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하우

 

'''다하우
Dachau
'''
[image]
'''휘장'''

'''다하우의 위치'''
'''행정'''
'''국가'''
독일 [image]
'''시간대'''
(UTC+1/+2)
''''''
바이에른
''''''
오버바이에른
''''''
란트크라이스 다하우
'''인문환경'''
'''면적'''
34.85km
'''인구'''
47,721명(2019년)
'''인구밀도'''
1,365명/km²
'''홈페이지'''

'''정치'''
'''시장'''
플로리안 하르트만
'''사민당''']]
'''Dachau'''
1. 개요
2. 다하우 강제 수용소


1. 개요


뮌헨에서 북서쪽으로 16km 떨어진 곳이다. 인구 4만 7천명(2017) 가량의 작은 도시이다.
뮌헨 중앙역에서 S-bahn 등의 기차로 20분 정도에 다하우 역으로 갈 수 있다. 밑에 나오는 강제수용소 때문에 관광객이 도시 규모에 비해 많은 편이다. 대중교통으로 강제수용소에 갈 때는 다하우 역에서 726번이나 744번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시내버스의 경우 뮌헨 대중교통패스 중 Inner pass 는 적용되지 않으므로 주의. XXL 패스 등은 이용할 수 있다.

2. 다하우 강제 수용소


Das Konzentrationslager (KZ) Dachau (독일명)
Dachau Concentration Camp (영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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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우, 이 곳에서 나의 고난이 시작됐단다."''' - 블라덱 슈피겔만, 만화 에서의 회상

1933년 6월 나치 독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수용소이다. 1945년 4월 29일 해방되었다. 영어식 발음인 '다카우'라고도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정치범 수용소로 이용되다가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럽 전역에서 끌려와 수용되었다. 유대인(Jude)뿐만 아니라 집시(Sinti und Roma), 동성애자, 정치범들을 잡아가두는 나치 독재와 인권탄압, 인종말살 정책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수용소가 미합중국 육군에게 해방될 때, 이곳의 SS 무장친위대 소속인 경비 병력들은 항복했음에도 불구, 참상을 보고 분노한 미 육군 장병들에 의해 '''즉결처형'''되었다. 또한 해방된 수용자들에게 아예 복수하라고 삽같은 걸 주기도 하면서 던져주기도 했다. 이 경우 쳐맞는걸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고 시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경비도 있었다. ## 당연하지만 이미 제3차 제네바 협약까지 비준된 상황이었으므로 항복한 독일군을 미군이 즉결처형한 것은 분명 전쟁범죄에 해당된다. 뒤늦게 미 육군 장교가 나타나 제지했지만, 이미 500명 넘는 SS 대원들이 학살된 뒤였다. 학살을 막아야 할 장교들조차 이를 묵인했고, 이 중 육군 군의관은 부상당한 SS 대원들의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처벌 받은 미군은 없다.
이 학살은 다른 학살에 비해서 동정적인 반응 내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편이다. 다하우가 나치 만행의 주요 현장인 것도 있고, 경비병들 역시 그 당시에 저지른 만행[1]이 있어서 그러한 학살조차 인과응보이자 사이다라는 것. 그래서인지 조사만 하고 법적으로 처벌받은 병사는 없다.
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독일 제국과 같이 붕괴된 옛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태자 루프레히트와도 연관이 있는 장소다. 당시 루프레히트는 나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이탈리아추방당했는데, 1944년 10월, 연합국과 강화를 모색하려던 헝가리호르티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헝가리를 침공한 독일군에 의해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옛 영지가 있는 바이에른주의 뮌헨 인근의 이 다하우 수용소로 이송되어 미군에 해방될 때까지 수감되었다. 그중 루프레히트 왕태자의 아내인 안토니오 왕태자비는 가혹한 수감생활을 견디지 못해 그대로 옥사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돌프 히틀러는 1차 대전 중에 루프레히트의 부하였다.
JTBC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도 소개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엄청난 존재감으로 인해 가려진 편이지만, 다하우는 아우슈비츠에 이어 두번째로 큰 규모의 강제수용소이며 현재 독일 영토 내에서는 단연 최대 규모의 수용소였다. 무엇보다 나치가 세운 최초의 강제수용소로서,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이후 나치의 여러 수용소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아트 슈피겔만에서 주요 배경 무대가 되기도 했다.
수용소와 내부의 박물관 및 전시관의 입장은 무료이며, 오디오 가이드는 3.5유로에 대여할 수 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이 있으며, 한국어는 없다. 부대 시설로 식당, 기념품점, 무료 화장실 등이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

[1] 대표적으로 수용소 복장중 하나인 모자를 뺏어서 던지고 주워오라고 시킨 뒤 총으로 쏴 죽인 뒤, '''탈출하려 한 유대인을 죽였다며''' 휴가를 받았다던가, '''자기 기분에 따라 죽을 때까지 두들겨패놓고 치료없이 방치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등의 짓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