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클래시

 


[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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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더 클래시
THE CLASH
'''
'''멤버'''
'''조 스트러머, 믹 존스, 폴 시머넌,
테리 차임즈, 니키 히든
'''
'''입성 연도'''
'''2003년'''
'''후보자격 연도'''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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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왼쪽부터 니키 '토퍼' 히든, 믹 존스, 조 스트러머, 폴 시머넌)
현재
(왼쪽부터 폴 시머넌, 니키 '토퍼' 히든, 존 윌슨[2], 믹 존스, 조 스트러머는 2002년 타계함.)
1. 개요
2. 상세
3. 음반 목록


1. 개요


The Clash
영국 출신의 펑크 록, 뉴웨이브 밴드. 섹스 피스톨즈와 함께 영국 펑크의 양대산맥으로 통한다.[3]

2. 상세


영국 펑크씬에서는 굉장히 저항적인 가사와 과격한 밴드로써도 유명하다. 조 스트러머(보컬, 리듬 기타), 믹 존스(리드 기타), 테리 차임즈(드럼)[4]', 폴 시모넌(베이스)의 4인조로 결성되었다.[5][6] 1집을 발매한 뒤에 테리 차임즈가 탈퇴하고 니키 히든이 드러머로 가입한다.
섹스 피스톨즈의 영향을 받아 결성되었다. 리더인 조 스트러머가 런던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을 구경하고 그만 ‘감동하여’ 펑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퍼브록 밴드 101'ers[7]를 탈퇴해 믹 존스[8]와 함께 클래시를 결성했다.[9] 그리고 1976년 12월에는 섹스 피스톨즈의 ‘대영제국의 무정부 상태’ 순회공연에 오프닝으로 참가, 펑크 물결 확산에 나섰다.
섹스 피스톨즈의 바톤을 이어잡았으나 단순한 워너비 피스톨즈를 넘어 본인들만의 오리지너리티를 가졌으며, 현재는 섹스 피스톨즈와 동격으로 대우 받을 정도. 혹자는 무정부주의에만 그쳤던 펑크씬의 정신을 선동적인 가사와 과격한 사운드로 저항정신을 내뿜었다는 것으로 영국 펑크씬의 발전형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한다.
DIY정신에만 입각하여 단순한 구조만을 고집했던 섹스 피스톨즈와 달리, 프로그래시브한 구조나, 헤비메탈을 연상시킬 정도의 강력한 사운드, 심지어는 레게 리듬까지 도입하는 등 펑크 록의 음악적 저변을 엄청나게 확장시킨 밴드이다.[10] 이 때문에 펑크 록을 음악성없다고 까는 평론가들도 더 클래시는 좋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그들의 저항정신을 그대로 담아 수많은 밴드가 그들을 동경하고 펑크계로 뛰어들기도 했다. 리버틴즈가 대표적인 경우다.[11]
1986년 믹 존스와 조 스트러머의 불화로 해산을 맞았으나 2년 후 다시 화해를 하고 현재도 함께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하고, 공연을 하는 등 활동을 하고 있다.[12] 2002년 조 스트러머가 심장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최근에는 폴 시머넌이 블러데이먼 알반과 The Good, The Bad and The Queen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믹 존스도 고릴라즈의 라이브 세션에 참가하고 데이먼 알반이 클래시의 노래를 커버하는 것을 볼때 친분이 있는것으로 보인다.[13] 참고로 시머넌은 뮤지션인데 지나치게 잘생겨서 클래시 활동 당시 별명이 '런던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 '미스터 핸섬'이었다. 미술에도 재능이 있어 화가로도 활동했다. 아들이 둘 있는데 역시 대단한 미남들로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 밴드 중 이들의 음반을 국내 밴드 크래쉬의 음반인 줄 알고 사서 들었다가 펑크 밴드를 하기로 마음먹은 밴드도 있다고 한다.
영화 007 시리즈 어나더데이에서 'London Calling'이 삽입곡으로 쓰였다. 제임스 본드가 쿠바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과 악당 구스타프 글레이브스가 기사작위를 받기 위해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에 나온다.
영화 아이언맨 2편에서 이들의 곡인 'Should I Stay Or Should I Go'가 쓰이기도 했다. 토니 스타크가 차고에서 작업하는 장면. 비디오 게임 파 크라이 4가 똑같은 곡을 오프닝과 트레일러에 쓰기도 했다. 또 이 곡은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서 조나단 바이어스가 동생 윌에게 알려 주는 곡이기도 하다.
참고로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나오는 스탠드 클래시는 여기서 모티브를 따 왔다.
여담으로 한국인들은 불편할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이 양반들은 욱일기와 카미카제를 매우 사랑하고 그 이미지를 자신들에게 적극 차용하곤 한다.더 클래시의 카미카제 티셔츠들 션 레논 여친이 입었다가 한국인들한테 까인 그 욱일기 티셔츠가 바로 이 분들 티셔츠이다. 일부 팬들은 '제국주의를 까려고 만든 티셔츠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14] 평소에도 카미카제 머리띠를 악세사리로 잘만 두르고 다니는 걸 보면(심지어 도쿄 공연에서도) 딱히 그런 깊은 뜻을 염두하고 입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조 스트러머는 1970년대 말엽부터 ‘반나치 동맹(Anti-Nazi League)’과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록’(Rock Against Racism)’ 운동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보아 사상 자체가 극우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링크
여담이지만, 사실 카미카제라는 단어 자체가 품고 있는 의미가 서구권에선 본래와는 늬앙스가 좀 다르다. 심지어 카미카제 칵테일이 있기도 하다. 심지어 이 칵테일을 처음 만든 곳은 미국.링크
애초에 대놓고 좌파성향 밴드다.
초기 대표곡 White Riot[15]
대표곡 London Calling[16]
또다른 대표곡 Should I Stay Or Should I Go[17]
대중적 인기로는 정점에 오른 곡 Rock the Casbah[18]
심지어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한국에 보도가 됐을 정도의 파급력

3. 음반 목록


  • The Clash (1977)
  • Give 'em Enough Rope (1978)
  • London Calling (1979)
  • Sandinista! (1980)
  • Combat Rock (1982)
  • Cut The Crap (1985)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2] BBC의 라디오 프로그램 Front Row의 진행자. 당연하지만 클래시의 멤버는 아니다. 애초에 클래시는 86년 해체 이후 재결성된 적이 없다.[3] 실제로 섹스 피스톨즈가 앨범 1장으로 단명한데 비해 이들은 6개의 앨범과 다수의 EP로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섹스 피스톨즈가 "펑크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줬다면, 클래쉬는 "펑크가 나아갈 길"을 보여준 셈.[4] Terry Chimes. 1집 앨범에 '토리 크라임즈(T'''o'''ry C'''r'''imes), 즉 '보수당의 범죄들'로 표기되는 굴욕을 겪은 바 있다.[5] 믹 존스나 폴 시모넌이 리드 보컬을 맡은 곡도 꽤 있다.[6] 초기에는 기타가 3명(!)이었다. 키쓰 리바인이 있었는데, 몇가지 문제로 탈퇴했다. 키쓰 리바인은 훗날 쟈니 로튼의 포스트펑크 밴드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Public Image Ltd. 약칭 PIL)에 참여한다.[7] 펍 록 밴드로 정통 백인 R&B, 로큰롤 사운드를 표방했다.[8] 당시 미대생이었던 폴 시머넌과 London SS이라는 밴드를 하고 있었다. 믹 존스에게서 이미 밴드 가입 제안("니 목소리랑 기타치는건 참 좋은데, 니 밴드는 구려."가 믹 존스가 조 스트러머에게 한 제안이었다고 한다.)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고 나서 섹스피스톨즈 공연을 본 뒤 큰 충격을 받고 101'ers를 때려 치우고 믹 존스를 찾아간다.[9] 그리고 우연히 클래쉬의 공연을 본 한 관객이 충격을 먹고 펑크밴드를 만들겠다며 만든 밴드가 아나코 펑크 밴드인 CRASS 이다.[10] "조 스트러머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영국에 레게를 가르쳤다" - 존 라이든. 1978년 일본 뮤직라인과의 인터뷰 중.[11] 믹 존스는 이들의 1집앨범 Up the Bracket을 프로듀스 하기도 하였다.[12] 이 시기 조 스트러머는 믹 존스 없이 클래쉬를 건사하며 Cut the Crap이라는 앨범을 발매한다. 그러나 이 앨범은 '''사운드가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클래쉬 팬들에게서 클래쉬 앨범으로 안 쳐주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요즘에는 조금씩 재조명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같은 시기, 믹 존스는 레게 디제이이자 초기 펑크 확산 및 레게-펑크 하이브리드의 혁혁한 공을 세운 돈 레츠같은 디제이과 Big Audio Dynamite를 결성한다. 하지만 평가가 막장에서 압권까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이유는 완전히 랩과 댄스뮤직으로 선회했기 때문에.[13] 여담이지만 두 밴드를 매니지먼트하는 회사가 같다.[14] 티셔츠에 Pearl Harbor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런 주장이 나온 것. 카우치 사건 당시에도 한 멤버가 더 클래시의 카미카제 티셔츠를 입은 것이 논란이 되자 이와 같은 변명을 했었다.[15] 클래쉬 멤버들은 1976년의 노팅 힐 폭동에 어쩌다 참여했었는데, 그때 조 스트러머가 든 생각은 '''흑인들은 이렇게 열받으면 폭동도 일으키고 그러는데 백인들은 찌질하게 아무것도 안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사가 섬뜩하다. "모든 권력은 돈있는 놈들에게 있고 거리에 쏘다니는 우리는 가진게 없네. 난 백인들의 폭동을 원한다!"[16] 한국 밴드인 크라잉 넛이 'OK목장의 젖소' 앨범에서 '명동콜링'이라는 곡을 넣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도바츠텐이라는 밴드는 노동 CALLING이라는 곡을 이 곡의 제목에서 차용했다.[17] 1982년 처음 공개되었으나 활동중지 이후인 1991년 재발매되었을 때 훨씬 큰 인기를 얻어 각국 차트 톱 10에 들고 영국 차트 1위를 찍었다. 더 클래시의 유일한 UK차트 1위곡.[18] 걸프전이나 테러와의 전쟁 당시 재조명되기도 했다. 더 클래시의 곡들 중 유일하게 미국 빌보드 톱 10에 든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