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제
1. 제원
2. 최초의 후장식 볼트액션 라이플
Zündnadelgewehr Dreyse(췬트나델게베어 드라이제)[1]
프로이센의 기술자 요한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Johann Nikolaus von Dreyse)가 1836년 개발한 여러 가지로 혁신적인 소총으로 장약+뇌관+탄환을 하나로 묶은 종이 탄피를 사용하고 뒤로 장전하는 최초의 볼트액션 소총이었다. 사실 최초의 군용 후장식 소총은 영국의 퍼거슨 소총이지만, 여러 가지 단점 때문에 대량 사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3. 후장식 총기로서의 이점
(Forgotten Weapons의 설명 영상.)
이전의 전장식 소총은 일정한 양의 흑색화약을 부어 넣고 그 위로 탄환이 총신 안에 꽉 물리게 꼬질대로 쑤셔 넣어야 했다. 무엇보다 전장식이기에 서있거나 무릎을 꿇은 상태 외에는 장전이 불가했으며 때때로 흑색화약을 쏟아버리거나 미처 꼬질대를 제거하지 못하고 총신 안에 집어넣은 상태로 발사하는 경우[2] 도 종종 있었으며 30발 이상 발사하면 부싯돌을 갈아줘야만 했다.[3] 게다가 아무리 숙련되어도 1분 안에 1~2발 이상을 발사했다면 상당히 빠른 편에 속할 정도로 느려 미리 장전된 탄환을 발사하고 재장전을 하더라도 최대 분당 2~3발을 넘길 수는 없었다.[4]
그러나 드라이제의 후장식 소총의 종이 탄피는 재장전 시간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후장식이기에 엄폐한 상태나 엎드려 쏴 자세에서도 적을 지향한 상태로 연사 할 수 있었다. 1868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7주 전쟁 당시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후장식 소총을 사용한 프로이센 군이 엎드려 쏴 자세로 분당 5발을 연사 하며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트리아 군을 관광 보냈다.[5][6]
▲로렌츠 라이플과 드라이제 소총의 발사속도 비교(1분 10초부터)[7]
▲ 독일 ZDF에서 제작한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Die Deutschen(독일인들)>에 등장한 드라이제 후장식 소총. 총기의 작동 방식 및 전장식 소총과의 차이점을 잘 알 수 있다. 동영상 후반부에 내레이터는 전쟁 마지막 날에 오스트리아군은 15,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으나, 프로이센 군은 불과 2,000여 명만 전사했다고 설명한다.[8]
그리고 현대식 소총이 공이-뇌관-화약의 수순을 거쳐 격발하는 것과는 달리 이 드라이제 소총은 위 동영상처럼 공이-화약-뇌관의 수순을 거쳐서 격발 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즉 바늘이 흑색화약을 거쳐서 탄환의 탄저판(Sabot[9] )에 부착된 뇌관을 때리고 그로 인해서 흑색화약에 점화되어 폭발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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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제 소총과 샤스포 소총의 종이 탄피 구조 비교
위에 보듯이 드라이제 구조적 순서는 Firing Pin (Needle) - Charge - Primer. 바늘 공이가 종이 탄피에 구멍을 뚫고 화약을 지나 Sabot의 홈에 들어 있는 뇌관을 격발한다.
4. 단점
드라이제는 혁신적인 소총이었음에도 전장식에 비하여 밀폐가 잘 되지 않았기에 가스가 새어 나오거나 공이가 부러지는 등의 문제가 자주 발생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노리쇠 폐쇄 기술은 근대 금속 탄피를 사용하는, 프랑스의 그라 소총 같은 단발식 볼트액션 소총의 등장 후부터 도입된 것이다. 이 당시엔 그런 장치를 금속 성형할만한 기술이 없어서 사실상 전장식 총에다가 총알 넣을 구멍 내고 볼트 달린 뚜껑으로 닫았다 열었다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가스가 새는 게 오히려 당연한 정도였다. 그걸 막으려고 고무링에 왁스 바른 명주실까지 동원하였으나, 고무링이나 실이 먼저 녹아내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10][11] 사수가 패킹이 녹아내린지도 모르고 발포하면 사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얼굴에 큰 화상을 입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이 탄피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경우[12] 가 있었기에 비전투 손실이 무시 못할 만큼 커진 프로이센 군은 1870년 벌어진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에서는 보다 향상된 성능의 프랑스식 니들 건인 샤스포 소총과 이들의 신식 기관총에 의해 보병대 보병으로 붙기만 하면 녹아내리게 된다. [13]
또한 탄약의 뇌관이 종이탄피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구조 때문에 사용된 길고 뾰족한 공이는 초기형 기준으로 12발 사격 후 교체해야 할 만큼 수명이 짧았다.[14] 이 문제는 지속적으로 개량되어 1860년대에는 수명이 200발까지 증가했지만 여전히 전투 중 공이의 수명이 다할 위험이 상존했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항상 예비 공이를 소지해야 하며 신속하게 공이 교체를 할 수 있도록 병사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15]
그래도 어쨌든 퍼커션 캡 방식의 전장식 라이플들 보다는 훨씬 이점이 많았기에 보오전쟁 이후 돈 좀 있고 육군 좀 쌔다는 나라들은 후장식 소총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보불전쟁 이후에는 아예 돈이 없는 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열강들이 후장식 소총을 장비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금속 가공기술과 무연화약 제조 기술이 발달하며 더 훌륭한 기술이 자리 잡자마자 프랑스가 그들이 사용하던 종이 탄피 샤스포 소총을 그라 소총이란 금속 탄피 단발식 소총으로 개조하여 종이 탄피식 소총들을 퇴역시켰듯 1871년부터 마우저가 개발한 금속 탄피 사용 소총인 게베어 1871로 대체된다.
[1] Zündnadelgewehr의 정확한 뜻은 바늘 점화식 소총, 즉 영어의 Needle gun이지만 편의상 후장식 소총으로 부른다.[2] 이렇게 되면 어디서 꼬질대를 새로 구해올 때까지는 총을 쓸 수 없게 되어버린다. [3] 나중에 퍼커션 캡이라는 뇌관을 이용하게 되면서 부싯돌 문제는 해결[4] 다만 극후반 미니에 탄과 같은 원추형 탄, 퍼커션 캡, 페이퍼 카트리지를 이용한 전장식 소총은 분당 3발은 안정적으로 사격이 가능했다. 당시의 형태가 전장식 소총의 최종 진화형이었기 때문. [5]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전장식 총기의 최종 진화형인 로렌츠 탄과 강선 총열, 퍼커션 캡 격발 방식의 로렌츠 전장식 머스킷을 장비했다. 강선 머스킷과 미니에 탄보다 진보된 로렌츠 탄을 채용한 총 답게 정확도와 사거리는 준수했으나 역시 보병 화력에 있어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연사력에선 드라이제 소총에 미치지 못했고 이는 결국 전장식 소총 중에선 로렌츠 라이플이 우수한 소총임에도 저평가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열강들은 후장식 소총 장비를 위해 열을 올리게 된다. 연사력 문제는 소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그 후 출현하는 후장식 소총들도 결국 단발식에서 시작했으나 종래는 연발 소총으로 진화하게 된다.[6] 하지만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패한 것은 소총의 질적 차이도 있지만 지휘계통이 혼란해진 오스트리아군의 실책이 컸고, 전쟁 전반에 걸쳐 프로이센은 철도를 비롯한 빠른 군수보급 능력을 보여주었다.[7] 온라인에선 드라이제를 근거없이 까내리는 사람들이 잘못된 주장을 자주 하곤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로렌츠가 드라이제보다 명중률이 더 나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영상에서도 언급하듯이 보병 교전 거리내에서의 명중률은 드라이제나 로렌츠나 비슷했다. 드라이제가 9초만에 장전이 끝나서 사격하는 것도 볼만한 부분. 다만 흑색 화약의 한계로 인해 드라이제 소총 내부에 연소 잔재물들이 남아 후대에 나올 탄피식 소총들에 비해선 지속 사격 능력이 떨어졌다. 물론 이는 로렌츠 머스킷에도 당연히 해당하는 문제점.[8] 이 당시 포병은 오히려 프로이센보다 오스트리아가 더 우수했다. 보병 화기와는 반대로 포병화기에선 프로이센은 크루프 후장식포가 막 들어오려던 찰나였고 반면 오스트리아는 후장식 대포로 완전히 무장한 상태였다. 프로이센 군은 개별 보병의 화력에 충실했다면 오스트리아군은 신형 대포를 통한 포병 화력에 집중했다. 현대전에서야 대포 화력이 훨씬 더 강력한 것이 당연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포병의 화력이 명중률이 우수한 소총을 갖춘 보병의 일제사격보다는 약했다. 후장 강선포라고 해도 통짜 쇳덩이 포탄으로는 살상력에 한계가 있을뿐더러 영상처럼 엎드리기만 해도 희생은 크게 줄어든다. 반면 보불전쟁에선 오히려 프랑스가 샤스포 소총으로 무장하여 우위였고, 포병은 독일이 더 나았다.[9] 분리철갑탄의 뒤의 Discarding Sabot를 번역한 경우 "이탈피"라고 쓰는데, 분리철갑탄의 작동 현상을 직역하여 번역한 경우지만 이 경우는 탄저판이다. Sabot는 실은 이탈하는 물체도, 탄저판도 아닌 "총기 격발 시 폭압을 제대로 받기 위해 구경에 꽉 맞게 채워주는 물체나 판때기"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 화포의 격목이나 토격과 같은 역할의 물체다.[10] 격발 시 고무링이 압축되면서 약실에 밀착되어 가스 누출을 막는 방식이었고, 샤스포 소총에서 먼저 채용된 방식을 1869년부터 도입하였다. 그러나 고무링이 소모품이라 주기적인 교체가 필요했고, 제때 교체하지 않으면 사고의 위험이 있었다.[11] 다만 가스 누출에 따른 사고를 막기 위해, 드라이제는 노리쇠와 약실이 만나는 부분을 총 앞으로 비스듬하게 만들어 가스가 새더라도 뒤나 옆이 아닌 앞으로 새어나가도록 설계되었다.[12] 탄피가 찢어지거나 습기를 흡수해서 작동 불량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쾨니히그래츠 전투가 끝난 후 몰트케도 '이 소총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결코 훌륭한 소총은 아니었다.'라고 인정할 정도.[13] 그러나 직사화력의 우수성에만 의존하던 프랑스는 전술적으로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으나 전략적으로는 보불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독일은 전술적 차원에서는 대량 배치된 후장식 크룹 포의 압도적인 포병화력으로 보병 화력의 열세를 상쇄했고, 작전적, 전략적 차원에서는 전신과 철도, 참모본부 제도의 효과적 활용으로 상황인식과 결심, 명령 하달, 병력 기동 속도에서 막대한 우세를 누리고 있었다.[14] 물론 드라이제가 도입될 당시만 하더라도 한 전투에서 총을 12발 쏘기 전에 전투가 끝나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수명으로도 불편을 감수하고 충분히 사용할만한 수준은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유지 및 사용에 불편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었다.[15] 다만 이런 문제를 의식해 드라이제의 공이는 나사산으로 결합된 채 노리쇠 뒤쪽으로 노출된 구조를 하고 있어서, 노리쇠를 분해하지 않고도 공이를 돌려서 노리쇠에서 분리하고 교체할 수 있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