서 그 당시의 일들은 현재로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 편이다.

3.2. 4~6집: 성공적인 홀로서기, 하지만 떨어지는 뒷심


3집 활동 이후 그는 당대 가요계의 미다스의 손 김창환의 라인기획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가요계에 충격을 주었다. 뮤지션으로서 지향점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강력한 상업성으로 호불호가 존재하던 김창환에게서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성장을 위한 홀로서기에 나선 것.
결별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프로듀싱한 '''4집''' 'Exchange'는 1996년의 별들의 전쟁 시기에 발매했고, 최준영, 솔리드정재윤 등과 손을 잡았다. 의외로 이 시기가 매우 큰 슬럼프였다고 하는데 2~3집 당시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한데다 김창환과 대판 싸우고 나가면서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지쳐있었던 상태였고, 워낙 큰 히트를 연이어 기록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네가 김창환 떠나서 잘 될 것 같냐' '넌 김창환 덕에 뜬 거지 네 능력은 제로야'라는 말을 매우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수 생활을 은퇴해야 하나하는 기로에 설 정도로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으나, '내 스스로 한번 보여줘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고 심혈을 기울여 앨범을 제작했다고 전해지며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매 앨범마다 변화하던 그의 음악적 성향에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신뢰감을 보내면서, 4집이 발매되자마자 타이틀곡 '''스피드'''를 비롯해서 제대로 된 활동이 없었던 수록곡들('''미련''', '''악몽''', '''빨간우산''')까지 차트에 이름을 올리며 크게 사랑받았다. 앨범 수록곡들도 대중이 원하는 스타일과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방향을 적절히 섞어 많은 호평을 받았고, 김창환을 떠나도 그 스스로 훌륭한 수작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다만 타이틀곡에 있어서는 전작 '잘못된 만남'을 의식한 선정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는데, 실제로 매번마다 조금씩 달라지던 타이틀곡의 패턴이 스피드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아 다소 실망감을 나타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워낙 전에 다져놓은 기반이 단단했던 덕분에[37] 스피드 역시도 골든컵 달성이 유력해 보였으나, 4주 1위를 달성하고 대기록을 세우기 직전 자신의 전 소속사의 신인 가수에게 정상 자리를 넘기면서 정규앨범에서 4장 연속으로 골든컵 수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된 게 매우 큰 화제가 되었고 본인 인기의 하락세를 알리는 전환점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실제로 타 방송사에서도 3주 1위, 2주 1위에 그치는 바람에 1위 수상기록으로만 따지면 전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다.[38]
그럼에도 동명의 MBC 프로그램 오프닝 삽입곡으로 유명한 ''''테마게임''''을 히트시켰고 또 다른 활동곡인 ''''악몽''''과 ''''미련''''도 준수한 인기를 얻으면서 '''160만 장'''의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KBS에서 '''3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그 해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최고가수상'''과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3년 연속으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핑계-잘못된 만남-스피드라는 최절정 전성기의 마무리를 지었다.[39]
이후 1997년 12월 발매된 '''5집''' 'Myself'에서는 최준영 대신 윤일상, 방시혁 등과 손잡으면서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음악적 방향도 바꾸었다.[40] 앨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본격적인 프로듀서로서의 행보를 보여준 앨범으로, 두 번째로 직접 프로듀싱했지만 이전보다 한층 진보한 재즈와 소울을 기반으로 한 흑인 음악의 색깔이 더욱 짙어지며 평단의 호평을 이끌었으나,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타이틀곡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사랑이 떠나가네''''를 활동곡으로 선정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이전과는 조금 타이틀곡의 방향이 달라졌는데, 1~2집의 실험적 성향 타이틀곡, 3~4집의 트렌드에 맞춘 타이틀곡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게 5집 타이틀곡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쿵짜자 쿵짝'거리는 트로트 비트를 기반으로 한 타이틀곡이었다. 사랑이 떠나가네 역시 마찬가지로 다소 올드한 느낌의 리듬이 쭉 이어진다. 갑자기 올드한 느낌의 곡들로 활동방향이 바뀐 이유는 데뷔 초~최절정기인 1990년대 초중반에는 트렌디한 느낌의 재즈, 소울, 레게, 하우스 등을 바탕으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자신이 개척한 장르가 대세가 되면서 비슷한 장르의 가수들이 급격하게 쏟아져 나와 식상해진 감이 있었고, 김건모 본인의 나이도 30대에 접어들면서 대중가요 주 소비층인 10~20대층에선 다소 밀려난 듯한 인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핑계' '잘못된 만남'을 통해 트렌드에서 멀어졌었던 30~40대에도 큰 인기를 끌며 '국민가수' 타이틀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이름값을 바탕으로 상대적 고연령층을 타겟으로 방향을 살짝 옮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예전 3~4집만큼은 못 해도 초창기에 활동한 ''''당신만이''''와 ''''사랑이 떠나가네''''는 가요톱텐 기준으로 각각 10, 3위까지 오르면서 선전했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각종 가요차트 1위를 쓸어담고 '''110만장'''을 판매하면서 여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으나, 2년 후인 1999년 11월 발매된 '''6집''' 'Growing'은 뛰어난 작품성과는 달리 49만 장에 불과한 저조한 판매량과 미비한 홍보로 대중적으로는 처절하게 묻혔고 가요 차트에선 10~20위 권 정도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이 앨범은 그의 뮤지션으로서의 전성기였다.
이미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 있던 김건모는 그가 원하는 음악을 아낌없이 이 앨범을 통해 보여주었고, 왜 그가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는 평가를 받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앨범이었다. 비록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에 실패했지만 평단 역시 김건모의 변신과 새로운 시도에 호의적이었다. 다만 음악적으로는 현재까지도 3집과 더불어 그의 최고작으로까지 평가되는 6집이 상업적인 면에선 별다른 흥행을 하지 못하자, 그는 고심 끝에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된다.

3.3. 7, 8집: 제2의 전성기, 마지막 불꽃


2001년 김건모는 4집 때 호흡을 맞췄던 최준영과 함께 대중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7집''' 'Another Days...'에서 완벽히 재기하며 자신의 전성기였던 2~4집에 버금가는 반응을 얻었다. 애절한 발라드 타이틀곡 '''미안해요'''와 코믹한 댄스곡 '''짱가''', 테크노 기반의 트렌디한 댄스곡 '''Double''', 1964년 발표되어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성인가요 '''빗속의 여인'''까지 크게 인기를 얻으며 앨범 수록곡의 절반이 대중들에게 사랑받아, 4집 이후 가장 큰 인기를 누리며 음악프로에서 여러 번 1위를 수상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의 3배 가까이 뛰어올라 '''143만 장'''이라는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그 해 이미연의 연가(컴필레이션)와 god에 이어 최종 3위에 올라 다시금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한동안 뜸해졌던 예능계에서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활발하게 방송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 해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41]
반면 대중의 호응과는 별개로 활동곡인 '짱가'와 '빗속의 여인' 등에서 나타난 음악적인 퇴행은 음악 마니아들의 많은 안타까움을 샀다. 이전까지 흑인 음악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길을 걸었다면, 6집에서 실패를 맛본 이후 기존 행보와 너무나 반대되는 대중적인 행보에, 이미 데뷔 10년차로서 자신의 팬층 나이대가 올라간 것까지 감안하여 30~40대의 성인 취향의 곡들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리메이크곡 두 곡을 합해도 트랙 수는 9개에 불과했고, 실제 신곡은 겨우 7개에 그쳤다. 이전 5, 6집에서 15트랙까지 꽉꽉 수준 높은 곡들로 채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성도였고, 이쯤되면 대중가요 음반시장의 마지막 절정기로서 대부분의 가수들이 못해도 12트랙 이상, 많으면 20트랙 가까이 채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곡 수에 있어서도 날선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었던 '스티비 원더'스러운 음악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에, 팬들과 평단에서는 냉정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당시 MBC 음악캠프에서 문차일드의 '사랑하니까'에게 정상 자리를 넘겨준 직후, '음반판매량이 나의 1/10에 불과한 신인 가수가 어떻게 1위를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음악방송 순위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MBC 방송출연을 일절 거부하겠다고 선언해 방송사와 큰 마찰을 빚었다. 또 연예계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인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며 대중적인 호감도를 크게 깎아먹었다. 이때 저지른 사건으로 김건모는 '''스타병에 걸린 유아독존 지멋대로의 연예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아직까지도 이 꼬리표로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존재할 정도로 이미지를 크게 실추하게 되었다.
다만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는 저랬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방송 순위는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수시로 바뀌거나 명확히 밝히지 않는 순위의 기준점 때문에 공정성을 잃은 상태였다. 문차일드의 소속사가 바로 그 유명한 김광수가 운영했던 GM기획이었으며, 이 소속사의 간판스타 조성모를 띄우기 위해 별짓을 다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대형기획사에 의한 힘의 논리라는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또한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 반기를 든 대다수의 연예인은 그들을 움직이는 언론, 정권, 조폭계의 실세에 의한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출연했었던 경향이 강하며, 김건모 자신도 그들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했다. 가요계의 거물이자 큰손인 만큼 그를 견제하는 정경계와 어둠의 세계에서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
참고로 순위제 도입 때부터 2001년 상반기까지의 가요 순위제는 대부분 방송 횟수나 시청자 투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팬덤이 많은 가수들이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음원이 차지하고 있는 대중성의 지표는 그 당시로서는 음반 판매였지만, 이는 거의 반영이 되지 않았다. 그 예로 1996년에 신승훈의 5집이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요 순위제에서는 1위를 많이 차지하지 못했다.[42]
또한 투표라는게 조작이 매우 쉬운 분야고 인터넷이 덜 발달한 당시에는 그것이 더욱 쉬웠기 때문에 김건모 당사자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대중들 또한 납득하기 매우 힘든 순위 결과였다. 그 뒤 음반과 음원 분야 점수는 2001년 하반기부터 도입되었으며 그 덕분에 2001~2004년까지는 아이돌보다는 비아이돌에게 1위가 많이 돌아갔다.
당장은 음악성과 인기를 등가교환한 셈이 되었고 위에 거론된 사건들과 이후 음반 시장의 침체로 7집이 그의 마지막 밀리언셀러가 되었지만, 한순간에 인기가 사그러들진 않았고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8집까지 지속됐다. 2003년 2월 발매한 '''8집''' 'History'에서는 앨범 메인 자켓에서 연탄사진을 실어 대놓고 올드 팬들을 겨냥한 듯한 인상을 주었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애절한 발라드곡 '''청첩장'''을 타이틀로 삼았다. 누가 봐도 완벽하게 7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앨범으로, '미안해요' - '청첩장'으로 이어지는 발라드 라인을 비롯하여 '짱가' - '''제비'''로 이어지는 코믹한 후속곡에, 심지어 오래된 고전가요를 리메이크하여 행사와 나이트 위주로 인기를 끌은 '빗속의 여인' - '''아파트''' 라인까지 동일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테크노 기반의 트렌디한 댄스곡을 밀었던 'Double'과는 달리, 이미 댄스 장르가 사양화되던 시기였던지라 자전적 가사가 담긴 소울곡 '''My Son'''을 또다른 후속곡으로 삼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앨범이었지만, 어릴적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가사로 실은 'My Son'은 그가 추구했던 음악적 방향성을 다시 살린 곡으로 높은 호평을 받았다.
7집에 못지 않은 폭발적인 인기를 통해 대중적인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지만, 순위제 방송사에선 많은 피해를 봐서 체감 인기와 음반 판매량에 비하면 1위 수상 기록은 매우 부실했는데 케이블 '쇼 뮤직탱크'에서 2003년 4월 5일~19일까지 '청첩장' 3주 1위, 지상파 SBS 인기가요에서 4월 6일 - 'My Son' 1위 수상이 전부였다. 일단 전작에서 MBC를 두 번이나 물먹인 전력이 있어서 음악캠프 측에서는 아예 1위를 할 수 없도록 대놓고 견제를 당했다. 물론 그 사이에 어찌저찌 MBC 화해를 했기 때문에 예능과 음악방송에 출연할 수는 있었지만 청첩장의 인기를 누를 정도로 막강한 경쟁자가 딱히 없었던 상황이었음에도 고작 1위 후보에 머물렀다.
또한 KBS 뮤직뱅크에서는 순위제를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1위가 가능한 지상파 방송은 오로지 SBS 인기가요 뿐이었음을 감안하면 8집도 어느 정도 많은 인기와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타이틀곡 '청첩장'은 지상파 1위는 하지 못했으나 케이블 순위제 프로인 '쇼 뮤직탱크'에서는 2003년 4월 5일~19일까지 3주 1위를 했으며 각종 음원 차트에서도 높은 순위에 랭크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김건모표 발라드에서도 자주 손꼽히는 명곡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삼속곡으로 선보인 '제비'는 순위제를 운영했던 음악캠프에서 1위 후보까지 오르는 등 선전했다. 이 앨범으로 대략 53만 장을 기록하면서 '''2003년 전체 음반판매량 1위'''를 가져가는 영광을 얻었다.
이는 앨범 발표 당해 년도에서 전체 1위를 차지한 것은 '''1995년 잘못된 만남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쉽게도 음반 산업의 침체가 가속화되면서 밀리언셀러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김건모가 '''메이저에서 남길 수 있었던 '국민가수' 타이틀에 걸맞은 마지막 성적'''이었다.[43]
또한 그의 8집 앨범이 대한민국 음반 역사상 '''한 해 동안 판매된 마지막 하프 밀리언셀러 단일 앨범'''이 되었다.[44]
이 시기가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다시 한 번 큰 전환점이 되었는데, 8집 앨범 활동을 마치고 불법 다운로드로 인한 음반시장의 악화와 방송활동과 음반홍보를 통한 후배 가수들과의 경쟁에 염증을 느끼고 공연활동으로만 팬들과 만날 것이라 밝히게 된다. 이 이유로 인해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와 음반 판매고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에서 1위를 많이 차지하고 못했고, 결국 골든디스크 대상이 99% 확실시 되었음에도 불참하면서 수상자리를 조성모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조성모는 당시 <피아노>를 타이틀 곡으로 한 5집 <가인>으로 4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2003년 음반 판매량 3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2위 이수영의 경우 앨범이 8월에 발매되어 12월에 들어서 조성모 앨범판매량을 추월했고, 골든디스크 음반판매량 집계 기준은 2002년 12월~2003년 11월까지였다. 따라서 김건모가 불참, 이수영이 역전 직전의 상황에서 3위였던 조성모가 정말 운 좋게 간신히 수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성모가 수상 소감으로 '''방송에서 은퇴하셨지만 이제 콘서트장에서 그를 열렬히 사랑해 주시기 바란다'''고 아쉬운 마음을 표한 적이 있다.

3.4. 9~13집


그가 방송을 중단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어느 예능 출연 중 MC가 PD에게 "게스트들이 힘들어하니 좀 쉬었다하자"라고 말하자 PD가 "쉬긴 뭘 쉬어. 쉬고 싶으면 뽑아 먹을 거 빨리 뽑아먹고 보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 방송활동 은퇴를 선언했다는 이야기를 2015년 1월 라디오 스타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완전히 트렌드가 바뀐 음반생태에 있어 방송활동을 제하고 히트를 기록하는 것은 그 김건모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8집의 경우 그래도 일부 예능에서는 출연을 했지만, 바로 다음 해 발매된 9집이 전작의 1/10 수준으로 판매량이 줄고 타이틀곡인 '잔소리'도 다소 묻히게 되자 결국 방송활동 은퇴 선언을 2년 만에 번복하고 2005년에 방송에 복귀했다. 이후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컸던 듯...
하지만 7~8집에서 대중적 인기를 상당히 의식했던 행보와는 반대로 방송 중단을 선언하면서 그의 음악적 행보는 완전히 극초창기 또는 6집 비견할 만한 수준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9~10집이 김건모 음악 커리어의 전성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자신의 음악적인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준 9집과 10집은 팬들과 평단에게 매우 좋은 평가를 받으며 비운의 명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9집의 경우 방송활동 중단이라는 행보와는 걸맞지 않게 전작의 구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 다소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였으나, 10집은 김건모의 팬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이견 없이 완벽한 앨범'''으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쏟아놓은 최고의 명작으로 칭송받는 앨범이다. 실제로 그가 처음으로 프로듀싱을 맡았던 4~6집 시기와 비교해서도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이때는 자신이 원하는 장르의 곡과 대중성을 의식한 곡을 적절히 분배하고, 흑인 음악 성향의 곡들도 1~2곡을 제외하면 대중성을 모토로 말랑말랑하게 분위기를 바꾸어 내었다.[45] 하지만 10집에 이르러서는 대중성을 의식한 하이브리드화를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재즈, 블루스, 소울 장르 본연의 색깔에 집중하여 미국 본토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 가장 '흑인음악 본연에 가까운' 농도 짙은 곡들 뿐이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던 발라드&댄스곡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다. 정통 재즈, 블루스, 소울음악을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한국 가요계에서 찾기 힘든 보석이라고 표현할 수준이었다. 다만 이 때문에 그의 역대 앨범 커리어 중 가장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는 앨범이어서, 최고의 역작이라 평가받지만 경우에 따라 단조롭고 지루하다는 의견도 일부 보이는 편이다.
이 시기에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곡은 2년 만에 방송 복귀하며 대중들에게 모습을 선보인 '''10집''' 타이틀곡 '''서울의 달'''이다. 블루스와 재즈를 적절히 섞은 이 노래는 기존의 발라드&댄스로 묶일 수 있었던 그의 활동곡들과는 엄연히 차별화되는 곡이었다. 대중들에게 인기를 못 얻고 그냥 김건모가 간만에 좋은 노래 들고 왔네 수준으로 기억되다가 201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빛을 보며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과 음원 차트, 노래방에서 스테디 셀러로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김건모 본인도 공연을 나갈 때 '잘못된 만남'과 함께 꼭 챙기는 곡 중 하나가 바로 이 '서울의 달'이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장르의 곡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곡으로, 뒤늦게나마 오래도록 사랑받는 것이 정말 감사하다고 밝히며 현재도 강한 애착을 보이는 곡이다.
계속되는 미진한 상업적 성취에 좌절한 김건모는 2008년 다시 김창환에게 돌아가 프로듀싱을 맡기는 초강수를 두며 12집과 13집을 발매했지만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4년 10월' 3년 만에 14집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앨범 작업이 늦어지며 연기되었다가 2016년 11월 19일, 신곡 1곡과 기존 곡을 리마스터링하여 듀엣으로 나눠 부른 미니앨범을 발매했다. 발매 3주 전 SBS 미운 우리 새끼에서 피아노 반주와 함께 부르는 것이 방송되며 일종의 선공개(?) 프로모션이 이루어졌다. 제목은 《다 당신 덕분이라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노년 부부의 이야기를 풀어낸 노래로 차이라면 노부부 이야기는 아내 혹은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남편 혹은 아내의 이야기라면 다 당신 덕분이라오는 두 부부가 당신이 있어 지금껏 살아왔다고 고마워하는 얘기를 담고 있다. 미우새 선공개 때 어머니들 모두가 찡해 하셨다.

4. 사건사고/논란




5. 음반 목록




6. 수상 내역


  • 1993년
    • 최우수 신인가수상
    • 제4회 서울가요대상 10대 가수상 랩댄스부문
    • 제8회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본상
    • KBS 가요대상 10대 가수상
  • 1994년
    • 연예영화신문 신세대가수상
    • 제5회 서울가요대상 랩댄스부문상, 대상
    •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대상
    • KBS 가요대상 대상
    • KBS 가수상 최고히트곡상
    • MBC 한국가요제전 최고인기가요상
    • SBS 스타상 가수부문 대상
  • 1995년
    • 제22회 한국방송대상 남자가수상
    •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대상
    • KBS 가요대상 대상
    • TV저널 올해의 스타상 최우수상 (가수 부문)
    • 문화체육부장관 표창
    • 한국최고인기연예대상 대상
  • 1996년
    • 제7회 서울가요대상 10대 가수상
    •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대상
    • KBS 가요대상 대상
    • 제3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청소년 가수상
    • KMTV 가요대전 대상
    • MBC 한국가요제전 최고인기가요상
  • 1998년
    • KBS 가요대상 작곡상 사랑이 떠나가네
    • 제13회 골든디스크상 본상
  • 2001년
    • 제12회 서울가요대상 대상
    • 제16회 골든디스크상 본상
    • 제35회 가수의 날 올해의 남자가수상
    • SBS 가요대전 프로듀서 선정 최우수 가수상
    • KBS 가요대상 청소년 선정 최고 인기상
    • MBC 10대 가수 가요제 본상
  • 2008년
    • 제16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신세대가요 10대 가수상
  • 2011년
    •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
  • 2016년
    • 2016 SBS SAF 연예대상 토크쇼부문 최우수상
1990년대 데뷔한 가수 중에서는 H.O.T., 조성모와 함께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 골든디스크 시상식, 서울가요대상 이렇게 5대 가요 시상식의 대상을 모두 받은 경험이 있는 가수였다.''' 또한 H.O.T., 조성모, god, 김종국과 함께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 대상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기록'''을 가지고 있고, H.O.T., god, 김종국과 함께 '''한 해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 대상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기록을 보유한 가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수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1994년 한 해에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 골든디스크 시상식, 서울가요대상이 5대 시상식의 대상을 모두 거머쥔 진정한 의미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6.1. 가요 프로그램 1위


'''총 69회 1위'''
<rowcolor=#FFFFFF> '''날짜'''
'''방송명'''
'''곡명'''
'''비고'''
'''1993년'''
3월 18일
SBS 인기가요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2회)
'''데뷔 첫 1위'''
4월 22일
'''1위
(통산 2주)'''
10월 13일
KBS 가요톱10
첫인상
(5회)
1위
10월 20일
10월 27일
11월 3일
11월 10일
'''1위
(5주 연속, 골든컵)'''
'''1994년'''
2월 13일
SBS 스타 서울 스타
핑계
(15회)
1위
2월 16일
KBS 가요톱10
2월 20일
SBS 스타 서울 스타
2월 23일
KBS 가요톱10
2월 27일
SBS 스타 서울 스타
3월 2일
KBS 가요톱10
3월 6일
SBS 스타 서울 스타
3월 9일
KBS 가요톱10
3월 13일
SBS 스타 서울 스타
3월 16일
KBS 가요톱10
'''1위
(5주 연속, 골든컵)'''
3월 20일
SBS 스타 서울 스타
1위
3월 27일
4월 3일
4월 10일
SBS 스타 서울 스타
'''1위
(9주 연속, 최다 1위)'''
4월 24일
SBS TV 가요 20
1위
'''1995년'''
3월 11일
KMTV 쇼! 뮤직탱크
잘못된 만남
(18회)
1위
3월 12일
SBS TV 가요 20
3월 15일
KBS 가요톱10
3월 18일
KMTV 쇼! 뮤직탱크
3월 19일
SBS TV 가요 20
3월 22일
KBS 가요톱10
3월 25일
KMTV 쇼! 뮤직탱크
3월 26일
SBS TV 가요 20
3월 29일
KBS 가요톱10
4월 1일
KMTV 쇼! 뮤직탱크
4월 2일
SBS TV 가요 20
4월 5일
KBS 가요톱10
4월 8일
KMTV 쇼! 뮤직탱크
'''1위
(5주 연속, 최강자)'''
4월 9일
SBS TV 가요 20
1위
4월 12일
KBS 가요톱10
'''1위
(5주 연속, 골든컵)'''
4월 16일
SBS TV 가요 20
'''1위
(6주 연속, 당해 최다 1위)'''
4월 21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1위
4월 28일
'''1996년'''
6월 8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스피드
(9회)
1위
6월 12일
KBS 가요톱10
6월 19일
6월 22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6월 29일
6월 30일
SBS TV 가요 20
7월 3일
KBS 가요톱10
7월 7일
SBS TV 가요 20
7월 10일
KBS 가요톱10
'''1위
(4주 연속)'''
'''1998년'''
3월 7일
MBC 젊은그대
사랑이 떠나가네
(1회)
1위
4월 4일
KMTV 쇼! 뮤직탱크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1회)
'''2001년'''
6월 23일
MBC 음악캠프
미안해요
(11회)
1위
7월 5일
KBS 뮤직뱅크
7월 7일
MBC 음악캠프
7월 12일
KBS 뮤직뱅크
7월 13일
KMTV 쇼! 뮤직탱크
7월 14일
MBC 음악캠프
7월 19일
KBS 뮤직뱅크
'''1위
(3주 연속, 골든컵)'''
7월 20일
KMTV 쇼! 뮤직탱크
1위
7월 21일
MBC 음악캠프
7월 27일
KMTV 쇼! 뮤직탱크
'''1위
(3주 연속)'''
7월 28일
MBC 음악캠프
'''1위
(4주 연속, 통산 5주)'''
7월 8일
SBS 인기가요
짱가
(3회)
1위
7월 15일
7월 22일
'''1위
(3주 연속, 왕중왕)'''
'''2003년'''
4월 4일
KMTV 쇼! 뮤직탱크
청첩장
(3회)
1위
4월 11일
4월 18일
'''1위
(3주 연속)'''
4월 6일
SBS 인기가요
My Son
(1회)
뮤티즌 송

7. 여담


  • 소문난 애주가. 그 중에서도 소주만을 유독 좋아한다. 극단적인 예로 어떤 인터뷰에서는 담배는 끊을 수 있지만 술은 못 끊는다고 했고, 세바퀴에 출연했을 때 부부싸움의 기술이라는 코너에서 상대역인 한성주에게 오빠 나 그럼 성형수술 포기할 테니까 오빠도 술 끊어라는 말에 단번에 그냥 수술해라고 말할 정도... 심지어 미우새를 보면 집에 소주 전용 냉장고에다가 소주 전용 정수기를 장만한 것도 모자라, 여름 한정용으로 소주 얼음[46]을 갈아 소주 팥빙수를 만들기도 했다.[47] 대선블루 CF모델로도 활동하기까지 했다.
  • 동시에 애연가로, 하루에 한 갑 반 가량을 피운다. 태우는 담배의 종류는 말보로.
  • 후배 성시경이 "형은 어떻게 이랑 담배를 그렇게 많이 하는데 녹음과 라이브를 한결같은 목소리로 유지할 수 있어요?"고 묻자 녹음할 때도 술을 마시면 된다고 했다고. [48]
  • 첫사랑이 1993년 '핑계' 활동 때라고 하며 박진영의 소개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2년 가량을 연애했지만 잊는 데는 9년이 걸렸다. 7집까지의 모든 사랑 노래를 그 여성을 생각하며 부르다가 8집 녹음을 하는데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고 한다.
  • 대한민국 해군 연예병[49] 출신으로, 해군홍보단에서 근무했다. 김용만지석진이 김건모의 1년 선임이었다.김건모 김용만 지석진 "해군 시절 함께 죽을 뻔"현재의 문화 홍보병으로 박보검이 현재 이로 복무중이다.
  • 해피투게더 쟁반노래방에 출연하고 싶어했고 결국 8집 앨범이 나온 후인 2003년 4월 출연했다. 이 때 2절까지 아는 노래가 나온 덕에 단 2번만에 성공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 결과 방송시간이 모자라는 바람에 노래를 한 곡 더 불렀다. #
  • 동생 김현모가 한때 게임 제작 사업(이야기 소프트)을 한 적이 있었다. 판타지 포유를 만들어 본인도 홍보 모델로 활약한 적 있었는데 이때가 게임에 대한 취미를 갖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 까무잡잡한 피부색, 작지만 단단한 체격# 때문에 '까만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 #2 이러한 특징 때문에 북한 출신의 김정남이 유럽코리아재단과 주고받은 메일에서 장성택의 신상묘사 중 김정남의 표현을 빌리면 '시커멓게 생긴' 사람의 비유명사로 뜬금 등장하기도 했다. [image]
  • 2014년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에 출연해서 실력 검증(?)용 노래방 기기 점수 측정에서, 유일하게 한 번에 100점을 받으면서 실력이 변치 않음을 보였다. [50] 또한 같은 프로에서 김건모가 드라이 리허설을 한다는 것이 프로그램 내에서 화제였는데 그가 전성기일 때는 리허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서 오자마자 노래 부르고 사라졌다고 한다. 어쨌든 1990년대 가요계를 휩쓴 끝판왕답게 본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사랑이 떠나가네", "잘못된 만남" 총 3곡을 부르면서 관객들 및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 특히 잘못된 만남에서 대기실에 있던 무도 멤버 및 가수들이 총출동, 단체 댄스를 추면서 대미를 장식한 장면이 압권. 공연 끝나고 하하의 가게에서 뒤풀이할 때 회식값 절반을 혼자 냈다고 한다.
  • 콘서트나 무대 때에는 굉장히 예민해지고 짜증도 많이 낸다고 한다. 특히 콘서트의 경우 자신의 음악적 기질까지 더해서 스태프들을 굉장히 많이 갈구는 듯... 2016년 8월 라디오스타에서 경리가 데뷔 전 김건모의 콘서트에서 백댄서로 무대에 섰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김구라가 "그때 많이 힘들었죠?"라고 묻자. 경리가 바로 "네 힘들었죠..."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미우새에서 공개된 5년만의 단독 콘서트 때도 여지없이 세션 팀들을 신나게 갈궈준다. 근데 잘 들어보면 세션 팀이 리허설 때 연주를 엉망으로 해서 반주 인이어 모니터링이 하나도 안 되어서다. 실제로 자세히 들어보면 멜로디 라인이 하나도 안 나왔다. 이상하게 웅얼웅얼 벙벙대는 소리만 들린다.
  • 미우새 2017년 3월 24일 방영분에서 드론 39대를 가지고 있음이 보였고, 후에 드론 자격증을 취득했다. 후에 전라남도 곡성군 건모마을에서 드론으로 농경지에 물을 주며 일손을 돕는 봉사활동을 했다. 전국투어 콘서트에는 관객들에게 드론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 RC카를 여러 대 소유하고 있으며, RC카 대회에 출전하여 수상한 경력이 있다. 이 RC카 덕에 코미디언 권재관과 의외의 친분이 있다고 한다.
  • 가요계에서 엄청난 실력과 경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예능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대가수라고 빼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가식 없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김건모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가수면 으레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예능출연을 자제하거나 출연하더라도 무게를 잡는 것이 보통인데 김건모는 태생적으로 웃기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가차없이 망가진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웃음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 김건모가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는 의 '사랑합니다',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김장훈의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고 한다.[51]
  • 오랜 자취 경력으로 요리 실력이 상당하다.
  • 2019년 10월 30일, 피아니스트 장지연과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김건모 내년 결혼 30대 피아니스트와 1년 열애 결실 예비 신부는 작곡가, 가수이자 목사인 장욱조[52]의 딸이자 배우 장희웅[53]의 동생이다. 장희웅의 입장에서 보면 첫 상견례 때 대선배에게 형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상당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서 5월 말 작고한 아버지의 선물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했다. 이후 결혼식 날짜도 발표했으나 지인들의 참석요청이 많아 식장을 변경한다는 이유로 4개월 뒤로 결혼식을 미뤘다고 발표했다.

8. 방송 활동



8.1. 나는 가수다


2011년 3월 20일,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으며 지상렬이 3번의 공연과 경연에서 모두 매니저를 맡았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선곡한 다음 최하위를 해서 하차해야 했는데, 인터뷰에서 장난 쳐서 떨어진 것 같다는 변명과 다른 출연자 및 스태프의 즉흥적인 재도전 기회 부여를 수락한 관계로 폭풍같은 까임을 받았다. 재촬영 의혹 기사 결국 23일 밤 기자회견을 통해 자진 하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후에 라디오 스타에 나온 지상렬의 말에 따르면 '나는 가수다는 분류가 예능이다![54] 그러니 노래할 때 예능을 조금 섞자!'라고 지상렬 자기가 말하고 김건모가 공감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그 뒤 2011년 3월 27일 열린 2차 경연, 나가수에서 항상 여유를 보이던 그가 손을 덜덜 떨면서 정엽의 ‘You are my lady’를 진지하게 불렀고 시청자들을 감동을 줬다. 나가수에서의 경험이 20년간의 가수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다며 언급하기도 했는데 나가수가 매너리즘에 늘어져있던 천재를 각성시킨 것일지도... '국민가수'라는 타이틀을 가진 김건모가 이 정도의 어그로를 끈 적은 사실 없었기에,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듯. 재출연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재도전 사건은 김건모 자신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 출연하게 된 김연우는 '김건모 씨를 좋아해서 함께 무대에 서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며 1차 경연에서 김건모의 노래를 편곡해 불렀다.
하차하긴 했어도 나가수에 김건모는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는 소리도 있다. 매번 미션곡에 김건모 노래가 나온다고...
이후 룰루랄라우리들의 일밤에 컴백했다. 다만, 나가수는 재도전할 생각이 없는 듯.
그런데 나는 가수다 2의 섭외를 거절했다던 김건모가 김영희 PD의 끈질긴 설득에 다시 재출연이 성사되었다. 김영희 PD가 얼마나 끈질겼는지를 알 수 있는데, 김건모의 콘서트장에 관객과 스탭들의 동의를 얻어 무대에 올라가 '''"나가수2에 나가게 해주세요!!"'''라고 팬들과 함께 외치고 그 콘서트 뒷풀이 자리를 따라가고 후에도 포장마차에서 같이 술을 마시면서 꽤 많이 설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8월 경연에서 스케줄 조정에 따른 제작진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 다시 자진 하차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나는 가수다 2 항목의 비판 부분 참고. 그 뒤 토토가 2014년 12월 20일 방영분에서 나가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나는 가수다
경연
노래
순위
첫 공연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3위
첫 경연
립스틱 짙게 바르고 - 임주리
7위
두 번째 경연
You Are My Lady - 정엽
자진하차[55]
나는 가수다2
오프닝 쇼
서울의 달

5월 B조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 유재하
상위권
5월의 가수전
시인의 마을 - 정태춘

6월 B조
내 마음 당신 곁으로 - 김정수
하위권
6월 고별가수전
다행이다 - 이적

7월 B조
I can wait forever - Air Supply
하위권
7월 고별가수전
어떤이의 꿈 - 봄여름가을겨울

8월 A조
서른 즈음에 - 故 김광석
상위권
8월의 가수전

자진하차
  • 나가수에서 불려진 김건모 곡
방송일
제목
가수
2011년 3월 27일
첫인상
박정현
2011년 5월 8일
미련
김연우
2011년 6월 12일
사랑이 떠나가네
옥주현
2011년 9월 11일
아름다운 이별
김조한
2012년 1월 1일
Double
바비 킴
2012년 9월 23일
미안해요
서문탁
2015년 4월 3일
미안해요
양파

8.2. 미운 우리 새끼


어째 방송이 될 때마다 시청자들로 하여금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기행'''을 보여줬다. 좋게 말하자면 미운 우리 새끼를 재미있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
토니 안의 어머니인 이옥진이 김건모의 열렬한 팬이다. 미우새에서 밝혔으며 김건모가 토니 어머님을 만나러 평창까지 찾아갔다.


[1] 1967년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닌 빠른 년생이며, 1974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미우새에서도 2017년에 쉰하나, 2018년에 쉰둘이라는 자막을 쓰는 등 실질적 1967년생이라는 태도를 유지했고, 1968년 7월생인 탁재훈도 그를 형으로 부르고, 1967년 생이자 대학 동기 김용만과도 친구로 살고 있다.[2] 어린 시절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으로 이주하여 성장했다.[3] 프로필 키는 172cm지만 실제키 168인 윤종신보다 3cm이상 작은 김범수와 비슷한걸로 보아 160중반이다. 다만 옥주현보다는 확실히 작았다. 2001년에 가족오락관에서 밝힌 몸무게는 59kg.[4] 미운 우리 새끼 52회 출연. 카 레이서가 꿈이었지만 가족들을 위해 꿈을 접었었다. 김건모가 아버지를 모시고 강원도 인제 레이싱장을 가게 되었다. 이때 소속사 대표(손종민)와 김진표도 함께 출연했다. 2019년 5월 19일 지병 투병 끝에 사망했다. 향년 79세.기사 [5] 함경남도 원산(현 강원도 원산시) 출신, 미운 우리 새끼차남 김건모와 함께 출연했었다.[6] 두 형제의 이름은 미운 우리 새끼에서 언급되었다. 김건모가 소속사 손종민 대표와 함께 떠난 소주 기행에서 당시 부산에 거주 중이던 친동생의 집을 찾아갔다.[7] 2019년 11월에 혼인신고를 했다.[8] 현 음악학부 한국음악전공[9] 미운 우리 새끼 49화에서 가족들과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10] 대표는 손종민으로, 미운 우리 새끼에서 자주 등장했다. 다만 연예 기획사 등록 현황에는 대표자가 김건모로 올라와 있으며 손 대표가 한살 동생인 탓에 김건모의 각종 기행과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에 자주 휘말렸다.[11] 이름 '건모'를 (마를 건)과 (털 모)로 해석한 것[12] 2001년 가족오락관 출연 당시 노래방 코너(도전! 30곡)에서 주영훈이 10번 카드를 뒤집었을 때, 뒤집은 카드에 흑기사를 고르라는 설명이 아래에 적혀있자, 주저없이 김건모가 선택되었다.[13] 지금은 계정이 정지되었다.[14] 육군과 달리 해군과 공군은 체력검사를 거쳐야 한다.[15] 최후의 지상파 가요대상 수상자는 2006년 SBS에서 대상을 수상한 동방신기다.[16] 음반 판매는 2019년 방탄소년단이 339만장 판매를 기록하면서 김건모의 330만장 판매 기네스북 기록을 깼다. 이는 1년에 3번이나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할 정도의 역대급 한류스타나 되어야 김건모의 기록을 깰수 있다는 말이다.[17] 신승훈이 1990년에 데뷔,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 1992년 3월 발매, 김건모 1집이 1992년 10월 발매되었다.[18]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직접 확인해 보자.[19] 남녀 보컬리스트 설문조사[20] 서울예술대학 재학 당시 데뷔 전이던 김혜림과 박성신과 함께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21] 김건모 - Lately (1993) 영상을 보고 리액션하는 영상이다.[22] 김건모의 대표적인 스티비 원더 모창곡인 I Just call to say I love you.[23] 해당 퍼포먼스 구성 자체는 당시 유행하던 Jodeci의 버전을 많이 참고한 것이다.[24] 물론 『혼자만의 사랑』, 『아름다운 이별』 등과 같은 발라드 히트곡도 적진 않았다.[25] 대표적인 곡이 작곡과 편곡을 맡은 '미련'.[26] 이런 부분은 당대의 라이벌인 신승훈과 비슷한 면이 많다.[27] 이승철이 부른 '잠도 오지 않는 밤에'의 부분 리메이크.[28] 오죽하면, 최근 유튜브 댓글에서는 '핑계'로 성공한 사람은 김건모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다.[29] 이후 남자 3명, 여자 1명으로 구성된 혼성 4인조 그룹이 붐을 이루고 있었는데, 혼성 그룹은 김건모의 댄스 파트너로 관심을 끌었던 김송이 등장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30] 3집 아름다운 이별, 4집 미련, 6집 버담소리, 7집 미안해요, 8집 청첩장, 9집 잔소리, 11집 허수아비.[31] 한 해에 가요 관련 대상에서 2개 이상 대상을 받은 가수들은 있지만, 5개 주요 시상식에서 한 해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가수는 김건모가 유일하다.[32] 1994년의 김건모는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핑계>가 가요톱10 골든컵을 수상했던 1994년에는 이 곡 외에도 골든컵 수상곡이 6곡이나 더 있었지만 김건모의 <핑계>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015B의 <신인류의 사랑>과 김원준의 <너 없는 동안>은 살짝 임팩트가 부족했고 김민교의 <마지막 승부>는 표절 시비가 있었다.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은 립싱크 사건으로 인해 연말 가요시상식 무대에도 서지 못했고,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은 아직 풋풋했던 신인그룹의 곡이었다. 신승훈의 <그후로 오랫동안>은 신보를 낸 시점이 9월말로 김건모의 아성을 위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오히려 김건모 커리어하이인 3집 활동 당시에 김건모의 아성을 위협한 가수들이 쟁쟁했다. 1995년 한 해에 골든컵 2회 수상의 기염을 토한 룰라가 있었고 김건모의 소속사 동료였던 노이즈박미경이 자신들의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또한 마지막 앨범이 대박을 친 서태지와 아이들도 건재했다.[33] 원래 발라드곡 아름다운 이별이 타이틀곡이었지만 이 곡이 갑자기 큰 인기를 얻었다.[34] 이 영화촬영으로 인해 김건모는 <잘못된 만남>이 골든컵을 수상했을 당시 가요톱10 무대에 서지 못했다.[35] 다만 당시 한국에는 공인된 음반 판매량 집계 체계가 없었던 점은 고려해야 한다. 이 기록은 2019년 방탄소년단의 Map of the Soul: Persona 앨범이 깼다.[36] 또한 토토가 이후 잘못된 만남은 발매된 지 20년이 지난 2015년에 뮤직뱅크에서 4위까지 들었다.[37] 1집 후속곡 '첫인상', 2집 타이틀곡 '핑계', 3집 타이틀곡 '잘못된 만남' 모두 가요톱텐 골든컵을 달성했다. 특히 2집 핑계와 3집 잘못된 만남은 다른 지상파에서도 여러 번 1위를 한 상태였다. 참고로 첫인상 활동 시기에는 가요톱텐 외의 다른 방송 차트 프로그램이 없었다.[38] 다만 MBC와 SBS는 1995년 하반기부터 각각 3, 5주 연속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2주 1위를 한 뒤 상반기 결산으로 한 주 미집계된 것도 골든컵 수상 실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상반기 결산의 최고 곡으로 수상은 하긴 했다.)[39] 지금까지 KBS에서 3연속 대상을 수상한 가수는 조용필과 김건모뿐이다.[40] 음악적 코드는 솔과 리듬앤블루스 재즈 등 흑인 음악적 발라드다. 10대 취향의 댄스음악에서 탈출선언을 한 셈이다. '독백'의 원숙한 보컬, 가벼운 발라드 '아침 풍경', 샹송 분위기의 '이별없는 사랑', 권진원과 듀엣을 이룬 '오늘처럼 이렇게' 등이 그런 뜻을 머금고 있다. 김건모는 "음악의 내용과 형식을 통해 당장 절박한 내 이야기를 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동아일보 1997년 기사)[41] 이 대상이 큰 의미가 있는 게 당시 김건모를 제외하고는 대상을 받은 가수가 god 밖에 없었다.[42] 그 당시가 치열했던 시기였던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43] 사실 그럴 수 없었던 것이 2002년 이후로는 음반판매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2002년에도 밀리언셀러는 나오지 않았으나 전체 판매량을 비교해볼 때 밀리언셀러 앨범만 제외하면 2001년과 비슷했다. 반면 2003년에는 2002년에 비해 80만 장 이상 음반판매량이 떨어졌다. 밀리언셀러는 1990년대에도 흔한 일이 절대로 아니었으며 실제로 음반판매량을 보면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가수는 한 해의 2~3팀 될까 말까다.[44] 하프 밀리언셀러는 그 후에도 몇 차례 기록된 바 있었다. 바로 다음해인 2004년 1월에 발매된 서태지 7집, 그리고 2013년 이후의 엑소 앨범들이 그것인데, 서태지의 경우 2004년 앨범이 나온 당해에 48만 장, 이듬해에 2만 장을 판매하여 2년에 걸쳐 50만 장을 넘긴 사례였고, 엑소는 1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버전을 합해서 나온 컬렉션 판매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하프 밀리언셀러라는 표현은 틀린 표현이지만, 단 하나의 버전으로 한 해 동안 팔린 하프 밀리언셀러라고 하면 맞겠다.[45] 대표적인 예가 발라드로 바뀐 미련, 뽕짝 댄스곡으로 바뀐 사랑이 떠나가네이다. 각각 그를 대표하는 인기곡이었지만 처음 곡을 썼을 때는 전혀 다른 색깔의 곡이었고, 프로듀서의 권유로 대중성이 가미된 장르로 탈바꿈 되었다 전해진다.[46] 요즘 소주는 영하 17~18도 정도면 얼지만 가정용 냉장고로 단단하게 얼려면 오래 걸려서인지 소주 8, 물 2의 비율로 섞어서 각얼음으로 만들었다.[47] 다만 미우새는 예능이라서 과하게 설정했다.[48] 근데 정작 성시경도 연예계 주당에 골초로 유명하다. 게다가 미성이다.[49] 국방부 직할의 육군 연예병사와는 다르다.[50] 노래방 기계는 성량과 박자에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 음정이 정확해도 성량이 크지 않으면 기계가 틀린 것으로 잘못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성량이 크고 박자감이 뛰어난 김건모같은 가수가 유리하다. 반대로 조성모의 경우 전성기에 비해 창법이 많이 바뀌고 성량이 큰 가수가 아니기에 점수가 낮았다. 즉, 점수가 실력에 비례해 나오는건 아니지만 점수 받기 유리한 스타일이 있긴 하다.[51] 여기서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리메이크해서 부른 바 있다.[52] 조경수의 "아니야"와 "돌려줄 수 없나요", 조용필의 "상처", 유미리의 "젊음의 노트", 최진희의 "꼬마 인형" 등을 작곡했다. 본인도 가수 활동을 하며 "고목나무", "왜 몰랐을까" 등의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으나 목사가 된 이후에는 CCM에 주력하고 있다.[53] 선덕여왕에서 박의 역할을 했던 배우이다.[54] 후에 힐링 캠프에서 밝혔는데 예능인데 뭘 그리 기를 쓰고 하냐고... 원래 김건모는 콘서트에서 저런 장난을 자주 쳤는데 본인이 말하듯이 이건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했으며 결과적으론 잘못이라 사과했다.[55] 순위가 공개되지 않았으나, 3위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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