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이치칸교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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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한국과의 관계
2.1. 구한말 경제침탈
2.2. 제일권업은행 서울사무소
3. 같이보기


1. 개요


第一勧業銀行(The Dai-ichi Kangyo Bank, Limite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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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제일은행 시절 홍보 팜플렛
구 제일은행 교토중앙점(현 미즈호은행 교토중앙점)
1873년에 '제일국립은행'(第一国立銀行)이란 명칭으로 설립된 일본 최초의 은행이다. 정부인가번호가 1번이기 때문에 이름이 '제일'이다. 또한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이기도 하다. 당시 제1은행부터 제153은행(...)까지 설립되었으며 그 중 1번째. 참고로 제20은행은 1912년에 제일은행에 합병되었다. 아직도 당시에 세워진 은행은 이름이 숫자일 당시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니가타의 제4은행.
최초로 설립되고 이름에 국립(国立)이 들어가서 중앙은행인것 같지만 일본의 중앙은행은 1882년 설립된 일본은행이다. 최초 본사는 니혼바시카부토초(日本橋兜町)[2]에 있었으며 로고는 빨간 별 두개를 겹친 형태로 제정됐다. 화폐정리사업 당시에 발행된 조선 엔 지폐에도 이 로고가 박혀있다. 1896년에 국립은행조례에 의해 이름에서 '국립'이 빠지고 제일은행이 되었다.
초대행장은 일본 경제계의 거두 시부사와 에이이치였다. 2차대전 전까지 시부사와 재벌에 소속되었으며 전후에는 제일권업은행 자체가 모기업 노릇을 하며 '다이이치칸긴 그룹'(DKB GROUP)이란 이름의 기업집단이 되었다.[3]
1971년 일본권업은행[4]과 합병하여 제일권업은행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다이이치칸긴'(第一勧銀, 제일권은)으로 줄여 불렀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이조차 부르기 어려웠는지, '간긴'(勧銀)이나 '이치칸'(一勧)같은 표현도 통용되었다.
이 때부터 원 안에 'DKB'라는 로마자 약칭이 들어간 로고와 빨간색 바탕에 하얀색 하트모양이 들어간 로고가 병용됐는데, 광고 등에서는 '하트 은행'(ハートの銀行)이란 슬로건과 함께 후자를 많이 사용했다. 또한 지금과 정반대로 옅은 빨간색이 기업 상징색이었다. 1970~80년대에는 당시 기준으로 젊은층이던 신인류 세대를 겨냥하여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들어간 통장이나 기념품을 내놓기도 했다. 이 전통은 미즈호 은행이 된 이후에도 이어져서, 2020년 현재에도 헬로키티가 들어간 통장 등, 젊은층 인구를 겨냥한 귀여운 디자인의 상품을 자주 내놓는 중.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가 절정이던 시기에는 세계 50대 기업 시가총액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였으나, 거품이 꺼지고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며 좀비기업들의 부실채권 문제와 경기 불황으로 금융권의 인수, 합병 물결을 견디지 못하고 2002년 4월 미즈호 은행에 편입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도 미즈호 은행에는 제일권업은행 시절의 흔적이 꽤 남아있다. 바로 은행 코드넘버가 '''0001'''라는 것과, 미즈호 은행의 일부 금융상품 중에서 볼 수 있는 '하트풀'(heartful)이란 표현, 그리고 미즈호 은행 우치사이와이초 빌딩[5] 근처에 세워진 하트모양 시계탑이다. 복권 당첨금 지급을 담당하는 기능 역시 제일권업은행에서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또한 제일권업은행 혹은 제일은행 시절에 발행된 캐쉬카드나 통장도 여전히 미즈호 은행에서 사용이 가능하다. 단, 당연히 너무 오래된 서류라 ATM에서는 거래가 불가능할 수 있는데, 원금이 전부 보장되어 있으니 은행 창구에서 입출금 등 처리 혹은 미즈호 은행 계좌로 이전이 가능하다. 2021년 기준으로도 여전히 미즈호 은행 창구에서 대기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명씩 제일은행, 후지은행, 일본흥업은행 중 한곳의 계좌나 캐쉬카드를 가지고 은행 업무를 보는 사람이 보일 정도.


2. 한국과의 관계



2.1. 구한말 경제침탈


일본 제일은행과 일본권업은행 모두 한반도와 악연이 깊은데, 특히 일본 제일은행은 구한말 조선에 진출해 일제의 이권침탈의 도구로 쓰였다.[6] 고종황제는 러시아와 협력해 한러은행을 설립하여 중앙은행을 만드려고 하였으나[7] 친일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독립협회의 반발로 무산되었으며 제1차 한일협약 이후로 경제주권을 빼앗긴 뒤 '제일은행'이 실질적인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으로서의 노릇을 하며 정부 국고금의 취급[8], 화폐정리사업과 법화의 발행을 하였고 이렇게 모인 돈을 대한 제국에서 활동하려고 하던 일본인들에게 대출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로서 한국 최초의 중앙은행의 역사가 일제에 의해 쓰여지게 된다. 따라서 '제일은행권'은 대한제국의 화폐 역할을 하게되는데 이것이 조선 엔의 시작이다.[9] 통감부의 화폐정리사업대한제국의 법화인 조선 엔 발행은 서로 연결되는 과정으로,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그전까지의 대한제국 화폐를 뿌리뽑았고 일본 엔과 일대일 대응인 조선 엔을 대한제국의 통화로 사용하게 해서 대한제국 경제를 일본 경제에 예속시켜 하나의 경제권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때 제일은행에서 발행한 지폐의 모델로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넣었다. 그런데 2024년에 새로 바뀌는 일본 엔 1만엔권 화폐 도안에 기존의 후쿠자와 유키치를 대신하는 모델이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결정되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로서는 두번째 지폐모델인 셈이다.
1909년에는 한국통감부의 사실상의 지배하에 있었던 대한제국의 구(舊)한국은행에 업무를 이관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짓고있던 경성지점건물을 구(舊)한국은행에 인계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쓰이는 한국은행 구본관이다. 한편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자 구(舊)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10] 이것이 해방 후 5년후인 1950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중앙은행 한국은행의 전신이다.[12]
1945년 8.15 해방 뒤 명동 본점은 1948년 반민특위가 입주했고, 1949년 해체 후 상공부 특허국을 거쳐 1963년 국민은행 창립 시 본점으로 쓰다가 1969년경 신관 신축으로 철거되었다.

2.2. 제일권업은행 서울사무소


제일권업은행 명칭으로 한국에 다시 들어온 것은 1971년 10월경이다. 당시 일본계 은행으로는 4번째였다고 한다.[13] 남대문로 KAL빌딩에 제일권업은행 서울사무소가 설치되었으며 본격적인 영업은 1972년 2월 7일에 시작했다.
1981년 12월에는 한국인 직원 차별대우로 인해 노사분규와 사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14] 다행히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극적으로 노사간 합의가 이루어지긴 했다.[15]

3. 같이보기


[1] 당시 로고에 병기됐던 영문 표기이다.[2] 도쿄증권거래소가 있는 일본 최대의 금융가.[3] 엄밀히 말하면 구 시부사와 재벌+구 후루카와 재벌+구 가와사키 재벌이 합쳐진 형태이다.[4] 1896년에 설립된 특수은행으로 2차대전 시기에는 전시채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패전 후 일반은행으로 전환했다.[5] 원래 동양척식주식회사 본부가 있던 곳이었다. 패전후 일본 국세청이 쓰다가 1980년에 재건축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2013년 본사를 오테마치로 이전하면서 해당 건물은 '도쿄영업부'로 격하된 상황.[6] 본문서에 해당하는 '제1은행'외에도 '제18은행', '제58은행', '제102은행'이 있었다.(숫자는 일본정부 인가번호.)[7] 러시아계 합작은행인 한아은행은 이미 1898년 설립된 바 있다.[8] 사실 이 업무는 제1차 한일협약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9] 그래서 조선 엔의 극초기 화폐들은 조선은행이 아닌 제일은행 로고가 박혀있다.[10] 비슷하게 일제중앙은행을 다른 침략지였던 일본령 대만대만은행, 만주국에는 만주중앙은행, 중국점령지에는 몽강국몽강은행, 중국연합준비은행, 화흥은행을 각각 설립하였다.[11] 구 조선은행의 일본인 자산은 상당수가 미군정의 몰수를 피해 일본 본토로 빼돌려졌고, 이를 바탕으로 설립된 '일본부동산은행'은 지금의 아오조라은행으로 이어지고 있다.[12] 1945년 해방 후부터 1950년까지는 일제강점기와 같이 조선은행의 이름 그대로 있었고 화폐는 조선 엔의 원판에서 독립문이나 무궁화를 집어 넣는 약간의 수정을 한 조선은행권 원을 법화로 발행하다가 1950년 한국은행으로 재설립 후[11] 한국은행권 원(1기)을 발행하였다.[13] 그 전에 이미 도쿄은행, 미쓰비시은행, 후지은행의 서울지점이 들어왔던 상황이었다.[14] 한인직원 차별대우 분규 日은행 서울지점 사표소동, 동아일보 1981년 12월 18일자 기사[15] 사표 전원 반려 日 권업은 분규타결, 동아일보 1981년 12월 25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