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color=#373a3c> '''아르헨티나 대통령'''
[image]
41대

42대

43대
이사벨 데 페론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 아르헨티나 제42대 대통령
Excelentísimo Señor
Jorge Rafael Videla Redondo '''
<colcolor=#373a3c><colbgcolor=#75aadb> '''본명'''
Jorge Rafael Videla Redondo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돈도
'''출생'''
1925년 8월 2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메르세데스
'''사망'''
2013년 5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마르코스 파스 교도소
'''국적'''
아르헨티나 [image]
'''임기'''
제42대 대통령
1976년 3월 29일1981년 3월 29일
'''정당'''

'''배우자'''
알리시아 라켈 아르트리드헤
'''약력'''
투쿠만 주지사
1. 개요
2. 생애
2.1. 초년 생애
2.3. 경제 파탄
3.1. 임기 막판
3.2. 재판과 말년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color=#373a3c> [image]
'''△ 노년의 모습'''
아르헨티나의 제 42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현재 아르헨티나 독재 피해를 조사하는 단체의 추정으로 30,000 ~ 45,000명, 공식적인 집계로 15,000명에 이르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납치당하거나 고문, 살인 등으로 사망 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피해자들의 시신은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외곽의 그랑부르 공원에서 400여 구의 유골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비델라 집권 당시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외채 증가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경제도 몰락했다. 아르헨티나는 1929년 미국발 대공황 이전까지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국이었지만 몇 번의 경제위기를 겪고 그 위상이 추락했는데, 그 중에서 비델라 정권이 위기와 추락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그나마 다른 경제위기에서는 어떻게든 빈민율만은 지켜냈으나 비델라 정권은 그나마 남은 마지막 자존심인 빈민율 억제마저 내팽개쳐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징 빈민 증가율이 높았던 시기가 비델라 집권기간(7배)이었다.

2. 생애


<color=#373a3c>[image]
'''△ 호르헤 비델라'''

2.1. 초년 생애


비델라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에서 태어났다. 아르헨티나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아르헨티나의 군장성으로 되었고, 1973년에는 아르헨티나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75년에 이사벨 데 페론[1]이 비델라를 아르헨티나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비델라는 후안 페론의 뒷통수를 쳤다. 1976년 3월 24일 군부 쿠데타를 주도하여 이사벨 데 페론을 대통령 자리에서 쫒아보낸 후 1976년부터 1981년까지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정확히 5년간 집권했다.

2.2. 더러운 전쟁


비델라는 1976년 3월 미국CIA의 지원 아래에 "좌익세력의 폭력적 위협이 심각하다, 신의 도움에 힘입어 완전한 국가 회복을 이룩하고 국민에게 혼란과 부담을 안겨주었던 상황을 종식시키겠다"라는 명분으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데 페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쿠데타 이후 취임식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이 수습되면 민정으로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군부독재 정권이 출범하자 당연히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이에 군사정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비밀리에 납치해서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재판없이 살해했다. 군부는 시위대와 군과 경찰 그리고 관제단체인 반공동맹이 불순분자라고 지목한 인사들을 체포해서 340여개의 비밀수용소에 무기한 구금했으며 일체의 집회와 시위,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국회는 폐쇄됐으며 입법권은 3인의 군사위원회가 행사하였다. 여타 중남미 국가들도 그렇듯 망명 온 나치 전범들을 군과 경찰과 같은 국가기관에 취직시켜주었다.
또한 인접한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5개국 우익 군사정권이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벌인 ‘콘도르 작전’을 통해 군인들은 매일 밤 골목에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체포하였으며, 이 만행을 인접국가까지 펼쳤다. 희생자 대부분은 자동차 수리점으로 위장한 군부 독재 정권의 조사실에서 고문,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숨진 사람들과 고문으로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밤마다 비행기에 태워 라플라타 강에 던져버렸다. 이렇게 군부가 좌파 인사를 색출하기 위해 벌인 ‘콘도르 작전’으로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40만여 명이 고문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때 아르헨티나는 재판도 없이 그저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만 명을 항공기에 태워 대서양이나 태평양 앞바다에 던져버리던 시절이었다. 비델라는 자신에게 반대하던 민주화 인사들과 정치범들을 모아서 컨테이너에 몰아 넣은 다음 폭격기에서 태워서 대서양 한가운데로 투하시켰으며, 헬기를 몰고 대서양 연안 쪽으로 가서 죄수의 몸에 추를 달고 쥐도새도 모르게 대서양 한가운데로 던져넣은 사례도 비일비재할 정도의 극악무도한 독재 정치를 펼쳤다. 반대파 인사들에게 마약을 먹인 후 대서양에 투하하기도 했다.[2]
성고문도 자주 있었다. 군부 세력이나 흉악범죄자들, 혹은 발정난 개들을 시켜 반체제 여성 수감자들을 강간하고 임신시켰다. 이들은 아비도 모르는 아이를 출산해야 했으며, 임산부가 아기를 낳고 나면, 산모들은 용도폐기가 되었다는 듯이 죽이던가 군용기에 실려가서 산 채로 바다에 던져졌다. 그리고 수용소에 끌려간 임산부는 출산일까지 감시하다가 출산 후에 총살당했으며, 임산부에게서 갓 태어난 아기가 총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이후 임산부가 낳은 아기들은 출산 직후 아르헨티나 군인들에게 보살펴져서 군인과 경찰 등 친정부 성향의 인사들의 가정에 양자나 양녀로 보내졌고, 몇살 미만의 아이들도 친정부 인사들의 양자나 양녀로 보내졌다.
자세한 사항은 더러운 전쟁 참조.

2.3. 경제 파탄


아르헨티나는 19세기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었고, 대공황의 타격을 세게 받기는 했지만 국민소득은 서서히 오르고 있었고 후안 페론이 빈민구제정책과 복지정책을 병행해 빈부격차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호르헤 비델라는 경제 성장과 빈부격차 해소 어느것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실정으로 국내의 산업기반은 완전히 붕괴되버렸으며, 최근까지도 초인플레이션과 외환위기가 빈발했다.
비델라는 우선 집권한 직후 자국의 거의 대부분의 회사를 미국 등 외국에게 헐값으로 처분했고 외자를 마구잡이로 유치했다. 이 과정에서 비델라는 최대한 빨리 팔아치우려고 미국 등 회사를 매입하려는 상대가 값을 깎아달라는 요구를 다 들어줘서 거의 공짜에 가깝게 처분해버렸다. 또한 국채를 엄청나게 찍어댔고 그걸로 자기 개인 재산 불리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기업가들은 졸지에 회사를 빼앗기고 무직이 되어 길거리에 나앉았다. 그 중 일부의 자금은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유치비용 및 운용자금으로 활용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일부는 심판에게 지급한 특별수당으로 사용되었다.
경제가 대통령의 개인 비자금으로 빨려들어가는 형국이었고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비델라 등의 군부독재세력의 실정으로 추락했다. 비델라가 물러난 이후에도 군사정권의 부패는 사라지지 않았고, 민주화 이후 라울 알폰신 민선 대통령이 아우스트랄 프로젝트 등 정말 별의 별짓거리를 다해도 경제가 전혀 회생하지 못했다.
<color=#373a3c>[image]
△ 적갈색의 PRN이라고 써있는 부분에서 빈민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카를로스 메넴, 페르난도 데 라 루아,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에두아르도 두알데,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마우리시오 마크리,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등 이후의 모든 아르헨티나 대통령들이 총력을 다해 경제를 되살리려 노력했지만 비델라가 망쳐 놓은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거의 고질병 수준으로 좀체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조금 나아지나 싶으면 터지고 또 회복되는가 싶으면 재발하고 항상 이런 리싸이클에 시달리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경제에 이런 큰 고질병을 안겨준 장본인이 바로 비델라이다.

3. 월드컵의 부정부패


비델라 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축구를 이용하기로 결정했고 이게 바로 축구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월드컵인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시작이었다. 해외 여론은 쿠데타가 일어났던 아르헨티나에서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이 열리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비델라의 핵심 내각 중 한명인 군사평의회의 의원이자 해군 총사령관인 에밀리오 마세라가 대회를 유치하기위해 FIFA뿐만 아니라 각계의 지도부 인사를 만나며 적극적인 로비 활동을 했으며, 철저한 물밑작업 끝에 마침내 월드컵을 유치해내는 데 성공했다. 마세라는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공약으로 엄청난 자본을 투입할 것을 약속했으며 아르헨티나 재무장관이었던 후안 알레만조차 경악하게 만든 액수였다고 한다.
처음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은 군 장성이긴 했지만 비델라와는 껄끄러운 사이였다. 비델라는 아르헨티나 국내외 모든 컬러 TV를 전면 송출하기를 원했는데 그 조직위원장은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조직위원장은 좌익 게릴라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다. 그 뒤를 이어 조직위원장을 맡은 사람은 비델라의 심복이었는데, 전 조직원장을 누가 죽였는지 뻔히 알고 있던 축구선수 관계자들은 공포에 떨었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한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임무는 단 한 가지였다. '''"어떻게든 우승하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정부는 무조건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거리지 않았다.
강호 헝가리와 맞붙은 조별 리그에서 상대 선수 2명을 퇴장시키면서 2-1로 억지로 이겼다. 2차 조별 리그는 조편성을 일방적으로 했는데, 전 대회 우승팀 서독, 준우승팀 네덜란드, 전통의 강호인 이탈리아를 한쪽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대파하는 바람에 브라질을 골득실 차로 제치고 결승에 올랐고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와의 경기 전 페루의 부채 5천만 달러를 탕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페루팀 골키퍼로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가 전격 기용되는가 하면, 페루의 공격수들은 유난히 헛발질을 벌이고 최종 수비수가 공격진에 가세하는 기괴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반면 브라질 측에도 역시 경기전 아르헨티나전을 무승부로 틀어막으면 선수 1명당 6만 달러씩 보상금을 주기로 했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기어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툭하면 반칙 호각을 불어대는 심판 때문에 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불공정한 경기였다. 이로 인해 잠시 동안은 호르헤 비델라의 지지도가 상승하기도 했으나 월드컵의 열기가 사라지자 비델라의 지지도는 다시 내려갔다.

3.1. 임기 막판


한편 오일쇼크로 인한 침체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던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후안 페론이 주장한 페론주의 대신에 시장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일시적으로 경제성장률을 7%대로 높이는 효과를 얻었지만 시장개방을 하겠다고 외채를 다량으로 들여왔고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 문제은 오히려 더 심각해졌으며, 외자유치를 감행하겠다고 하면서 외국기업들이 대거 들어오기는 했지만 새로 들어온 외국기업들이 별 다른 수익을 내지못하며 철수하려하자 이들기업의 채무부담을 정부가 해결하겠다면서 정부의 채무부담을 크게 늘렸으며, 더군다나 미국에서 인플레이션을 줄이겠다고 금리인상을 단행했던지라 결과적으로 거액의 예산을 외채상황에 써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3] 결국 이뤄 놓은 것 하나 없이 외채부담만 크게 늘린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군부에서는 핵심 세력들을 아르헨티나 대통령직에 올리며 돌려막기를 시도하다가 레오폴도 갈티에리 장군이 포클랜드 전쟁이라는 대삽질을 저지르자 결국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는 종식되었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라울 알폰신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자 라울 알폰신과 맺은 협상 때문에 자신들이 안전할 줄 알았지만 라울 알폰신은 군부의 뒷통수를 치며 비델라와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 군부의 핵심 지도자들을 재판에 넘겼다.

3.2. 재판과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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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받는 비델라(왼쪽 인물)'''
비델라는 세 번에 걸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라울 알폰신 대통령의 민선정부 출범 직후 '더러운 전쟁'을 통해 인권을 탄압한 혐의로 다른 군사평의회 지도자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1983년 민주화를 이룬 2년 후에 1985년 알폰신 대통령시대에 군사 독재 시절의 범죄행위로 파면되고 1986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의 사면법과 미국의 눈치, 군부의 눈치에 의해 1990년 메넴 정부에서 실시한 범법자에 대한 사면으로 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6년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가 집권했던 시기에 벌린 유아 유괴에 대한 범죄로 1998년 다시 무기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아르헨티나 법률에 의해 70세가 된 이후 외출 등을 통제된 채 본인의 집에서 복역하도록 바뀌었으나, 2008년에 다시 주거 복역이 금지되고 다시 감옥으로 옮겨졌다. 2010년 키르치네르 정부에서는 군사정권 시절의 사면법과 메넴 정부 시절의 사면이 위헌이라 판결하고, 또 다시 무기징역이 선고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마르코 파스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다른 사건들은 군부독재가 종식된 이후 대부분 드러났지만 아이들을 양자나 양녀로 입양시킨 것은 2000년대에 와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 네스트르 키르치네스가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1977년 실종 자녀를 찾아 달라며 시위를 시작한 어머니·할머니 등 14명이 '5월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아이들이 강제로 입양된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비델라 정권 시절 희생자 가족들이 모여 만든 ‘5월 광장 어머니회’의 계속된 집회로 아기 납치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납치된 아이들 500여명 중 100여명이 DNA검사를 통해 진짜 가족을 되찾았지만 아직도 파악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몇 명 있다고 한다. 이러한 악행으로 인해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2011년 아르헨티나 법정에서 50년형을 선고 받았으며 양부모들 역시 납치된 아이를 키운 혐의를 인정 받아 실형을 선고받았다. 비델라는 이에 대해

아르헨티나 사회는 당시 마르크스혁명을 막기 위한 강경진압이 필요했다. 오늘날 '테러범'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정부 전복 세력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7~8천 명이 죽어야 했다. 희생자들의 시체를 비밀리에 처리한 것은 국내외의 저항 촉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의 엄마들은 ‘열혈 테러리스트’였다. 그들은 아이를 인간방패로 이용했다.

대안이 없었다. 군부 지도자들은 반정부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는 데 견해를 같이 했다.

실종자 전체 명단은 없으며 부분적인 명단이 있을지 모르나 부실하다. 엄격히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쿠데타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실수였다. 기사

라고 변명했다. 한편 아이들을 납치한 양부모들은 자신들은 아이들을 키운 죄 밖에 없으며 모든 것들은 조국을 위한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라는 변명을 했다고 한다. 양부모에게 키워진 아이들중에는 나중에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다 자살하거나 양부모를 총으로 쏴죽인 일도 있었다.
결국 2013년 5월 18일 복역 중이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마르코 파스 감옥 독방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기타


[image]
시골신부(?)와
당대 넘버원 인물 호르헤 비델라의 모습

한 때 교황을 고르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가 협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자들은 서로 돌아가며 대통령을 했는데 이 중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가장 오래 했다.[4] 다른 독재자들은 다들 1년 남짓 해먹은 반면 비델라는 무려 5년 동안이나 대통령에 있었다.
두 교황에서 베르골리오가 과거를 회상할 때 등장한다.

5. 관련 문서



[1] 후안 페론의 세번째 부인. 후안 페론이 1974년에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지만 후안 페론만한 카리스마가 없는데다가 국정운영의 총체적 실정으로 인해서 지지율이 크게 낮아진 상태였다.[2] 물론 이 잔혹한 고문기술과 심리전 요법은 모두 CIA 요원들이 전수한 것이다.[3] 이 정책은 카를로스 메넴이 재도입하게 되었다. 물론 군부정권과는 다르게 태환제도를 실시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물가상승률을 크게 낮추고 1인당 국민소득도 1만달러를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만 결국 임기 후반기부터 외채도입과 민영화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2001년에 디폴트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본격적으로 일이 터진것은 메넴의 후임인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 임기였다.[4] 20세기 남미나 중미는 칠레의 피노체트나 니카라과의 소모사 가문, 아이티의 뒤발리에, 반대로 좌익 쪽의 쿠바 피델 카스트로 정도나 개인 종신 독재자였지, 근본적으로 독재정권의 형태는 군부와 정계 우익 인사들이 서로 짜서 돌려서 해 먹는 과두정이 대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