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딘 수흐바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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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Дамдины Сүхбаатар / Damdin Sükhbaatar'''
1893.2.2 - 1923.2.20.
몽골의 정치인이자 군인, 혁명가. 몽골인민공화국의 국부격으로, 지금도 몽골 공화국에서 칭기즈 칸과 함께 몽골 화폐에 얼굴이 들어가는 국가적인 영웅이다.[2]
2. 활동
1893년 가난한 유목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후레와 러시아의 국경도시 캬흐타를 잇는 역전마차의 마부가 되었으며, 채 20살이 안된 1911년 몽골이 일단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자 몽골군에 입대했다. 그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1918년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이 되었다.
1919년 몽골은 중국 군벌 쉬수정이 주도한 외몽골 출병으로 인해 자치를 취소당하고 1921년까지 중화민국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에 수흐바타르는 1920년 처이발상 등과 몽골 인민당을 결성해 중국으로부터의 무장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러시아가 1차대전과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고 내전이 일어나자 러시아 적군에 쫓기던 러시아 백군의 한 무리인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중화민국의 지배를 벗어나게 해주겠다며 복드 칸을 꼬드겨 몽골을 잠시 접수하기도 한다.
허나 중국 군벌이건 러시아 백군이건 몽골 독립엔 관심없다고 생각한 수흐바타르는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해 본인이 인민군 총사령관에 오르고, 먼저 몽골-러시아 국경지대에서 아직도 얼쩡대던 중국군을 먼저 격파한 뒤 블라디미르 레닌과의 협상을 통해 러시아 적군의 지원까지 받아 6월 30일에 수도 후레(울란바토르)까지 진격해 러시아 백군을 격파, 운게른을 축출하고 7월 10일 후레에서 인민정부를 수립하고 몽골의 독립을 선포한다.
이때 수흐바타르와 보토, 단잔 등의 인민당 관계자들은 복드 칸 겨울궁전에 찾아가 복드 칸을 알현하고, 복드 칸에게 국가원수 겸 군주로서의 지위는 유지하되 시대 변화에 맞추어 인민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건의를 올렸으며 복드 칸은 이를 수락한다. 사실상 정권을 접수한 인민당이었지만, 복드 칸은 독립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명인데다가 종교적인 권위도 같이 지녀 몽골인들의 신망이 있었기에 예우를 해준 것으로 보인다. 실제 몽골은 복드 칸이 1924년 사망한 뒤에야 몽골 인민 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수흐바타르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공산주의 국가로 거듭난 몽골에서 국방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몇년 안가 1923년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하고 만다. 여담으로 이를 두고 지금도 몽골에선 허를러깅 처이발상이 담딘 수흐바타르를 독살했다는 식의 음모론이 종종 도는데, 명확한 증거가 있는건 아니라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긴 하다.[3]
3. 평가
담딘 수흐바타르는 독립전쟁을 이끌어 공을 세운 후 일찍 요절해 딱히 과도 없었기에, 공산주의 체제가 끝나고 민주화가 된 1990년 이후에도 몽골의 개국공신, 독립영웅 취급을 받고 있다. 지금도 투그릭 지폐에는 수흐바타르의 초상이 들어가고 있고, 울란바토르 중심 광장에는 여전히 수흐바타르의 동상이 서 있다.
일각에선 몽골을 공산화시켜 결과적으로 소련 위성국화시켰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많은 몽골인들은 소련 위성국으로라도 독립을 지킨 게 중국에 합병당하고 한족에 땅 빼앗기다시피 한 내몽골 신세보단 나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욕은 후임자가 대신 다 먹어주었고 공산화 자체도 무혈 민주화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니 지금 와선 굳이 그를 열렬하게 깔 이유가 남아있는 세력도 별로 없다.
정리하자면 평범하게 살던 한 노동자가 '''인생 막바지 3년을 정말 정열적으로 화려하게 타오르고 순식간에 사라진 셈'''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잔불'''들은 이후 몽골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젊은 나이에 독립과 공산화를 완수한 뒤 자신의 동료같은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요절해버려 몽골의 영웅이 되었다는 점에서 체 게바라와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4. 이야깃거리
몽골 수도이기도 한 울란바토르라는 도시 이름은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으로 수흐바타르를 기리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또 몽골의 동남부에 위치한 수흐바타르 아이막, 북부 러시아 국경도시 수흐바타르 시도 그의 이름에서 딴 지명이다. 울란바토르 중심에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4] 몽골 훕스골 호수에 있는 몽골군의 유일한 함정인 수흐바타르 역시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내륙 해군#s-3.7 참조.
몽골 내에서 칭기즈 칸과 수흐바타르의 우열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이해 관계까지 얽혀들어 상당히 복잡하다. 몽골의 민주화를 이끈 민주당 등지에서는 민족주의 등으로 칭기즈 칸을 좀 더 추켜세우는 한편[5] , 기존 공산주의를 계승한 몽골 인민당 등지에선 수흐바타르를 좀 더 추앙하는 경향이 있다. 수흐바타르를 추앙하는 쪽 견해를 살펴보면, 칭기즈 칸의 업적이 위대하기는 하나 그는 과거의 인물이고, 수흐바타르가 몽골을 독립시키고 근대국가로 출발시켰으니 현대 몽골인들에겐 그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본다. 그 외 수흐바타르는 침략자를 물리친 수호자였다는 점에서 더 높게 보는 경우도 있다.
[1] 앞의 담디니는 담딩(Дамдин) + 의(-ы)라는 뜻으로, 부칭(父稱)이다. 현대 몽골의 이름은 부칭 + 이름으로 이루어지는데, 부칭은 원래 소유격 형태로 끝나지만 다른 언어로 적을 때 종종 부칭을 "Damdin Sükhbaatar" 같은 식으로 원형으로 적는 경우가 있다.[2] 몽골 화폐 100투그릭 이하에는 모두 이 사람의 얼굴이 들어간다.[3] 이오시프 스탈린도 블라디미르 레닌을 독살했다느니 식인을 했다느니 하는 음모론이 도는걸 보면, 저 동네에서 으레 도는(?) 음모론인 듯도 하다.[4] 다만 2010년대 한땐 칭기즈칸 광장으로 개명되기도 했다.[5] 몽골이 공산화되었을 시절 칭기즈 칸은 폄하되는 경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