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티 미클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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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 [image]''' 헝가리 왕국의 초대 섭정'''
'''본명'''
'Vitéz nagybányai'[1] Horthy Miklós[2]
'너지바녀 기사' 호르티 미클로시
'''출생'''
1868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켄데레시
'''사망'''
1957년 2월 9일, 포르투갈 공화국 이스토릴 (향년 88세)
'''정당'''
무소속
'''시민권'''
헝가리 왕국
'''신체'''
177cm
'''종교'''
칼뱅파
'''가족'''
아버지 호르티 이슈트반
'''배우자'''
마그도나 퍼즈리
'''자녀'''
호르티 마그도나
호르티 파울라
호르티 이스트반
호르티 미클로시 2세
'''서명'''
[image]
독일어 : Nikolaus Horthy Ritter von Nagybánya[3]
(1868년 6월 18일-1957년 2월 9일)
1. 개요
2. 생애
2.2. 헝가리의 독재자
2.2.1. 바다 없는 나라의 제독
2.2.2. 왕 없는 왕국의 섭정
2.3. 최후
3. 기타
4.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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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군인, 정치인, 독재자. 1868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생의 귀족으로 오헝제국의 해군 장교가 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제국이 분할되자 독립한 공산주의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후 왕정을 복고하나, 왕을 옹립치 않고 섭정이 되어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을 편들어 참전했으나, 전황이 악화되자 소련과 단독 강화를 시도하다 독일에 의해 축출되었다. 전후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포르투갈로 추방되어 1957년 사망한다.

2. 생애


186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켄데레시(Kenderes) 지역의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인 이슈트반은 헝가리 왕국 귀족원 의원으로 1,500에이커의 토지를 가진 대지주였다.
1886년 피우메[4]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894년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1896년 중위, 1900년 대위로 진급했으나, 소령 진급은 1909년에 이루어져 동기들보다 늦었다고 한다. 이후 중령(1911년), 대령(1914년)까지는 동기들보다 빨리 진급했다. 소령이었을 때는 당시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전속부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2.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독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전함 SMS 합스부르크SMS 노바라함장으로 근무했다. 주요 상대는 영국 해군, 프랑스 해군, 이탈리아 해군이었다. 이탈리아는 해군력이 빈약하였고, 프랑스는 해군 강국이었으나 지중해에 전개시킨 전력은 미약했기에, 호르티는 두 나라의 해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917년 5월 아드리아 해의 출입구에서 벌어진 오트란토 해협 전투는 호르티 대령의 명성이 동맹국은 물론 협상국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전함을 비롯한 주력함을 현존함대 전략으로 보존하는 대신 U보트를 통한 지중해에서의 통상파괴전에 주력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이에 맞서 저인망 어선과 함대를 배치하여 아드리아 해의 출구인 오쓰란토 해협을 봉쇄하였다. 호르티는 정찰 순양함[5] SMS 노바라를 비롯하여 장갑순양함 1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4척을 이끌고 출격하여 해협을 봉쇄중인 어선들을 개발살냈고[6] 곧이어 출동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해군과 교전을 벌였다. 적절한 지휘로 호르티는 연합군의 구축함 2척과 지원함 2척, 어선 14척을 격침시켰고 반면 동맹군 측은 격침당한 함선없이 귀환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연합군은 해협봉쇄에 참여중인 어선들이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오쓰란토 해협 봉쇄를 제한적으로만 실시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보트에게 다시 지중해로 나가는 길이 열렸다.[7] 호르티는 전투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귀환하였지만,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전쟁 영웅으로 부상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와 함께 1918년 2월에는 제국 해군의 반란까지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서 소장(Rear Admiral)으로 진급했고, 제국이 해체되기 직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2.2. 헝가리의 독재자



2.2.1. 바다 없는 나라의 제독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고 공산주의의 물결이 전 세계를 풍미한 가운데, 헝가리에서는 1919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쿤 벨러(Kun Béla)가 공산정권인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했다. 호르티 제독은 이에 반발해 헝가리 동남부의 세게드에서 옛 부하들을 모아 공산정권 타도를 내세우며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공산화를 우려한 루마니아의 도움으로 루마니아군과 함께 부다페스트로 진군해 쿤 벨러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1920년 3월 1일 헝가리 의회에서 '''헝가리 왕국의 섭정'''(kormányzó)으로 선출되며 정권을 잡게 된다.
헝가리는 1920년 연합국과의 강화조약인 트리아농 조약을 체결하면서 영토의 반 이상을 상실하고 내륙국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 되어버렸다.

2.2.2. 왕 없는 왕국의 섭정


오스트리아에서 폐위당했던 카를 1세가 1921년 몰래 헝가리에 입국해 헝가리 왕위라도 복귀하려 두 차례나 시도했지만, 호르티 제독은 군대를 동원해 카를 1세의 복귀를 막았다. 결국 헝가리 의회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문을 닫기로 결의하여 헝가리 왕국은 공식적으로는 왕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호르티 제독은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라는 해괴한 직책으로 사실상 헝가리를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북부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등을 상실하고 심지어 오스트리아에도 부르겐란트가 넘어가는 등 헝가리는 전통적인 국토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고, 이 때문에 헝가리 왕국 내에는 불만세력이 팽배하여 영토 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베를린을 방문하여 독일군의 사열을 받는 호르티 제독.
세계 대공황으로 헝가리가 엄청난 타격을 입은 가운데 호르티 제독은 한창 떠오르던 아돌프 히틀러와 손을 잡는다. 이후 뮌헨 회담에 의해 슬로바키아 남부 헝가리인 거주 지역과 루테니아를, 빈 중재를 통해 루마니아에서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얻었고, 또 유고슬라비아 침공 후 동부 보이보디나를 얻었는데. 이들 지역은 전후 진주한 헝가리 육군의 전쟁범죄가 문제화되기도 했다.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헝가리도 추축국의 일원으로 소련에 선전포고했다.
독일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파시스트라는 얘기도 나왔지만 호르티 제독 본인은 확고한 귀족적 권위주의자로 국내에서 성장하는 파시즘 세력들을 가차없이 때려잡았고 파시스트들이 선거에서 얼마나 약진을 하든지 그에 걸맞는 대접을 전혀 해주지 않았다. 화살십자당을 불법화한게 그 예. 나치도 기존 왕정이나 구체제의 엘리트 계층인 융커계급이 꽉 장악하고 있는 독일 군부와 서로 사이가 나빴다는 걸 생각하면[8] 구체제의 엘리트 출신인 호르티가 파시즘과 꽤 거리를 두었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편하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호르티가 공산정권에 대항해 왕정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숱한 백색테러와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살인행위가 동반되었다.

2.3. 최후


독일의 패망이 굳어지자 1944년 10월 소련과 단독으로 강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를 눈치챈 독일이 오토 슈코르체니 SS 중령의 주도로 판처파우스트 작전을 개시하여 그의 아들 호르티 미클로시 2세를 유괴하여 인질로 삼고 극우정당인 화살십자당 당수 살러시 페렌츠(Szálasi Ferenc,1897~1946)를 헝가리의 집권자로 세운다. 호르티 제독 본인은 독일로 끌려가 감금되었다가 종전 직전 미 육군에게 구출되었으며, 유괴된 아들은 종전 후에야 석방되었다. 살러시와 화살십자당 주요 간부들은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로 밀고 들어오자 독일로 도망갔으나, 종전 후 미 육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헝가리로 송환되어 인민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한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는 전범으로 분류되지 않아 증인으로만 출석한 뒤 석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측에서 거절했다. 호르티 제독 치하 헝가리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없진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가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홀로코스트가 실시된 시점은 호르티 제독이 실각하고 화살십자당이 정권을 잡은 1944년 이후의 일이었다. 당시 이송 책임자 중 한명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며, 이때 혜성같이 등장하여 유대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라울 발렌베리, 조르조 페를라스카(호르헤 페를라스카)이다.
1946년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포르투갈로 추방되었다. 이후 가족과 함께 포르투갈의 휴양지이자 전 루마니아 국왕 카롤 2세가 같이 망명해 있던(...) 이스토릴(Estoril)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57년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회고록을 집필하기도 한 그는 헝가리의 반소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충격을 받아서 "소련군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헝가리를 떠날 때까지" 자신의 유해를 헝가리에 옮기지 말라고 유언했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소련이 붕괴하고 헝가리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인 1993년에서야 헝가리로 돌아와 고향인 켄데레시에 묻혔다.

3. 기타


  • 추축국 지도자들 중에서 전쟁에 제일 소극적이었던데다, 그가 밀려난 후 집권한 화살십자당이 하도 짧고 강렬한 막장이었던 탓에 상대적으로 나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독재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내정은 엉망이어서 집권기간 중인 1923년 초인플레이션이 헝가리를 휩쓸었다. 이 초인플레이션 때문에 헝가리는 1927년부터 기존에 쓰던 크로네 화를 버리고 헝가리 펭괴를 발행해야 했다.[9]
  • 가톨릭이 다수인 헝가리에서, 이 비범하고 해괴한 섭정 각하의 종교는 칼뱅파였다. 헝가리 동부와 루마니아 서북부 접경지대, 즉 트란실바니아의 도시지역들은 중앙유럽에서 체코와 함께 개신교가 역사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바토리 가문도 칼뱅교와 연관이 있어서 가톨릭으로부터 누명쓴게 아니냐는 설도 있고 헝가리 제2의 도시인 데브레첸의 경우는 칼뱅교도들의 로마란 별명이 있을 정도며 루마니아 혁명의 도화선이라 할 수 있는 티미쇼아라(Timișoara)도 개신교세가 은근히 강한 지역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은 서부 지역은 로마 가톨릭이 우세이나, 동부나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등에 거주하는 헝가리인들 사이에서는 16세기 이후부터 종교개혁을 받아들여 개혁교회의 영향력이 상당하다.

지금도 헝가리 전체인구의 13%정도가 개신교 신자이며, 루마니아 거주 헝가리인들같은 경우 개신교 신자 비율은 47%정도까지 올라간다. 헝가리가 흔히 카톨릭 국가라는 인식이 강해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으나 개혁교회의 영향력도 꽤나 유서깊기때문에 헝가리인이면서 개신교인이라는 정체성이 딱히 유별나거나 특이한것은 아니다. 가령 오르반 빅토르 현 헝가리 총리도 개혁교회 신자이다. 여담으로 헝가리 개혁교회는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치고는 상당히 특이하게 감독를 실시하는 거의 유일한 칼뱅주의 교회이다.
  • 당대 에스파냐와는 달리 섭정 체제가 도중에 붕괴해버렸기 때문에, 그가 죽거나 헝가리인들에게 실각당할 때까지 섭정 체제가 계속되었을 경우의 상황은 상상의 영역에 맡길 수밖에 없다. 공화정, 혹은 헝가리 의회가 새 섭정을 뽑든가, 아니면 1921년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프랑코 사후 보르본 왕조를 복위시켰던 에스파냐처럼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옹립시켜 합스부르크 왕조를 왕정복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는 아예 호르티 섭정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르티 제독 본인은 1942년 장남 호르티 이슈트반(István)을 부섭정으로 세웠으나, 그 해 8월 이슈트반이 탄 헝가리 공군기가 추락해 사망한 뒤에는 다음 부섭정을 임명하지 않았다.

4. 매체


  • 2013년 12월에 개봉된, SS 장교로 변장하고 유대인들을 풀어주던 레지스탕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에서 배우 벤 킹슬리가 연기한 호르티 제독을 볼 수 있다.
  • 호이4에서 헝가리의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선택지에 따라 오토 폰 합스부르크 복위를 선택하게 되면 국가원수에서 퇴임하여 해군 지휘관으로 돌아간다.

[1] Vitéz는 기사를 뜻하는데, 1920년 창설된 비테즈 훈장의 수훈자에게 붙는 칭호다. 호르티가 훈장의 초대 주군이었으니 일종의 셀프 수여인 셈(...) 1944년 이후로 비테즈 훈장은 폐지되었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가문훈장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한편 nagybányai는 Nagybánya를 의미하며 호르티의 조상이 받은 영지 이름인데,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지역으로 지금 루마니아의 바이아마레(Baia Mare)이다.[2] Horthy가 성이고 Miklos가 이름이다. 동양계인 마자르족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곳 답게 이름이나 주소 표기 방식 등이 동양과 유사하다.[3] 너지바녀 기사 니콜라우스 호르티[4] Fiume, 오늘날 크로아티아 서부의 항구도시인 리예카(Rijeka).[5] 경순양함의 일종[6] 작전 목표 자체가 적 해군력 파괴가 아니라 (유보트를 위한) 해협봉쇄 돌파였으니, 봉쇄에 참가중이던 저인망 어선들에 상당한 타격을 가한 시점에서 이미 작전은 성공이었다.[7] 저인망 어선의 해협 봉쇄는 낮 시간 동안에만 진행해야 했고 15시 무렵에는 봉쇄를 풀어야 했다.[8] 관련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독일 군부, 특히 육군과 나치당은 서로 견제하는 대상에 가까웠다. 군부는 히틀러의 재무장계획이 필요하기 때문에 협조를 하고 있었지만 나치당을 벼락출세한 뜨내기들로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고 나치당 역시 자신들이 세울 천년제국에 '실패한 체제'인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유산이자 융커 계급이 주도하는 군부는 걸맞지 않다고 공공연히 여기곤 했다. 히틀러 또한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소장파인 에르빈 롬멜,하인츠 구데리안등을 중용하기도 하고 이 때문에 이들은 적어도 전쟁 초중반엔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병과별로 충성경쟁을 유도하거나 전쟁 중반에는 아예 무장친위대를 육군을 견제할 만한 수단으로 확대시키기도 했다.[9] 헝가리는 1945년에도 또 한번 초인플레이션을 겪어 펭괴를 폐지하고 현재까지 포린트 화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