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디 모스
1. 개요
'''천재(Phenom)'''
前 NFL 선수로, 포지션은 와이드 리시버였다. 제리 라이스를 잇는 NFL 최고의 와이드 리시버를 논할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대선수로, 통산 리시빙 터치다운 2위(156개), 단일시즌 리시빙 터치다운 1위(23개) 등의 대단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순수한 와이드 리시버로써의 기량만 본다면 그를 제리 라이스보다 뛰어난 선수로 보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2. 커리어 초창기
랜디 진 모스는 1977년 2월 13일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랜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다양한 운동종목에 두각을 나타냈던 모스는 고등학생에 이르러 웨스트 버지니아 최고의 미식축구 선수로 발돋움한다.[3] 또한 육상에서도 만 15세에 100m를 10.9초에 주파하며 주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으며, 야구에서도 버지니아 올해의 선수에 2번이나 선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 속에 당시 최고의 풋볼 명문인 노트르담 대학교가 모스를 주목했고 모스 역시 노트르담에서 뛰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가 폭행사건에 휘말리면서 노트르담 대학교는 진학 직전 그를 영입할 의사를 철회했고 랜디 모스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이러한 모스에게 플로리다 주립대학교가 흑기사를 자청하고 그를 스카우트한다.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노트르담 대학에 진학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레드셔츠[4] 를 받고 NCAA에 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사고를 치니, 앞서 밝힌 폭행사건으로 보호관찰에 놓인 상황에서 마리화나가 적발된 것. 이에 플로리다 주립대마저도 그를 퇴학조치시킨다.
결국 모스는 마샬대학교로 전학을 가고, 마침내 그의 재능을 발산하는데...
[5]
1학년에는 1,709야드에 28 터치다운, 2학년에는 1,820야드에 26 터치다운을 기록하고, 육상대표로도 뛰면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러한 활약 속에서 그는 대학교 최고의 와이드 리시버에게 주는 프레드 빌렛니코프상을 수상한다. 대학에서 더이상 이룰 것이 없다고 여긴 모스는 1998년 NFL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한다.
대학시절의 훌륭한 활약 덕분에 모스는 1라운드 상위픽으로 점쳐졌다. 그 중 그를 주시한 팀은 댈러스 카우보이스였고, 모스 역시 댈러스 카우보이스 팬으로 자랐기에 누구보다도 카우보이스가 자신을 뽑아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마이클 어빈의 사생활 논란 등으로 골치를 썩였던 카우보이스의 구단주 제리 존스는 모스의 범죄경력을 우려해 최종적으로 그를 드래프트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에 대해 모스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고 이후 카우보이스를 상대로 활약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사실 모스의 과거 전력 때문에 카우보이스뿐만 아니라 많은 팀들이 그를 뽑길 주저했고 당초 탑텐픽이 유력했던 그는 20개 팀이 지나치면서 1라운드 21순위로 미네소타 바이킹스가 낚아채간다. 그리고...
3. 충공깽의 데뷔시즌
당시 바이킹스는 크리스 카터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와이드 리시버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모스까지 가세하면서 1998시즌 최고의 오펜스 파워하우스로 자리매김한다. 모스의 활약은 가히 충격적이었는데, 1,313 야드에 '''17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면서 '''데뷔시즌에 프로볼, 올프로에 선정된다'''. 그가 세운 루키시즌 리시빙 터치다운 17개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모스와 카터의 원투펀치에 힘입어 바이킹스는 그해 정규리그에서 15승 1패를 기록하고 당시 최고였던 총점 556점을 기록하는 역사적인 시즌을 보낸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는 애틀랜타 팰컨스에게 충격적인 업셋을 당하면서 슈퍼볼 진출에 실패한다. 그리고 9년 후 그는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역대급 루키시즌과 함께 랜디 모스는 리그의 슈퍼스타로 발돋움한다. 바이킹스와 함께 했던 첫 7년동안 모스는 정규시즌 9,142 리시빙 야드와 90개의 리시빙 터치다운을 기록하고, 5번의 프로볼과 3번의 올프로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린다. 2003 시즌에는 1,632 리시빙 야드에 17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그는 바이킹스와 8년 7,500만달러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4. 블랙홀[6] 에 빠지다
그러나 2004시즌 모스는 부상에 신음하면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1,000+ 리시빙 야드를 기록하지 못하고, 그의 실력은 높이 샀지만 크고 작은 경기외적인 논란과 샐러리 캡 등으로 골머리를 앓던 바이킹스는 그를 처분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2004시즌 종료 후 모스는 라인배커 나폴레옹 해리스와 1라운드 지명권을 대가로 오클랜드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된다.
당시 오클랜드 팬들은 랜디 모스라는 슈퍼스타가 로스터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두손 벌려 환영했다. 비록 전시즌은 부상 때문에 실력 발휘를 못했지만 그가 미네소타에서 보여줬던 활약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야유로 바뀌는 데에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랜디 모스의 오클랜드에서의 2년은 본인도 인정하는 '재앙'이었다. 첫번째 시즌은 잔부상으로 시름했다지만 그러한 요소를 고려해도 생기가 없는 느낌이었고 두번째 시즌에는 태업이 의심될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레이더스에서의 2년동안 그는 1,558 리시빙 야드에 11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는데 이는 그가 2003년 한시즌동안 작성했던 기록보다 떨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본인 입으로 '불행하다'는 얘기를 하면서 사실상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2006시즌을 끝으로 레이더스와의 불편한 동거는 끝나게 된다.
5. 거짓말같은 부활, 더 거짓말같은 전승준
주가가 땅에 떨어진 모스를 패트리어츠가 4라운드 지명권이라는 헐값에 보스턴으로 데려온다. 모스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었지만 지난 세시즌간 선수생활이 끝난 것같은 폼을 보여줬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빌 벨리칙과 톰 브래디는 랜디 모스의 능력을 높이 샀고 특히 브래디는 자신의 연봉까지 삭감하면서 모스의 영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들의 안목은 정확했다.
죽어가는 사자로 여겨졌던 모스는 패트리어츠의 하이-파워 오펜스 속에서 물만난 물고기마냥 활약한다. 2007시즌 그는 정규리그에서 '''23개'''의 리시빙 터치다운을 기록, 종전 제리 라이스가 보유했던 22개를 경신하면서 '올해의 재기상'을 수상한다. 브래디 역시 50개의 패스 터치다운을 기록하고 팀은 '''16전 전승'''의 NFL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패트리어츠는 전대미문의 19승 0패로 슈퍼볼 우승까지 차지하나 싶었지만...슈퍼볼 XLII에서 희대의 업셋을 당하며 그 유명한 전승준 시즌을 기록하게 된다.
6. 황혼기와 마지막 슈퍼볼 도전
너무 충격적인 시즌 엔딩 때문일까. 모스는 이후 두시즌동안 준수한 활약을 펼쳤지만 과거의 폼은 되찾지 못하고 결국 2010시즌 4경기 이후 패트리어츠로부터 컷당한다.[7] 이후 테네시 타이탄스로 갔다가 친정팀 미네소타 바이킹스로 복귀하는 등 해당 시즌에만 3개의 팀에서 뛰었고, 시즌 종료 후 은퇴...하는 줄 알았으나
2012시즌 깜짝 복귀를 선언하며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 입단한다. 그는 더이상 자신이 No.1 리시버가 아님을 인지하고 조력자로 활약, 팀도 슈퍼볼에 진출하면서 드디어 롬바르디 트로피를 들어올리나 싶었지만...볼티모어 레이븐스에 석패하면서 또다시 우승에 실패한다. 그래도 해당시즌에 3개의 터치다운을 추가하면서 터렐 오웬스를 넘어 역대 리시빙 터치다운 부문 단독 2위에 오른것이 위안이라면 위안. 이 시즌을 끝으로 그는 완전히 은퇴한다.
7. 은퇴와 그 이후
은퇴 이후에는 폭스 스포츠의 애널리스트로 활약하다, 2016년 ESPN으로 자리를 옮겼다.
명예의 전당 입성 자격이 주어진 2018년 한턴만에 들어갔다. 그가 선수로 이룬 업적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 이게 얼마나 대단한거냐 하면 리시버가 첫해 입성한 건 제리 라이스 이후 처음이다. 제리 라이스 전에 첫해 입성했던 선수들은 스티브 라전트, 레이몬드 베리, 폴 워필드, 랜스 올워스 넷 밖에 없었고 그들은 90년대 전에 은퇴했던 한참 선배들이다. 그 후로 마빈 해리슨, 터렐 오웬스, 마이클 어빈, 크리스 카터, 아트 몽크, 제임스 로프튼 같은 기라성 같은 리시버들이 첫턴 입성을 실패했던 걸 보면 랜디 모스가 얼마나 폭발적인 임팩트를 남겼는지 알 수 있다.
아들인 테디어스 모스(Thaddeus Moss)도 아버지를 따라 미식축구 선수이다. 포지션은 타이트엔드이고, 2020시즌에 조 버로우와 함께 LSU 타이거스를 NCAA 우승으로 이끌고 2020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하였다. 드래프트에는 아무도 지명하지 않았지만 워싱턴 레드스킨스와 계약을 맺었다.
8. 플레이스타일
193cm의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상기된 바와 같이 육상대표로 뛰었던 경력 등 무시무시한 스피드를 보유했다. 공식기록은 없으나 컴바인 당시 4.2~4.3초대를 뛰었다고 한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역대 러닝백 중 가장 빠른 컴바인 기록을 가졌던 크리스 존슨이 4.24초였다. 와이드 리시버는 대개 힘이 좋고 사이즈가 큰 유형의 선수, 작지만 스피드와 민첩성이 좋은 선수로 나뉘는데 모스는 '''크면서 빨랐다'''. 그래서 현지에서 모스에 대해 설명할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Phenomenal athlete' 혹은 'Freak of nature'이다.'''랜디 모스는 내가 본 최고의 리시버이다.'''
ㅡ 크리스 카터[8]
여기에 말라보이는 프레임에도 몸의 밸런스가 좋았고 사이즈와 스피드, 점프력과 글루핸드를 모두 보유한 완성형 선수로 자타공인 리그 최고의 와이드 리시버였다. 특히 그의 버티컬 게임[9] 은 역대 최고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전성기 시절엔 반농담으로 쿼터백이 눈감고 던져도 모스가 받아낼 것이라고 할 정도였고, 상대 코너백보다 기본 10cm는 더 큰 모스의 피지컬을 당해내지 못하고 상대팀은 모스를 상대하기 위한 수비전술을 별도로 짜야 했다. 이랬을 정도라, 모스의 반대편에서 활약하던 바이킹스의 또다른 레전드급 리시버 크리스 카터가 노쇠화로 2001년 시즌 종료후 팀을 떠나자, 믿을수 있는 타겟이 모스 1명뿐이었던 바이킹스는 이럴바엔 아예 모스한테 몰빵하자!라는 Moss Ratio라는 전략으로 아예 유의미한 패스는 모스한테 던지고 보는 몰빵풋볼을 시전했을 정도. 그게 또 통했으니 전성기 모스가 얼마나 괴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전성기가 짧았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비교대상이 제리 라이스나 터렐 오웬스[10] 같은 자기관리의 화신일 뿐 만 32세까지 1,000+ 리시빙 야드를 기록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멘탈레기라고 불릴만한 사고를 꽤나 친 편이다. 오델 베컴 주니어처럼 경기 중 평정심을 잃고 천방지축 날뛰는 유형은 아니었지만 리그의 대표적인 기분파로 이름을 떨쳤다. 그 유명한 'I play when I want to play' 사건이나, 오클랜드에서처럼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태업에 가까운 플레이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대표적인 예.
9. 여담
전설적인 Full Moon 셀레브레이션.
동시대의 터렐 오웬스와 함께 리그를 대표하는 와이드 리시버였으며 동시에 둘다 악동 이미지가 강했다. 고등학교 시절 폭행사건부터 시작해 마리화나 적발, 여자친구 폭행 등의 사생활 논란, 미디어와의 불편한 관계, 패커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줬던 악명높은 'Full Moon' 셀레브레이션[11] 등 경기 내외적으로 잡음이 상당했던 선수. 하지만 선수 시절 워낙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2010년 이후로는 별다른 사고없이 지내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써는 많이 희석되었다.
[1] 영화 '위 아 마샬'에 등장하는 그 마샬대학교 맞다.[2] 오클랜드 레이더스 팬덤을 일컫는 지칭이며 동시에 부진에 빠졌다는 이중적인 의미의 표현[3] 고교시절 다양한 운동에 두각을 보였는데 농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이슨 윌리엄스의 농구 팀 동료기도 했다.[4] 한마디로 일년을 꿇는 것[5] 이 동영상의 쿼터백은 뉴욕 제츠와 마이애미 돌핀스등을 거친 유리몸의 전설 격년제 쿼터백 채드 페닝턴이다.[6] 오클랜드 레이더스 팬덤을 일컫는 지칭이며 동시에 부진에 빠졌다는 이중적인 의미의 표현[7] 톰 브래디와의 불화도 컷의 주 원인이었다.[8] 명예의 전당 와이드 리시버이자 랜디 모스의 바이킹스 시절 동료. 한 시대를 제리 라이스, 마이클 어빈과 풍미했던 90년대 최강의 리시버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며, 특히 커리어 내도록 보여준 원핸드 캐치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현재는 폭스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중.[9] 딥-볼 오펜스(롱패스 오펜스)[10] 오웬스는 사고뭉치이긴 했으나 자기관리는 매우 철저했던 선수이다. 일단 37살까지 선수생활을 했고, 당장 45살인 현재 그의 몸 상태를 보면 답이 나온다.[11] 미국에서 상대에게 엉덩이를 들이대는 짓은 상대를 모욕,능멸하는 수준의 도발이다. 그 짓거리를 미네소타 바이킹스 유니폼을 입고 사이 나쁘기로 유명한 위스콘신 그린베이 사람들에게 했으니... 이걸 아는 위스콘신 출신 사람들은 랜디 모스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이걸로 엄청나게 화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