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코 미티치
1. 개요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미티치는 1922년 유고슬라비아의 벨라 팔랑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일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축구를 배웠다. 그의 부모는 그가 축구하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는 그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1937년부터 그는 코슈트냐크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1938년에는 당시에 잘 나가던 팀 중 하나인 BSK 베오그라드에서 뛰게 되었다.
2.2. 클럽
미티치는 1940년에 처음으로 1군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미티치 역시 세계 각지의 많은 축구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임시 리그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하면서 실력을 키워갔고 1945년에는 레드 스타로 팀을 옮겼다. 그리고 특유의 리더십으로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첫 주장에도 선임되었다. 하지만 1947년 시즌은 무릎 반월판 부상으로 인해 미티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했다.
미티치가 이끄는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1948년 처음으로 컵 대회에서 최대 라이벌 FK 파르티잔을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미티치는 이것이 커리어 사상 가장 좋았던 기억이라고 회고했었다. 그리고 1951년에는 염원하던 첫 리그 우승도 이루어냈다. 그가 뛰는 동안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거칠 것이 없었고 유고슬라비아 내에서는 큰 성공을 이루어냈다. 1948년부터 10년 동안 3번을 제외하면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고, 컵 대회 결승에도 6차례에나 나갈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장 라이코 미티치가 있었다. 그래서 라이코 미티치는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5인의 별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2.3. 국가대표
국가대표로도 미티치는 여러 대회에 나가 활약을 하였다. 올림픽과 월드컵에 두 번씩 나간 것. 하지만 스티에판 보베크, 블라디미르 베아라, 브랑코 제베치, 제이코 차이코프스키 등 여러 스타 선수들과 힘을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국제무대에서 단 한 번도 정상에 서지 못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미티치는 4강에서 영국 단일팀을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결승에서 만난 스웨덴에게 3대 1로 패함으로서 준우승 확정.
2년 후의 월드컵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예선 1조에 속했던 유고슬라비아는 잘 나갔다. 조별 예선 최종전을 앞두었을 때 성적은 유고슬라비아가 1위, 개최국 브라질이 2위였다. 하지만 시합을 앞두고 유고슬라비아에게 큰 불운이 찾아왔다. 미티치가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경기를 앞두고 입장하다 철제 대들보에 머리를 부딪친 것. 미티치는 이것 때문에 출혈이 있었고 20분간 치료하느라 경기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경기는 이미 아데미르의 골로 기울어 있었고, 미티치는 뒤늦게 경기장에 들어갔지만 승부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지뉴의 추가골을 얻어맞고 유고슬라비아는 2대 0으로 패배. 2위를 차지했음에도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와야 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미티치는 6골을 넣으며 같은 팀의 브랑코 제베치에 이어 득점 전체 2위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번의 결승 상대는 매직 마자르 헝가리. 유고슬라비아도 강했지만 헝가리가 너무 강했고, 결국 2대 0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스위스 월드컵에서 유고슬라비아는 브라질에 이어 조 2위로 8강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8강에서 서독을 만났고 서독에게 2대 0으로 패하며 짐을 싸고 말았다. 다음 월드컵 예선에서 유고슬라비아가 탈락한 것이 미티치에게는 마지막 국가대표 출전이었다.
미티치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 총 32골을 넣었으며 3번의 해트 트릭을 기록하였다.
2.4. 은퇴 이후
은퇴 후 미티치는 친정팀 츠베르나 즈베즈다에서 매니저로 일했다. 그 후 1966년부터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그의 최고 성과는 츠베르나 즈베즈다의 후배 드라간 자이치를 축으로 하여 이끈 유로 1968에서의 준우승이었다. 비록 이탈리아에게 아깝게 패배하였지만 그들의 실력은 유럽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1970년 에 사령탑에서 내려온 이후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츠베르나 즈베즈다의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평가
기술적으로 꽤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발 슈팅은 강력한 무기였다. 또한 리더십이 뛰어나 주장으로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였다.
4. 뒷 이야기
- 미티치의 리더십은 처음부터 발휘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친구 브랑코 스탄코비치를 제외하면 선수들이 명령을 듣지 않기도 했다고.
- 미티치의 마지막 시즌인 1958년. 하이두크 스플리트와의 원정경기 도중 팬들이 던진 돌에 레드 스타의 보라 코스티치가 맞았다. 미티치는 선수들을 이끌고 경기장에서 철수하였는데 유고슬라비아 축구 협회는 츠르베나 선수 9명에게 한 달간의 출장 정지 처분을 내렸다.
- 즈베즈다 구단은 미티치가 구단에 끼친 영향력과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2014년, 홈 구장인 스타디온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이름을 '스타디온 라이코 미티치'로 변경했다.
5. 수상
5.1. 클럽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5회: 1938–39(이상 OFK 베오그라드), 1951, 1952-53, 1955-56, 1956-57(이상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준우승 4회: 1939–40(이상 OFK 베오그라드), 1948–49, 1950, 1952(이상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4회: 1948, 1949, 1950, 1958(이상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 유고슬라비아 컵 준우승 2회: 1952, 1954(이상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 세르비아 리그[1] 우승 3회: 1940–41, 1942–43, 1943–44(이상 OFK 베오그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