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지

 


鄧芝
(? ~ 251년)
1. 개요
2. 정사
2.1. 이름없던 듣보 시절
2.2. ·의 외교관
2.3. 무관으로서의 면모
2.4. 죽음
3. 연의


1. 개요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등량의 아버지. 자는 백묘(伯苗).[1]
의양군 신야현 출신.[2] 후한의 사도 등우의 후손.[3]

2. 정사



2.1. 이름없던 듣보 시절


일찍 으로 들어가 활동하였지만 듣보잡 인재 정도로 취급당해 중용되지는 못했다. 이 시기 익주종사 장유가 등지의 관상을 보고는 그가 70줄 넘어서 대장군 지위에 오르고 또한 후에 봉해질 것이라 평하였다. 이후 파서태수 방희가 인재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 의탁했다. 전체적으로 유비의 입촉 전에는 별다른 행적이 남아있지 않다. 연의에서 등장부터 문무겸비 고급인재로 나오는것과는 꽤나 다른 행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비저각독에 임명되었으며, 유비와 대면한 자리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때 유비가 등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비현 현령으로 임명했다가 곧 광한태수로 승격시켰다.나중에는 중앙정부로 불려가 상서에 임명되기도 했다.

2.2. ·의 외교관


유비 사후 제갈량손권이 딴 마음을 먹고 촉에 위협을 가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등지가 찾아와 촉오동맹을 굳건하게 해야된다고 주장하자 제갈량은 등지를 적임자로 보고 오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등지가 제갈량을 만나 말했다.

"지금 주상은 유약하며 방금 즉위하였으니, 응당 중요한 사신을 보내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두텁게 해야 합니다."

제갈량이 대답했다.

"나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얻었습니다."

등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질문했다. 제갈양이 말했다.

"당신입니다."

제갈량은 곧바로 등지를 파견하여 손권과 우호 관계를 맺도록 했다.

등지는 후주 유선의 능력의 의구심을 품고 있던 손권을 설득시켜 오가 위와 관계를 끊고 촉과 공수동맹을 맺도록 주선하였고 더불어 오에 붙잡혀있던 장예의 석방 협상도 성사시켰다.
이때 등지와 손권이 했던 대화는 가히 호걸들의 대화라고 할 만한데 등지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손권은 과연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 불시에 등지를 만나게 되었다. 등지가 직접 표를 올려 손권을 만날 것을 요청하며 말했다.

"신이 오늘 온 것은 또한 오나라를 위하려는 것이지, 비단 촉나라 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손권은 곧 만나보고 등지에게 말했다.

"나는 진실로 촉나라와 화친하기를 원하지만, 촉나라의 군주는 유약하고 국토가 작고 형세가 빈약하여 위나라가 틈을 타고 침입하면 자신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이오. 이 때문에 유예(猶豫)시킬 뿐이오."

등지가 대답하여 말했다.

"오와 촉 두 나라는 네 주의 땅을 갖고 있고, 대왕은 한 시대의 영웅이며, 제갈량 또한 한 시대의 호걸입니다. 촉에는 첩첩의 험준한 요충지가 있고, 오에는 삼강의 험준함이 있으니, 이 두 장점을 합쳐 함께 입술과 치아의 관계가 된다면, 나아가서는 천하를 겸병할 수 있을 것이고, 물러나서는 삼국 정립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대왕께서 지금 만일 위나라에 귀순하게 된다면, 위나라는 반드시 위로는 대왕의 입조를 바라고, 아래로는 태자가 궁으로 나아가 받들기를 요구할 것입니다.[4]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반란을 토벌한다는 이유를 들 것이며, 촉은 반드시 흐름을 따라 할 수 있음을 보고 나아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강남의 땅은 다시는 대왕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손권은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말했다.

"당신 말이 옳소."

그러고 직접 위와의 관계를 끊고 촉과 우호관계를 맺고 장온(張溫)을 보내 촉에 답례했다.[5] 촉도 다시 등지에게 오나라로 가도록 했다. 손권이 등지에게 말했다.

"만일 천하가 태평하다면, 두 군주가 나누어 다스려도 또한 좋지 않겠소?"

등지가 대답했다.

"하늘에는 두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명의 군주가 없습니다. 위를 병탄한 후일지라도 대왕은 천명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군주가 각각 자신들의 덕행을 함양하고, 신하가 각각 자신들의 충성을 다하며, 장수들은 전쟁용 북을 울려 출전한다면, 전쟁이 비로소 시작될 뿐입니다."

손권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성실함으로써 당연한 답변이오."

손권이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이전의 사자 정굉(丁厷, 丁宏)은 언사가 화려하며 속으로는 변화가 끝이 없었습니다. 두 나라를 화합시킬 수 있는 자는 오직 등지 뿐입니다."

손권은 등지의 변설과 외교관으로써의 역량에 감복하여 제갈량에게 별도의 서신을 보내 등지를 칭찬했다. 그 이후로도 손권은 몇 차례 편지를 보내 등지의 안부를 묻고 예물을 보내기도 했다.

촉한은 기본적으로 한실부흥을 명분으로 삼고 있었기에 손권 역시 궁극적으로는 토벌 대상임을 여지없이 드러낸 등지나 그걸 듣고 흔쾌히 웃은 손권이나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제갈량은 손권이 칭제하자 분개하여 반대하는 신하들 상대로 등지와 비슷한 논리로 우선 위나라를 먼저치고 손권의 찬역은 나중에 논해야 한다고 하였는데(절맹호의) 이는 분명 촉한의 대의명분적 파탄이요, 손실이었다. 그러나 당시 촉한에서도 진밀이나 비시, 조운 등의 중신들이 손오보단 한실을 직접적으로 무너뜨린 가장 세력이 강대한 위나라를 먼저 주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오나라는 그 다음이어야 한다는 현실적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등지의 교섭결과나 손권의 야망넘치는 언행 등이 촉한 조정에 알려진 상황이었기에 손권의 칭제는 거의 기정사실화 되었음에도 이런 반대여론이 대세였던 점, 이후에도 비의 등 촉한의 사신들이 오나라 중신들과의 접견에서 계속 자국의 우위를 과시하는 신경전을 펼친 정황을 보건대 그만큼 당시 촉한의 국시인 '한적불왕립'의 사고방식이 촉한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는 것을 것을 의미한다. 등지의 이런 태도는 절대로 이 외교관계가 촉한의 명분상실로 넘어가는 걸 좌지우지하진 않겠다는 촉한의 의지표명이었다고 보는게 좋을것이다.
사실 손오 입장에서도 촉한이라는 동맹이 있는게 더 이득이었다. 촉이 아니라 오vs 위의 1:1매치였으면 결국 무너질 상황인 것이다. 촉한과 규모의 차이는 분명 있었지만 손오의 지방 호족이나 세족들은 손씨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보니 오의 경우엔 반란도 상당히 잦았고 외침 시에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명분이 부족했다. 애초에 오는 호족들의 사병을 모아 오군으로 편성해서 전쟁을 치르다 보니 지휘체계의 혼선도 많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당장 한나라의 후손이자 황제의 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 집권 구조 체제를 구축한 촉한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았고 위와 천하를 놓고 결전을 벌인다 가정했을때 우군으로서 촉한만큼 안정된 세력은 없었다. 손권이 그렇게 공을 들인 요동의 공손연이나 고구려, 이들은 결과적으로 위나라에게 대차게 깨지거나 손권의 사절단을 이용만하고 버리거나 하여 손권의 바람이 헛된 것임만이 드러났을 뿐이다. 이런면에서 손권에게 남은 최선은 제갈량 휘하에서 국력을 단단히 다지고 그 병사들이 강병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촉한과의 동맹일 수 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종예가 사신이 되어 손권에게 나아가서 당당하게 맞받아치자 손권이 감탄하며 '''"경은 예전에 왔었던 등지만큼 대단한 사람이오."'''라고 말한 바 있다.

2.3. 무관으로서의 면모


제갈량의 북벌이 시작되자 중감군, 양무장군으로 임명되어 종군하였고 1차 북벌에서는 조운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제갈량 사후에는 전군사, 전장군, 연주자사에 임명되고 양무정후로 봉해졌으며, 나중에는 거기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등지의 직책이 중감군 양무장군이 된 것은 제갈량의 한중출병 당시의 일로 되어 있는데, 이엄 탄핵 당시 등지의 보직은 독좌부 행중감군 양무장군, 겸직이다. 등지가 한중출병과 231년 북벌 사이에 승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때 직속상관이었던 조운의 보직을 등지가 대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엄 관련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는 촉군 편제상 감군은 호군보다 위인데 등지가 227년 당시 중감군이었다면 조운이 주장으로 출전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248년에 부릉군의 대성호족인 서거가 도위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등지가 군대를 인솔하여 토벌하였다. 화양국지에는 이 기록이 25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등지가 부릉을 정벌할 때 활 쏘기를 좋아했던 등지는 검은 원숭이에게 화살을 맞히었다. 그런데 원숭이가 그 화살을 뽑고 나뭇잎을 말아 상처를 감싸자 등지가 탄식하며 "아~! 내가 사물의 본성을 어겼으니 장차 죽게 되겠구나!"라고 말했다.
일설에 따르면 등지가 새끼 원숭이를 안고 있는 어미 원숭이에게 화살을 맞히었는데 새끼가 어미에게서 화살을 뽑고 나뭇잎으로 어미의 상처를 감쌌다. 등지가 마침내 탄식하며 활을 물 속에 던지고는 스스로 마땅히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2.4. 죽음


등지는 251년에 죽었다. 등지는 오랫동안 촉의 중직을 맡았지만 생활은 관에서 주는 녹봉에만 의존하였고 재산을 모으는데도 영 관심이 없다보니 가족들은 끼니를 걱정해야 될 정도로 가난했고 죽었을 때 남은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진수는 등지가 정조가 곧고 간결명료한 인물로써 관직에 있으면서는 가업을 잊었다고 평가했다.
그 외에도 강직했지만 나름대로 모난 성격이었던지 다른 신하들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나마 강유 정도만이 등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등지 사후에는 아들 등량이 뒤를 이었다.

3. 연의


연의에서도 정사처럼 촉오동맹을 놓고 고뇌하고 있던 제갈량의 눈에 들어 따로 회동을 가지게 되었고, 이때 제갈량의 인정을 받아 오의 사절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손권은 촉에서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펄펄 끓는 기름을 담은 솥을 준비하고 무장한 병사들을 잔뜩 세워놓은 채 맞이한 것으로 나온다. 다음은 연의의 내용이다.
손권이 군사를 움직인다는 소식을 듣자 제갈량은 등지를 보냈고, 손권은 이에 어떻게 대응할 지를 의논하였다. 이에 장소가 손권에게 간했다.
"역이기가 제나라를 설복하려다 튀겨져 죽은 일화를 얘기해 겁을 주십시오."
이에 손권은 등지를 맞이할 때 무사들을 줄세우고, 큰 북을 울리며 솥에 기름을 팔팔 끓였다. 하지만 등지는 웃음까지 지으면서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손권에게 나아갔다. 등지가 절을 하지 않자 손권은 왜 절을 하지 않냐 따졌고, 등지는 이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큰 나라에서 온 사신작은 나라에게 절하지 않는 법입니다."'''[6]
이에 손권이 장소가 말한대로 기름솥에 쳐넣으라며 겁을 줬지만 등지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리며 '''"무사들을 모아놓고 기름솥을 내걸고 맞이하는 게 사신을 접대하는 태도가 맞냐? 설령 나를 겁주려고 한들, 이래서야 동오가 일개 사신에게 잔뜩 겁을 먹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가?"'''라고 반박했으며, 이에 손권은 무작정 화만 낼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무사들을 물린 뒤 등지를 맞이했다.
손권은 등지에게 "나는 촉주 유선과 함께 힘을 합쳐 위나라를 치고 싶은데 촉주가 어려서 걱정이다."라고 하자 등지는 "대왕께서는 오나라의 영걸이고 제갈량은 천하의 기재인데 어찌 힘을 합쳐서 치지 못하겠습니까? 제 말이 틀리다면 저는 이 기름솥에 몸을 던져 세객이란 이름을 씻겠습니다."라며 '''진짜로 기름솥에 몸을 던지려 하자''' 손권이 얼른 그를 말렸고 그의 말을 따랐다.

4. 미디어 믹스



[1] 덩샤오핑이 주장했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의 그 백묘와는 한자 표기가 다르다. 그의 자가 맏이 백이란 글자를 쓴 것으로 보아 등지는 형제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음을 추측해 볼 수도 있다.[2] 다만 등지가 태어나고 성장할 당시에 의양군은 설치되지 않았고 남양군 신야현이었다. 의양군이 설치된 때는 위나라에 들어와서 였다.[3] 위나라의 조상의 심복 등양도 마찬가지다.[4] 아닌게 아니라 위나라 문제 조비는 손권의 태자 손등의 입조를 요구하고 손권이 이에 응하지 않자 손권을 지속적으로 공격했었다.[5] 정작 장온은 사신의 자격으로 촉나라에 갔다온 뒤, 거기에 매료되었는지(...) 촉나라를 자주 찬미하는 발언을 했는데다가 본인이 가진 인망도 높았으므로 사람들이 장온을 너무 칭송만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손권에게 찍혀 다른 일을 핑계로 쫓겨났다가 몇년 뒤에 요절했다. 장온 문서 참고.[6] 이희재 화백의 만화 삼국지에서는 유선은 촉의 황제이고, 손권은 아직 왕이니, 동오가 그만큼 작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