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정리사업
貨幣整理事業
구한말 시기 일본 제국의 주도 하에 대한제국에서 시행한 화폐개혁.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한 일본은 대한 제국의 근대화를 명분으로 대한제국을 장악하기 위해 외국인 고문들을 파견한다. 이 고문들 중 재정을 담당하기 위해 파견된 자가 바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 種大郞, 1853~1926)[1] 이며 그가 부임하자마자 단행한 것이 바로 화폐 정리 사업이었다.
일단 대한제국 화폐 변천사부터 알 필요가 있다.
조선은 갑오개혁 이전부터 근대적 화폐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1882년 마제은을 수입해서 최초의 서양식 화폐[2] 이자 은화인 대동전(大東錢)을 만들었으나, 이 돈들은 모두 부유한 이들의 창고로 들어가거나 해외로 유출되었고, 원료인 마제은의 가격 상승으로 1883년 생산이 중단된다. 이후 고종은 당오전을 만드는 한편, 1885년 차관을 도입해서 독일에서 근대 화폐 제조 기계(압인기!)를 수입[3] 하고 전환국을 설치했다. 전환국 총판에 독일인 고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앉히고 1886년부터 전환국에서 화폐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 때는 금화 5종, 은화 5종, 적동화 5종 체계였으나 기본적으로 금본위제에 필요한 금이 부족해[4] , 시험 생산하는 수준에 그치고, 조러 밀약이 들통나자 뮐렌도르프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면서 주도할 사람이 없어져 한동안 발행하지 않다가 1888년에 들어서야 적동화 2종과 은화 1종을 발행했다.[5]
1892년부터 은본위제도 하의 화폐 시스템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당시 전환국 통판 안경수가 일본에 건너가서 주조 이익의 1/4을 주는 조건으로 차관을 도입하고 일본 기술자들을 끌어들여서 근대 화폐가 제조된다. 당시 근대 화폐 기술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은화의 가치는 "일본 1엔 = 조선 5냥"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1냥(=일본 20전)과 5냥(=일본 1엔)은 은화로 제조되었다. 그리고 액면 체계는 량(兩)의 1/10이 전(錢), 전(錢)의 1/10이 푼(分)으로 정해졌다. 당시 발행한 주화는 5냥 은화, 1냥 은화, 2전 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로 5종이었다. 이 때 기존 화폐를 근대 화폐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임시로 쓰려고 했던 것이 호조태환권이다.
그러나 1892년이면 아직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 않을 시절이고, 앞서 언급된 화폐를 발행하기 위한 법인 '신식화폐조례'의 시행은 화폐권의 수호를 위한 정부당국의 저항과 당시 일본세력의 한국 침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던 청나라를 비롯한 열강의 반발로 중단되었다. 그리고는 1894년부터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터졌다. 이후 갑오개혁이 시행되면서 당오전이 없어지고 신식 화폐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된다.
그러나 갑오개혁 시기가 되면 다시 일본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상승하게 된다. 1차 갑오개혁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시작 되었고, 청일 전쟁 시기는 조금 영향력이 약해졌으나, 박영효가 끼어드는 2차 김홍집 내각 시기, 삼국간섭으로 약해진 영향력을 을미사변으로 갈아엎은 이후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김홍집 내각으로서는 은을 통제해서 대량의 은화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 결국 조선 정부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백동화 뿐이었다. 실제로 이게 가장 주조 이익이 많기도 했고 말이다. 여기에 기존 화폐 발매 권한을 가졌던 이들이 백동화에 달라 붙으면서, 정식으로 화폐를 만들 권한을 가진 한양과 인천의 전환국 외에도 주조의 특권을 얻어 행하는 특주(特鑄)나 환관이나 관리가 행한 묵주(默鑄)가 등장했다.
한편으로 이 때 사적으로 밀주된 사주전(私鑄錢)도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국내의 민간에서는 화폐를 만들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이 화폐는 밀조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환국의 주조 기술은 일본에서 왔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밀조가 가능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밀조된 백동화와 제조 기계가 조선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밀조 기계만 적어도 150대가 한반도로 밀수되었고, 수입된 백동화의 양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일본의 백동화 밀조는 국제적 문제로까지 불거져서, 1902년 일본에는 '한국의 백동화 위변 조범 처벌령'까지 제정된다. 실제로 가장 악명 높은 것이 광무 2년(1898) 이전 오푼 백동화인데, 이 시기 즈음에는 일본과 대한제국의 사이가 끝장나게 안 좋았기 때문에 백동화 위조를 조장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다. 실제로 저 처벌령에 의한 처벌은 형식적인 수준에 가까웠기 때문에 사주전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 당시 통계를 보면, 서울 내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25%가량, 그리고 제2 도시였던 평양에서는 80% 가량이 불량 혹은 위조된 백동화였다. 백동화가 워낙에 풀려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은본위제를 포기, 1901년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금본위제도를 재도입한다. 이때 1899년부터 1903년에 걸쳐 20원(1900년, 1902년 발행 이중 1902년 20원 금도금화는 한국은행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10원(1901년, 1903년 발행), 5원(1902년, 1903년 발행되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발견된다면 말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를 해도 모자랄 수준.)은 금도금금화로 제작되었고[6] 반원(1899년, 1901년 발행)은 은화, 5전은 백동화, 1전(5전, 1전 모두 1902년 단년도 발행)이 청동화로 발행되었다. 이 때의 본위화폐는 금화였다.
그런데 조선에서 이름만 바뀐 대한제국에는 금이 부족했다. 금화의 생산량은 적었고, 기존의 백동화를 포함한 화폐들은 회수되지 않았다. 사실 금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행하려면 러시아와 합작해서 한러은행을 설치하거나 이후에 중앙 은행 설치 등이 따라야 했으나, 한러은행은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막아내었다'''고 언급되는 독립협회의 활약으로 막혔고, 중앙은행 설립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조선에 금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를 포함해서 조선내 일본 지지 세력을 통한 일본의 압력이 가해진 것도 금화를 발행하기 어려웠던 요인이 되었다.
결국 금본위제도 하의 신식 화폐는 기존 화폐를 대체하지 못했고, 일본산과 한반도 내 자체 생산 위조 백동화는 여전히 찍혀나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백동화가 너무나 저급 화폐였던 탓에 많은 지역에서 아직도 상평통보가 유통되는 등 조선의 화폐 사정은 막장이었다. 이 때문에 화폐를 한 번은 손 볼 필요는 있었다.
메가타 다네타로는 우선 기존 대한제국의 공식 조폐창 역할을 했던 전환국을 폐지했고, 일본에서 새로운 화폐를 제조하면서, 이전부터 이미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실질적으로 행하고 있던[7] 일본제일은행 한양지점에 공식적으로 조선 화폐의 제조 및 관리 권한을 부여했다. 이 신 화폐 체제의 골조는 장기적으로 일본 화폐 체제에 대한제국의 화폐 체제를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당대 조선의 화폐제도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정리할 필요는 있었으며 화폐정리사업은 한국의 근대적인 화폐 제도의 첫 시작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선 화폐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일본 화폐를 조선 사회 곳곳에 유통시켜서, 경제적으로 침투를 쉽게 하기 위한 목적 또한 있었다.
화폐개혁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당시 화폐 교환 과정에서 일본은 구 백동화를 신화와 바꿀 때 액면가로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구 백동화의 질에 따라 상대적으로 교환비를 달리해서 신화와 바꾸어주었다. 즉, 백동화를 등급별로 나누어 갑(甲)인 경우에는 액면가(2전 5푼) 그대로, 을(乙)인 경우에는 2전 5푼짜리를 1전으로, 병(丙)인 경우에는 교환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백동화를 정리하였다.[8] 이렇게 된 것은 백동화를 정부에서만 발행한 것이 아니라 주조의 특권을 얻어 행하는 특주(特鑄)나 환관이나 관리가 행한 묵주(默鑄), 일본으로부터 밀수된 사주(私鑄)등이 횡행하여 화폐의 종류만해도 관주가 16종에 사주 560종, 도합 백동화 한 화폐의 종류만 해도 576종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두돈오푼은 은도 아닌 백동이라 제조 단가가 너무 낮았다. 두돈오푼의 제조 단가는 고작 5푼이었으니 25푼이라는 액면에 비해서 말도 안되게 낮은 셈이었다. 차익을 남겨야 하니 당연히 악화가 많았다.
화폐 교환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백동화는 을이나 병으로 판정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교환을 거부하여 가지고 있는 화폐가 무효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경우 화폐 정리 사업을 미리 알고 있어 사업이 시행되기 전 악화를 미리 양화로 바꾼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한편 을이나 병으로 판정되어 교환이 거부된 조선인들의 백동화를 일본인들이 헐값에 사 갑으로 교환받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또 다른 문제점은 교환 4일 전에서야 황성신문을 통해 통보되었고, 충분한 통보 조치나 홍보 조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조선인으로서는 백동화 정리가 상당히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조선인의 통화 보유량이 급감했다. 조선의 상인과 은행이 다수 파산하면서 이 시점에서 '''조선의 상업 자본은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당연히 그 공백을 채운 것은 일본의 경제력이었다. 일본 다이이치은행(제일은행/第一銀行)이 법화 발행을 담당하는 중앙은행의 지위를 확보하게 됐음[9] 은 물론이고, 더불어 금융 조합·농공 은행·어음 조합·공동 창고 회사 등까지 설립해 일본은 조선의 산업 경제 활동을 통제·장악하고, 기간 산업을 독점하게 된다. 이 결과 민족 자본가 중 화폐가 아닌 현물(토지)을 보유한 지주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는 일제강점기 상인 출신 부호보다는 만석꾼 같은 민족 자본가가 대부분인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저 저질 위조 백동화의 등장배경이 일본에서 생산된 밀조기계와 직수입된 위조백동화라는 것까지 고려하면 화폐정리 사업을 곱게 봐줄 이유가 없어진다.
이후 일본 제일은행 엔화가 공식 화폐가 되었고 환율을 일본엔과 1대1로 맞춰졌다. 이 때문에 일제가 대한제국을 집어삼켰을 때는 한국을 일본의 경제에 쉽게 예속시킬 수 있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필요한 비용을 모조리 대한제국 정부로 떠넘기는 것으로써, 대한제국의 빚을 크게 늘리는 도구중 하나가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여러가지 배경중 하나가 이것이다.
분명 화폐 정리 사업은 언젠가 해야 할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를 조선 / 대한 제국이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에 의해 주도됨으로서 기간 산업이 모두 넘어가고 조선 상인들이 몰락했으며 나아가 대한제국의 경제권과 종국에는 주권이 일본 제국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 개요
구한말 시기 일본 제국의 주도 하에 대한제국에서 시행한 화폐개혁.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한 일본은 대한 제국의 근대화를 명분으로 대한제국을 장악하기 위해 외국인 고문들을 파견한다. 이 고문들 중 재정을 담당하기 위해 파견된 자가 바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 種大郞, 1853~1926)[1] 이며 그가 부임하자마자 단행한 것이 바로 화폐 정리 사업이었다.
2. 배경
일단 대한제국 화폐 변천사부터 알 필요가 있다.
조선은 갑오개혁 이전부터 근대적 화폐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1882년 마제은을 수입해서 최초의 서양식 화폐[2] 이자 은화인 대동전(大東錢)을 만들었으나, 이 돈들은 모두 부유한 이들의 창고로 들어가거나 해외로 유출되었고, 원료인 마제은의 가격 상승으로 1883년 생산이 중단된다. 이후 고종은 당오전을 만드는 한편, 1885년 차관을 도입해서 독일에서 근대 화폐 제조 기계(압인기!)를 수입[3] 하고 전환국을 설치했다. 전환국 총판에 독일인 고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앉히고 1886년부터 전환국에서 화폐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 때는 금화 5종, 은화 5종, 적동화 5종 체계였으나 기본적으로 금본위제에 필요한 금이 부족해[4] , 시험 생산하는 수준에 그치고, 조러 밀약이 들통나자 뮐렌도르프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면서 주도할 사람이 없어져 한동안 발행하지 않다가 1888년에 들어서야 적동화 2종과 은화 1종을 발행했다.[5]
1892년부터 은본위제도 하의 화폐 시스템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당시 전환국 통판 안경수가 일본에 건너가서 주조 이익의 1/4을 주는 조건으로 차관을 도입하고 일본 기술자들을 끌어들여서 근대 화폐가 제조된다. 당시 근대 화폐 기술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은화의 가치는 "일본 1엔 = 조선 5냥"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1냥(=일본 20전)과 5냥(=일본 1엔)은 은화로 제조되었다. 그리고 액면 체계는 량(兩)의 1/10이 전(錢), 전(錢)의 1/10이 푼(分)으로 정해졌다. 당시 발행한 주화는 5냥 은화, 1냥 은화, 2전 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로 5종이었다. 이 때 기존 화폐를 근대 화폐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임시로 쓰려고 했던 것이 호조태환권이다.
그러나 1892년이면 아직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 않을 시절이고, 앞서 언급된 화폐를 발행하기 위한 법인 '신식화폐조례'의 시행은 화폐권의 수호를 위한 정부당국의 저항과 당시 일본세력의 한국 침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던 청나라를 비롯한 열강의 반발로 중단되었다. 그리고는 1894년부터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터졌다. 이후 갑오개혁이 시행되면서 당오전이 없어지고 신식 화폐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된다.
그러나 갑오개혁 시기가 되면 다시 일본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상승하게 된다. 1차 갑오개혁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시작 되었고, 청일 전쟁 시기는 조금 영향력이 약해졌으나, 박영효가 끼어드는 2차 김홍집 내각 시기, 삼국간섭으로 약해진 영향력을 을미사변으로 갈아엎은 이후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김홍집 내각으로서는 은을 통제해서 대량의 은화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 결국 조선 정부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백동화 뿐이었다. 실제로 이게 가장 주조 이익이 많기도 했고 말이다. 여기에 기존 화폐 발매 권한을 가졌던 이들이 백동화에 달라 붙으면서, 정식으로 화폐를 만들 권한을 가진 한양과 인천의 전환국 외에도 주조의 특권을 얻어 행하는 특주(特鑄)나 환관이나 관리가 행한 묵주(默鑄)가 등장했다.
한편으로 이 때 사적으로 밀주된 사주전(私鑄錢)도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국내의 민간에서는 화폐를 만들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이 화폐는 밀조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환국의 주조 기술은 일본에서 왔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밀조가 가능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밀조된 백동화와 제조 기계가 조선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밀조 기계만 적어도 150대가 한반도로 밀수되었고, 수입된 백동화의 양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일본의 백동화 밀조는 국제적 문제로까지 불거져서, 1902년 일본에는 '한국의 백동화 위변 조범 처벌령'까지 제정된다. 실제로 가장 악명 높은 것이 광무 2년(1898) 이전 오푼 백동화인데, 이 시기 즈음에는 일본과 대한제국의 사이가 끝장나게 안 좋았기 때문에 백동화 위조를 조장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다. 실제로 저 처벌령에 의한 처벌은 형식적인 수준에 가까웠기 때문에 사주전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 당시 통계를 보면, 서울 내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25%가량, 그리고 제2 도시였던 평양에서는 80% 가량이 불량 혹은 위조된 백동화였다. 백동화가 워낙에 풀려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은본위제를 포기, 1901년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금본위제도를 재도입한다. 이때 1899년부터 1903년에 걸쳐 20원(1900년, 1902년 발행 이중 1902년 20원 금도금화는 한국은행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10원(1901년, 1903년 발행), 5원(1902년, 1903년 발행되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발견된다면 말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를 해도 모자랄 수준.)은 금도금금화로 제작되었고[6] 반원(1899년, 1901년 발행)은 은화, 5전은 백동화, 1전(5전, 1전 모두 1902년 단년도 발행)이 청동화로 발행되었다. 이 때의 본위화폐는 금화였다.
그런데 조선에서 이름만 바뀐 대한제국에는 금이 부족했다. 금화의 생산량은 적었고, 기존의 백동화를 포함한 화폐들은 회수되지 않았다. 사실 금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행하려면 러시아와 합작해서 한러은행을 설치하거나 이후에 중앙 은행 설치 등이 따라야 했으나, 한러은행은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막아내었다'''고 언급되는 독립협회의 활약으로 막혔고, 중앙은행 설립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조선에 금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를 포함해서 조선내 일본 지지 세력을 통한 일본의 압력이 가해진 것도 금화를 발행하기 어려웠던 요인이 되었다.
결국 금본위제도 하의 신식 화폐는 기존 화폐를 대체하지 못했고, 일본산과 한반도 내 자체 생산 위조 백동화는 여전히 찍혀나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백동화가 너무나 저급 화폐였던 탓에 많은 지역에서 아직도 상평통보가 유통되는 등 조선의 화폐 사정은 막장이었다. 이 때문에 화폐를 한 번은 손 볼 필요는 있었다.
3. 전개
메가타 다네타로는 우선 기존 대한제국의 공식 조폐창 역할을 했던 전환국을 폐지했고, 일본에서 새로운 화폐를 제조하면서, 이전부터 이미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실질적으로 행하고 있던[7] 일본제일은행 한양지점에 공식적으로 조선 화폐의 제조 및 관리 권한을 부여했다. 이 신 화폐 체제의 골조는 장기적으로 일본 화폐 체제에 대한제국의 화폐 체제를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당대 조선의 화폐제도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정리할 필요는 있었으며 화폐정리사업은 한국의 근대적인 화폐 제도의 첫 시작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선 화폐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일본 화폐를 조선 사회 곳곳에 유통시켜서, 경제적으로 침투를 쉽게 하기 위한 목적 또한 있었다.
화폐개혁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 금을 표준으로 화폐의 가치를 정하기로 하고, 당시 쓰였던 보조화인 백동화는 분별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보조화를 발행한다.
- 한국의 화폐본위는 일본과 동일하게 하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 또는 일본 정부의 보증을 받아 자금을 차입한다.
- '화폐조례'를 실시하고 일본 화폐의 국내 유통을 공인해 한국 정부의 재정에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화폐조례에서 규정한 화폐의 종류 중 5전 백동화와 반환(半圜)·20전 은화 체제를 개정한다. 그리고 구화(舊貨)를 회수하고 백동화는 통용 기한 및 교체 기한을 정해 교체, 회수하기로 했으며, 적동화(赤銅貨)나 상평통보는 일정기간 뒤에 제한액을 한정해 회수하기로 하였다.
4. 문제점
당시 화폐 교환 과정에서 일본은 구 백동화를 신화와 바꿀 때 액면가로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구 백동화의 질에 따라 상대적으로 교환비를 달리해서 신화와 바꾸어주었다. 즉, 백동화를 등급별로 나누어 갑(甲)인 경우에는 액면가(2전 5푼) 그대로, 을(乙)인 경우에는 2전 5푼짜리를 1전으로, 병(丙)인 경우에는 교환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백동화를 정리하였다.[8] 이렇게 된 것은 백동화를 정부에서만 발행한 것이 아니라 주조의 특권을 얻어 행하는 특주(特鑄)나 환관이나 관리가 행한 묵주(默鑄), 일본으로부터 밀수된 사주(私鑄)등이 횡행하여 화폐의 종류만해도 관주가 16종에 사주 560종, 도합 백동화 한 화폐의 종류만 해도 576종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두돈오푼은 은도 아닌 백동이라 제조 단가가 너무 낮았다. 두돈오푼의 제조 단가는 고작 5푼이었으니 25푼이라는 액면에 비해서 말도 안되게 낮은 셈이었다. 차익을 남겨야 하니 당연히 악화가 많았다.
화폐 교환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백동화는 을이나 병으로 판정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교환을 거부하여 가지고 있는 화폐가 무효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경우 화폐 정리 사업을 미리 알고 있어 사업이 시행되기 전 악화를 미리 양화로 바꾼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한편 을이나 병으로 판정되어 교환이 거부된 조선인들의 백동화를 일본인들이 헐값에 사 갑으로 교환받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또 다른 문제점은 교환 4일 전에서야 황성신문을 통해 통보되었고, 충분한 통보 조치나 홍보 조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조선인으로서는 백동화 정리가 상당히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조선인의 통화 보유량이 급감했다. 조선의 상인과 은행이 다수 파산하면서 이 시점에서 '''조선의 상업 자본은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당연히 그 공백을 채운 것은 일본의 경제력이었다. 일본 다이이치은행(제일은행/第一銀行)이 법화 발행을 담당하는 중앙은행의 지위를 확보하게 됐음[9] 은 물론이고, 더불어 금융 조합·농공 은행·어음 조합·공동 창고 회사 등까지 설립해 일본은 조선의 산업 경제 활동을 통제·장악하고, 기간 산업을 독점하게 된다. 이 결과 민족 자본가 중 화폐가 아닌 현물(토지)을 보유한 지주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는 일제강점기 상인 출신 부호보다는 만석꾼 같은 민족 자본가가 대부분인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저 저질 위조 백동화의 등장배경이 일본에서 생산된 밀조기계와 직수입된 위조백동화라는 것까지 고려하면 화폐정리 사업을 곱게 봐줄 이유가 없어진다.
이후 일본 제일은행 엔화가 공식 화폐가 되었고 환율을 일본엔과 1대1로 맞춰졌다. 이 때문에 일제가 대한제국을 집어삼켰을 때는 한국을 일본의 경제에 쉽게 예속시킬 수 있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필요한 비용을 모조리 대한제국 정부로 떠넘기는 것으로써, 대한제국의 빚을 크게 늘리는 도구중 하나가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여러가지 배경중 하나가 이것이다.
분명 화폐 정리 사업은 언젠가 해야 할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를 조선 / 대한 제국이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에 의해 주도됨으로서 기간 산업이 모두 넘어가고 조선 상인들이 몰락했으며 나아가 대한제국의 경제권과 종국에는 주권이 일본 제국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5. 바깥고리
6. 같이보기
[1] 가쓰 가이슈의 사위이며, 일본 최초의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졸업자이기도 하다.[2] 구멍이 없었다는 점 + 은화라는 부분에서 서양식이라는 이야기이다.[3] 이 기계들은 나중에 인천 전환국에서 계속 사용된다.[4] 사실 금화와 은화라고 하지만, 저 화폐도 주석에 금과 은을 도금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금과 은이 부족했다.[5] 그나마 이때의 은화는 은 90%로 제대로 발행했다.[6] 진짜 금도금이 아닌 금화로 발행된 것은 일본이 재정 분야를 장악한 1906년에 발행된 10원, 20원 금화와 1908년 발행된 5원 금화부터였다.물론 이때라고 금이 부족했던건 다르지 않아 생산량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그리고 20전, 10전, 반전 역시 1901년에는 발행되지 않았고 20전은 1905년, 10전, 반전은 1096년부터 발행되었다.[7]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걸 벗어나려던 시도가 한러은행이었다. 제일은행은 국책은행을 대신하면서 모인 돈을 일본인들에게 대출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8] 지역따라 갑을병정의 4등급으로 나눠진 곳도 있었다고 한다.[9] 국고금 보관은 이전부터 했고, 화폐 발행권은 화폐정리사업으로 생기니 중앙은행의 기능을 100% 하게 된다.[10] 하지만 상평통보는 끝내 정리되지 못했다. 화폐정리사업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상평통보를 고집하는 조선인들을 보고 일본인들은 엽전이라는 비칭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