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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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r'''
'''멤버'''
그레이엄 콕슨, 데이브 로운트리, 데이먼 알반, 알렉스 제임스
'''활동 시기'''
1988년 ~ 현재[1]
'''장르'''
얼터너티브 록, 브릿팝, 인디 록
'''blur'''
'''멤버'''
그레이엄 콕슨
데이브 로운트리
데이먼 알반
알렉스 제임스
'''파트'''
기타
드럼
보컬
베이스
1. 개요
2. 역사
2.1. 밴드의 결성 (1988-1990)
2.2. Leisure 시절(1990-1991)
2.3. 미국 투어와 브릿팝 (1992-1996)
2.4. 브릿팝 이후(1996-2000)
2.5. 베스트 앨범과 휴식기, Think Tank (2000-2003)
2.6. 잠정 해체 이후 재결합까지 (2004-2007)
2.7. 재결합 이후 (2008-2014)
3.1. 이후
4. 멤버
5. 디스코그래피
6. 그 외
6.1. 다른 밴드와의 관계(?)
6.2. 여담
6.3. 국내의 팬덤 및 인식
6.4. 어록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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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록 밴드. 오아시스(밴드)와 함께 90년대 브릿팝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자 가차없이 브릿팝을 버리고 탈바꿈한 세기말 카멜레온이라는 평가를 받는 밴드. 이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인데, 동시대의 밴드인 오아시스(밴드), 지금 세계에서 상업적으로 제일 잘나가는 밴드인 콜드플레이의 경우 각각의 전성기 이후에는 거의 대부분의 앨범에서 평가가 극심하게 안 좋아졌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블러의 경우 브릿팝 시절에도 성공을 거뒀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앨범에 대해 음악적인 성과를 인정받았다. 또한, 대중적인 인기도 전성기만은 못하지만 여전하여 이미 영국에서는 살아있는 전설로 취급받는다.

2. 역사



2.1. 밴드의 결성 (1988-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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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 멤버들의 어린 시절.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데이먼 알반, 그레이엄 콕슨, 알렉스 제임스, 데이브 로운트리.
우선 데이먼과 그레이엄의 첫 만남은 각기 데이먼이 12살, 그레이엄이 11살때 콜체스터[2]에 위치한 Stanway Comprehensive School에서 데이먼이 그라함에게 "어이 친구, 네 브로그 신발은 완전 X인데. 봐, 내 껀 제대로 된 거잖아(Your brogues are crap, mate. Look, mine are the proper sort: 이 대사는 그레이엄이 재현할때마다 조금씩 다른데..하여간 '니껀 가짜고 내껀 진짜'라는 의미는 한결같다)." 라며 자기 신발 자랑을 하며 시작되었다.(데이먼은 블러 다큐멘터리에서 그레이엄이 아직도 이 일로 삐쳐 있다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레이엄에게 모욕감을 준 첫 만남이었지만 음악을 좋아했던 소년들은 곧 유년시절의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먼저 졸업한 데이먼이 연기자가 되기 위해 런던에 가고, 데이먼과 함께 음악을 하고 싶었던 그레이엄이 데이먼이 있는 런던으로 가기 위해 골드스미스 미대에 지원한다.
무사히 대학에 합격하고 런던으로 온 그레이엄은 데이먼과 재회하고 이 곳에서 같은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기숙사 아래층에서 살던 알렉스와 친해진다.

한편, 먼저 런던에 와 있던 데이먼은 자신이 연기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 비정규 음악 수업을 듣던 중이었다. 또한, 당시 데이먼은 에디 디디건[3] 등과 서커스라는 밴드를 하고 있었다. 데이먼은 그레이엄이 일전에 소개해 준 데이브에게 서커스의 가입 의사를 타진했고, 데이브가 (블러 멤버 중에서) 2번째로 가입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BBC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데이브는 주중엔 정규 학교에 다니고 주말에 음악 학교에 다니며 어렸을때부터 드럼을 배우고 있었는데, 이때 그레이엄의 아버지에게 토요일마다 재즈를 배웠다. 데이브는 학교 졸업 후 그리니치 대학교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컴퓨터 엔지니어로 콜체스터 의회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밴드가 결성될 무렵에는 그만두고 런던에서 길거리 공연과 소규모 공연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런던으로 온 그레이엄도 서커스에 합류하고 친구인 알렉스에게 데이먼과 데이브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해주면서 알렉스는 서커스라는 밴드와 데이먼,데이브에 대해 알게된다. 그리고 알렉스는 데이브가 서커스 기존 멤버 두명을 내보내면서 생긴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냉정하게 기존 멤버를 잘랐던 데이브는, 어렸을때부터 음악을 해 온 경험이 있는 나머지 멤버들에 비해 당시 알렉스는 경험이 부족한 상태라 훌륭한 베이시스트는 아니였지만 알렉스의 태도와 잘 생긴 외모와 잘 생긴 외모 등 '''여하간 얘가 너무 잘 생겨서''' 밴드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었던 듯...
마침내 블러의 모든 멤버가 다 모이게 되고 이윽고 4명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샐린저가 쓴 책 제목에서 따온 시모어(Seymour)를 밴드 이름으로 정하고, 1988년 12월 18일 4인으로써 최초의 연습을 시작했다.
이들은 1989년 11월 푸드 레코즈와 가계약을 맺은 뒤 1990년 3월 정식 계약을 맺었다. 계약의 유일한 조건은 밴드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는데 이는 푸드 레코즈에서 시모어라는 이름이 너무 학생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4] 피자를 사주겠다는 꼬임(..) 등이 먹혀 멤버들은 밴드 이름 교체에 동의한다.
푸드 레코즈에서는 The Shining Path, The Government, Sensitize, Whirlpool 등의 대안을 제시했고 이 중 Blur가 밴드의 이름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2.2. Leisure 시절(1990-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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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커버 [5]

계약 한 뒤 펑크 밴드인 크램스의 투어에서 오프닝 밴드로 돌다가 첫 리허설때 만든 곡이었던 She's So High와 함께 I Know를 녹음해 싱글로 내놓았다. 이 싱글은 여성의 누드를 사용한 커버후방주의로 노이즈 마케팅을 하고 48위에 들었다. 그리고는 한참 앨범작업이 되지 않을 때 그 노래를 들은 스미스의 프로듀서인 스티븐 스트릿이 프로듀싱을 맡아 작업을 시작하고 91년 두번째 싱글인 There's No Other Way이 발매되었다. 이 싱글은 8위까지 찍으며 꽤 인기를 끌었고 블러는 The Scene That Celebrates Itself라는 인디 신의 잘생긴 밴드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알렉스가 다큐에 나와서 말하길 매니저가 지금 푹 자는게 좋을거라고 했다고. 그러나 앨범이 발매된 이후 평단으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은데다가 배기 씬이 무너져 내려버렸다.
이 당시엔 배기슈게이징 등 영국 음악씬의 다양한 장르의 물리적 혼합에 불과한 그저 그런 밴드 취급받았다. 봐서 알겠지만 커버 이미지도 이상하다... 톰 요크는 블러의 1집 앨범인 Leisure를 블러의 실수라고 평하기도 했다. 데이먼은 이 점을 인정한다는 듯이, "그렇다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이걸 수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라고 말했다. 그때는 후진 앨범을 내도 안 묻히던 시기라 좋았다는 깨알같은 자학드립까지!
그 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다이노서 주니어, 지저스 앤 메리 체인과 공동 헤드라이너로 투어를 다니기 시작하고 배기를 버리고 펑크 스타일로 갈아탄 새 싱글인 Popscene을 내놓았으나 32위(...)라는 성적으로 망했어요. 설상가상으로 매니저가 돈을 먹튀해버리는 바람에 파산 위기까지 처하자 앨범 계획까지 취소된다. 이후 밴드의 빚을 갚아 줄 테니 미국 투어를 하자는 티셔츠 회사[6]의 제안에 따라 미국 투어를 시작하였으나 오히려 주먹다짐을 하는 등 멤버들의 불화만 심해진 채로 투어를 마무리한다.

2.3. 미국 투어와 브릿팝 (1992-1996)


이후 블러는 유행을 쫓았던 Leisure 앨범과는 정반대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영국적인 캐릭터와 풍경을 소재로 킹크스, 스페셜즈 등의 영향을 받은 영국적인 팝 멜로디를 정교하고 다채롭게 다듬어 낸 Modern Life Is Rubbish 앨범을 만든다. 레코드 회사에서는 레코딩을 하는 도중에도 이러한 블러의 시도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의 입장을 표했지만, 블러는 자신들을 믿어달라며 꿋꿋이 밀고 나가며 레코딩을 지속했다.
2집 Modern Life Is Rubbish 부터 4집 The Great Escape 까지가 사람들이 '브릿팝'이라 여기는 성향을 보여주는 앨범이라 할 수 있다. 블러의 앨범 중 비교적 가장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이 세 앨범을 묶어 블러의 'Life 3부작'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본인들이 3부작으로 계획한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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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집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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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집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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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집 커버
비록 Modern Life Is Rubbish 발매 직후에는 대중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인디씬에서는 호응을 얻었고 때 마침 영국에 불어닥친 너바나를 위시한 미국의 그런지 열풍에 대항할 밴드를 찾던 영국 음악계의 분위기와 맞물려서 큰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미국의 그런지 사운드와는 차별화 되는 이들 영국 밴드들의 음악은 영국 언론에서 브릿팝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애초에 큰 관계가 없던 영국 밴드들을, 미국 음악에 의해 음악시장이 잠식된 상황에 대항할 인기를 얻고 있다는 공통점만으로 묶은 것이기 때문에 브릿팝이라는 장르는 그 어떤 장르보다 모호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언론에 의해 브릿팝과 대립각을 세운 것처럼 묘사되었던 미국의 그런지 또한 밴드들의 고향이 시에틀 출신이라는 점만으로 묶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브릿팝은 새로운 유행이 됐고, 블러는 브릿팝 열풍에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1994년 발표한 3집 Parklife는 블러의 포텐이 본격적으로 터지면서 90년대를 대표하는 명반이라는 평이 대다수일 정도로 이러한 브릿팝 열풍을 제대로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는다. 평단으로부터 사랑 받았지만 대중적으로는 실패한 Modern Life Is Rubbish와 달리 Parklife 앨범은 평단의 호평은 물론 판매량 부분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덕분에 밴드는 그동안 가지고 있던 막대한 빚을 전부 갚을 수 있게 됐고, 1994년 브릿어워드에서 최우수 밴드, 최우수 비디오, 최우수 싱글, 올해의 앨범의 4관왕을 이룬다. 하지만 브릿팝 열풍이 결국 영국 음악계의 마케팅을 위한 수작임을 깨닫고 있던 블러는 이 열풍을 달가워하지만은 않았고, 브릿팝이라는 단어와 자신들의 브릿어워드 4관왕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알렉스는" 우리가 브릿 아워드에서 상을 받은 것은 단지 영국 음악 마케팅을 위한 몰아주기식 수상이었을 뿐" 이라는 식으로 발언하기도. 이후 블러는 이에 대한 항의로 The Great Escape 앨범을 영국 사회의 계급과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태도가 두드러지는 내용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오아시스의 싱글 발매일보다 먼저 발표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4집의 첫 싱글 Country House의 발매일을, 두 밴드의 라이벌 대결 구도로 화제거리를 만들어서 판매량을 올리고 싶었던 음반사가 동일한 날로 옮기기 원했고, 데이먼 알반이 매스컴의 장단을 맞춰준다는 기분으로 허락하면서 오히려 밴드의 뜻과는 반대로 남북전쟁이라 불리던 오아시스 와의 대립은 심지어 BBC의 9시 뉴스에까지 나오는 등 격렬해진다. NME는 잠시 판매고를 올렸지만 곧 많은 독자들이 떨어져 나갔고, 블러는 싱글 판매량 대결에서는 승리했지만 블러와 대립중인 오아시스가 새로운 노동계급의 영웅으로 인식되면서 과거에는 모드족 노동계급의 영웅이었던 블러가 이번에는 중산층 날라리 밴드로 인식되었다. 당시 블러는 최정상 밴드였고 오아시스는 떠오르는 밴드였으므로 사람들의 응원이 오아시스로 향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였고 게다가 오아시스의 거침없는 태도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그 시대 최고의 명반중 하나로 손꼽히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까지 내놓았다, 반면 The Great Escape는 앞서 말했듯 영국 사회와 계급에 대한 신랄한 태도가 두드러졌던 앨범이었기에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들었다.
평론가들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발매 당시 가디언, Q매거진, 셀렉트, NME, LA타임즈 등에서 만점 혹은 그에 가까운 높은 점수를 주었으며 멜로디 메이커는 아예 10점 만점에 12점이라는 점수를 부여했다. 셀렉트의 데이비드 카바나(David Cavanagh)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has everything you could want)이라며 극찬했고 NME의 조니 시가레츠(Johnny Cigarettes)는 아이디어, 감정, 곡들이 당대 밴드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utterly beyond contemporary compare)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멜로디 메이커, Raw, Q, NME, 셀렉트에선 앨범을 1995년 10대 명반 안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혹평도 생겼고 결국 앨범 판매량은 오아시스에 크게 뒤쳐졌다. 사실 판매량 면에서도 비교 대상이 됐던 Morning Glory가 엄청나게 팔렸을 뿐, 망한 것은 아니었다. 데이먼 알반 또한 자신이 만들었던 최악의 앨범으로 Leisure 와 함께 이 앨범을 꼽았었지만, 후에 이 앨범의 가치를 재발견했는지 2012년에는 뮤지컬로 만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2.4. 브릿팝 이후(199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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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집 커버[7]
결국 블러는 The Great Escape 활동 도중이었던 1996년 상반기에 일시적으로 밴드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활동 중단시기에 그레이엄 콕슨은 속해있던 밴드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업적인 의도가 짙은 퍼포먼스에 연루된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미국 인디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투신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알렉스는 친구 찰리 블로어[8], 듀란 듀란의 초기 멤버이자 Tin Tin, The Lilac Time으로 알려진 스티븐 더피, 엘라스티카의 청일점 드러머인 저스틴 웰치와 Me Me Me를 결성해 싱글 Hanging Around를 냈고 데이먼은 개인 스튜디오인 Studio 13을 세웠다.[9]
한편, 블러의 멤버들은 각자 개인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여러 스튜디오를 전전하면서 새 앨범을 작업하였고 마침내 1997년 '''브릿팝은 죽었다'''라는 충격 발언을 터트리면서 5집 Blur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소닉 유스페이브먼트같은 미국 중심의 노이즈 기타 록을 대대로 받아들여서 블러의 쾌활한 곡을 사랑했던 기존 팬들을 충공깽 상태로 빠트렸지만[10] 일반 대중과 평단으로부터는 앨범 내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이지한 기타의 아름다운 연주와 로우 파이식 레코딩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러한 블러의 사운드적 변화에는 미국 인디씬으로 관심을 돌린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의 공이 컸다. 이 앨범에 실린 'You’re So Great’ 는 처음으로 블러 앨범에 실린 그레이엄 작사,작곡,보컬의 곡이다. 앨범 활동 중 블러는 리믹스/라이브 앨범인 Bustin'+Dronin'을 발매하기도 했다.

특히 게임 FIFA 98에 OST로 실려서 블러의 곡 중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Song 2'''역시 이 앨범의 2번 트랙 수록곡이다. 강렬한 질주감과 사운드, 짧고 간단하면서 머리속에 쉽게 기억되는 임팩트한 멜로디와 가사 덕분에 1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올타임 베스트 곡 되시겠다.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그 뭐냐 오프닝에 나오는 '우후~'하는 곡 이름 뭐냐?'라는 질문이 쇄도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이 곡 이름이 'Woo Hoo Song'라는 괴 이름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FIFA 98 OST 외에도 한국에서는 이요원이 나온 염색약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메이저리그의 몇몇 선수들이 'Song 2'를 등장음악으로 써서 히트를 쳤다.
이후 데이먼은 범죄영화인 Face에 출연해 연기활동을 하였으며, 알렉스는 코미디언 키스 앨런, 예술가 데이미언 허스트[11]와 함께 프랑스 월드컵시즌에서 응원가 그룹인 Fat Les를 결성해 Vindaloo를 냈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레이블인 Transcopic을 세워 솔로로 데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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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집 커버
1999년 밴드는 이전까지 블러의 앨범을 프로듀싱한 스티븐 스트릿 대신 상술한 Bustin'+Dronin'에서 리믹스를 맡은 인연으로 마돈나의 프로듀서로도 잘 알려진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윌리암 오빗을 새 프로듀서로 기용해서 6집 13을 발표했다. 전자음을 도입해서 기존의 기타 중심의 구조를 깨버리고 음울한 성향으로 돌아선 이 앨범은 전체적으로 그레이엄의 실험적인 기타 사운드가 도입되고 데이먼의 흑인음악에 대한 관심이 Tender에서 드러나는 등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가사 역시 개인적인 면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랑스러운 우유곽 밀키가 나오는 그레이엄 보컬의 Coffee & TV 가 히트하기도 했다.

2.5. 베스트 앨범과 휴식기, Think Tank (200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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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발표 이후, 블러는 신곡 Music Is My Radar가 수록된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고 휴식기를 갖는다. 데이먼은 이웃집에 사는 만화가 제이미 휴렛과 '''고릴라즈'''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다른 멤버들도 각자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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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집 커버
그리고 2002년에 다시 모여 Music Is My Radar를 프로듀싱한 벤 힐러와 노먼 쿡 (a.k.a. 팻 보이 슬림), 전작의 윌리암 오빗과 7집 Think Tank를 작업하나 데이먼의 성향이 일렉트로니카로 변해버려 기타가 별로 필요 없어졌다는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데이먼과 그레이엄의 불화가 심해져 결국 그레이엄이 밴드를 떠났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녹음 초기에 그레이엄은 멤버들 몰래 알콜 중독으로 재활 치료를 받고 있었고 그것을 모르는 다른 멤버들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던 것. 이 시기에 녹음되었던 Don't Bomb When You're The Bomb는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를 위해 한정반으로 발매 되었다. 이후 그레이엄이 돌아오긴 했지만 멤버들이 보기에 그레이엄이 밴드를 대하는 태도상의 문제가 있었던 듯 해보였고 결국 그레이엄 더러 잠시 밴드를 쉬라고 했던 것이 밴드를 탈퇴한게 되어버린 것. 그래도 네 명이서 네 곡[12]을 녹음했기 때문에 앨범에서 그레이엄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발매한 Think Tank 앨범은 데이먼의 월드 뮤직에 대한 관심과 일렉트로니카나 힙합의 강한 영향을 보여주며 기존의 블러와는 크게 다른 사운드를 보여주었고 가사 또한 사랑과 정치적 문제들을 주제로 쓰여졌다. 이 앨범은 평단의 지지를 이끌어내긴 했지만 싱글 발매된 곡들을 제외하면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13에 비하면 팝적인 성향을 띄었는데도 대중적으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며 지금까지도 별 존재감이 없다(...). 심지어 그 다음 해 블러의 리즈시절 프로듀서이던 스티븐 스트릿과 제작하여 그레이엄의 솔로 커리어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앨범 Happiness In Magazine과 비교당하기도 했다. 당시 투어에서는 그레이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기타세션에 버브의 Urban Hymns 활동 시절의 기타리스트인 사이먼 통이 참가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앨범에 수록된 Sweet Song이라는 노래는 그 당시 그레이엄의 사진을 보고 떠올라 쓴 곡이라고 한다. 정작 그레이엄은 이런 노래가 있는 줄도 모른다고...

2.6. 잠정 해체 이후 재결합까지 (2004-2007)


그 뒤 나머지 멤버들도 각자의 일을 하였으며 데이먼은 '그레이엄은 언젠간 올거임!그러니 새 기타리스트 안받고 셋이서 쭉 할거임! ' 이라고 했고 기타를 못쳐도 할 수 있는(...) 펑크 록 스타일의 앨범이 나올 것#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거나 크리스마스 전까지 공격적인 성향의 EP를 내겠다#고 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잠정 해체 상태'''가 되고 말았다. 결국 팬클럽도 마지막 잡지와 싱글 Some Glad Morning을 마지막으로 리뉴얼 하겠다며 활동 중단. 재결합 하고 싱글도 두장이나 낸 현재까지 소식이 없다(...).
당시 인터뷰에서 데이먼은 '밴드의 나머지 멤버들이 날 증오하고 있어요'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레이엄과 화해했다는 기사와 멀쩡히 재결합한 걸 보면 그냥 개드립인듯. 원래 데이먼이 생각 없이 말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기질이 있다... [13]
당시에 타블로이드의 추측성 기사나 왜곡 기사가 많아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재결합 이후 블러 다큐에서 모든 멤버들이 직접 코멘트 한 당시 상황은 그레이엄의 알콜중독이 심해져 재활원을 갔고,멤버들은 이 상황을 모르거나 오해하면서 그레이엄이 스튜디오에 나오지 않았던것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레이엄은 그걸 밴드를 나가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그레이엄이 직접 데이먼의 아프리카 익스프레스 공연 리허설 현장에 찾아가고, 모르는 사람 집 앞에서 에끌레스 케익을 나눠먹으며(...) 화해를 한 뒤 멤버들이 재결합하고 2007년 8월에 녹음을 시작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10월로 미뤄지더니 10월에 멤버들이 모이는 모습이 보였을 때 공홈에서 그냥 점심 약속이고 블러 활동은 계획에 없다고 밝히며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 뒤..

2.7. 재결합 이후 (200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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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하이드 파크(Hyde Park) 라이브 앨범
2008년 데이먼과 그레이엄이 화해를 하면서 2009년 7월에 재결합 공연이 있을 것이라 발표. 원 멤버로 재결합을 했고 투어를 돌았다. 다만 앨범 발표는 하지 않았고 2009년 여름 스코틀랜드 공연을 끝으로 다시 활동 중지 상태다. 그레이엄이 개인적으로도 2009년에 신보를 발표하고 투어를 돌고 있는데다, 데이먼도 2010년 발표한 고릴라즈 신보 때문에 당분간 블러 활동은 보기 힘들 듯 싶다. 그래도 녹음한 곡이 있었는지 2003년 이후 7년만에 2010년 4월 17일 신곡으로 'Fool's Day'를 싱글로 내놓았다. 레코드점의 날(Record Store Day)을 위한 곡이라고.[14]
2011년 말, 알렉스 제임스가 '블러는 성탄절 이후에나 녹음을 재개할 것'이라며 뭇 블러팬들을 설래게 했 다.
2월 19일. War Child 공연에서 데이먼과 그레이엄이 같이 나와서 신곡 Under The Westway를 연주하고 The Great Escape과 Blur에 들어 있던 두 곡(He Thought Of Cars, Strange News From Another Star)도 공연했다.
그리고 2월 21일 2012 브릿 어워즈에서 공로상을 받게 되었다
모두들 블러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거라 기대만발 이였으나...데이먼이 더 이상의 블러 활동은 없다는 식으로 말해 팬들을 패닉으로 몰아넣었다가, 곧 그게 꼭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고 누군가 해명을 하는 일을 반복하며 전세계 팬들을 낚고 있다.

데이먼은 멤버들이 오랫동안 각각의 솔로 활동을 하며 음악색, 성향이 너무 진하게 달라졌기 때문에 멤버들이 함께 음악을 만들 때 합의점을 찾는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며, 그레이엄과 자신과는 달리 나머지 두명이 풀 타임 뮤지션이 아니라는 블러 활동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실제로 정치인으로 활동중인 데이브는 예정 된 런던 올림픽 폐막식 공연 등 블러 활동을 위해 휴가를 모두 써야했다.
데이먼이 호로비츠가 주관하는 런던 시낭송 대회에서 블러의 신곡 The Puritan 을 처음 발표, 전에 그레이엄과 라이브 공연으로 들려줬던 Under The Westway 와 함께 7월 3일, 블러의 옥상 라이브를 라이브 스트림으로 생중계하고 트위터에서 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받는 시간도 가진다. 두 곡은 7인치 싱글이 한정반으로 발매됐고 아이튠즈에서 다운 받을 수 있다.
13의 윌리엄 오빗이 말하길 재결합 이후 2012년 즈음에 레코딩 세션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데이먼이 중지 시켰다고... 꽤나 화가난건지 다시는 데이먼하고 작업하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블러 21주년 기념으로 블러 리마스터링 앨범과 LP앨범, DVD 등 박스 세트를 내놓았다. 우리 돈으로 35만원. 개별적으로도 발매되는 앨범들은 본 앨범과 함께 B사이드, 라이브 세션, 일부 팬클럽 싱글을 모아서 Disc 2로 정리했고[15] Rairities 1-4 디스크는 시모어 시절부터 재결합 이후까지의 자료들이 수록되어있으며 라이브 영상 Showtimes, The Singles Night, Live 13가 DVD에 수록되어있으며 시모어 시절의 곡인 Superman의 라이브가 7인치 싱글로 발매되었다. 하지만 Rairties나 라이브 영상들이 유튜브에 이미 많이 퍼져서인지 앨범을 각각 따로 사는 쪽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박스셋을 비추천하는 이유

2.8. The Magic Whip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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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2년만에 발매된 정규앨범. 블러에게 있어 두 음반 사이에 가장 긴 공백을 가진 음반이기도하다.
데이먼 알반은 2013년 홍콩 투어 도중에 15곡 정도를 녹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알렉스는 괜찮은 곡들이었지만 데이먼이 가사를 쓰지 않아서 발매하기는 힘들다고 밝힌 바 있다.
신보 공개 이후 신보 발매를 2주 앞둔 노엘 갤러거와 함께 묶여 브릿팝 전쟁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는 반응이 줄을 이뤘다. 햇수로도 딱 20년. 그러나 이들의 스타일 변화등으로 브릿팝 전쟁으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16]링크.
그러다가 2015년 NME 매거진에서 "독점 공개되는 유명 밴드의 신보 커버"라면서 중국어로 된 한 사진을 공개했다. 몇 시간 되지 않아 팬들은 표지의 중국어 '模糊'가 '흐린'이라는 뜻임을 알아내고 이것이 블러의 신보라고 추측했고, 이후 2월 19일 블러는 공식적으로 신보 'Magic Whip'의 발매를 발표했다. 신보 발매 기념으로 BST Hyde Park에서 헤드라이너로 공연할 예정. 또한 이 시기 즈음하여 유튜브에 이전 앨범들의 싱글 컷 되지않은 곡이 업로드 되었다. 선공개된 트랙리스트 중 'Pyongyang'이라는 곡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3월 20일에 런던의 클럽 MODE에서 앨범 발표 이후 첫 공연을 가졌다. 비츠의 스폰을 받아 하게되며 홈페이지에서 추첨한 200명[17]+초대된 100명으로 300명의 관객이 모였다.[18] 같은 날 There Are Too Many Of Us가 공개되었다. 25일 영국 기준 저녁 8시(한국 시간으로는 26일 새벽 5시)및 태평양 표준시 기준 저녁 8시 (한국 시간으로는 낮 12시)에 비츠사의 유튜브에서 스트리밍 하였다.
4월 14일 Later... Jools Holland 출연[19]을 시작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그리고 영국 차트에 데뷔하지마자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빌보드 차트에서도 역대 블러 앨범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고.
2015년 6월 9일에 공식 코믹북인 Travel Hong Kong With Blur를 내놓을 것임을 발표했다. 홍콩의 만화가 Kongkee의 작품이라고 한다. 인터뷰 영상
The Magic Whip 투어가 끝나고 다시 활동정지에 들어갔지만, 2019년 깜짝 재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3. 내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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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엠넷의 공연 녹화 영상[20] 2019년 5월 기준으로 '''21년 9개월'''된 영상이다.
[21]
1997년 10월 21일 오후 7시 30분에 정동문화체육관[22]에서 내한 공연을 했다. 관객이 2천여명이 들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천여명이었다고 하기도... 오죽했으면 배철수조차 내한 때 관객이 너무 없어서 자신이 다 미안할 정도였다고 했을까.[23]
내한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듣보잡 그 자체(?)였는데 [24] 심지어 한국에서 나름 제일 유명했던 핫뮤직에서조차 밴드 멤버들의 얼굴을 제대로 몰라서, 당시 내한 소식을 알리던 기사에 데이먼을 두고 데이브라 적을 정도였다. 또한 알렉스를 중동계라고 하기까지...
5집 이후 제 2의 전성기를 맞아 몸값이 상당히 비쌌을텐데 IMF 터졌을 당시 어떻게 섭외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25] 물론 1997년은 한영수교 100주년을 맞은 해이기 때문에 주한영국대사관에서 '쿨 브리타니아'라는 슬로건에 걸맞는 뮤지션들을 대거 섭외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내한공연들의 후원을 했다고는 한다. 따라서 블러가 내한왔던 1997년에는 블러를 제외하고도 부쉬, 스파이스 걸스와 같은 걸출한 스타들이 내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데이먼이 경향신문의 인터뷰에서 말하길 지금까지 한국에 와보지 않은 것 같아서 아시아 투어의 첫 장소로 한국을 잡았다고는 하는데.. 또한 블러 팬들은 1997년에 불러오지 않았더라면 안갔던 곳 위주로 공연한다고 했던 2012년 블러 투어에서라도 내한 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공연 기획사를 원망하고 있다.[26]
멤버 모두 태권도에 관심이 많다. [27] 내한 당시 다 함께 태권도 하러 가야 한다고 아침에 태권도장에 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게다가 이때 연습하다 '''발톱이 빠져''' 병원까지 갔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일본의 Most Wanted 인터뷰에서도 태권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외 에피소드로는 당시 브릿팝은 죽었다는 발언할 때 와서 국내 기획사가 건 플랜카드에 '브릿팝 밴드 블러'라는 문구를 보고 가리려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또 경향신문 기자가 데이먼을 만났을 때, 씻는 것을 싫어하는 데이먼에게 심한 악취가 났다고 한다. 안습 [28] 이러한 일화들을 보면 한국에 대한 인상이 굉장히 안좋았을 법 하지만 후에 내한 당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내한 공연에서 의외의 반응에 매우 깜짝 놀랐다고 [29] 한다. 또한 내한 공연 후 3년 뒤 진행되었던 데이먼과의 전화 인터뷰에 따르면 태권도를 배웠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시간이 많지 않아 많은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에게는 새로운 환경이어서 매우 좋았다고 한다. 또한 영국에서는 한국이란 곳을 매우 특색 있고 신비한 곳으로 보기 때문에 직접 와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고도 한다. 사족으로 인삼 음료가 참 맛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도 했다.

3.1. 이후


1997년 이후로 블러는 오지 않았고 많은 한국 팬들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블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심지어는 지산락페 트윗에서 지산락페에 오면 좋을 밴드 중에서 블러가 '''상위권'''에 들어가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2012년 월드투어를 돌 당시, 자주 가지 않았던 지역에서 공연할 예정이라고 하여 그레이엄의 트위터에 남한을 와달라고 한 팬이 있었으나 그레이엄은 매몰차게 한국은 이미 갔다왔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13년 10월, 데이먼이 BBC 라디오에서 방북한 사실을 말한 뒤로는 왜 북한에는 가면서 남한에는 오지 않냐며 내(남)한을 외치는 중이다.
2014년 CJ E&M현대카드가 엄청나게 공들여서 섭외를 하려고 했지만 거절했다는 거물급 뮤지션 D가 데이먼과 헤비시즈라는 설이 돌고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두번 다시 블러가 내한 올 가능성은 낮을 듯 하다.
2015년 2월 공개된 8집 트랙에 'Pyongyang'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한국의 팬들 사이에서는 공연하기에 상당히 어려움이 따를 북한 대신 혹시라도 남한에 올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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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15년 4월 28일, 뜬금없이 블러의 공식 페이스북에 진한 구글 번역기의 냄새가 나는 한글로 쓴 앨범 홍보글이 올라왔다! 해당 게시물은 다른 언어로 같은 내용의 글이 올라오지는 않았으며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게 설정되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한국팬들은 이 때문에 혹시 내(남)한을 하려는 것이 아닐가 기대하였지만 연합뉴스와의 인터뷰 내용을 참고하면 그저 오래 기다린 남한 팬들을 위한 서비스성 글로 생각된다. 현재 해당 게시물은 삭제된 상태이다.
10주년에다 그해 가장 강렬한 헤드라이너[30]를 데려온다는 호언장담 때문인지,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공개된 예스컴 사장의 블러 내한에 대한 자책 문자 때문인지 2015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로 내한을 온다는 이야기도 돌았으며 그 때문에 트위터에서는 검색창에 펜타를 치면 '펜타포트 블러'가 자동완성으로 떴으나 결국 이런 들이 헤드라이너로 결정되면서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8집이 발매되어 진행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내(남)한 계획을 묻자 The Magic Whip 투어에서는 남한으로 가는건 어렵지만 꼭 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하고 대신 유엔과 논의하여 북한으로 가는걸 추진중이라고(...).[31] 새 앨범을 발매하거나 새로운 투어를 할 때 까지는 블러의 내한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듯 하다. 그리고 해당 인터뷰에서 블러는 "K팝을 들어본 적이 있다"며 "영국 어린 친구들이 많이 듣는 음악인 걸로 안다. 한국 록 음악도 들어본 적이 있다. 가끔 한국 팬들이 한국 록 CD를 건네줘 컨템퍼러리 록부터 옛날 한국 록까지 들어봤다. 마지막으로 받은 한국 CD는 1970년대 록밴드의 음악이었다. 최근 들어 한국 음악이 세계 시장에서 성장해 나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으며 그 중 데이브는 "굉장히 즐거웠던 걸로 기억난다. 데이먼과 나는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배워 당시 내한 공연 때 한국 도장에서 태권도 수업을 받은 기억이 난다. 한국 팬들이 오래 기다렸고 그간 젊은 세대의 다양한 팬들이 생겼다고 들었다. 꼭 다시 가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2015년 7월, 홍콩 공연 기자회견에 참석한 워너 뮤직 코리아의 남한 언급에 알렉스가 데이브에 이어 꼭 다시 남한을 찾고 싶다고 하였으며 같은 날, 백스테이지로 찾아간 피키캐스트의 기자가 데이먼에게 내한 오라고 말을 전했다고 해 내(남)한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다.
이후 2017년 7월,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고릴라즈가 참여하면서 데이먼은 두번째로 내한하게 되었다. 공연장에는 고릴라즈 팬과 더불어 블러와 데이먼 알반의 수많은 팬들이 모였고, 심지어 일부 팬들은 입출국 비행기 시간까지 알아내 공항에까지 따라가기도 했다(...) 가히 20년만의 내한이었던 만큼 데이먼을 비롯한 뮤지션들과 관객 모두의 호응으로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2018년 6월 23일 데이먼 알반이 비공식적으로 내한했다는 사실이 트위터로 알려지면서 한국 팬들을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일단 2019년 시점에서는 The Magic Whip 활동도 끝나서, 새 월드 투어나 앨범을 기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4. 멤버


'''이름'''
'''생년월일'''
'''포지션'''
데이브 로운트리 (Dave Rowntree, David Alexander De Horne Rowtree)
1964년 5월 8일
드러머
데이먼 알반 (Damon Albarn)
1968년 3월 23일
메인 보컬리스트, 세컨드 기타리스트[32] , 키보디스트
알렉스 제임스 (Alex James, Stephen Alexander James[33])
1968년 11월 21일
베이시스트
그레이엄 콕슨 (Graham Coxon, Graham Leslie Coxon)
1969년 3월 12일
퍼스트 기타리스트, 배킹 보컬리스트

5. 디스코그래피




6. 그 외



6.1. 다른 밴드와의 관계(?)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가 무지 싫어 했던 밴드. 얼마나 증오하면 갤러거 형제가 데이먼이 활동하고 있는 고릴라즈 마저도 어린애들이나 들을만한 음악을 하고 있다고 깔 정도이다. 하지만 요즘 데이먼이 활동하는 The Good The Bad & The Queen은 노엘 갤러거가 인터뷰 땐 의외로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오아시스와 대판 싸운 과거는 '브릿팝 남북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흑역사화 됐다. 하지만 최근에 노엘은 데이먼과 술집에서 만나 화해를 했다며 좋아라하고 있다.(...) 브릿 어워즈 2012에서도 만나서 서로 껴안는 포즈를 취하고...
그리고 2012년 9월에 데이먼이 진행하는 African Express에 노엘이 초대받았다! 그러나 평소 노엘의 행보를 봤을 때 이 공연에 참여의사를 표할 가능성은 낮고, 데이먼도 이를 알기 때문에 노엘과 콜라보 가능성에 대한 사람들의 계속되는 관심에 수락 가능성이 적은 초대를 대충 했을 가능성이 높다.실제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3년 노엘 갤러거와 알반, 콕슨이 TCT 무대에서 '''함께''' 블러의 노래를 불렀다! 락덕들은 기적적인 일이라며 경악해 하 는 중. 노엘은 이전의 싸움에 대해서도 기자들이 계속 쓰레기 같은걸 물어봤고 취한 상태에서 했던 말일 뿐이었고, 원래 데이먼을 좋아했다고(...) 밝혔으며, 고릴라즈에 대한 평은 어느새 '어린애들이나 듣는' → '우리 애들도 사랑하는'으로 바뀌었다.
이후 2017년, 노엘이 고릴라즈의 신보 Humanz의 'We Got the Power'에 피처링을 하게 되며 수십년만에 오아시스와 블러의 프론트맨이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34]
리암과는 원래 실제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던 사이. 2015년에는 트위터에서 Lonesome Street를 극찬하기도 했다. 그런데 솔로 투어에서 부를 오아시스 노래를 추천받을 때 블러가 나오자 단단히 삐졌다(...)
브릿팝 밴드들이 제 잘난 맛에 살지만 Suede브렛 앤더슨이 '블러는 팝 밴드가 아닌 코미디 밴드'라고 비야낭 거린 것이 유명하다. 여기에 데이먼은 '마약중독자 약쟁이'라 받아쳤고 그러자 브렛 앤더슨은 '주삿바늘 무서워하는 겁쟁이'라고 했다. 이는 일래스티카(Elastica)의 저스틴 프리쉬만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브렛 앤더슨과 저스틴 프리쉬만이 동거에까지 이른 상태에서 저스틴 프리쉬만이 데이먼과 불륜을 시작하면서 관계가 파탄났으니... 참고로 브렛은 저스틴과의 결별에 충격을 받아 헤로인에 손을 댔다가 마약중독자가 되었고, 데이먼과 저스틴 프리쉬만은 이후 쭉 사귀다가 13 때 헤어졌다. 그리고 저스틴 프리쉬만은 '''재입학한 대학의 교수'''와 결혼했다., 브렛과 데이먼은 여전히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저스틴이 화해시키려고 만나게 했는데 악수만 하고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저스틴은 여전히 두 남자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
라디오헤드의 프론트맨 톰 요크는 2003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타 뮤지션의 곡들 중 내 곡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한 곡이 있느냐' 라는 질문을 받자 블러의 girls and boys를 꼽았다. '내가 만들었어야 하는 곡인데 블러 그 개자식들이 먼저 뺏어갔다(..)'라고 장난삼아 얘기했다고. 그만큼 그 곡을 좋아하는 듯 하다.


6.2.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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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새 데이먼은 머리가 벗겨지고 있다. 치아 상태도 좋지 않다. 하지만 원판이 워낙 좋아서인지 아직도 훈남 소리 듣고 산다. 금니를 박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빨이 빠진 이유에 대해선 그냥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없었다고... 2019년 들어와서는 머리를 박박 밀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주먹밥에 감싸진 김 같다(..) 어쩐지 자신도 어색한지 비니를 많이 쓰고 다니는 것 같음. 팬들은 빨리 데이먼의 머리가 자라길 기다리고 있다..
  • 알렉스는 치즈를 사랑한다. 직접 만들고도 있다. 왕실에 납품도 한다. 그의 치즈 사랑은 유명하다. 노엘 갤러거의 팬들은 그의 와싯 이후 거취를 궁금해하며 그가 하지 않을 일 리스트로 '알렉스와 치즈 만들기'를 꼽은 적이 있다.포장 디자인 변천사
  • 치즈 사랑과 함께 같은 밴드 멤버 그레이엄 콕슨을 항한 사랑도 유명하다. 그가 묘사하는 그레이엄 콕슨은 이 시대 최고의 기타리스트이며, 그림도 잘 그리고 기타도 잘 쳐서 학교 다닐 때 인기가 짱이었고, 좋은 냄새가 난다고 한다...
  • 데이브는 데이먼이 승부욕이 예전에 정말 심했다고 말하면서, 들고있던 짐을 들기 싫으면 데이먼한테 가서 이렇게 말하면 됐다고 한다. "야 이거 진짜 무거워. 넌 이거 못 들걸?" 그러면 데이먼은 "내가 이걸 못 들 것 같아?! 잘 봐!" 이러는 식이라고...
  • 데이먼은 알렉스 집에 찾아가서 절대 노크를 하지 않았었다. 창문에 돌을 던졌다.
  • 그레이엄은 옷과 신발과 오토바이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이 중에서 신발은 그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무생물이며, 옷은 보존을 정말 잘 하는지 15년도 전에 공연에서 입었던 티셔츠를 또 입고 공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데이브는 여러가지 블러 외 활동들을 하는데개인 사이트(링크 죽음), 블러 외에 The Alierons라는 밴드에서 드럼을 친다. 또한 애니메이터로도 활동해 Empire Square라는 애니메이션을 감독하거나 Nanomation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2012년 부터는 DJ로도 활동중. 초기에는 DJ Dark Destroyer(...)라는 중2병스러운 이름으로도 활동했다. 여기서 DJ로서 활동 기록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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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브의 음악 외 활동 중 가장 잘 알려져있는 것은 변호사 일과 정치인데, Kingsley Napley라는 로펌에 소속되어있으며 여기서 프로필 을 볼 수 있다. 범죄 관련 전문이라는 듯. 정치인으로서는 2002년 영국 노동당에 가입하며 웨스트엔드 지부에 의장으로 앉았기도 했다. 이후 Marylebone의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다음해 7월 노동당 텃밭인 Church Street에 출마했는데 팬들이 정치인이 드럼치면 맛이 안난다(...)며 애써준 덕분(...)에 또 낙선. 결국 2010년 총선에서 웨스트민스터 선거구에 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블러 재결성 공연에서 오바마의 선거포스터를 패러디해 위 처럼 Vote Dave라고 적힌 티셔츠를 무려 블러 공식 머천다이즈로 판매하고 공연장 전광판에 구호까지 띄웠으나 결국 보수당 마크 필드에 밀려 낙선.. 다음 총선을 위해 Norwich South 지역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저널리스트 출신의 클리브 루이스에게 밀려서 낙천. [35]
  • 정치인으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았던 데이브 로운트리는 2017년 5월 4일에 열린 영국 지방선거에서 노포크 카운티 의회 의원(Councilor)으로 당선되었다. 지역구는 Universitiy Division으로 1,173표를 획득하여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 이 지역구는 본래 노동당의 텃밭이다.
  • 여담이지만 데이브는 2016년 현재 유일하게 50대에 접어든 밴드 내의 맏형이다.
  • 중국어 표기는 '블러'를 음차한 布勒(포륵, 보통화로 발음하면 '블러'와 비슷하게 들린다.)이라고 쓰이다가 The Magic Whip 발매 이후로 模糊가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 한때 그때 그 사람들이란 한국영화의 포스터가 Song 2의 싱글 커버를 표절했다고 하여 논란이 된 적 있다.
  • 2003년에 있었던 유명 인터뷰어 날드와르와의 인터뷰가 안좋은 쪽으로 유명하다. 다른 멤버들은 그다지 친절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상대를 해주지만, 특히 데이브 로운트리의 태도가 논란이 되었고, 후에 코카인의 영향 때문에 그랬다고 사과했으나 댓글을 보면 알 수 있듯 반응은 여전히 좋지 않다.

6.3. 국내의 팬덤 및 인식


97년 전후를 시작으로 여러 팬사이트가 생겨났었지만 대부분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내 블러 덕후들이 희귀종족(...)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현재로서는 데이먼의 팬카페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팬덤을 다시 부흥시키려는듯한 새로운 움직임도 보이는 중이다.
여담으로 국내 블러 팬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장기하'''가 있다. # # 데이먼의 솔로 프로젝트인 Rocket Juice & The Moon의 LP를 인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본인이 말했듯이 오아시스에 빠져 블러에 많이 소홀해진 상태(...)
잔나비 역시 블러의 팬으로 꾸준히 자신들의 공연 리허설 및 출연하는 방송에서 블러의 Tender를 자주 커버하고 있다. 덕분에 그들이 자신들의 개인 방송에서 Tender를 커버하자 갑자기 Blur와 Tender가 멜론 실시간 검색어에 각각 1위와 3위로 등장하기도 했다.

6.4. 어록


  • 데이먼 알반
- "나는 아침에 매우 섹시하다."
- "난 종종 알렉스를 때렸어, 걔가 계속 정말 짜증나는 짓을 하잖아. 난 걔가 맞는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 "진실로 난 우리 엄마에게서 영향을 받았어, 나는 엄마에게 사랑과 존경을 갖고 있고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엄마는 항상 날 웃게 만들어, 나는 그녀를 전적으로 믿고있어. 부모님 두 분 다 아티스트이고 나는 꽤 자유로운 가정에서 자랐어, 나는 내가 원하는건 뭐든지 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만 그건 모두 강한 도덕적인 기초를 기반으로 했어야 했어. 내 생각에 부모님이 아이가 어릴 때 그런걸 허락해주는건 중요한 일인 것 같아 강렬한 욕구를 좀 더 잘 해소할 수 있지. 나는 정말 우리 엄마를 사랑해."
  • 그레이엄 콕슨
- "우리집은 냉각기가 망가져서 계속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어야해."
- "내 옷장을 칭찬해 준 노엘...고마워.Cheers,그리고 나 가디건 없어, 개새끼야."
- "나는 싱글이니까 마돈나에게 결혼해 달라고 할겁니다. 진짜라니까. 만약에 마돈나가 좋다고 하면, 신문 1면에 날 만한 짓을 해보고 싶어. 권총을 한 자루 사서 내 머리에 대고 마돈나를 젊은 락 스타 과부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거죠! 뭐 안 할 수도 있고...
  • 알렉스 제임스
- "데이먼은 블러가 자기 밴드라고 생각하고,그레이엄도 블러가 자기 밴드라고 생각하지만,사실 블러는 내꺼야"
  • 데이브 로운트리
- "그런데도 'blur'가 위대한 앨범이라고 말해졌다는것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블러가 오아시스한테 승부수를 띄웠어!' 그게 오아시스 vs 블러 전쟁의 대가야. 뭘해도 계속 오아시스가 언급되는 거지. 영원히!"

[1] 공백기 : 2004~2008, 2016~2018[2] 콜체스터는 데이브의 고향이기도 하다. 데이먼, 그레이엄, 데이브는 지역적 연고가 같은 셈이다.[3] Random Gender라는 밴드의 기타리스트 출신.[4] 사실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었다고 한다. 데이브가 공연 때 파자마를 입고 드럼을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5] 이 앨범 표지의 사진은 1954년에 촬영한 것으로 이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 한 명이 수영복을 입은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6] 이 회사가 바로 데이먼과 데이브가 지금까지도 즐겨입는 브랜드인 프레드 페리이다. 한국 프레드페리 블로그에서는 자신들이 블러의 투어를 지원해줬다고 홍보(?)하기도.[7]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표현하는 커버 이미지에 타이틀또한 'Blur' 셀프타이틀이다. 전작과는 달리 blur 자신들에 대한 앨범. 좀 더 감정적이고, 개인적이며, 거칠다.[8] 싱글 제작에만 참여하고 실제로 공연에 나타나지는 않았다.[9] 13의 이름의 유래가 된 그 스튜디오 맞다. 이 이후 블러의 노래 뿐만 아니라 고릴라즈등 데이먼의 솔로 프로젝트의 곡은 대부분 이곳에서 작업되었다. 데이먼이 프로듀싱한 바비 워맥의 The Bravest Man In The Universe와 The Best Is Yet To Come등 다른 뮤지션의 앨범들도 작업되었다. [10] 하지만 어쨌든 13 앨범과 달리 블러적인 송라이팅은 유지하고 있어서 블러의 팬들도 5집을 그렇게까지 까진 않는다.[11] 알렉스, 그레이엄과는 같은 골드스미스 미대 출신이다. Country House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했다.[12] 앨범에 실린 것은 한 곡 뿐이다. 두 곡은 B사이드가 되었고 나머지 한 곡이 마지막 팬클럽 싱글인 Some Glad Morning.[13] 네이버 기사들을 잘 뒤지다 보면 블러 멤버들이 법정 싸움으로 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멤버간의 갈등이 아니라 공연 스폰서와의 갈등으로 빚어진 해프닝이다.[14] 레코드점의 날 기념이라 특이하게도 앨범 자체는 7인치 축음기 음반으로만 1000장 한정판으로 발매했다. 그리고 팬들이 질 떨어지는 불법 복제된 앨범을 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앨범 발매일 다음 날 MP3 형식의 파일로도 무료 다운로드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15] 개별적으로 발매되는 버전은 각각 4장의 사진과 인터뷰집이 동봉된다.[16] 여담으로 위키피디아에서는 8집을 브릿팝으로 분류하고 있었다.[17] 공식 샵과 달리 국가 선택에 남북한 모두 가능했었다..[18] 데이먼이 공연장에 아이스크림 차를 타고 왔다고 한다..[19] 재결합 이후 첫 TV출연이라고 한다.[20] Beetlebum이 Bettlebum으로 오타가 났다.[21] 하지만 콜드플레이도 이미 내한하면서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끝판왕이다(...)[22] 지금은 건물을 헐어버렸다.[23] 하지만 우리나라에 블러 팬이 적어서라는 이유보다 1997년 IMF 위기로 인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관객이 별로 들지 않았다는게 중론. 그리고 2015년 블러의 8집이 나오고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도 블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블러를 섭외했던 공연 기획사 예스컴 사장이 라디오 방송 도중 배철수에게 보낸 문자에 따르면 자신의 홍보 부족으로 관객이 적게 들은거 같다고 한다.[24] 꼭 그렇지도 않았던 거 같다. 내한 공연 당시 지금은 사라진 국산 의류 브랜드 '쿨독' 에서 협찬을 해주었고 이 브랜드에서 모델 제의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오아시스 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25] 꼭 그렇지도 않았던게 내한공연 날짜는 10월 21일이고 IMF는 11월말에 터졌다.....외환위기가 오기전에 내한공연을 했던것[26] 참고로 블러를 섭외했던 공연 기획사는 '예스컴'이라는 곳으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27] 알렉스를 제외한 전원이 태권도를 배우고 있었다고 한다. 나름 최근에도 그레이엄이 자신은 태권도 워리어(...)라고 한 적이 있을 정도.[28] 알렉스의 이름이 잘 알려진 미들 네임인 알렉스가 아닌 퍼스트 네임인 스티븐으로 소개되었다.[29] 그 당시에 M-net에서 찍은 공연 실황을 보면 적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열정 및 떼창이 대단하긴 했다[30] 결국 그 헤드라이너는 서태지 밴드로 밝혀졌다.[31] 하지만 블러의 공식 내(북)한은 성사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 인터뷰가 나오기 얼마 전, UN의 수장 반기문 사무총장이 방북하려다 북한의 변심으로 취소된 일이 있었기 때문...인줄 알았으나 슬로베니아의 락밴드 '라이바흐'가 락밴드 최초로 2015년 8월 19~20일 평양에서 하는 내(북)한 공연이 성사되었다. 해당 밴드는 나치 퍼포먼스로 유명한 상당히 파격적(...)인 밴드인데 이런 서방세계의 파격적인 락밴드가 선례를 남겼으니 블러의 북한 공연 가능성도 높아진 셈. 더군다나 김정은의 형인 김정철이 락에 관심이 많고 에릭 클랩튼의 대단한 팬이어서 한때 에릭 클랩튼의 평양 공연을 추진한 적이 있던걸 생각하면...[32] 일렉기타 보단 거의 어쿠스틱 기타가 주 악기였다.[33] 특이하게도 미들 네임로 불린다. 데이브의 말에 따르면 고향에서는 스티븐이고 런던에서는 알렉스라고..[34] 그리고 리암은 이를 두고 "형이 나사가 빠졌다 (seriously lost the plot)"라는 말을 남겼다.(...)[35] 데이브 로운트리가 출마한 지역구 중 웨스트민스터는 보수당의 Saft-Seat, 즉 텃밭이라고 불리는 지역구이다. 출마 당시부터 당선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던 곳이었다. 상대가 현역 국회의원이기도 하고...... 총선 후보자로 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차차기 총선에서나 다시 도전할 수 있을 듯 하다. 그와는 별개로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는 계속 진행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