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킨코타이

 

参勤交代制(さんきんこうたいせい(참근교대제)
'''Alternate attendance system'''
1. 개요
2. 예외 사항
3. 영향
4. 한국과의 비교
5. 기타
6. 미디어에서


1. 개요


일본 에도 시대 때 에도 막부에서 시행한 제도. 한국에서는 참근교대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막부는 각 번국의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했는데, 산킨코타이는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제도이다. 공식적으로 이 제도가 자리잡은 것은 에도 막부의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 시기로 1635년 武家諸法度(부케쇼핫토/무가제법도)를 개정하면서(당시 연호인 간에이에서 따온 寛永令(간에이령)이라고 부른다.) 2조에 다이묘들을 매년 여름 4월중에 에도에 머물도록 명령한다.
이 제도에 따라 일본 전역에 있는 다이묘들은 1년을 주기로 수도인 에도와 자신의 영지를 번갈아가며 생활해야 했다. 또한 다이묘의 자녀들은 에도의 저택에서 볼모 생활을 해야 했다. 다이묘 혼자만 오는게 아니라 다이묘의 가신 및 휘하 병력들도 한꺼번에 움직이므로 이 과정에서 이동 및 체류에 들어가는 비용은 적지 않았다. 물론 이는 다이묘 본인의 영지에서 부담해야 했고, 이러한 비용 부담으로 인해 다이묘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는 부수 효과도 있었다. 다만, 후술하듯이 이 행사가 변질되어서 오히려 막부가 산킨코타이 행렬의 형식을 제한하는 경우도 있었다.

2. 예외 사항


이 제도의 목적은 막부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을 통제하는 것이었으므로 막부 안에서 쇼군을 직접 보필하며 활동하는 가신단인 하타모토, 에도 주변에 거점을 두고 막부의 친위 세력으로 활동하는 일부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등은 굳이 교대를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에도 시내에서 거주했다. 또한 일본 입장에선 벽지 중의 벽지이지만 동시에 조선 등 외국과의 외교 및 무역의 중요도가 높은 쓰시마 섬의 소(宗) 가문은 예외로 3년에 1번씩 교대를 하게 했다.

3. 영향


영주들과 가신들 수 천명이 각지에서 1년마다 에도와 본거지를 왕복해야 했으므로 그 과정에서 도로역참이 크게 발달하였고, 도쿄의 인구가 크게 늘었으며, 이를 대상으로 한 상업도 덩달아 발전했다. 또한 지방의 문물이 에도로 모이고, 반대로 에도의 발달한 문물이 각 지방으로 퍼지는 문화 순환효과도 있었다.
참근교대 행렬의 규모와 격식, 수행원들의 숙식 등은 해당 번의 석고에 따라서 최소 규모가 규정되어 있었다. 번의 재정이 열악하다 하여 함부로 규모를 줄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다이묘의 힘을 소모하게 함으로써 견제하려는 막부의 의도가 다분한 정책이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이묘들의 행렬은 곧 해당 번국의 세력을 과시하는 행사의 성격도 가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행렬의 규모가 점점 화려해졌고, 세력이 약한 다이묘도 체면상 무리하게 행렬를 화려하게 꾸며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막부의 재정이 점차 각 번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이게 도가 지나쳐서 번국이 경제적으로 파탄나는 상황을 우려하게 되자, 막부 측에서 행렬의 규모를 제한한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에도 후기가 되면 재정적인 부담을 덜고자 행렬이 간소화되었고, 분큐의 개혁(1862년) 때에는 3년제가 되었다. 금문의 변을 계기로 격년제로 번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막부의 위신은 예전같지 않아 사츠마 번을 비롯해 따르지 않는 번들이 많았고 어느샌가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대정봉환과 함께 산킨코타이는 폐지되었다.

4. 한국과의 비교


한국사에서도 비슷한 제도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 규모와 수준은 확실히 약했다. 신라 시대의 상수리 제도고려 시대의 기인 제도는 지방 세력의 세력자 본인이나 그 자제 가운데 한 명을 순서대로 번갈아가며 수도에서 머물게 하는 제도였다는 점에서, 본인 및 가족과 휘하 가신 및 일부 병력까지 우르르 에도로 데려가야 하는 산킨코타이보다는 훨씬 가벼웠다. 게다가 단순히 머물기만 하면서 체류 비용을 다이묘 본인 영지에서 고스란히 대야 하는 산킨코타이와 달리 상수리 제도 등은 데려온 지방민을 수도의 관청에 부임시켜 행정 업무를 시켰기 때문에,[1] 체류에 필요한 재정적 부담도 더 적었을 것이다. 이는 자기 영지에서는 왕이나 마찬가지인 에도시대 다이묘와, 연고지에서도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을 보좌하는 지위였던 신라나 고려의 지방세력의 지위 차이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시 고려 시대의 사심관 제도는 중앙에 머무르는 지방 유력자에게 지방을 책임지게 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중앙귀족이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양면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도 비슷한 제도가 존재했는데, 바로 경재소이다. 처음에는 지방토호 격인 이(지방 양반, 향리, 재지사족, 실직을 받지 못한 산관)들이 주축이 된 유향소를 대표하기 위해서 한양에 유력자를 파견 거주하는 형태였는데, 이게 가면 갈수록 지역에 연고가 있는 현직중앙관료가 이를 대리하는 양상으로 변한다. 다만 이 제도가 워낙 조선의 중앙집권화 경향과 맞지 않는 제도이고, 무엇보다 중앙에서 지방에 파견한 지방관의 권한과 중복되거나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태종대에 설치와 폐지, 세종대에 다시 설치했다가 이시애의 난에 유향소가 이용되면서 다시 폐지, 성종대에 복설 등 파란만장했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유향소가 사실상 붕괴되고 수령권이 강해지는 과정에서, 유명무실해진 경재소도 같이 없어진다. 즉, 에도시대에 산킨코타이가 한참 시행되기 시작할 때, 한반도에서는 비슷한 제도가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일본과 한반도의 중앙집권화 정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5. 기타


해당 지역(地域)의 다이묘가 지나가면 부근에 있던 백성들은 행렬이 다 지나가는 동안 땅바닥에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서 인사를 해야했다.
예를 들어서 오다와라 번에 속하는 지역이고 해당 번주와 같은 길로 산킨코타이 때문에 지나가던 센다이 번주가 있었다고 가정하자. 오다와라 번주가 지나면 무조건 엎드려서 인사하는 기본이지만 타 지역에서 온 센다이 번주가 지나가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대놓고 무례를 범한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참형에 처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쓰에이 전쟁의 발발 원인이 된 나마무기 사건(1862)이 유명하다.
다만 산파(産婆)[2]와 비각(飛脚)[3]은 위급한 업무를 주로 맡는 직업 특성상 다이묘의 행렬에 멈추지 않고 거슬러갈 수 있었다.
사실 신분제 사회에서 피지배층이 이런 식으로 예를 표하는 건 흔한 일이긴 하다. 조선에서는 왕이나 고위 관리가 행차를 하더라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엎드릴 필요는 없었다. 정조대왕 능행차를 그린 그림에도 백성들이 왕의 행차를 편하게 앉거나 서서 구경하는 것이 그려져 있다. 다만 피맛골 등이 있었던 것을 보면 조선에도 이러한 풍습이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새로 총리가 취임하면 가장 먼저 미국을 찾는 것을 산킨코타이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다.

6. 미디어에서


  • 초고속! 참근교대 & 초고속! 참근교대 리턴즈
  • 츠라츠라 와라지 - 오노 나츠메의 만화.
  • 이치로(一路) - NHK 시대극 드라마
  • 13인의 자객 - 최종 보스의 모델이 실제 역사에서 참근교대 중에 무례를 범한 어린이를 베어 죽인 사건을 일으켜서 이에 분노한 오와리 번이 자신의 영지를 통과하는 것을 거부한 일이 있다.
  • Europa Universalis IV - 막부 국가 기능 중의 하나로 전통성 20을 소모하여 외교적 평판을 3 증가시킨다. 외교적 평판에 따라 다이묘 합병 속도가 달라지니 가장 쓸만한 기능이다.

[1] 원 간섭기 등 특수한 경우에는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고 한다.[2] 산부인과 의사. 옛날에는 여성의 출산은 여성 의사가 맡았다.[3] 파발꾼: 택배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