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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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叔蕃
(1373 ~ 1440)
1. 소개
2. 초기 생애
3. 태종의 일등공신
4. 안하무인 권신
5. 몰락
6. 말년
7. 평가
8. 창작물


1. 소개


조선 초기의 관료. 본관은 경기도 안성(安城). 자는 백응(伯應), 호는 운정(芸亭), 시호는 충숙(忠肅).
무인정사에 참여했다는 것 때문에 이숙번을 무관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숙번은 조선 최초의 문과 급제자로 엄연히 문관이다. 그의 주군 태종도 무인정사를 일으킨 것 때문에 무골 이미지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 문과 급제한 문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과연 그 주군에 그 부하...

2. 초기 생애


이숙번의 아버지는 이경이고 어머니는 영양 남씨로 남휘주의 딸이다. 이경과 결혼하기 전 윤공의 아내였던 남씨는 윤공이 죽은 후 두 아들 윤자량과 윤자당을 데리고 이경에게 재가하여 이숙번을 낳았다. 즉, 윤자량과 윤자당은 이숙번의 이부형이다. 이숙번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기억력이 비상했다고 한다.
성현의 수필집 용재총화에 따르면 이런 전설이 있다. 이숙번이 태어나기 전 이숙번의 이부형 윤자당이 7살 때 어머니 남씨를 따라 무당집에 가서 운명을 물어보았더니 무당은 윤자당이 귀한 상인데 반드시 동생의 힘 때문에 귀함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남씨가 과부의 아들이 어찌 동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자 무당은 남씨가 곧 재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정말로 남씨는 이경에게 재가하여 이숙번을 낳았다[1].

3. 태종의 일등공신


1393년 20살에 조선 최초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지안산군사, 즉 안산군의 지사를 지내는 중에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방원을 도와 경복궁으로 병력을 출동시켰고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주선으로 맨 처음에 이방원을 만났을 때 자신을 돕겠냐는 이방원에게 "그런 일쯤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라면서 패기있는 대답을 하여 이방원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고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후에도 이방원의 충실한 수족으로서 2차 왕자의 난조사의의 난 때 진압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특히 조사의의 난 당시에는 진압군의 주력을 직접 지휘해 반란을 진압했다.

4. 안하무인 권신


이방원이 왕이 되어 태종이 된 후로 이숙번은 거의 안하무인으로 권세를 누렸다. 사실 태종과 각별한 사이였으니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이숙번이 얼마나 안하무인이었던지 실록에 의하면 이숙번의 집이 돈의문(서대문) 안에 있었는데 한양의 큰 성문이니 당연히 사람들이 오가고 우마 소리가 들리는게 인지상정이지만 이숙번은 시끄럽다고 하며 서대문을 틀어막아버렸다. 조선 왕조 역사상 많은 권신이 있었으나 정상적으로 다니는 성의 대문을 틀어막은 건 이숙번이 거의 유일무이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 이 때문에 한양의 백성들은 이숙번의 집을 "색문가"(성문을 막아버린 집)이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했다고 한다.[2]
백성들의 원성에 조정에서 새로 성문을 만들어서 불편을 덜어주려고 했는데 어떻게 계획을 짰는지 하필이면 그 문으로 가는 길도 이숙번의 집 앞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자 이숙번은 친절하게도 "인덕궁 앞에 작은 동네가 있는데 거기가 길을 내고 문을 세우기에 적합하다"라고 하자 조정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인덕궁은 상왕 정종이 거처하는 궁이었다. 아무리 정종이 바지사장이라지만 이성계의 사실상 장남이자 상왕이자 현 국왕의 형이었다. 하지만 내 집 앞이 조용할 수 있다면 상왕 집 앞이 시끄러워도 상관없어라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단순히 예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집 앞에 문 놓기 싫다고 상왕 집 문 앞으로 바꿀 정도로 힘이 셌다는 것이다.《태종실록》 권25 13년 6월 19일 병인 2번째 기사, 《세종실록》 권40 10년 윤4월 24일 을사 3번째 기사
그리고 좌찬성으로 있을 때 태종이 형이자 상왕인 정종에게 문안 인사드리고 배웅하러 갔는데 이숙번이 하륜과 함께 의정부 관리들과 풍악을 울리는 등 무례한 행동을 하자 사간들이 이건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벌을 주라 간청하자 태종이 만류하였다. 이에 화가 난 이숙번은 하륜과 함께 자신들을 탄핵한 사간들을 벌주라고 임금께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어이없게도 임금의 잘못을 직언하는 것은 올바르고 자신들의 잘못을 탄핵하는 것에 대해 벌하라는 것은 이중잣대나 다름없어서 정승이였던 성석린남재가 이건 너무 어이없다 하여 동참을 거절하자 그날밤 성석린의 집과 남재의 집에 방문하여 반협박적으로 상소장에 연명할 것을 재촉하였다. 오늘날로 보면 부총리급이 총리급을 호령할 정도의 권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숙번의 행패와 패악질이 1~2가지가 아니고 태종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태종은 그럴 때마다 실드를 쳐주면서 이숙번을 비호했다.[3]

5. 몰락


맹인 중이 사대부 가의 과부간통한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온 조정이 목을 치자는 쪽으로 몰아갔지만 이숙번은 법에 따르면 곤장을 쳐야 한다며 살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종실록》 권31 16년 2월 25일 무자 2번째 기사
하지만 사안이 충격적이다 보니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아서 둘 다 참수형에 처해진다. 이에 불만이 쌓인 이숙번은 궁궐에 나오지 않고 태종의 부름조차 무시하여 태종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렸다. 거기에 세자 이제를 찾아가서 여론에 밀려서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으니 이런 미친 짓이 어디있겠냐며 국정을 비판하다 태종을 간접적으로 까버렸고 이게 태종의 귀에 들어갔다. 《태종실록》 권33 17년 3월 30일 병진 4번째 기사 그리고 한때 자기 밑에 있었던 박은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은근히 불만을 표시했고 이것 역시 태종에게 보고되었다.《태종실록》 권31 16년 6월 4일 갑자 5번째 기사
이 사건을 보면 행패와 패악질을 많이 부린 이숙번이 의외로 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겨 저 2명의 처형에 반대했고 고작 간통가지고 사람을 처형까지하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숙번이 바로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중과 간통한 저 과부를 보고 아들 2명 딸린 몸으로 아버지와 재혼해서 자신을 낳은 자기 어머니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가 결국 1417년 세자 이제가 사고를 치고 근신하던 중에 선공감의 비리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온 구종수 형제가 후일을 도모하려고 양녕대군에게 주색을 제공하면서[4] 비단도 뇌물로 바친 사건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세자가 사고를 쳐서 골치가 아프던 태종에게 이 사건은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고 구종수 형제는 다시 저 머나먼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사실 별일 아닐 수도 있는 사건일 수도 있지만 태종이 이렇게 격노했던 건 세자에게 뇌물을 주고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던 발상 탓이 컸다.
그런데 구종수 형제는 유배를 가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숙번에게 세자에게 말과 활을 보내달라고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가 이게 이숙번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거기에 태종이 가뭄을 걱정하며 여러 대신들이 날마다 재앙을 의논하며 몸 둘 바를 모르고 분주하였으나 이숙번이 병을 이유로 여러 달 궁궐에 나타나지 않았다. 태종이 이숙번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소문이 돌자 대간이 이숙번의 무례와 불충을 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태종이 즉각 이숙번을 지방에 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과거 민씨 형제들과 이거이 부자의 전례를 생각한 대간은 이숙번을 제거해야 한다며 신나게 굿판을 벌였지만 태종은 이숙번이 천성이 거칠어 가끔 무례한 짓을 할 뿐이지 나쁜 놈은 아니라면서도 이숙번을 함양으로 유배를 보내버리곤 죽을 때까지 찾지 않았다.
태종이 자신의 최측근인 이숙번을 유배보낸 것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에서였다는 분석이 많다. 또 중전 민씨의 남동생들을 모조리 죽인 태종이라 최측근까지도 내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역시 말썽이 많았지만 세자와 엮이지 않았고 나이도 많았던 늙은 하륜과는 달리 이숙번은 40대의 창창한 나이였고 태종이 죽은 이후 세자를 가지고 놀 소지가 있었기에 그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태종은 죽기 전 세종에게 이숙번은 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유배를 풀어주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승하했다고 한다. 세종은 부왕의 말씀을 충실하게 받들어서 이숙번의 유배를 절대 풀어주지 않았다.

6. 말년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만들 당시(세종 20년), 이숙번이 태종의 최측근이라 태종의 예전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세종은 자료 수집차 잠시 이숙번의 유배를 풀어서 이숙번을 한양으로 올라오게 했다고 한다. 왕자의 난 당시의 기록이 부정확하고 세종 자신이 아는 일도 많이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 1차와 2차 왕자의 난 모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숙번이기에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이는 최소한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5] 그가 하는 일은 매일 경연청으로 출근해서 그 당시 일을 구술하는 것이었다. 이숙번은 그때도 전혀 예전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유배에서 풀려난 사람인 것처럼 안하무인으로 굴었다고 한다. 능력 자체는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은근히 이숙번은 세종이 자신을 다시 등용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지만 딱 그걸로 끝이었다.
세종은 용비어천가 자료 수집이 끝나자 이숙번의 함양 유배 조치를 풀어 이숙번을 수도 근처인 경기도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조치해줬으나 아버지인 태종의 유언을 잊지 않고 그를 끝끝내 정계로 복귀시켜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세종의 신하들도 인재풀이 넘쳤다. 이숙번은 겨우 해봤자 아버지인 태종의 신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유능해도 현 지도자가 신선한 인재를 뽑지 전임자의 측근을 뽑을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숙번은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더니 고작 2년 후 병으로 사망했다(세종 22년). 죽기 전까지 함양 유배지로 돌려보내야 된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세종은 "이숙번이 쟤가 좀 아파서 그럼."하면서 실드를 좀 쳐주긴 했다.
사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숭되었고 '충숙'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이숙번의 아내는 서원부부인 청주 정씨인데 이숙번의 자식들과 자손들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그의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재가녀의 자손의 관직 진출이 금지된 조선이었으니 재가녀의 아들 이숙번의 자손들은 관직 진출도 못하고 힘들게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묘는 옛 안산군의 영역인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에 있다. 버스로 간다면 32번, 5602번, 11-3번을 타고 물왕교 정류장에 내려서 산현2동 경로당 방면으로 내려가야 하며 이곳에서 2km 남쪽에 성종의 서녀인 정숙옹주의 묘가 있다.

7. 평가


사실 이숙번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고 조선 최초로 문과 급제할 정도로(그것도 위에 이부형이 2명이나 있는 재가녀의 자식으로서!!!) 능력도 없지는 않았던 인물이었으나 스스로 태종의 최측근이라고 자부하면서 오만 방자하게 굴었던 것이 결국 남은 일평생 유배지에서 살다가 죽는 원인이 되었다. 솔직히 태종은 방간을 빼면 동복 형제들끼리 사이는 좋았던 바, 아무리 바지사장이래도 자신의 동복 형인 정종한테 결례를 범한 이숙번을 좋게 여겼을 리 없다. 다만 정종이 워낙 세력이 없고, 상왕인 정종이 세력이 세져봐야 자신의 입장에서 별로 좋을 게 없으므로 그냥 넘어갔지만, 자신의 아들한테 독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게 아들바보인 태종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사실 하륜과 달리 나이가 창창한 40대인 것도 있었다. 그럼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젊어서 경험이 부족한 새 임금을 쥐고 휘두를 수 있는 노회한 신하 포지션이 되기에 딱 충분했던 것. 이숙번의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면 태종이 그런 걱정을 안하는 게 이상한 것이다. 같은 태종의 최측근이자 모사였던 하륜이 뇌물을 받아먹으면 먹었지 미래권력은 건드리지 않아 무탈하게 영화를 누린 점을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인생무상이라 할 만하다. 하륜은 미래권력에 대해 아예 안 건드린 건 아니다만, 태종의 경고를 듣고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거기에 어차피 나이가 많아 미래권력인 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면 이미 수명이 다했을게 뻔했던 지라 태종이 더 건드리지 않은 것도 있었다. 실제로 태종보다 먼저 사망했다.
태종의 후계자인 세종은 이숙번이 안하무인격으로 권력을 휘두르기는 했어도 '반역'이나 '불충'을 꾀한 적은 없지만 태종이 끝내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위에 언급된 것처럼 정계로 복귀시켜주지는 않았다. 사실 세종의 치세에서 이숙번 같은 타입의 신하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법. 다음은 세종이 이숙번을 평가한 말이다. 그런데 세종은 하륜에 대해서는 이숙번에 비해 평가를 매우 짜게 주었다. 하륜의 말년을 보면 늙어서 판단력이 떨어졌는지 말실수를 여러 번 해서 태종에게서 경고를 여러 번 받았고 탐욕이 매우 컸는데, 세종은 전성기 시기의 하륜은 본 적 없고 이런 삽질+탐욕꾼 모습의 하륜밖에 모르기에 세종이 느끼는 인상에서는 평가가 박해진 걸지도 모른다.

"숙번이 광패하고 거친 성격에 상감의 총애를 믿는 마음이 있어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례하여 선왕의 노여움을 산 것이지, 불충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께서 태상왕(太上王)이 되어서 황희 등을 용서하실 때에도 말씀하시기를, '숙번의 공이 매우 크다. 내가 다시 등용하고자 하나, 그러나 그 죄가 큰 까닭으로 실행하지 못하겠다' 하시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공(功)과 죄가 서로 비긴다.', '비록 그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 덮어 준다.' 하였다. 한(漢)나라 양혼(楊惲)이 재상의 아들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도하여서 원망하는 말이 있게 되자 죽이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로써 이것을 본다면 양혼의 죽음이 진실로 옳은 것이나, 선유(先儒)들은 죽이는 것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 이미 등용하시지 아니하신 것을 내가 어찌 다시 등용할 마음이 있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 12월 7일


8. 창작물


굉장히 거침없고 괄괄한 성격으로 나온다. 태종(이정길 분) 등극 이후 태종이 "살인만 아니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한 말을 믿고, 정말 사람을 죽이지만 않을 뿐 이외의 온갖 포악한 짓을 일삼다가(...) 양위를 앞둔 태종에게 유배를 명받았다. 이 때도 열받쳐서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렸다. 후속작인 《조선왕조 500년 - 2부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김희라가 분했으며 이 땐 두 번 정도 단역으로 나왔다. 1회에서 태종의 양위 소식을 듣고 누가 귀양을 풀어주냐며 흥분하고, 마지막회(28회)에서 《용비어천가》를 만들 당시 자료 수집을 위해 잠시 상경했는데, 이 때도 그 본성 어디 안간다고 신하들 앞에서 마치 자기가 윗 사람인 것 마냥 예의없이 굴었다.
그는 이숙번을 연기했을 당시 시간이 나면 이숙번의 묘를 찾았다고 한다. 작중 행보는 이숙번(용의 눈물) 참고.
여기선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공신 버프+왕의 신임을 받아 안하무인의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충녕대군(김상경 분) 문제로 고민하는 태종(김영철 분)을 찾아가 대놓고 어사주(술)나 한잔 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신하라는 놈이 말법 한 번 공손하다?"하면서도 다음 컷에선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태종의 반응을 보면 영락없는 형님/아우 사이이다. 술상에서도 강상인(정흥채 분)을 호위로 보내는 대신 충녕대군을 원지로 보내라고 직언을 한다. 《용의 눈물》에서 지략가적인 이미지도 두드러졌던 것에 비하면 여기서는 다혈질적인 면모만 부각되었다. 이후 세자인 양녕대군(박상민 분)과 너무 가깝게 지낸 나머지 세자의 소원인 요동 정벌을 위해 병력까지 제공[6]하다가 태종에게 숙청당한다. 이때 태종과 마지막으로 술자리를 한 후 쫒겨나는 장면이 나름대로 명장면이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해석하기를 탐욕스럽기는 이숙번에 밀리지 않았던 하륜은 끝까지 남고 이숙번만 쫓겨난 이유는 '하륜이야 이미 늙어서 다음 왕이 즉위할 때쯤이면 이미 죽어있을 테니 걱정 없는데, 이숙번은 아직 젊기 때문에 세자를 갖고 놀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 이야기는 앞서 사극 《용의 눈물》에서 이숙번의 입을 빌려 이미 등장했던 해석이다.
이숙번(정도전) 문서 참고. 드라마 거의 끝인 45화부터 등장하며, 배우 인터뷰에 의하면 작중 이지란으로 등장하는 선동혁에게 이숙번 연기에 대해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보답(?)인지 6월 15일 방송분에서 배우개그가 나왔다. 이지란과 이숙번이 만나는 장면에서 《용의 눈물》에서 이숙번을 연기했던 선동혁이 '숙번, 숙번이? 많이 듣던 이름인데?' 라고 한다.
다만 주인공 육룡에 맞춰져서인지 정말 조연급으로 역할이 작다. 무인정사 장면을 제외하면 정말 적게 나온다. 마지막에 나온 장면은 태종(유아인 분)이 민씨 형제들을 죽이고 원경왕후가 태종의 집무실로 들어올 때 잠깐 비춘다. 원경왕후(공승연 분)가 신하들을 다 나가라고 해서 하륜(조희봉 분)과 같이 나가고 이후엔 안 나온다.
[1] 즉 이숙번은 재가녀의 자식으로 고위직까지 진출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섬겼던 주군 태종은 재가 금지법을 시행했고, 이후 재가녀의 자손은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다.[2] 풍수가 최양선돈의문, 창의문, 숙정문의 터가 좋지 않다고 해서 세트로 폐쇄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 결정 과정에 이숙번이 관련된 것은 사실인 듯 하다.[3] 그러나 이때 감싸준 건 아직 이숙번의 능력이 필요해서였지 자기 형이자 상왕 정종에게 오만불손하게 군 걸 좋게 봤을 리 없다. 훗날 이숙번을 숙청하고 난 후 세종에게 절대 이숙번을 복귀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정도면 뇌물 사건도 그렇고 왕권 강화에 열을 올린 태종으로서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쩌면 이숙번 같은 재가녀의 자손의 관직 진출을 막아버린 서얼금고법의 제정에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4] 이때 구종수 형제는 세자궁의 담을 넘어서 들어가서 세자에게 주색향연을 베풀었다고 한다.[5] 태종 이방원 본인이나 하륜, 이거이와 이저 부자, 조영무, 민무구민무질 형제 등 다른 핵심 인물들은 모두 죽은 후였다.[6] 여담으로 이 행동에 제대로 열받은 황희(김갑수 분)는 이숙번의 멱살을 잡고 폭언을 한다(...). "군사 수천을 네 마음대로 움직여? 그게 병판이란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