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척식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
'''東洋拓殖株式會社とうようたくしょくかぶしきがいしゃ
Oriental Colonization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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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일본 제국과 그 외 일제강점기 조선
'''설립'''
1908년 12월 18일
'''해체'''
1945년 11월 10일[1]
'''업종명'''
식민지 개발 사업, 국제 무역 사업
'''기업 분류'''
주식회사
'''창립자'''
이토 히로부미
'''주요 주주'''
조선총독부 (40%)
'''본사 소재지'''
일본 제국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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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2]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옥'''
1. 개요
2. 해방 이후
3. 기타


1. 개요


1908년 일본 제국조선대만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권 이득 착취를 위해 설립된 국책 회사. 줄여서 '동양 척식회사' 또는 '동척'(東拓, とうたく)이라고도 한다.
1905년 대한제국일본 제국과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으로 인해 한국통감부가 설치된 지 3년 후인 1908년, 일제가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토지 및 자원 수탈 목적으로 세워졌다. 인도 제국을 식민지화했던 대영제국동인도 회사를 대놓고 본따서 세워졌다.
1908년 일본 정부의 훈령 및 내각 의회의 승인하에 따라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 통과되자 조선에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한 척식(拓殖) 사업하에 회사를 설립하였다. 조선이 식산(殖産) 진흥을 담당하고 일본에서 근면(勤勉)하고 농업에 전문성을 가진 농민을 육성하여 진보된 농법 전수와 식산사업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조선의 농광산물 등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역할을 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지속된 토지조사사업에서 토지를 직접 관리하거나 싼 값에 지주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직접 관리하는 토지의 소작인에게는 50%가 넘는 소작료를 부여했다.
경술국치 이후 동척은 조선으로부터 출자받은 토지를 매입하고 국유지를 인수했으며 막대한 면적의 삼림지를 매입하였다. 삼림지는 임산물 개발에 쓰였고, 국유지를 포함한 농토는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이나 조선인 대지주 등에 불하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에서의 활동을 계기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면서 1917년 경성부에 있던 본사를 도쿄부 우치사이와이초(内幸町)로 이전하였다.[3] 침탈 구역을 확장하여 조선은 물론 중국, 대만, 몽골, 필리핀, 영국령 말레이 반도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에서까지 척식 사업을 통해 경제 침탈과 물자 수탈을 잇따라 강행하였다. 한편 괴뢰국인 만주국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세워 만주의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1922년 황해도 재령군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농장에서 조선인 소작농을 중심으로 생존권 투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동척은 이를 무시하고 한반도에 이민을 왔던 일본인들을 동원하여 총을 지급하고 투쟁을 진압한 바 있다. 이 때 1926년 북률 출신이었던 나석주 의사(義士)가 경성부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와 조선 식산은행 사옥에 폭탄을 투척하여 의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4]

2. 해방 이후


1945년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미군정 훈령에 따라 공기업인 '신한공사' 로 바뀌었다. 이후 신한공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시절 일본인에 의해 강탈된 농토를 토지 개혁을 통해 조선의 농민들에게 귀속하였다. 그리고 토지개혁 이후 과도정부의 중앙토지행정처로 개편했다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이후 농림부의 특수토지행정처에서 흡수하며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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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 지사 건물은 6.25 전쟁 이후 내무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1970년 외환은행에서 구입한 후 1972년에 철거되고 1981년 1월 30일에 본점을 신축하였다. KEB하나은행 을지로2가 본점 건물이 옛 동척 경성지사 건물이 있던 곳이다. 동척 경성지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 자리는 병원인 제중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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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목포, 대전에는 동척의 잔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지사 건물이 남아있다.
부산지점의 경우 한때 주한(駐韓) 미국 영사관으로 사용되었으나,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터져서 유명해졌다. 이후 복구해서 쓰다가 문화원은 1996년, 영사관은 1999년에 각각 철수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로 귀속되어 2003년에 부산박물관 산하 박물관인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바뀌어서 근현대 부산항 관련 전시를 하고 있다. 목포지점의 경우 광복 후 해군이 접수하여 쭉 사용해 왔다. 해군이 떠나면서 빈 건물이 되어 1998년에 철거 계획이 있었으나 일제의 만행을 후세에도 전하는 목적으로 그대로 남겨두어 지역 보존물로 존치하고 있으며, 부산과 마찬가지로 근대역사관 별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전지점은 1922년 세워졌으며 광복 후 체신청과 대전 전신 전화국으로 사용되다 1984년 신한 철강에 매입되었고, 이후 개인에게 매도되어 현재는 1층은 건자재상, 2층은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광복 후 관리 소홀로 땅의 등기가 말소되지 않아서, 전국 18군데의 땅이 2013년까지도 동척의 명의로 되어있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다만 8.15 광복 시점에 한반도에 잔류한 일본인 자산은 몰수하여 한국인에게 넘겨 주기로 연합국에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이기에, 이 땅은 자동으로 국유지가 된다. #[5]

3. 기타


'척식'이란 "한 국가에서 국외의 미개지를 개척하여 자국민의 이주와 정착을 정책적으로 촉진하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조선뿐 아니라 대만, 오키나와, 홋카이도 등을 대상으로도 쓰였다. 동척을 본따서 1935년 '만주척식공사(満州拓殖公社)', 1936년 '대만척식주식회사(台湾拓殖株式会社)', '남양척식주식회사'(南洋拓殖株式会社)도 세워졌지만 모두 패전으로 해산되었다. 홋카이도에서는 1968년 폐지된 '홋카이도 척식철도(北海道拓殖鉄道)', 1997년에 파산한 '홋카이도 척식은행'이 존재했다.[6] 오늘날까지 이 단어가 사용되는 곳은 척식대학과 홋카이도 지역 버스 회사인 홋카이도 척식 버스뿐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1927년부터 1932년까지 5년간 근무한 뒤 무려 2만평의 땅을 불하받고, 이 땅을 기반으로 또 다른 식민지 수탈기구인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일제를 위한 군수사업을 하여 막대한 부를 일군 김지태의 친일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1] 미국에 의해 공기업이 되어 "신한공사"로 탈바꿈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농림부에 흡수되었다.[2] 당시 명칭은 경성[3] 해당 건물은 패전 이후 한동안 일본 국세청이 사용하다가 1976년에 철거되고, 1980년에 다이이치칸교은행(현 미즈호 은행)의 본사로 재건축되었다.[4] 다만 폭탄은 모두 불발에 그쳤다.[5] 영상에 등장하는 '동경시 국정구 내행정'이라는 일본 주소는 지금의 도쿄도 지요다구 우치사이와이초에 해당한다. 도쿄 23구로 개편하면서 옛 국정구(고지마치구)와 간다구를 병합해 지요다구로 만든 것.[6] 현지에서는 '다쿠긴'(たくぎん)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