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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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국의 국왕. 태국의 국가원수로, 현재 짜끄리 왕조는 1782년부터 이어져왔다. 1932년 시암 혁명 이후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 짜끄리 왕조의 라마 10세가 현 국왕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실을 굉장히 신성하게 여긴다. 전국에 국왕의 초상화가 붙어져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왕실을 존경하고 지지하는 이유는 후술.
그러나 70년 동안 큰 존경을 받았던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이 사망하고 현 국왕 마하 와치랄롱꼰은 아버지와 다르게 엄청난 논란을 몰고 다니면서 현지의 젊은이들은 왕실과 군부에 대한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물론 대놓고 비방을 하면 잡혀가기 때문에 주로 트위터 같은 익명 사이트를 이용한다.
2. 최고존엄
태국의 왕은 '''불교 신자'''여야하며, 불교 신자가 아니면 절대로 왕위를 받지 못한다. 절에 가서 수행함은 필수적인 통과의례이며, 아주 오랜 시간 수행을 마치면 왕에 즉위한다. 21세기의 태국의 왕은 살아있는 부처 정도 위치에 있다고 보면 된다. 선왕 라마 9세(푸미폰 아둔야뎃)가 2016년 10월에 서거한 뒤 공위상태가 되어 추밀원장이 임시섭정을 하였으나 # 동년 12월에 선왕의 장남 라마 10세 마하 와찌랄롱꼰(เจ้าฟ้ามหาวชิราลงกรณ)이 즉위하였다.
푸미폰 국왕이 오랜 기간 통치하면서 수많은 정치세력들과 쿠데타 주모자들이 명멸하는 동안 오직 국왕만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태국 내에서는 그 권위가 대단하다. 형법 제112조 국왕 모독죄가 적용받는 법정 최고형량은 '''징역 15년'''이며, 이는 속지주의, 속인주의에 근거하여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는다. 실제로 술마시고 푸미폰 국왕이 미소짓는 큼직한 거리 간판에 낙서를 큼직하게 했던 외국인 관광객을 체포하여 징역형을 선고하는 바람에 외교적 마찰도 벌어졌다. 물론 대부분은 국왕의 '자비로운' 결정으로 국외추방 당하는 정도로 그쳤다. 왜 여행 가이드북에는 국왕 칭찬 일색인지 알 수 있다.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구석이 있다면 바로 최저 3년의 징역행이니까.
해외거주하는 태국 외교관들도 공무원 신분으로 태국법의 지배를 받는 만큼 국왕을 비판, 비난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왜냐하면 주의를 게을리했다가 고발당하면 신분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유명한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가 태국 여행 도중 거리 곳곳에서 국왕 초상화와 초상화에 국민들이 절하는 모습을 보고 김일성 우상화와 비교하는 글을 올렸는데 '''태국 대사관'''에서 '''우리 국왕님은 그렇지 않아(…)!'''라며 공문을 보내왔다.
이런 법을 국왕 모독죄 혹은 불경죄(lese-majesty)라고 부르는데, 소위 민주 선진국으로 일컬어지는 북유럽, 서유럽 입헌군주국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데다가 최근 판결 사례까지 있다. 그러나 태국은 그 형량이 유럽 군주국에 비해 지나치리만치 혹독하고, 또한 이들 국가에 비해 국왕에 대한 비판에 관대하지 않아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수준이다. 국가가 해외거주 자국민의 SNS를 감시하고, 국왕을 비판했다간 살인범이나 받을 법한 징역 20년이 선고되거나, 단순히 사진만 태워도 징역 3년에서 15년까지 선고되는 등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현재진행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헌법재판소는 국왕모독죄 형법 112조가 국민의 자유권을 규정한 헌법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냐는 국왕모독죄로 수감 중인 솜욧 변호인단의 헌법소원에 대해 형법 112조는 국왕의 안위를 규정한 헌법 8조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조항으로 태국 국민은 이 헌법 조항이 규정하는 범위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
국왕의 사진은 지폐, 달력, 도로 광고판, 택시, 버스 등 여기저기에 엄청나게 붙어 있는데,[1] 멋모르고 "저 듣보잡은 누구심?" 하고 묻는 실수를 했다가는 골치 아파진다. 길거리에 떨어진 지폐를 줍겠다고 발로 밟았다가는 국왕 모독죄로 잡혀갈 수 있다. 입헌군주제 국가임에도 실질적으로 국왕에게 주어진 정치적 권위는 막강하며, 국민의 여론을 좌지우지한다는 점에서 강력하다. 그러나 푸미폰 국왕 사후의 정세는 불투명한데, 자세한 내막은 아래에서.
군부의 쿠데타가 성공하더라도 국왕은 쿠데타의 대상이 아니며[2] 오히려 국왕의 승인을 얻지 못한 쿠데타는 실패한다. 덕분에 군부에서 쿠데타 일으켰다가 국왕이 하지 말라고 해서 버로우 탄 적도 있다. 왕궁에 함부로 총질했다가는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왕 앞에서는 거의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인사를 하며, 이것은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총리까지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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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 영상.[3]
대략 이러한 식으로 알현한다. 위 사진은 1992년 5월 20일 밤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태국은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수찐다 크라쁘라윤 정권과 청백리로 유명한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이 이끄는 민주화 시위대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등 사태가 점점 악화되었는데 푸미폰 국왕이 이를 중재하기 위해 둘 다 입궁시켜 꿇어앉혀놓은 모습. 왕이 손짓으로 다가오라고 하자 두 사람 다 무릎으로 기어갔다. 물론 허락이 있기 전까지 고개조차도 감히 들지도 못했고… 맨 왼쪽의 인물이 잠롱 전 시장이고 우측의 인물이 수찐다 총리인데, 잠롱 전 시장은 5월 18일에 시 현장에서 군부정권의 무장군인에게 연행되었으나 국왕의 호출로 이틀 만에 풀려났는데 군인들이 정중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또 이 날 푸미폰 국왕은 "국민을 위한 민주적인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로 사실상 수찐다 총리를 꾸짖었고, '''그날로 수찐다 정권은 실각됐다'''. 태국 정치에서 국왕이 미치는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사건이다. 다음은 영상에 나오는 왕의 꾸중이다.
현지에 나가 있는 한국 회사들도 왕이나 왕족이 방문했을 때 무릎을 꿇는 이벤트를 벌였다.국가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며, 하나 또는 두 명의 특정 사람들에게는 속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서로 이야기하고 함께 해결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고한 시민이 피를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폭력에 의지하면 마음을 잃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왜 그들이 서로 싸우며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서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유일한 승자가 되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길은 승리로 이어지지만 위험합니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을 것입니다. 서로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패자가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패자의 국가가 될 것입니다. ... 유적과 파편에 서있을 때 그대가 승자라는 것을 당신은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불기 2535(1992)년 9월 20일
사실 태국은 1932년 전까진 입헌군주제도 아닌 '전제군주국'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왕은 말 그대로 '신'이나 다름없었으나, 당시 짜끄리 왕조가 무능과 혹정을 거듭하던 중 1932년 6월 24일에 무혈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태국은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혁명을 주도한 사람은 중급 관리였던 쁘리디 파놈용과 쁠랙 피분송크람 장군. 이들의 무혈 혁명으로 인해 150년간 굳건하던 짜끄리 왕조는 일시적으로 힘을 잃고 라마 7세 왕은 영국으로 망명해 거기서 죽었다. 젊어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라마 8세[4] 의 뒤를 이어 즉위한 그 동생인 푸미폰 국왕 역시 초기에는 군부 세력 및 그 후계자들의 조종을 받았으나 차츰 권력을 장악해 현재는 승리자가 되어 있다.
그러나 국왕의 위세가 몹시 강하기 때문에 사실 왕가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그 비판도 대놓고 말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명백한 사실. 또한 탁신 축출에 푸미폰 국왕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온다는 것을[5] 보면 지금도 왕실의 권력은 막강한 셈.
태국 국왕과 왕가인 짜끄리 왕조에 대한 태국인들의 존경심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는데 과거 서방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주변 나라들이 죄다 식민지화가 진행될 때 태국은 왕을 중심으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대나무 외교를 하여 결국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냉전 시기에는 서방으로부터 독립한 주변 나라들에서 서방에 대한 반감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열풍이 불어닥쳤으나 태국은 '''주변국들이 공산화되는 와중에도 왕을 중심으로 꿋꿋이 왕국 체제를 유지했다.''' 이렇듯 주변 정세가 어지럽고 혼란한 상황에서도 짜끄리 왕가는 나라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왕실에 대한 태국 국민들의 지지와 사랑은 엄청날 수밖에... 그래서 이와 같은 시기에 왕위를 역임했던 라마 5세와 라마 9세는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특히 존경을 받는다.
선왕이 존경을 받았지만 뒤를 이은 마하 와찌랄롱꼰[6] 의 경우 한량스러운 인물[7] 인데다가, 폭력적이고 감정기복이 심한 충동적인 성격이라 평판이 안 좋아[8] 미 외교 대사에 따르면 태국 정세가 불안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3. 여담
태국 국왕은 삼종신기가 아니라 오종신기, 즉 5개의 레갈리아를 물려받는다고 한다.
이외에도 태국 왕실은 굉장히 대단한 보물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인 골든 주빌리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고 있다. 이 다이아몬드는 비교적 최근인 1985년 남아공에서 발견되었는데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즉위 50주년(골든 주빌리)[9] 기념으로 국왕에게 바치기 위해 태국의 보석상 헨리 호의 주도로 태국의 재벌들과 기업가들이 돈을 모아서 드비어스로부터 이 다이아몬드를 구입하여 국왕에게 헌상했다고 한다. 이 다이아몬드는 현재 태국 왕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국왕을 상징하는 색깔은 노란색이며 왕비는 파란색, 왕족들 중 가장 지지기반이 확고한 둘째 공주는 보라색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는다.
4. 역대 태국 국왕 목록
4.1. 수코타이 왕국
4.2. 아유타야 왕국
4.3. 톤부리 왕조
4.4. 짜끄리 왕조
짜끄리 왕조의 국왕들에게 붙은 '라마'는 힌두교의 비슈누의 화신 라마를 의미하며, 왕의 이름이 아니다.
과거 태국의 국왕들은 신성화 차원에서 간혹 자신을 라마와 동일시하도록 했는데, 서구화를 이루게 되면서 서양의 왕국들이 ''XX n세"로 왕호를 칭하던 것을 본받고자 했으나 이는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던 태국의 관습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국왕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1대 국왕 하는 식으로 대수를 붙여 말했는데, 여기에 태국 국왕을 상징하는 라마를 덧붙인 것이 "라마 X세" 식으로 정착한 것이다. 이러한 괸습을 시작한 것은 라마 6세이다.
[1] 심지어 유흥업소 간판에도 붙어있다.[2]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예로는 탁신 총리에 대한 쿠데타가 있다.[3] 영상 처음에 나오는 인물은 현재 태국 국왕인 라마 10세이다. 잘 보면 왼쪽에 태극기가 보인다. 당시 왕세자 신분으로 대한민국을 국빈 방문 중이었기 때문.[4] 이 암살사건에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관련되어 있다거나 라마 9세가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을 정도였다.[5] 일단 태국 군부는 왕실을 지지하니 왕의 허가가 없었다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6] 태국군의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고, 슬하에 5남 2녀를 뒀다.[7] 부인이 3명이나 되는데 여기에 정부도 뒀다.[8] 게다가 에이즈나 C형 간염, 혈액암 등 혈액 관련 질환을 앓는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또한 본국이 아닌 유럽에서 지내며 민심을 잃은 데다가 2009년에는 셋째 부인인 스리라스미 왕자비가 알몸에 팬티만 걸치고 왕자의 애완견(!)의 생일을 축하하는 외설스러운 비디오 동영상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9] 19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