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브라운

 






'''이름'''
바비 브라운 (Bobby Brown)
'''출생'''
1969년 2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보스턴
'''별명'''
King of New jack swing, King of Stage
'''신체'''
178cm
'''데뷔'''
New Edition
'''가족'''
딸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1993년 출생~2015년 사망
휘트니 휴스턴(이혼)
앨리샤 에더리지(재혼)[1], 아들 바비 브라운 주니어1992년 출생~2020년 사망, 딸2015년생[2]
1. 개요
2. 솔로 시절
3. 히트곡
4. 몰락
5. 기타


1. 개요



대표곡 중 하나인 <Every Little Step>. 그루브의 진수를 보여주는 몸놀림.
미국의 댄스 가수 및 싱어송라이터. 어린 시절부터 아이돌 그룹인 뉴 에디션을 결성하여 가요계에 입문하였다. 한때 바비 브라운과 뉴 에디션 멤버들이 마이클 잭슨의 집으로 초대받아 마이클 잭슨이 춤에 대해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그정도로 바비 브라운은 데뷔하자마자 타고난 춤 실력으로 인정받은 춤꾼이였다.
R&B힙합을 합친 뉴 잭 스윙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이 분야의 거장인 베이비페이스, 테디 라일리와 함께 1980~90년대 초반의 음악시장을 선도하였다. 소위 악마의 재능의 원조격인 셈이다.
소위 말하는 흑인 특유의 힘이 넘칠듯한 오버스러운 댄스 는 바비 브라운이 원조라고 할수 있다. 깝침이 과도하여 무대를 보면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넘쳐 흐른다. 무대에서는 자주 객석에 드나 들며 관객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얼굴을 들이대 팬서비스를 해주는데 당시 빈약했던 관중과의 소통등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다만 본인의 트레이드마크인 토끼춤이 워낙 체력적으로 힘든 춤이라 립싱크를 많이 사용했다.
그러다가 점점 마약에 손을 대면서 목소리가 나갔으며 "Humpin around"부터는 토끼춤이 아닌 직접 개발한 파워댄스로 탈바꿈하였다. 바비 브라운을 대놓고 벤치마킹한 현진영 역시[3] 오래 가지 못해 마약에 손을 대어 인기와 인생을 말아먹었다. 덤으로 휘트니 휴스턴까지... 이것이 진짜 평행이론이 아닐지..
한때 미국의 유행을 선도하였던 인물이자 1980년대 한국 댄스가수들의 롤모델이었지만 1990년대 들어 한국에서는 서태지의 출현으로 인해 인기가 바랜 면이 있다. 그리고는 본인의 사생활이 점점 막장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본토에서도 잊혀졌다. 지금은 1980~90년대 올드팬을 제외하곤 이름 아는 사람도 잘 없을 정도로 인기가 없다. 최근 복귀하여 다시 활동하나 성대결절로 인해 과거만큼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체중도 불고 나이도 들어서 춤까지 불가능해 매력이 없어져 버렸다.

2. 솔로 시절


뉴에디션에서 솔로로 전향한 후 1988년부터 1993년까지 "Don't Be Cruel", '''My Prerogative''', "On Our Own", "Every Little Step", "Roni", "Rock Wit'cha", '''She Ain't Worth It''', "Humpin' Around", "Good Enough", "Get Away" 등으로 활약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89년은 바비 브라운이 최전성기를 맞은 해인데, 자넷 잭슨, 폴라 압둘, 뉴 키즈 온 더 블락, 밀리 바닐리 등과 함께 1989년 미국 음악계를 지배했다.
1989년 바비 브라운의 히트곡은 "My Prerogative", "On Our Own", "Every Little Step", "Roni", "Rock Wit'cha"인데 '''이 다섯 곡이 모두 1989년 빌보드 연말 차트 100위 권 안에 들어갔다.''' 이 중 "My Prerogative"는 빌보드 핫 100 1위, '''연말 차트 2위'''를 기록했으며, "On Our Own"은 빌보드 핫 100 2위, 그리고 '''연말 차트 19위'''를 한 대히트곡이었다.
MC 해머와 라이벌이였으며 그를 MMA같은 공개석상에서 몇차례 꺾기도 했다. 그러나 MC 해머U Can't Touch This 이후로 하락세를 타는 듯 했으나 1992년 2집 앨범 "Bobby"로 다시 한번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 라이벌이었던 MC 해머는 저 곡 이후 2년 정도 최전성기를 누렸지만 1992년 말 닥터 드레스눕 독등장으로 힙합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며 인기가 하락했다.
MMA에서는 프리스타일 랩으로 저렴한 속어를 구사하여 되려 상을 받고도 야유를 받은 적이 있다.

3. 히트곡


  • Don't Be Cruel (1988) [4][5]
  • My Prerogative (1988)[6][7]
  • Roni (1989)[8]
  • Every Little Step (1989)[9]
  • On Our Own (1989)[10][11]
  • Rock Wit'cha (1989)[12]
  • She Ain't Worth It (1990)[13]
  • Humpin' Around (1992)[14]
  • Good Enough (1992)[15]
  • Get Away (1993)[16]


4. 몰락


휘트니 휴스턴과 결혼했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결혼생활 내내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키며 타블로이드 지, 찌라시에 가십 거리로 자주 올라왔다. 특히 바비의 폭행으로 부부간 불화가 잦았고 결혼 생활 말엔 바비 브라운이 외도를 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시민과의 몸싸움, 소속사 직원 성희롱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휘트니의 속을 썩였다. 결국엔 이혼.
휘트니는 이혼 후 재기 했으나 이미 마약과 결혼 생활에서 받은 각종 스트레스 때문에 그 아름답던 목소리가 망가졌고 결국 오래가지 못해 휘트니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여러모로 바비 브라운의 막장행각이 휘트니의 발목을 잡은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은 맞다.
다만, 이전 서술에선 바비 브라운으로 인해 휘트니가 마약을 배웠다고 적혀있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휘트니는 바비를 만나기 훨씬 전인 16살에 생일선물로 마리화나와 코카인을 접했고 이미 가수 데뷔 시기부터 줄곧 마약을 흡입해왔다. 이는 그녀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휘트니(영화)에서 친오빠들과 주변 지인들의 증언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심지어 친오빠들이 해당 영화에서 밝힌 바로는 바비 브라운은 마약을 그렇게 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본인들과 바비가 어울리다보니 복용량이 늘게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바비의 타고난 마약 복용량이 대단치 못해서 휘트니 휴스턴과 그 형제들이 마약을 하는 타이밍에는 따로 빠져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술로 치면 주량이 대단치 못한 셈. '''즉, 휘트니가 바비보다 마약을 더 했음 더 했고, 마약을 오히려 소개해준 입장'''에 가깝지, '바비 브라운이 아무것도 모르던 휘트니에게 마약을 건네줬다'는 둥의 얘기는 루머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바비 브라운은 자서전에서 코카인 판매책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10세 때에는 코카인을 밀가루로 착각해 프라이드 치킨을 만든 적이 있을 정도로 마약을 접하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으며, 휘트니와의 교제 이전 어린 시절부터 마약을 했다고 고백했다.
가족 전체가 저주받았다 라고 평해지는데 전 부인 휘트니휴스턴이 2012년 2월에 사망했으며 2015년 7월 그녀의 딸까지 어머니를 따라 갔다. 그리고 2020년 11월 그의 아들 바비 브라운 주니어가 죽으며 비극의 가족이 됐다.
더욱 상세한 정보:기사1 기사2

5. 기타


화장품 메이커인 Bobbi Brown과는 같은 발음이나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상당히 잘 생긴 외모에 뛰어난 댄서였지만 현재에는 나이도 많은데다 살도 많이 쪄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의 장수 댄스그룹 J Soul Brothers의 탄생에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초대 멤버 다섯 명이 브라운의 방일 공연 당시 댄스 팀으로 나왔던 인연에서 이름을 J Soul Brothers라고 지어준 것이 지금의 EXILE의 전신을 만들어 준 셈이다.
GTA 5의 라디오 Non-stop pop FM에 On our own이 나온다.


[1] 본인 매니저이며 2007년 휘트니 휴스턴과 이혼 후 2010년에 청혼 후 2012년에 재혼했다.[2] 재혼한 부인 슬하 출생. 공교롭게도 몇 주 뒤에 전 부인 슬하 1녀 크리스티나가 사망하고 말았다.[3] 슬픈 마네킹 무대를 보면 옷부터 댄스까지 전부 바비 브라운을 따라하였다.[4] 바비 브라운의 첫 번째 솔로 히트곡이었다. 빌보드 핫 100에서 8위에 올랐고 1988년 빌보드 연말 차트에도 진입했다.[5] 같은 해(1988년)에 다른 그룹이 부른 같은 제목의 노래도 있었다. 그 다른 그룹은 유명한 미국의 락 밴드 Cheap Trick. 엘비스 프레슬리Don't Be Cruel을 커버한 노래인데 빌보드 핫 100에서는 4위까지 올랐다.[6] 바비 브라운의 첫 번째 빌보드 핫 100 1위 곡이며, 이 곡의 인기는 아주 대단해서 1989년 빌보드 연말 차트에서 2위까지 올랐다.[7] 이후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리메이크해서 발표했다.[8] 빌보드 핫 100에선 3위를 기록했으며, 1989년 빌보드 연말 차트 90위 권 안에도 진입한 히트곡이다.[9] 빌보드 핫 100에서 3위를 기록했으며, 1989년 빌보드 연말 차트 50위 권 안에 든 대히트곡이다.[10] 빌보드 핫 100에서는 2위를 차지했으며, 이 곡의 인기는 대단해서 1989년 빌보드 연말 차트에서 19위까지 올랐다.[11] 또한 이 곡은 1989년 나온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 2의 주제곡이다.[12] 빌보드 핫 100에서 7위를 기록했고, 1989년 빌보드 연말 차트 100위 권 안에 들어가는 히트를 거뒀다.[13] 글렌 메이드로스의 노래를 피쳐링한 것인데 피쳐링했기에 완전한 자신의 노래는 아니지만 이 곡 역시 뉴 잭 스윙 장르의 곡이며,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하고 1990년 빌보드 연말 차트 30위 권 안에 드는 대히트곡이었다.[14] 바비 브라운의 인기를 다시 끌어올려준 노래이며, 2집 앨범 Bobby의 리드 싱글이며, 빌보드 핫 100에서는 3위까지 올랐고 1992년 빌보드 연말 차트에서도 33위를 기록한 대히트곡이었다.[15] 빌보드 핫 100에서 7위를 기록했고, 1992년 빌보드 연말 차트에서도 50위 권 안에 든 히트곡이었다.[16] 빌보드 핫 100에서 14위를 기록했으며, 바비 브라운의 사실상 마지막 히트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