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캄행

 

'''태국 국왕'''
[image]
수코타이 왕조
2대 반무앙

'''3대 람캄행'''

4대 레타이

[image]
타이 수코타이주 수코타이에 위치한 람캄행 동상
'''왕가'''
수코타이 왕국
''''''
퍼쿤 람캄행(รามคำแหง)
'''생몰기간'''
1239(?) ~ 1298(?)
'''재위기간'''
1278년경 ~ 1297년
1. 개요
2. 치세
2.1. 대외 관계
2.2. 불교
2.3. 문화
3. 평가
4. 조작?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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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รามคำแหง
동남아 태국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의 제3대 왕. 본명은 '''퍼쿤 람캄행.''' 1239년(추정)에 태어나 1279년 왕위에 오른 뒤 1298년에 죽었다[1] 1279년, 형이었던 반 무앙 왕이 죽자 타이 시암 중북부의 작은 왕국 수코타이 왕국을 물려받았다.
이후 타이 민족을 처음으로 통일했고 수코타이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자국의 문자'''를 손수 만들어 태국의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태국 국민들에게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문무를 겸한 태국의 먼치킨. 군사, 외교, 통치, 문화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당시 동남아의 패권국이었던 크메르 제국을 격파해 수코타이를 동남아의 패권국으로 만들었다. 전설의 왕 르완왕을 선조로 삼고 국왕은 아버지, 국민은 아들들이라고 하여, 왕족과 같은 온정주의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인물의 행적에 '''큰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2. 치세


그에 대한 거의 모든 기록은 왕 자신이 초안해서 쓴 1292년의 비문에 근거하고 있다. 이 비문은 크메르 문자를 개량해 만든 태국 문자로 기록돼 있는데, 태국어의 원형을 보여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국어 자료이기도 하다.

2.1. 대외 관계


대외 관계에서 람캄행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외교적으로는 북방 란나 왕조, 파야오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어 북방의 안전을 해결했다.
그의 진정한 업적은 정복 활동에 있다. 그는 말레이 반도 전체를 점령한 후 크메르 제국을 제압하였고, 이후 꾸준한 정복활동 끝에 당시 크메르 제국의 영토이자 오늘날 라오스의 땅인 위앙 쨘과 루아프라방, 서쪽으로는 미얀마의 인도양 해안, 남쪽으로는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는 동남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다만 이때의 정복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후 아유타야가 성립된 짜오프라야강 캄보디아-롭부리[2]로부터 정복한 것은 사실인 듯 하나, 위앙 쨘, 루앙프라방, 테나세림, 나콘 시탐마랏의 정복의 경우 단순히 종주권을 인정받은 듯하기 때문이다. 그가 죽자마자 이 지역들은 대부분 쑤코타이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당시 타이족은 동남아 전체로 이주해서 독자적인 소왕국(무앙)을 세우던 상황이었고, 람캄행은 이들을 대표하는 패자라고 보는 연구가 있다.
1294년과 1300년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 조정에 방문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 패권국이던 원과의 우호에 특히 공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2.2. 불교


람캄행은 당시 불교 선진국이던 스리랑카에서 스님을 직접 모셔와 왕실과 평민 모두 불교를 믿도록 하였다(고려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람캄행의 이러한 서비스에 감동을 받은 스리랑카 왕조에서는 수코타이 왕조에 황금 불상을 선물해줬다.

2.3. 문화


태국만의 독특한 양식이 발전했는데, 특히 청동조각과 도자기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달해있었다.
또한 조선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듯, 크메르 문자를 바탕으로 '''태국 문자'''를 만들었다.

3. 평가


람캄행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수코타이 왕조는 그가 죽은 뒤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고 아유타야 왕조에 병합되고 만다.
한편 외교적인 통합의 한계도 보였다. 람캄행의 재위기의 수코타이의 영토는 크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방사형 영토가 아닌 실선으로 뻗어간 모양을 보인다. 즉 각지에 분포한 타이족 소왕국들의 맹주적인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 동맹이 수코타이에 대한 복종보다는 람캄행 개인에 대한 신뢰에 가까웠으므로 그가 죽자마자 대부분 소왕국들은 수코타이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아직 타이족의 영토가 아니었던 짜오프라야강 하구 서안을 정복함으로써 1350년 아유타야가 성립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기도 하였다. 또한 앙코르조와의 항쟁도 계속하였는데, 13세기 말 앙코르조 캄보디아를 방문한 중국인 주달관은 국경에서 섬(暹)인과 크메르인이 수시로 상대편을 학살하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일단 정복군주이다 보니 태국의 주변국에서는 침략자 취급이 강한 편이다.[3] 사실 모든 문화권의 정복군주가 이러한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4. 조작?


현대에는 람캄행의 업적을 남긴 비문의 신빙성이 의심을 받고 있다. 일단 이 비석의 발견자부터가 문제가 있는데, 이 발견자는 바로 19세기 태국의 왕인 '''라마 4세'''이다.[4] 게다가 초반부와 중반부 이후에 서술자의 인칭이 변화하고, 문체마저도 바뀌는 데다, 내용상으로나 시기적 이질성 등이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과연 이게 진품이냐 하는 논쟁이 일었다. 게다가 중반 이후에는 유럽 알파벳 체계의 영향을 받은 점도 있어서 19세기 이후에 쓰인 것이 유력한 상황이다. 현재 태국에서도 이 문제는 논쟁 중이고 비문이 아예 통째로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중간 이후부터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동시대의 원나라의 기록이나 주변국들의 상황 역시 이러한 주장의 신빙성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주는데, 당시 원의 황제였던 쿠빌라이 칸은 정복욕에 불타있던 인물로서 고려나 일본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 당시 원나라는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참파, 크메르, 버마, 심지어 저 멀리 '''인도네시아'''에까지 군대를 보내고 있었는데, 정작 (비석에 따르면) 동남아 최대의 강대국이었던 수코타이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원나라 측의 기록을 살펴봐도 이만 한 강대국인 수코타이에 대해 딱히 특기할 만한 기록을 하지 않았다.[5]
사실 이 문제는 태국 사람들의 민족주의에 큰 영향이 있기 때문에 학자들도 함부로 조작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니, 태국의 역사에서 람캄행의 비중과 위상을 고려할 때 이 비석이 조작인 것이 밝혀지면 아예 '''태국의 역사 자체가 통째로 바뀔 수도 있다'''. 람캄행은 타이족을 역사상 최초로 통일한 인물이자 타이 문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다. 만약 이게 조작인 것이 밝혀지면 지금까지의 타이의 역사 및 언어에 관련된 학술 서적과 교과서를 전부 다시 써야 한다. 때문에 이 문제로 영국 학자인 마이클 라이트(Michael Wright)는 국외 추방 협박을 받기도 했으며, 현재로서는 객관적인 연구가 진행되기 쉽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

5. 기타


람캄행은 막장제조 게임으로 유명한 문명 5시암 문명의 지도자로 나온다. 선전포고 때 한다는 소리가 '''"이제 세계는 나의 것!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드리겠소"'''
사실 문명5 플레이들 가운데에는 거듭된 패치로 약화된 간디보다 이쪽이 더 강력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람캄행 대왕의 외교 능력을 모티브로 한 시암의 특성이 대단히 강력해서, 초보자가 고난이도에 도전할 때 추천받는 문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
태국 방콕에는 람캄행 대학교가 있다. 특이하게도 이 학교는 국립대학이며 그야말로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 개방형 대학교이다. 정원이 없기 때문에, 한국어 붐이 불 때 람캄행 대학교의 한국어 수업은 학생 수가 천 명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12년부터 태국의 화폐인 태국 바트에서 20바트 지폐 뒷면에 람캄행의 도안이 사용되고 있다.
[1] 1317년이라는 주장도 있다.[2] 반독립적인 몬족의 왕국. [3] 특히 태국과의 악연이 매우 강한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미얀마에서 람캄행을 찬양하는 말을 했다가는 현지 주민들에게 욕을 먹거나 심하면 구타를 당할 수도 있다.[4] 유명한 작품 왕과 나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5] 당시 원나라의 사신이었던 주달관이 크메르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바로 옆의 수코타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