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타다나가
'''徳川忠長'''
1606년 ~ 1634년 1월 5일
에도 막부 초기의 다이묘. 에도 막부의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남이자[1]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친동생. 아명은 쿠니마츠(国松). 원래 2대 쇼군 히데타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중 자질이 뛰어난데다 형인 타케치요(竹千代 ;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말더듬이에 병약한 체질이었던지라 부모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특히 어머니 스겐인이 노골적으로 그를 편애하였다고 한다. 가문의 대를 이은 히데타다도 3남이었듯이 장유유서의 원칙이 없었던 때인지라 타케치요 지지파와 쿠니마츠 지지파 간의 세력 다툼이 있었으나, 이에미츠의 유모인 카스가노 츠보네가 당시 오고쇼[2] 였던 이에야스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한 것을 계기로 장자인 타케치요가 후계자가 되었다.
할아버지 이에야스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이에미츠가 먼저, 타다나가는 그 다음이라는 식의 발언을 종종 함으로써 아예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선을 그었으며, 아버지인 히데타다 역시 이에야스 사후에도 후계자에 관해서 별다른 언급 없이 이에야스의 뜻에 따랐다.
1616년(또는 1618년)에 코후(甲府 ; 현 야마나시 현) 23만 8천석의 영지를 받았으며, 이후 시나노의 코모로(小諸)의 영지를 더하였으나, 본인은 코후에 간 적이 없고, 가신들에게 정사를 일임하였다.
1620년에 형과 함께 관례를 올리고 이름을 타다나가(忠長)라 하였다.[3] 1623년, 형의 쇼군 취임과 함께 츄나곤(中納言 ; 종삼위 상당)으로 임관, 이듬해에는 스루가(駿河)와 토토우미(遠江)의 일부(카케가와)를 영지에 더하여 총 55만석의 거대한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단, 이때 코모로의 영지는 반납하였다). 1627년에는 다이나곤(大納言 : 정삼위 상당)으로 승진하였고, 고미즈노오 덴노의 행행에도 참가하였다.
1631년, 가신 중 한 명(또는 여러 명)을 이유 없이 베었다는 죄목으로 코후에 칩거를 명령받았고, 이듬해 아버지인 히데타다가 위독할 때에도 알현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후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죄목[4] 으로 가이에키되어 전 영지를 몰수당하는 한편 코즈케(上野) 타카사키(高崎)에 유폐되었고, 이듬해 할복형식으로 자살하였다. 향년 28세.[5]
영지 몰수의 표면상의 이유는 스루가성 진검시합 등으로 인한 품행상의 문제도 들어가나 이는 부가적인 문제였고 실제로 적용된 공식 죄목은 이에야스가 정해둔 무가제법도 위반이었으며 이는 바쿠후의 권위 강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다나가는 에도와 슨푸(駿府 ; 타다나가의 거성)[6] 에 쇼군이 두 분 계신다는 평이 돌 정도로 오만한 태도를 취해 왔으며, 스루가 다이나곤으로 있는 동안 막부의 명을 어기고 검술시합을 연 바 그 수가 20명을 넘었기에[7] 같은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한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忠輝 ; 히데타다의 이복동생)나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 ; 유키 히데야스의 아들. 히데타다의 조카) 등의 전례에 비추어 처리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이외에도 산킨코타이 등 쇼군과 바쿠후의 권위를 높이는 정책을 많이 시행했다. 실제로 바쿠후는 집권 초기 사후양자 등 정말 별의별 사소한 걸 갖고 가이에키를 시켰다.
단, 영내 백성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거나 가신들로 하여금 진검 승부를 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우울증 환자였다고 한다.
시구루이에서는 어전시합을 열었던 장본인[8] . 쇼군의 친동생이라는 높으신 분 위치인지라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영주. 꽤나 취향이 엽기적이라 피를 보는 것을 즐겨하는데, 심지어 신하가 진검시합을 막으려 할복하고 내장을 꺼내보이며 간언하는 순간에도 아무 동요 없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를 이용해 젋은 여자들을 중심으로 모든 인간을 장난감 취급한다. 타다나가가 여자 이름을 입에 올리면 어김없이 그 여자는 침소로 불려가는데, 구타 정도는 양호한 축이고 아무 이유 없이 목졸라 죽이거나 포박한 뒤 살해당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등 일단 그의 침소에 들면 사지 멀쩡하게 나오는 경우가 없다고 악명이 높다. 그래도 성욕은 있는지 후나키 치카의 등짝을 매질하고 흐르는 피를 보자 후배위를 한다.
원래는 형보다 이쪽이 더 용모와 능력이 출중했다. 검술도 뛰어나서 자신의 일도류 검술 사범의 경지를 뛰어넘었고, 본인을 시해하려 한 신하를 베어냈을 정도. 하지만 모친 오에요의 편애,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줄을 대기 시작한 다이묘들과 가신들을 겪으면서 마음 속에 자만심과 아랫사람에 대한 포악함이 깃든다. 결국, 장유유서를 깨면 안된다는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친형이 쇼군이 되자 좌절감까지 겹쳐 광기가 극도로 악화 되었다.
봉건사회의 완성형은 소수의 사디스트와 다수의 마조히스트로 구성된다는 작가의 해설에서 소수 사디스트를 상징하는 인물로, 본래 자기 것이 되었을 쇼군 직위를 돌려 받겠다는 생각으로, 은근히 역모를 마음에 두고 있다. 어전시합도 본인의 피에 대한 욕망을 채우고, 자신의 야망에 동조하는 다이묘들을 불러 모아 충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도 띄고 있다. 하지만 타다나가의 의중은 야규 무네노리를 비롯한 에도 쇼군가와 다테 마사무네를 비롯한 대다수 다이묘들에게 이미 파악 당한 상태였고, 결국 진검 승부시합을 열었던 게 화근이 되어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할복하게 된다.
인법첩 시리즈에서는 줄곧 언급만 될 뿐 직접 등장하는 건 야마다 후타로가 직접 쓴 것이 아닌 외전격 오우카 인법첩 뿐이다. 마계전생에서 멋대로 상경해 야규 영지에 머문 기슈 다이나곤 도쿠가와 요리노부(이에야스의 10번째 아들이자 전 슨푸성주였던 이로서 당시 이에미츠보다 윗세대에 해당되는 몇 안되는 다이묘였다)에게 타다나가의 예를 들며 발길을 돌리라 은근슬쩍 위협을 가한다.
1606년 ~ 1634년 1월 5일
1. 개요
에도 막부 초기의 다이묘. 에도 막부의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남이자[1]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친동생. 아명은 쿠니마츠(国松). 원래 2대 쇼군 히데타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중 자질이 뛰어난데다 형인 타케치요(竹千代 ;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말더듬이에 병약한 체질이었던지라 부모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특히 어머니 스겐인이 노골적으로 그를 편애하였다고 한다. 가문의 대를 이은 히데타다도 3남이었듯이 장유유서의 원칙이 없었던 때인지라 타케치요 지지파와 쿠니마츠 지지파 간의 세력 다툼이 있었으나, 이에미츠의 유모인 카스가노 츠보네가 당시 오고쇼[2] 였던 이에야스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한 것을 계기로 장자인 타케치요가 후계자가 되었다.
할아버지 이에야스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이에미츠가 먼저, 타다나가는 그 다음이라는 식의 발언을 종종 함으로써 아예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선을 그었으며, 아버지인 히데타다 역시 이에야스 사후에도 후계자에 관해서 별다른 언급 없이 이에야스의 뜻에 따랐다.
2. 생애
1616년(또는 1618년)에 코후(甲府 ; 현 야마나시 현) 23만 8천석의 영지를 받았으며, 이후 시나노의 코모로(小諸)의 영지를 더하였으나, 본인은 코후에 간 적이 없고, 가신들에게 정사를 일임하였다.
1620년에 형과 함께 관례를 올리고 이름을 타다나가(忠長)라 하였다.[3] 1623년, 형의 쇼군 취임과 함께 츄나곤(中納言 ; 종삼위 상당)으로 임관, 이듬해에는 스루가(駿河)와 토토우미(遠江)의 일부(카케가와)를 영지에 더하여 총 55만석의 거대한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단, 이때 코모로의 영지는 반납하였다). 1627년에는 다이나곤(大納言 : 정삼위 상당)으로 승진하였고, 고미즈노오 덴노의 행행에도 참가하였다.
1631년, 가신 중 한 명(또는 여러 명)을 이유 없이 베었다는 죄목으로 코후에 칩거를 명령받았고, 이듬해 아버지인 히데타다가 위독할 때에도 알현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후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죄목[4] 으로 가이에키되어 전 영지를 몰수당하는 한편 코즈케(上野) 타카사키(高崎)에 유폐되었고, 이듬해 할복형식으로 자살하였다. 향년 28세.[5]
영지 몰수의 표면상의 이유는 스루가성 진검시합 등으로 인한 품행상의 문제도 들어가나 이는 부가적인 문제였고 실제로 적용된 공식 죄목은 이에야스가 정해둔 무가제법도 위반이었으며 이는 바쿠후의 권위 강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다나가는 에도와 슨푸(駿府 ; 타다나가의 거성)[6] 에 쇼군이 두 분 계신다는 평이 돌 정도로 오만한 태도를 취해 왔으며, 스루가 다이나곤으로 있는 동안 막부의 명을 어기고 검술시합을 연 바 그 수가 20명을 넘었기에[7] 같은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한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忠輝 ; 히데타다의 이복동생)나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 ; 유키 히데야스의 아들. 히데타다의 조카) 등의 전례에 비추어 처리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이외에도 산킨코타이 등 쇼군과 바쿠후의 권위를 높이는 정책을 많이 시행했다. 실제로 바쿠후는 집권 초기 사후양자 등 정말 별의별 사소한 걸 갖고 가이에키를 시켰다.
단, 영내 백성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거나 가신들로 하여금 진검 승부를 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우울증 환자였다고 한다.
3.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시구루이에서는 어전시합을 열었던 장본인[8] . 쇼군의 친동생이라는 높으신 분 위치인지라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영주. 꽤나 취향이 엽기적이라 피를 보는 것을 즐겨하는데, 심지어 신하가 진검시합을 막으려 할복하고 내장을 꺼내보이며 간언하는 순간에도 아무 동요 없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를 이용해 젋은 여자들을 중심으로 모든 인간을 장난감 취급한다. 타다나가가 여자 이름을 입에 올리면 어김없이 그 여자는 침소로 불려가는데, 구타 정도는 양호한 축이고 아무 이유 없이 목졸라 죽이거나 포박한 뒤 살해당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등 일단 그의 침소에 들면 사지 멀쩡하게 나오는 경우가 없다고 악명이 높다. 그래도 성욕은 있는지 후나키 치카의 등짝을 매질하고 흐르는 피를 보자 후배위를 한다.
원래는 형보다 이쪽이 더 용모와 능력이 출중했다. 검술도 뛰어나서 자신의 일도류 검술 사범의 경지를 뛰어넘었고, 본인을 시해하려 한 신하를 베어냈을 정도. 하지만 모친 오에요의 편애,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줄을 대기 시작한 다이묘들과 가신들을 겪으면서 마음 속에 자만심과 아랫사람에 대한 포악함이 깃든다. 결국, 장유유서를 깨면 안된다는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친형이 쇼군이 되자 좌절감까지 겹쳐 광기가 극도로 악화 되었다.
봉건사회의 완성형은 소수의 사디스트와 다수의 마조히스트로 구성된다는 작가의 해설에서 소수 사디스트를 상징하는 인물로, 본래 자기 것이 되었을 쇼군 직위를 돌려 받겠다는 생각으로, 은근히 역모를 마음에 두고 있다. 어전시합도 본인의 피에 대한 욕망을 채우고, 자신의 야망에 동조하는 다이묘들을 불러 모아 충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도 띄고 있다. 하지만 타다나가의 의중은 야규 무네노리를 비롯한 에도 쇼군가와 다테 마사무네를 비롯한 대다수 다이묘들에게 이미 파악 당한 상태였고, 결국 진검 승부시합을 열었던 게 화근이 되어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할복하게 된다.
인법첩 시리즈에서는 줄곧 언급만 될 뿐 직접 등장하는 건 야마다 후타로가 직접 쓴 것이 아닌 외전격 오우카 인법첩 뿐이다. 마계전생에서 멋대로 상경해 야규 영지에 머문 기슈 다이나곤 도쿠가와 요리노부(이에야스의 10번째 아들이자 전 슨푸성주였던 이로서 당시 이에미츠보다 윗세대에 해당되는 몇 안되는 다이묘였다)에게 타다나가의 예를 들며 발길을 돌리라 은근슬쩍 위협을 가한다.
[1] 어머니 스겐인 소생의 적출로는 2남. 사실 히데타다의 장남인 나가마루는 시녀에게서 태어난 서자였던데다가 2살때, 즉 타다나가의 친형인 이에미츠도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다.[2] 은퇴한 쇼군으로 상왕과 같은 존재.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모두 쇼군직을 넘겨주고 오고쇼로 있으면서도 실권을 쥐고 있었다.[3] 타다(忠)는 히데타다에서의 타다를 나가(長)는 오다 노부나가에서 나가를 따온 것.[4] 가토 기요마사의 손자 가토 다다히로는 타다나가 퍼뜨렸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동요, 연루되어 나중에 구마모토번은 호소카와 씨가 차지하고 본인과 일부 가신들은 당시 데와 국 마루오카 번 1만석 소(小)다이묘로 추락하게 된다.[5] 그것도 고우의 언니인 죠코인 눈치가 있었어서 죽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더불어 그 소식듣고 충격에 빠져 이에미츠는 한동안 병석에 누었다고 한다.[6] 이에야스가 쇼군을 내려놓고 오고쇼로 있으면서 거처했던 성이기도 함.[7] 무가제법도에서 그가 걸린 부분이 이것이다. 영자 20만석부터 100만석까지의 대 다이묘들은 참근 교대 이외의 이동에 20명 이상의 무사를 거느리면 안 되었는데 1629년 스루가 성에서 어전시합을 펼칠 때 진검을 든 무사 18명과 철포무사 100여명을 멋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이는 명백히 막부와 쇼군의 권위에 반발하는 것이었기에 에도의 중신들에게 있어서 절대 묵과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8] 원작의 설정은 스루가성 어전시합 항목 참조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