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드 칸

 



'''복드 칸국 초대 대칸'''
'''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 | 복드 칸'''
'''칸호'''
복드 칸 (Bogd Khan)
''''''
잡증담바 호특트
(ᠵᠠᠪᠽᠠᠨᠳᠠᠮᠪᠠ ᠺᠦᠲᠠᠭᠲᠦ / Жавзандамба хутагт)
'''연호'''
공대(共戴)
'''생몰 기간'''
1869년 ~ 1924년
'''재위 기간'''
1911년 ~ 1924년
[image]
복드 칸의 어진 1
[image]
복드 칸의 어진 2
1. 개요
2. 행적
3. 여담


1. 개요


복드 칸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칸. 아울러 몽골사의 마지막 대칸이기도 하다. 복드 칸은 당시 몽골 불교의 법왕(종교지도자)이기도 한 젭춘담바 후툭투(Jebtsundamba Khutuktu) 8세이다. 현대 몽골어로는 잡증담바 호특트(Жавзандамба хутагт). 1대 젭춘담바 후툭투는 칭기스 칸의 후예인 할하 몽골의 수장 압타이 샌 칸의 아들인 자나바자르였다. 티베트달라이 라마처럼 환생을 통한 계승을 했는데, 1, 2, 10대를 제외한 젭춘담바 후툭투들은 모두 티베트 출신이었으며, 복드 칸은 8대 젭춘담바 후툭투이다.[1]

2. 행적


내몽골후금이 건국할 당시부터 합류해서 원나라의 옥새를 후금 칸에게 바치고 숭덕제를 대칸으로 옹립해 만주와 일체화했던 것과 달리, 외몽골준가르와 할하족이 청나라에게 대항하다가 17세기 때 청나라에게 정복당했으며 18세기까지 청나라 치하에 있었다. 물론 반 독립 지대였으며 내몽골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쇠약해지자 할하 몽골인들은 독립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911년 7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골의 왕공들은 왕공 회의를 열어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복드 칸은 여기서 러시아 제국에 파견된 대표단 중의 한 사람이다.
[image]
그의 본명은 악왕롭상초이지냠단잔왕축(Agvaanluvsanchoijinyamdanzanvanchüg)로 1869년 청나라 쓰촨성 간쯔 티베트 족 자치주 리탕 현에서 출생하여 청나라 서장성 티베트소자치주 라싸에서 잠시 유소년기를 보낸 그는 5세 시절이던 1874년을 기하여 몽골 니슬렐 후레, 현 울란바토르로 이주하였다. 이후 청년기에는 젭춘담바 후툭투(몽골의 티베트 불교 지도자 직위) 8세로 봉직 직무하며 청년 시절의 전부를 보냈다. 1904년, 2차 영국-티베트 전쟁의 결과로 달라이 라마 13세가 망명을 오자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1년 12월 29일 대표단의 한 사람인 젭춘담바 후툭투 8세를 '''대칸'''으로 추대하면서 외몽골은 독립하였으며 이것은 복드 칸국의 시작이였다. 연호는 공대(共戴)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내몽골중화민국으로 합류, 흥안성과 차하르성이 되었다. 당시 내몽골의 칸은 칭기즈 칸의 후손을 자처하던 데므치그돈로브였다. 1915년 중화민국은 러시아 제국, 복드 칸국과 협의 끝에 6월 캬흐타 협정을 체결하여 몽골의 완전자치를 인정하고 몽골은 중화민국의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 신강군벌 양쩡신과 영토문제로 분쟁하는 등 범몽골주의에 근거한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하지만 1917년 몽골을 지원하던 제정 러시아러시아 혁명으로 붕괴하자, 중화민국은 외몽골 복드 칸국의 자치마저 불허하게 되었다. 1919년 10월 안휘군벌 쉬수정의 변방군이 외몽골 출병을 단행, 11월 17일에 복드 칸의 항복을 받아내어 11월 22일 굴욕적인 자치 취소식을 거행하게 하여 복속시켰고 복드 칸은 오십 노구를 이끌고 당시 중화민국 대총통 쉬스창의 사진에 세번이나 절을 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광경을 보고 몽골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이후 몽골은 1921년까지 투바와 함께 북양정부의 지배를 받는다. 쉬수정은 몽골이 중국에 상환해야 할 채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엄청난 양의 물자를 수탈하여 몽골의 경제를 파탄지경에 몰아넣었다.
이에 복드 칸은 잠시 중국 밑에 들어가지만 2, 3년 안에 독립하겠다는 뜻을 천명하며 몽골 인민 혁명당을 창설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1919년 12월 29일부터 1921년 12월 29일까지 몽골 국가 원수로 재임하는 동안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외몽골은 적백 내전으로 쫓겨다니다가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들과 이들의 견제를 받는 북양 정부 군벌, 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몽골인들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1920년 9월, 백군 잔당을 지휘하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이 몽골의 독립을 돕겠다는 뜻을 알려오자 복드 칸은 운게른과 합작을 결정했다. 운게른은 1920년 10월 몽골로 들어와 중국군을 격파하고 1921년 2월 몽골의 수도 후레를 점령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였던 담딘 수흐바타르가 1920년 11월 허를러깅 처이발상과 함께 몽골인민유격대를 조직, 운게른과 중국군벌 타도를 통전하면서 유목민들을 선동해 군세를 확장했고 정식으로 몽골 인민당을 창설하여 적군의 지원을 받아 3월에 캬흐타를 점령한 중국군 잔당을 소탕하고 6월 운게른의 군세를 격파했다. 운게른은 후레로 퇴각해 재기를 도모했지만 부하들의 배신으로 몰락했고 수흐바타르는 7월 8일 후레를 점령했다. 수흐바타르는 복드 칸에게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 인민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복드 칸은 수흐바타르의 조건을 수락하여 7월 10일 인민임시정부로의 정권 이양식이 거행되었고 7월 11일 제한군주로 복위되었다.
담딘 수흐바타르가 집권한 이후에도 복드 칸은 독립에 기여했고 몽골 민중으로부터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화 이후 대부분의 군주들이 추방당하거나 처형당한 것과 달리 혁명 정부로부터 나름대로 존중은 받아서 1921년 12월 29일부터 1924년 5월 20일을 기하여 병사할 때까지 몽골 국가 주석을 역임하였다. 물론 명목상의 최고 지위이고 실권은 공산당에 있었다.
복드 칸이 사망하고 나서는 몇 달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군주제가 폐지되고 복드 칸국은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그의 환생으로 지목된 젭춘담바 후툭투 9세는 달라이 라마 13세에게 지위를 공인받았으며, 몽골의 공산화를 피해 티베트를 거쳐 인도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생활하다 몽골이 민주화된 후 다시 몽골 불교의 위상이 회복되자 몽골로 귀환해 2012년 입적했다. 비록 쫓겨나다시피 했지만 바로 다음대에 명예를 회복한 셈.

3. 여담


  • 역대 몽골 대칸 중 청나라 황제를 제외한다면 사진을 찍은 유일한 칸이다.
  • 의사 출신의 독립운동가였던 이태준이 바로 이 사람의 주치의였다고 한다. 당시 몽골에서 활동했던 이태준은 뛰어난 의술로 몽골에 만연했던 매독 퇴치에 기여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복드 칸이 이태준 선생을 자신의 어의로 임명했다고 한다. 울란바토르에는 2001년에 만들어진 이태준을 기리기 위한 기념공원이 있다.
  • 복드 칸의 아내, 이름은 첸딘 돈독둘람이다.[2]


[1] 2016년 11월 23일 달라이 라마 14세가 가진 기자회견에 의하면 10대 젭춘담바 후툭투는 몽골에서 이미 태어났지만 너무 어려서 정체를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2] 참고로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