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가노 츠보네
春日局
1579 ~ 1643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떠받치는 세 기둥[1]
에도 시대 초기의 인물로, 본명은 사이토 후쿠(齋藤福).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후 에도 막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한 여걸로 평가받는다.
1579년 덴쇼 7년, 사이토 도시미츠의 딸로 태어났다. 친가인 사이토 가문은 미노 지방의 명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중신이었던 탓에, 혼노지의 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토벌당한 후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후에 외할머니의 친가인 교토의 산죠니시(三条西) 가에 거두어져 다도와 같은 교토 공가(公家)귀족의 소양을 익혔고, 그 후, 외삼촌 이나바 시게미치의 양녀가 되며 외가쪽 친척인 이나바 마사나리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다.[2] 남편 이나바 마사나리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가신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때 다른 히데아키 가신인 히라오카 요리카츠와 함께 동군 다이묘들과의 접촉을 수행, 히데아키의 동군으로의 배신이 수월하게 이루어지게 하였던 인물이었다고 알려져있었으나, 최근 그가 히데아키 가신단에 참여한 시점이 세키가하라 이후일 가능성이 제기된 상태다. 후쿠의 교양이 감안되어 1604년 게이초 9년, 남편이랑 이혼한 이후 에도로 가서 훗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되는 다케치요의 유모로 발탁되었다.
다케치요의 어머니인 미다이도코로 오에요가 차남인 쿠니마츠(훗날 도쿠가와 타다나가)를 편애한 탓에 다케치요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직접 슨푸에 있는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찾아가 다케치요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승인받는 등 이에미츠의 쇼군 등극에 큰 공을 세웠다.
1623년 겐나 9년, 이에미츠가 쇼군이 된 후 오오쿠의 총책임자로서[3]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카스가노 츠보네가 정리한 이때의 오오쿠는 사치를 멀리하고 무가 특유의 검소함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후 칸에이 6년, 즉 1629년에 카스가노 츠보네는 이에미츠의 천연두 치유를 기원하기 위해 교토로 이세 신궁 참배 여행을 가게 된다. 그러나 무가인 사이토가의 딸이라는 신분으로는 조정에 들어갈 수 없어 사망한 양아버지의 아들과 의남매가 되어 산죠니시 가문의 딸이라는 자격으로 교토 조정에 입궐, 고미즈노오 덴노를 알현하고 종3위의 품계와 '카스가노 츠보네'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4] 츠보네(局)는 그녀가 덴노를 알현할 때 신분 없는 몸으로 궁에 입궐할 수 없었기에 받은 관직인데, 고미즈노오 덴노는 히데타다의 딸이자 이에미츠의 동생인 카즈코와의 정략결혼 문제에 막부의 압박으로 인해 총애했던 후궁인 요츠츠지 요츠코(四辻与津子)를 자식들과 함께 출궁시킨 일과 더불어 품계도 없는 무가 출신 여자를 덴노에게 알현시켜 권위를 실추시킨 막부의 행동을 참지 못해 동년 11월 8일에 출가하고 양위한다.[5]
동생만 편애했던 기 센 어머니에게 질려 여성혐오증이 생겼던 이에미츠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염려하여, 조카인 오후리를 소개시켜주는것 부터 시작해, 측실이 되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 스카웃해 오오쿠로 들여왔다. 카스가노 츠보네가 여러쪽으로 데려왔다고 하는 측실들은 오라쿠(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생모)[6] , 오나츠(도쿠가와 이에노부의 할머니), 오만노카타, 오타마(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생모) 등이 있다.
그러나 이에미츠의 직계는 증손에서 끊기고 오오쿠가 결국 막부의 돈 긁어먹는 골칫거리[7] 가 된걸 생각하면 카스가노 츠보네의 후사 구하기는 결국 희대의 개삽질이 되었다.
1643년 칸에이 20년, 향년 64세로 숨을 거둔다. 그녀가 죽었을 때 이에미츠는 친부모가 죽었을 때 이상으로 애통해 했다고 한다.
사세구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1579 ~ 1643
1. 개요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떠받치는 세 기둥[1]
에도 시대 초기의 인물로, 본명은 사이토 후쿠(齋藤福).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후 에도 막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한 여걸로 평가받는다.
2. 생애
1579년 덴쇼 7년, 사이토 도시미츠의 딸로 태어났다. 친가인 사이토 가문은 미노 지방의 명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중신이었던 탓에, 혼노지의 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토벌당한 후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후에 외할머니의 친가인 교토의 산죠니시(三条西) 가에 거두어져 다도와 같은 교토 공가(公家)귀족의 소양을 익혔고, 그 후, 외삼촌 이나바 시게미치의 양녀가 되며 외가쪽 친척인 이나바 마사나리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다.[2] 남편 이나바 마사나리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가신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때 다른 히데아키 가신인 히라오카 요리카츠와 함께 동군 다이묘들과의 접촉을 수행, 히데아키의 동군으로의 배신이 수월하게 이루어지게 하였던 인물이었다고 알려져있었으나, 최근 그가 히데아키 가신단에 참여한 시점이 세키가하라 이후일 가능성이 제기된 상태다. 후쿠의 교양이 감안되어 1604년 게이초 9년, 남편이랑 이혼한 이후 에도로 가서 훗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되는 다케치요의 유모로 발탁되었다.
다케치요의 어머니인 미다이도코로 오에요가 차남인 쿠니마츠(훗날 도쿠가와 타다나가)를 편애한 탓에 다케치요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직접 슨푸에 있는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찾아가 다케치요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승인받는 등 이에미츠의 쇼군 등극에 큰 공을 세웠다.
1623년 겐나 9년, 이에미츠가 쇼군이 된 후 오오쿠의 총책임자로서[3]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카스가노 츠보네가 정리한 이때의 오오쿠는 사치를 멀리하고 무가 특유의 검소함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후 칸에이 6년, 즉 1629년에 카스가노 츠보네는 이에미츠의 천연두 치유를 기원하기 위해 교토로 이세 신궁 참배 여행을 가게 된다. 그러나 무가인 사이토가의 딸이라는 신분으로는 조정에 들어갈 수 없어 사망한 양아버지의 아들과 의남매가 되어 산죠니시 가문의 딸이라는 자격으로 교토 조정에 입궐, 고미즈노오 덴노를 알현하고 종3위의 품계와 '카스가노 츠보네'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4] 츠보네(局)는 그녀가 덴노를 알현할 때 신분 없는 몸으로 궁에 입궐할 수 없었기에 받은 관직인데, 고미즈노오 덴노는 히데타다의 딸이자 이에미츠의 동생인 카즈코와의 정략결혼 문제에 막부의 압박으로 인해 총애했던 후궁인 요츠츠지 요츠코(四辻与津子)를 자식들과 함께 출궁시킨 일과 더불어 품계도 없는 무가 출신 여자를 덴노에게 알현시켜 권위를 실추시킨 막부의 행동을 참지 못해 동년 11월 8일에 출가하고 양위한다.[5]
동생만 편애했던 기 센 어머니에게 질려 여성혐오증이 생겼던 이에미츠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염려하여, 조카인 오후리를 소개시켜주는것 부터 시작해, 측실이 되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 스카웃해 오오쿠로 들여왔다. 카스가노 츠보네가 여러쪽으로 데려왔다고 하는 측실들은 오라쿠(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생모)[6] , 오나츠(도쿠가와 이에노부의 할머니), 오만노카타, 오타마(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생모) 등이 있다.
그러나 이에미츠의 직계는 증손에서 끊기고 오오쿠가 결국 막부의 돈 긁어먹는 골칫거리[7] 가 된걸 생각하면 카스가노 츠보네의 후사 구하기는 결국 희대의 개삽질이 되었다.
1643년 칸에이 20년, 향년 64세로 숨을 거둔다. 그녀가 죽었을 때 이에미츠는 친부모가 죽었을 때 이상으로 애통해 했다고 한다.
사세구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서(西)로 들어가는 달을 꾀어 불법(佛法)의 길을 따라 오늘이야말로 속세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3. 기타
- 이나바 마사나리와의 사이에서 마사카츠, 마사요시, 마사토시 세 아들을 낳았고 이 중 마사카츠는 이에미츠를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 어릴적 지병을 앓아왔던 이에미츠의 식욕을 돋구기 위해 칠색반(七色飯)을 지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가운데 중 하나는 이에미츠의 입에 맞을 것이라 생각해 준비한 이 일곱밥의 주 메뉴들은 각각 나물밥, 보리밥, 조밥, 팥밥, 지은 밥을 다시 찐 밥과 말린 밥, 그리고 으깬 쌀로 지은 밥이다. 요시나가 후미의 오오쿠에서도 카스가노 츠보네가 오오쿠를 설립한 이유및 계기로 이 설을 차용했다.
- 한낱 유모의 신분으로 당대 오고쇼였던 이에야스를 알현해 의견을 올렸다는 점에서, 그와의 관계에 대한 추문이 있었다. 이에미츠가 카스가노와 이에야스 사이의 아들이라는 썰도 있을 정도.
4. 대중메체
- 창작물에서는 쇼군가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스겐인과의 암투가 자주 부각되는데, 2004년도 드라마 '오오쿠 제1장'에서 그것이 잘 드러난다. 마츠시타 유키가 연기했다.
- 타임보칸 24에서 그녀의 에피소드가 다뤄졌는데, 일본의 미디어 믹스 소재로는 꽤나 레어한 케이스.
- Fate/Grand Order의 도쿠가와 회천 미궁 오오쿠 이벤트에서 등장했다. 다만 강제 소환되던 중 같이 끌려가던 파르바티가 영기를 나눠 준 덕에 파르바티와 츠보네 둘의 인격이 공존하는 상태. 외형은 파르바티(마토 사쿠라)에 기모노를 입힌 형태로 자세한 행적은 카스가노 츠보네(Fate 시리즈) 참조
- 바질리스크 코우가인법첩에서는 이에미츠의 유모로 들어가기 전에 남편이 자기 몰래 첩을 두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까지 낳은 걸 알고는 남편이 외출했을 때에 모자를 몰래 불러들여 죽인 후, 아무렇지도 않게 친정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요시나가 후미의 오오쿠에서는 남편의 첩 오리키가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마다 마사카츠를 때리는 걸 알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그녀를 죽이고 이를 계기로 스스로 남편에게 이혼을 요청하고 이에미츠의 유모로 들어간 걸로 묘사된다.
[1] 나머지 둘은 야규 무네노리, 마츠다이라 노부츠나.[2] 마사나리에게 그녀는 후처이며 전처인 이나바 시게미치의 딸과의 사이에서 마사츠구와 만이라는 1남 1녀가 있었다.[3] 그 이전에도 오오쿠는 존재했으나, 이 때를 기점으로 체계가 잡히고 정비된다.[4] 비슷한 케이스로, 먼 훗날인 1795년에 김만덕이 정조를 알현할 때 명예직인 의녀반수 벼슬을 받았다.[5] 막부에 의해 요츠코와 같이 쫒겨난 자식들 중, 첫째 공주인 분치여왕(文智女王)의 딸이 타카츠카사 노부코(鷹司信子)인데, 이후 노부코는 아이러니하게도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정실로 들어가게된다.[6] 이에미츠가 데려왔다는 이야기도 있다.[7]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오오쿠 초기에는 무가식 검소와 가풍을 강조했었지만 카스가노 츠보네 사후 대행자로 오만노카타가 총책임자가 되자 가풍을 교토 귀족 풍으로 바꿔놓았던 탓도 있었다.[스포일러] 그녀가 작중 텐카이의 정체의 가신의 딸이었던 것의 영향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