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 슈나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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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로미 슈나이더 (Romy Schneider)
'''본명'''
로스마리 막달레나 알바흐 (Rosemarie Magdalena Albach)
'''국적'''
독일 [image] | 프랑스 [image]
'''출생'''
1938년 9월 23일, 나치 독일[1]
'''사망'''
1982년 5월 29일, 프랑스 파리
'''직업'''
배우
'''신장'''
162cm
'''활동'''
1953 –1982
'''가족'''
헤리 마이언 (1966–1975), 1남
다니엘 바이사니 (1975–1981), 1녀

''' 역대 세자르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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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주연상'''
''' '''

''' 제1회
(1976년) '''

''' 제2회
(1977년) '''


'''로미 슈나이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야)'''

아니 지라르도
(Docteur Françoise Gailland)

''' 제3회
(1978년) '''

''' 제4회
(1979년) '''

''' 제5회
(1980년) '''
시몬 시뇨레
(마담 로자)

'''로미 슈나이더
(어떤 이혼녀)'''

미우 미우
(밤이여 안녕)

1. 생애
2. 여담


1. 생애


배우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할머니와 부모님 모두 배우 일을 하셨다. 아버지인 울프 알바흐티 레티는 오스트리아계 였으며, 어머니인 마그다 슈나이더는 독일인이었다. 항상 바빴던 로미의 양친은 딸을 외가에 맡겨 로미는 바이에른의 풍광 속에서 자랐다. 로미 슈나이더의 부모님은 1945년 이혼하셨으며, 어머니가 로미 슈나이더와 남동생의 양육권을 가져갔다.
그들의 이혼은 어린 로미 슈나이더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고 슈나이더는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 수많은 남성 편력의 한 원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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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인 마그다 슈나이더와
1933년 개봉된 영화 리벨라이[2]를 리메이크한 1958년 영화 '사랑은 오직 한 길'에 주연으로 캐스팅됐으며, 영화 촬영 중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알랭 들롱과 눈이 맞아 교제를 시작한다. 반대를 무릅쓰고 인기, 팬들, 영화 다 버리고 슈나이더는 알랭 들롱을 쫓아 파리로 떠나 그와 재회해 사랑을 확인한다. 하이틴 스타인 딸의 이미지를 위해 반대하던 마그다와 계부가 결혼을 허락, 스위스에서 1959년 약혼을 발표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가장 뷰티풀 커플로 꼽힌 둘의 순정만화 같은 사랑은 로미가 할리우드로 스카웃되어 원거리 연애, 둘 다 촬영 스케줄로 인해 관계가 소홀해지며, 그리고 자식 딸린 이혼녀 나탈리 바르텔미의 등장으로 알랭이 이별을 고하면서 1963년 결별했다.
이후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로미 슈나이더는 영화의 부진과 불안정한 상태로 귀국하고 예술 연출가 하리 마이엔과 사랑에 빠졌다. 독일 출신의 감독이자 배우, 유부남이었던 그를 얻자고 가정파탄범이란 오명과 부인에게 거액의 돈을 주어가며 갈라놓은 슈나이더는 마이언과 1966년 7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올린 해 아들 데이비드 크리스토퍼를 출산하지만 강압적이고 잘난 체하는 하리는 자신에 비해 스타인 아내를 상대로 질투심을 갖고 있었다. 끊임없는 맨스 플레인과 깎아내리기로 로미에 대한 열등감을 풀며 그녀를 가정에 묶으려 했고 이에 지친 로미는 프랑스 영화 <수영장>에 출연하면서 알랭 들롱과 재회,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로미를 여주에 추천한 사람은 알랭 들롱으로, 그 후로도 영화에 함께 출연하는 등 가까운 친구사이로 지냈다.[3]
로미 슈나이더와 알랭 드롱
끊임없는 싸움과 깎아내려지기에 질린 로미는 약, 술에 손을 대면서 이혼을 신청했지만 하리는 거부, 결국 그녀 재산을 반이나 주고 아들의 친권을 얻어 1975년 이혼하였다. 결혼 때부터 비난 받았던 하리와의 이혼은 슈나이더의 이미지를 더 나쁘게 만들어버렸다.
그 후 여러 남자를 오가며 사랑을 찾으려던 그녀는 백수 지골로인 다니엘 비아시니와 연애를 시작했고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1975년 개인비서였던 그와 결혼하였지만 아이는 유산됐다. 1977년 딸 사라 막달레나를 출산했다. 이 결혼은 그녀가 약과 술에 빠지고 부부 관계가 악화되다 연하남 롤랑 패탕과 외도하면서 1981년 또 다시 끝이났다. 현재 딸 사라는 어머니를 따라 배우활동을 하고 있다.
1981년 아들 다비트는 슈나이더와 애인의 불륜을 비난하고 새아버지 다니엘을 따라가버렸다. 로미는 절망했지만 다비트가 다니엘의 부모님 집에 못이 박힌 담장을 오르다가 추락해 넓적다리 동맥이 찔리면서 14살의 나이에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다비트의 시신 사진까지 공개하고 장례식에까지 침범한 파파라치 무리에게 쫓겼던 슈나이더와 충격을 받은 다니엘 대신 장례식을 책임진 사람은 알랭 들롱으로, 그는 헬기를 타고 날아와 두 사람을 격려하고 할 수 있는 한 일을 해냈다.
이후 다니엘과의 이혼이 완료됐고 슈나이더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다비트를 잃자 술에 의지하며 살 정도로 음주를 과도하게 했으며 살기 위해 유작인 '최후의 증언' 촬영에 몰두했다. 슈나이더는 영화에서 양자를 연기한 아역 배우에게서 다비트를 보았기에 괴로워 처음에는 냉담했지만 종료 무렵에는 매우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1982년 5월 29일 향년 43세의 나이에 파리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망 기사가 난 후 실내에 마시고 있던 와인과 약으로 수면제와 알코올을 과다 복용해 자살한게 아니냐는 루머가 있었지만, 부검결과 당국은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이라고 발표했다.
사망 후, 슈나이더의 친구 클로드 페탱의 말에 의하면 슈나이더는 사망으로 이어질 만큼의 음주는 하지 않았으며, 심장마비의 원인은 사망 몇 개월 전 받았던 신장 수술로 인해 심장이 약해져 심장마비가 발생한 거라고 밝혔다. 슈나이더는 사망 직전까지 영화 제작자였던 로랑 페팅과 동거했으며, 슈나이더가 깨어나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도 그였다.

2. 여담


  • 상당한 애연가였으며, 하루에 최대 말보로 3갑 정도를 피웠다고 한다.
  •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배우 시몬 시뇨레와 베스트 프렌드로 지냈으며, 로미 슈나이더의 아들이 사망한 후 슈나이더의 유작인 '최후의 증언'에 출연하도록 설득시킨 것도 시몬 시뇨레가 했다고 한다.
  • 본인의 우상이자, 같은 독일출신 여배우인 마를레네 디트리히와도 친하게 지냈다.

[1] 왜 오스트리아가 아닌지는 안슐루스 참고.[2] 영화 여주인공이 로미 슈나이더의 어머니 마그다 슈나이더다[3] 결별 후 함께 출연한 영화: 1969년 개봉작 '태양은 알고 있다', 1972년 개봉작 '트로츠키 암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