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마 산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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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대치하는 범인을 찍은 사진.
위의 더블 배럴 샷건을 든 남자가 범인 중 사카구치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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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벌어진 아사마 산장.

1. 개요
2. 발단
3. 돌입 작전
3.1. 경찰측 사상자
4. 결과
5. 문화적 영향


1. 개요


あさま山荘事件
공식 명칭은 '연합적군 아사마 산장 사건'. 1972년 2월 19일부터 28일까지 일본 나가노현 기타사쿠군 카루이자와 정에 위치한 '아사마 산장'에서 연합적군(連合赤軍)[1]이 벌인 인질극. 이 사건이 일본 좌익 변혁운동의 쇠퇴를 가져온 요인 중 하나로 손꼽혔다.
사카구치 히로시를 비롯한 연합적군 멤버 5명이 아사마 산장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10일 동안 틀어박혀 경찰과 대치했는데 당시 인질은 무려 219시간 동안이나 감금되어 있었다.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벌어진 인질사건으로서는 일본 최장시간 억류를 기록했다.
아사마 산장은 이 사건 전까지만 해도 가와이피아노에서 연수원처럼 쓰던 곳이었다.

2. 발단


총기탈취 사건 등을 일으키고 도주중이었던 연합적군 멤버들은 군마현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마련하고 계속 도피행각을 일삼았지만, 경찰의 수색이 시작된 데다 외부지원이 끊겨 조직 유지가 힘들어지고 거기에 더해져 1971년 연말부터는 내부분열 조짐까지 보여[2] 위기를 맞았다.
그러던 중 뉴스로 경찰의 수색으로 거점들 일부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연합적군 멤버들은 포위망이 좁혀지는 중임을 직감하곤 위기를 느껴 군마현과 가까운 나가노현으로 도피처를 옮겼다.
당초에는 나가노 동부의 사쿠시(佐久市) 방면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빈약한 장비 등 여러 모로 악조건이 겹친 데다 악천후로 인해 산에서 조난을 당해 의도와 달리 카루이자와 쪽으로 나왔다. 그러던 중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신 별장지를 보고는 은신처로 선택했으니, 바로 아사마 산장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사마 산장 인근의 사츠키 산장에 잠입했으나 수색중이던 나가노 현 경찰 소속 1개 부대와 마주쳤다. 이윽고 연합적군 멤버들은 총을 난사하며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인근의 아사마 산장으로 도주,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주모자 사카구치 히로시의 당초 요구사항은 연합적군 최고간부 모리 츠네오 부부의 석방과 아사마 산장에 있던 멤버들의 도주로를 보장해줄 것이었다. 그러나 도주건은 멤버중 요시노 마사쿠니가 반대해서[3] 결국은 그대로 산장에 틀어박힌 채 아무런 요구조건도 없이 농성체제로 돌입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산장 주위를 포위하는 한편 전기 차단을 시작으로 특수차량을 이용한 정찰 등을 강행하고 범인들을 지치게 하는 전략으로 맞대응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경찰 측에서 터뜨린 실수가 있었는데 범인의 가족들을 이용해 설득에 나섰던 것이다. 실제로 인질극 사태에서 범인의 가족, 특히 부모에게 설득을 맡기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통해 범인의 자수나 여자나 노인, 아이 등 일부 인질의 해방을 이끌어 내는 경우도 제법 되지만 이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대상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통해 이러한 수단이 역효과를 볼 가능성이 없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경찰측은 프로파일링 따윈 쿨하게 생략하고 막무가내로 가족을 투입했다. 이 시대는 프로파일링 기법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시절이다.[4]
당시 경찰은 범인들의 모친을 현장으로 불러와 그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당시 모친들의 호소가 얼마나 절절했던지 현장에 있던 기동대원들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범인들은 이에 대해 부모자식간의 정을 이용해먹었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설득은 커녕 오히려 역효과가 터져 그들의 신경만 더 건드려놓은 바람에 범인들은 자신들의 모친에게까지 발포를 하게 된다.
이 사례는 일본 경찰이 사용했던 가족을 통한 설득은 심각한 오판으로써 사건 당시 일본 경찰 대응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는, 60년대 후반 일본 학생운동계의 분위기에서부터 접근해야 한다.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서구와는 달리 집단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이 강한 일본에서는 가족을 통해 압박함으로써 학생운동을 와해시키려는 시도가 몹시 많았던 것. 특히, 2차대전 종전 이전의 극우 제국주의 시대에 교육받은 기성세대인 교사들은 학생운동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었고, 적군파와 같은 과격파가 아니라 학교 내에서 토론활동을 하고 대자보 등을 게시하는 온건한 수준의 학생운동 조직까지도 가족을 통해 협박하다시피 하여 와해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5]
이런 상황에서 학생운동을 계속하고, 적군파 같은 과격파에 가담할 정도의 인물이면 애초에 가족을 통한 설득은 안 먹힌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며, 오히려 자신도 가족을 통한 압박을 계속 받아왔고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도 가족의 설득과 강요에 못 이겨 학생운동을 포기하는 일을 계속 겪은 만큼 이런 설득 방법에는 오히려 심한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 제 3자의 눈으로 보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적이었을 지 몰라도, 본인들은 이미 숱하게 겪어왔기에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도발이 목적이었다면 모를까, 이런 방식으로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야말로 당시 일본 경찰이 상대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대응책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근거라고 보기도 한다.
결국 설득조차도 먹히지 않자 최후의 방법으로 산장 벽과 지붕을 부수고 정면돌파로 진압하자는 주장이 큰 설득력을 얻었다.
이 사건에서 웬 정신줄 놓은 민간인 하나가 자기가 인질을 대신 하겠다며 무작정 산장 안으로 바구니를 들고[6] 들어갔는데 범인 중 한 명인 요시노 마사쿠니가 "빨리 안 돌아가면 갈길 거임" 하고 소리지르고 있는 사이 경찰 쪽을 향해 윙크를 날리는 바람에 사카구치 히로시가 경찰인 줄 알고 오해해서 그대로 그 민간인 뒤쪽 머리통에 총알을 한 발 쏜다[7]. 그 민간인은 머리에 총알을 맞고도 머리 안에 총알이 박힌 채였기 때문에 살았으나 나중에 수술할 때 결국 사망했다. 이 양반은 '''경찰 경계선을 뚫고 유유히 산장으로 잠입'''했다가 저 꼴을 당했으며, 이전에 마약 때문에 경찰에 끌려가서 고초를 치룬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때문에 경찰은 당연히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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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적군파에 의해 사용된 엽총들.
경찰의 강행돌파에 대해 범인측은 5연발총[8][9] 22구경 라이플, 12게이지 O/U형[10] 더블 배럴 샷건,[11] 38구경 권총 등 총기로 저항했고 이 와중에 상호간 총격전으로 인해 경찰 기동대원 일부가 부상을 입거나 순직하고 작전에 동원된 대형 크레인에 기기 이상이 생기는 등 작전은 난항을 겪었으나 장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범인들은 전원 검거되었다. 당시 경찰청장 고토타가 범인들이 사살되면 순교자처럼 보이게 될 테니(좌익 운동권에서 사살된 것으로 트집을 잡을 테니) 전원 생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근데 잘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는 잘 됐지만 당시에 저 따위 명령을 수행했을 기동대원들 입장에서는 절로 쌍소리가 나올 명령이다. 지금처럼 테이저 같은 비살상 무기 체계도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엽총을 쏴대는 놈들을 무슨 수로 생포하라는 건가.''' 거기다 병맛스럽게도 '''사격하기 전에 상부에 보고 먼저 하라'''는,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지침까지 내려지고...결국 아래에 설명할 사사 아츠유키가 단독으로 발포 허가를 내려서 총격전을 벌였고, 또 생포에 대해서는 당시 경시청 간부들 중에 일본군 출신들이 많이 있었기에[12] 대안이랍시고 나온 작전은 인명을 갈아넣는 것이었다.

3. 돌입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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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철거용 철구를 장착한 크레인과 살수차가 동원되었고 기동대가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벽을 부수고 돌파구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한 크레인이 철구로 몇 번 후려치기도 전에 고장이 나서 멈춰버리는 바람에 돌입 작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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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돌입시도 도중 진두지휘하던 기동대원 2명이 총을 맞고 병원으로 이송 도중 순직하고 말았다.[13] 이때 돌입을 맡은 기동대는 일체의 보호장구와 진압용 방패, 곤봉과 가스총 등 비살상 무기와 M1911, 뉴 남부 M60 권총을 장비했다. 듀랄루민으로 만든 진압 방패는 한 장으로는 총알을 막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2장을 겹쳤다.
마지막 돌입작전 도중 적군파의 총격이 너무 심하자 결국 경찰 지휘부로부터 생포를 포기, 산장에 돌입한 제7기동대에게 총기사용 허가가 떨어졌지만 혼란이 심해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결국 3차례에 걸친 돌입시도 끝에 살수차의 고압살수로 산장의 벽을 부수고 돌입해 전원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인질도 무사히 구출되었다.
범인들은 신원이 까발려지는 걸 막겠다며 2월 21일부터 코드명을 쓰기 시작했다. 사카구치 히로시는 "아사마", 반도 쿠니오는 "타테야마", 요시노 마사쿠니는 "후지산", 가토 형제는 "아카기(형)"와 "기리시마(동생)". 다 소용 없는 짓이었지만 또 체포되어 현관으로 끌려나올 때 기자들과 기동대원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은 건 당연지사였다.

3.1. 경찰측 사상자


  • 제2기동대장 우치다 나오타카 경시 순직, 이후 경시장으로 2계급 추서.[14]
  • 지원차량 반장 다카미 시게미츠 경부 순직, 이후 경시정으로 2계급 추서.[15]
  • 제2기동대 4중대장 소게츠 카미하라 경부보, 안면에 산탄을 맞고 중상.[16]

4. 결과


경찰의 돌파작전 상황은 전국각지에 생중계되어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었고 당일 시청률이 조사 개시 이래로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집계된 시청률은 NHK 포함 시청률이 무려 '''89.7%'''라는 기록을 세웠고 같은 날 1시간에 걸쳐 방송된 뉴스 특보는 평균 시청률 50.8%로 2000년대에 들어선 지금도 뉴스 특보 시청률로는 일본 최고기록을 유지하고 있다.[17]
사건 당시의 생중계 영상 편집본.
또한 이 사건은 '''일본의 학생운동 세력, 아니 일본의 진보세력 혹은 좌파세력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한때는 일본 공산당이 주요 정당이었던 시절도 있고,[18] 1960년 미일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인 안보투쟁이 일어났던 적도 있으며, 학생운동 계열 신좌익파들이 사회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렇게 60년대 후반에는 전학공투회의 같은 학생 운동조직이 아주 전국적으로 확산될 정도로 엄청 활발하였지만, 우치게바 같은 내부투쟁이랑 점차 극좌적으로 변해 시민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결국 이 사건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
범인들은 체포 후 기소되었으며 주범인 사카구치 히로시는 1993년 사형 확정, 요시노 마사쿠니는 무기징역, 가토 형제 중 형인 미치노리는 징역 13년, 동생인 모토히사(체포 당시 16세)는 중등 소년원 송치가 각기 선고되었다. 반도 쿠니오는 이후 1975년에 일어난 쿠알라룸푸르 사건 때, 일본적군과 일본정부의 초법적 거래로 외국으로 도주하는데 성공, 국제 지명 수배 중이나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사카구치 히로시에 대한 형은 집행되지 않고 있으며, 요시노 마사쿠니와 함께 현재도 수감 중이다. 가토 형제는 복역 후 전향하고는 아예 자민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사건 이후 아사마 산장은 수리 후 영업을 재개했다. 사건 후 약 10년 동안은 사건현장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거의 잊혀진 곳이 되었지만 건물은 아직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운영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건물 외관이 깨끗한 것을 보아서는 관리는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5. 문화적 영향


2002년에 이 사건을 영화화한 야쿠쇼 코지 주연의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突入せよ! あさま山荘事件)」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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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 하드 시리즈레인보우 식스처럼 멋지게 진입해서 체포하는게 주된 내용은 아니고, 당시 사건 진압에 참여한 경시청 간부로써 지금은 일본에서 유명한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사 아츠유키[19]의 저서를 각색한 영화로 경찰측의 고군분투, 그리고 온갖 뻘짓과 삽질을 주내용으로 다룬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다.[20] 일부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바뀌어서 나오니 영화 보기 전에 숙지해두자. 경찰 입장에만 치중해서 그런지 연합적군 멤버들은 맨 마지막 돌입부분에서나 얼굴이 나온다. 아니 애초에 목소리도 없다. 그냥 엽총으로 총질만 한다. 안습.
겟타로보 코믹스판에서 진 하야토가 과격 학생운동 리더로 등장하며 빠지려고 하는 멤버 2명을 아이언 클로+얼굴찢죽 하는 장면도 이 사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 나오는 과격 혁명운동집단 "여명"과 그들이 일으킨 모토스 호수 총격전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쓰르라미 울 적에 DS판 4권 신미오츠쿠시편의 키워드 중 하나인 시라카바 산장 농성 사건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일본의 좌파감독이기도 한 와카마츠 코지 감독은 2008년에 '''「실록 연합적군(実録 連合赤軍)」'''이라는 영화를 통해 이 상황을 다루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 부분 진출작이다. 이전의 작품들이 오로지 경찰의 관점에서만 기술되어있던 것에 비해 연합적군측 관점, "왜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후술, 구성원들의 인간적인 고뇌 등을 다룬 수작으로 평가된다. 여담으로 와카마츠 코지 감독 본인부터가 신좌파 운동에 관계된 사람이었다. 적군파 멤버들과는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고 1971년에는 아예 세계혁명선언이라는 영화를 찍어서 적군파의 해외 무력투쟁이나 국제 무력투쟁, 반일제국주의 투쟁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당시 연합적군 리더 부부 모리 츠네오[21], 나가타 히로코[22] 커플의 여러 가지 사건(대표적으로 연합적군 사건)도 감상(?)할 수 있다.
방탄도 안되는 진압방패를 두 장 겹쳤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안습하고도 어설픈 당시 일본 경찰의 진압행태를 꼬집는 이야기로 쓰인다.[23] 결국 이걸 들었던 경찰 측에서도 사상자가 나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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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진압하러 온 경찰들이 닛싱 컵누들을 먹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되면서 컵라면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자세한 내막은 컵누들컵라면 항목 참조.[24][25]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고 헝클어진 머리로 경찰에 연행되는 적군파 구성원들의 모습이 TV로 생중계되면서 이후 불량문화의 융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사실은 며칠씩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한 냄새가 풀풀 풍겼고.
또한 아사마 산장 사건에 대한 경찰측 대응의 난맥상은 이후 일본 정부, 특히 경찰 조직의 관료제적 경직의 대표적 사례로 정말 두고두고 까였다. 서브컬쳐계에서도 다나카 요시키 같은 이들이 깐 적 있다. 경시청[26]이 현경에 대한 지휘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 문제에서 시작되어 직위상 동격인 지휘관이 여럿 있을 때 누가 최고권한을 행사하느냐에 대한 갈등으로 발전했고 결국 이 때문에 '''"캐리어는 앉을 자리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하는 자조적 농담이 나왔을 정도였다. 악명 높은 고위직 원탁회의[27]와 직급별 동심원[28]의 풍경 같은 경우 수많은 작가들이 다뤄서 이젠 농담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실제 이 사건 대책회의 당시의 풍경이었다고 한다. 결국 직위, 직급이나 직책상 우열을 판단하기 힘든 동급 지휘자가 여럿 있을 경우 일단 임관시기를 따지고 그것마저 같으면 정치력 투쟁을 시작한다는 전통이 여기에서 탄생했다! 물론 이런 갈등이 하급조직으로 번지지 않을 리가 없으므로 회의가 난항을 겪는 동안 컵라면에 붓는 뜨거운 물을 공급하는 '''현경 소속''' 급수차가 경시청 기동대에게 급수를 거부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 애초에 돌입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 중요한 이유에는 이런 관료적 경직도 있었다.
참고로 아사마 산장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러나 영업을 중단한 채 폐건물로 남겨져있어 종종 심령스팟으로도 유명하다.
[1] 1971년에서 1972년에 걸쳐 활동했던 극좌파 테러 조직으로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와 일본공산당 혁명 좌파 카나가와현 위원회가 연합하여 결성되었다.[2] 당시 내부 동료들끼리 인격마저 짓밟힐 정도로 혹독한 사상검증이며 토론이 이어졌고 그러던 끝에 조직의 '총괄'이라는 명목으로 동료들에게 집단 린치를 가한 끝에 그 중 12명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일으키고 만다. 이것이 바로 '연합적군 사건('산악 베이스 사건'이라고도 한다.)'.[3] 자동차를 탈취해서 도망치자고 했는데 하필 자동차 열쇠를 외출 중이던 인질의 남편이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당시 범행에 가담한 이들 중 '''운전을 할 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무산되었다. 운전을 할 줄 아는 멤버는 이미 산악 베이스 사건때 자기들이 때려죽였기 때문이다.[4] 당시 일본의 학생운동 과격파들은 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 가족간 감정에 호소하는 데 워낙 심하게 시달린 덕분에 가족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공공연하게 사용할 정도로 반감이 심했었다.[5] 교사든 학부모든 개인의 정치적 활동을 극히 적대시하는 전체주의 시대에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학생이 불온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부모를 협박하면, 겁에 질린 부모가 학생에게 운동을 그만둘 것을 강요하게 되는 것.[6] 인질 남편이 과일과 함께 아내, 범인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들어간 바구니였다. 그런데 연합적군 쪽은 가져가지도 않고 그냥 얌전히 버로우 탔다.[7] 범인은 경찰이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8] 기록으로 추정해 보건대 아마도 호와 M300로 추정. 일단 위 사진에는 4자루만 찍혀 있으나 잘 보면 위에 한 자루가 더 있다. 저 안 찍힌 총기가 "5연발총"으로 추정되지만 확실치는 않다.[9] 사진의 3번 총기(Auto-5 소드오프) 5연발총일 가능성도 있다. 튜브탄창의 뚜껑이 달려 있는 걸 보아서 산탄총이긴 하나 펌프가 없는 걸로 보아서 Auto-5가 확실하다.[10] 아사마 산장 사건 상세기록에는 '상하2연총'으로 되어있다.[11] 명색이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군대란 놈들이 엽총 따위로 무장했다는 게 웃기긴 하나, 애초에 적군파, 혁명 좌파 모두 '''그냥 학생 운동 조직'''에서 시작했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 참고로 여기 쓰인 엽총들은 가나가와 현 위원회(게이힌 안보공투) 멤버들이 적군파와 합쳐지기 전 1971년 2월 17일에 토치키 현 모오카 시의 츠카타 총포점에서 털어온 총들 중 일부이다. 또다른 일부는 적군파에서 처분했다. 일본 위키에서는 모오카 총포점 습격 사건이라고 하며 게이힌 안보공투는 이 전에도 파출소에서 멤버 3명이 권총 탈취를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물론 거기 있던 경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전혀 없었기에 1명은 사살되고 나머지 2명도 총에 맞고 체포당했다. 이후 만만한 총포상으로 목표를 바꾼 듯하다.[12] 영화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도 출신 간부들끼리 이딴 걸로 "전 대륙까지 갔다 온 사람이거든요?", "어 나돈데. 나 훈장 받았어. 너 계급 뭐였냐" 하면서 쓰잘데기없이 말싸움하는 장면이 나온다.[13] 이 때 두 경찰관이 순직당한 원인은 진압용 헬멧(방석모) 정면에 계급장이 새겨진 탓에, 지휘자임을 눈치챈 무리들이 표적으로 삼아 저격했다. 그 이후로 헬멧 정면에 계급장을 삭제하거나, 뒷통수 부분에 새긴다.[14] 경찰청 장관 > 경시총감 > 경시감 > 경시장 > 경시정 > 경시 > 경부 > 경부보 > 순사부장 > 순사장 > 순사[15] 경찰청 장관 > 경시총감 > 경시감 > 경시장 > 경시정 > 경시 > 경부 > 경부보 > 순사부장 > 순사장 > 순사[16] 경찰청 장관 > 경시총감 > 경시감 > 경시장 > 경시정 > 경시 > 경부 > 경부보 > 순사부장 > 순사장 > 순사[17] 이때 당시 관동 지방에서만 팔던 컵라면을 기동대원들이 먹는 장면을 생중계하면서 컵라면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8] 1960년대 당시 아니 1980년대까지 일본사회당과 더불어 주요 야당중 하나였다.[19] 후에 내각안전보장실 실장도 역임했으며 우익인사로, 새역모에도 기부를 한 적 있고 독도와 관련해서도 독도에 헬리콥터를 투입해야 하네 어쩌네 하던 양반이다.[20] 일본 경찰들의 평소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아서 유달리 일본 경찰이 나오는 영화들의 경찰들은 보통 시궁창 입장인 경우가 많다.[21] 체포된 후 연합적군 사건에 대해 "나는 미쳐있었다"는 조의 자기 비판서를 쓰고 그 다음해 1973년 1월 재판 도중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래도 늦게나마 정신차리기는 했지만 이미 죽은 자는 죽은 자고...[22] 남자 대원에게 이상한 짓을 당했다며 호소하는 여자 대원을 "님도 책임 있으삼"이라며 때려죽인 주제에 자기는 나중에 사카구치 히로시와 이혼하면서 "난 모리님이 좋으니 이혼하긔, '''그게 공산주의적 관점(?)으로도 올바른 것!'''"이라는 병맛 쩌는 개드립을 쳤다. 지금은 '''당연히''' 사형선고를 받고 다른 죄수와 재혼했다가 후에 뇌종양으로 40여 년 동안 투옥 끝에 2011년 2월 5일 밤 10시 도쿄 구치소에서 다발성 장기기능부전으로 사망했다고 일본 법무성이 발표했다. 어떤의미에서는 사형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당하다 가버린셈.[23] 당시 전 세계적으로 테러나 인질극에 특화된 전문가를 양성해서 운용하는 국가는 없었다. 뮌헨 올림픽 참사, 혜화동 무장 탈영병 총격 난동사건 등의 대응을 보더라도 다른나라도 비슷한 수준이었다.[24] 경찰관들이 착용한 방탄모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착용했던 90식 철모를 재도색한것이다. 일본군이 무장해제하며 반납한것을 인수한 것. 경찰 일부에서는 '''2000년대'''까지 이용했다고.[25] 상술한 영화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는 준비한 도시락이 전부 혹한에 얼어서 죄다 버리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26] 실질적으로는 일본 경찰 본부 구실을 하지만 법적으로는 도쿄지방의 경찰조직에 불과하다.[27]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누가 상석에 앉을지(누가 지휘자가 되어 회의를 진행할지) 결정하는 회의였기 때문에 둥글게 둘러앉았다고 한다.[28] 고위직급이 일단 안쪽에 원형으로 앉고 하위직급은 그 바깥에 직급대로 동심원을 형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