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와할랄 네루

 



'''인도 공화국 초대 총리
Pandit
Jawaharlal Nehru'''
'''जवाहरलाल नेहरू
جواہر لعل نہرو
Jawaharlal Nehru
자와할랄 네루'''

<colbgcolor=#248c4c> '''출생'''
1889년 11월 14일
영국령 인도 제국 알라하바드
(現 우타르프라데시 주 알라하바드)
'''사망'''
1964년 5월 27일(향년 74세)
'''국적'''
[image] 인도 제국[image] 인도
'''학력'''
해로우 스쿨 (졸업) (-190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자연과학 / B.S.) (-1910년)
Inns of Court[1]
'''정당'''
'''인도 국민 회의''']] '''
'''신장'''
176cm
'''종교'''
힌두교
'''배우자'''
카말라 네루 (1916년 결혼, 1936년 사별)
'''자녀'''
인디라 간디
'''직업'''
정치인, 독립운동가
'''약력'''
인도임시정부 부수상
인도 외교부장관
1947년 – 1964년
인도 재무부장관
1956년 – 1956년
1958년 – 1958년
인도 국방부장관
1953년 – 1955년
1957년 – 1957년
1962년 – 1962년
'''총리직'''
'''인도 초대 총리'''
'''임기'''
1947년 8월 15일1964년 5월 27일[2]
[image]
인디라 간디와 함께.
1. 개요
2. 생애
3. 네루의 후예들
4. 저술
5. 영국에 대한 태도
6. 마운트배튼 백작부인과의 관계
7. 기타
8.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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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인도독립을 이끈 독립운동가, 정치가. 영국에서 사실상 독립해 세워진 인도 자치령의 유일한 총리이자 1950년 세워진 인도 공화국의 초대 총리이다. 비폭력 운동을 벌였던 마하트마 간디와는 달리 적극적인 파업과 투쟁적인 독립 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2. 생애


알라하바드에서 부유한 브라만 가문에서 출생하여 15세 때 영국에 유학하여 명문으로 손꼽히는 학교인 해로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은 후 귀국하였다. 그 이후에 변호사일을 가지다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마하트마 간디에게 감명을 받아 인도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1916년 간디의 영향을 받아 그 해 국민 회의에 참가하였고, 1918년 자치 연맹 간사, 국민 회의 의원이 되었다. 192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피압박국 국민대회에 인도 대표로 참석. 영국 왕태자의 인도 방문 때 파업 투쟁을 주도하여 1922년~1923년까지 투옥되는 등 독립을 이루기까지 9차례 투옥되었다. 1923년 알라하바드 시의회 의장에 선출되고 인도 국민회의에 20년 이상을 국민회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인도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협력하는 실질적 리더 역할을 했다. 1929년 국민 회의파 라호르 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비로소 인도의 완전 독립이 결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국민회의파 내각은 총사직하고 1942년 영국에 대한 인도로부터의 즉시 철수를 결의하여 간디와 함께 체포되면서 인도 국민을 시름에 빠지게 했다.
출소한 뒤 1946년 임시정부의 부수상 겸 외상이 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인도 제국파키스탄 자치령인도 자치령으로 분할되었다. 비록 분할이라는 국가적 비극(?)을 맞기는 했지만 어쨌든 인도는 자치령으로 지정되어 실질적인 독립을 달성했다.[3] 이 때 네루는 총리 겸 외상, 연방관계상에 취임하여 뉴델리에서 아시아회의를 주재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지 제도에 대한 항전을 재선언하였다. 그리고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헌법을 제정하고, 1950년에 인도 공화국을 선포하여 공식적으로 왕정을 폐지했다.
간디와는 독립투쟁을 함께 한 양대 거두였지만 간디와 다르게 철저한 세속주의자였다. 이는 네루의 사회주의적 사상도 크게 작용했는데, 보수파였던 간디와 달리 네루는 초대 총리로 취임한 이래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결합하는 사민주의 체제를 만들었으며 1947년 인도 자치령 정부가 수립된 후에 카스트 제도를 헌법상 폐지하는 등 소위 네루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카스트 제도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이를 막으려는 브라만 계층을 앞세운 간디의 저지를 받기도 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독립한지 1년 후 암살당하면서 네루에게 힘이 쏠리긴 했다.
외교적인 중립주의 노선 역시 네루가 이후 인도의 국제관계에 남긴 큰 방향이다. 특히 제3세계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반둥 회의를 주관한 사람 중 하나로 미국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신생독립국끼리 연대하여 국제질서를 유지한다는 전략을 다졌다. 반면 인접국과의 국경분쟁에는 적극적인 일면을 보여서 카슈미르에 출병하거나, 티베트문제로 막판에는 중국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네루는 파키스탄의 분리에 공헌한(?) 과오가 있었다고 했지만[4], 독립했을 당시 문맹률이 80%를 넘고, 카스트 제도가 뿌리깊이 박혀있었던 데다가 인도와 포르투갈, 프랑스가 직접 통치했었던 지역말고도 수백여개의 토호국이 잔존해있었던 인도에 의회민주주의 제도가 비교적 순탄하게 정착 될수 있었던 것과 절대 다수의 토호국들을 공화정을 채택한 인도로 비교적 큰 분쟁 없이 통합시켜서(다만 카슈미르만큼은 예외다.) 인도가 수십-수백여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지 않게 된 것도 전적으로 네루의 업적이다.
특히 파키스탄 분리 이후에 힌두 극단주의를 인도 사회 주류에서 배제하면서도[5] (사실 이는 마하트마 간디가 힌두 극우파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 결정적인 요인이긴 했지만) 인도를 힌두교인"만의" 국가로 만들어내지 않고,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세속국가로 만들어낸데다가 독재의 유혹에도 빠져들지 않았고, 굳건하게 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점을 보면 정치적인 능력 하나는 특출하다는 걸 알수 있다. 비록 인도가 그 이후로도 항상 민주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인디라 간디가 독재적인 정치를 펼친 바 있기는 하지만 같은 인도 제국 출신 국가이면서 군사독재에 빠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나 아예 내전을 한바탕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평화가 정착된 스리랑카에 비하면 안정적인 민주정 체제가 잘 정착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2차 산업에 대해 투자를 집중하면서도 1차 산업을 상대적으로 경시했었고[6] 특히나 산업정책 전반에 대한 국유화 정책을 실시하면서도 토지개혁을 주저하는 바람에 빈부격차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데다가, 계획경제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부정부패 척결에 실패하여 결과적으로 비효율적인 경제체제를 갖추게 되어 1980년대까지 인도 경제가 도약하는데 실패하였다는 점때문에 네루를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있다.1964년 5월27일 심근경색으로사망한다

3. 네루의 후예들


브라만 출신의 거두 정치인이라 사후에도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네루는 1917년 카말라 네루[7]와 결혼했다. 하지만 자와할랄 네루 자신은 카말라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집안의 관계에 따라 맺어진 정략결혼이기도 했고, 영국에서 유학해 모국어인 힌디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잘 했던 본인과 달리 카말라는 영어도 잘 몰랐던 전통적인 힌두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인 인디라 간디[8]는 극진히 사랑했다.[9]
1936년 카말라 네루와 사별하고 나서 딸 인디라 간디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거의 퍼스트 레이디 노릇을 하다시피 했다. 인디라 간디 역시 아버지를 따라 인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64년 아버지 사후에 인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1980년 시크교도들의 독립운동을 강경 진압한 데 대해 앙심을 품은 시크교도 경호원에게 총격을 받아 1984년 암살당했다.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자 외손자인 라지브 간디 역시 인도의 총리를 지냈으나 그도 1991년 스리랑카 내전에 개입했다가 타밀족의 자폭 테러로 어머니처럼 암살당하고 말았다.
라지브 간디의 부인(즉, 인디라 간디의 며느리이자 네루의 손자며느리)인 이탈리아 출신의 소니아 간디[10] 여사가 1998년 국민회의당 당수로 선출되어 인도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소니아 간디는 2000년대 중반 국민회의당의 재집권, 만모한 싱의 수상 선출 등을 주도하는 등 인도 정계의 실력자로 자리잡았다.[11][12] 그녀의 아들인 라훌, 딸 프리앙카도 가문의 후광을 바탕으로 정계에 안착하면서 인도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 중. 말하자면 네루 가문의 영향력은 무려 4대에 걸쳐 인도 정계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image]
네루 가문의 위엄. 왼쪽부터 네루, 인디라 간디, 라지브 간디, 소니아 간디, 프리앙카, 라훌

4. 저술


문필가로서 대표적인 저작인 세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세계사 편력>(1934년), <자서전>(1936년), <인도의 발견>(1946년)이 그것이다. 제3세계에 박한 한국이지만 아무래도 영어로 쓰여있다 보니 쉽게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더불어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내는 편지를 교도소 안에서 썼는데 기네스북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편지로 인정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썼다. <세계사 편력>이 이 편지를 추린 것이다. 한국에선 2004년 일빛에서 3권짜리 책으로 나왔는데, 1500페이지에 달한다. 이 편지를 보면 한반도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매우 찬양하며 당시 어린 소녀였던 인디라 간디에게 본을 보이려는 듯 유관순 열사를 매우 격찬하는 서술이 쓰여있다. 더불어 네루는 일본도 영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이니 인도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여기지 말고 주의해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13]

5. 영국에 대한 태도


인도의 독립 운동가이지만 자신을 "인도를 통치한 마지막 영국인"이라고 칭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도인과 영국인의 중간쯤 위치에 놓았다. 네루 뿐만 아니라 다른 인도의 엘리트[14]들도 영국에서 공부하고 영국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독립후 60년이 넘은 시점에서도 인도 상류층은 자기 집의 실내 양식으로 영국식으로 꾸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15] 정치인들이 매스미디어에 나올 때 입고 나오는 다양한 전통 복장은 평소 복장이 아니라 일부러 입고 나온 정치적 프로파간다이다. 민족적 배신 행위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영국의 의회 정치 문화가 상류층에 내면화된 덕분에 높은 부패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나 언론의 자유는 그럭저럭 잘 지켜지고 있다.

6. 마운트배튼 백작부인과의 관계


영국 문화에 익숙하여 신사적인 태도를 갖추었고, 외모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다. 그렇다 보니 주변에 여자들이 꼬였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이었다.
[image]
네루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여성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이다.
그녀는 바로 인도 제국의 마지막 총독이자 인도 자치령의 초대 총독이었던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16]의 아내였다. 네루와 에드위나는 1947년(인도영국으로부터 해방된 해)부터 관계가 가까워진 것 같다. 인도에서는 육체관계는 없고 플라토닉 러브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루이와 에드위나의 두 딸은 "직접 본 게 아니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에드위나와 네루의 성격으로 봐서 실제로 육체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루이와 에드위나 부부의 두 딸 패트리샤와 파멜라, 특히 파멜라는 네루와도 아주 친해서 두 사람의 증언은 꽤 신빙성이 높다. 하지만 네루와 에드위나 두 사람의 애정 문제가 아니고 네루의 연령 때문에 실질적 육체 관계는 어려웠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루이 마운드배튼 백작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묵인하고 있었다. 네루는 에드위나 뿐만 아니라 루이 마운트배튼과도 굉장히 친했는데, 루이와 에드위나 모두 자유로운 연애관계를 신봉했던 관계로 두 사람이 결혼할 때부터 상대방의 성생활에서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결혼했다. 때문에 루이와 에드위나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양해 아래 자유롭게 성생활을 누렸고 이런 두 사람의 관계는 영국 상류층에서는 거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17] 이러한 마운트배튼 백작 부부와 네루의 독특한 인간적 관계는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유혈사태나 특별한 장애없이 일이 부드럽게 진행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이 로맨스(불륜)를 소재로 영화를 촬영하려고 했으나 인도 정부의 요청으로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해도 네루란 거물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기엔 너무 민감하기 때문이다. 인도뿐 아니라 영국 왕실의 인척이 엮여있으므로 아마 영국 왕실도 싫어했을 것이다.[18] 인도 독립 이후 1960년, 그녀는 남편과 함께 당시 영국령 북보르네오(현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 시찰 중 원인을 알 수 없이 사망하는데[19], 평소 자신이 죽으면 고향바다에 수장해달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영국 포츠머스 바닷가에서 영국 구축함 HMS 웨이크풀 호 선상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이때 네루는 인도 해군의 구축함을 2대나 보내서 그녀의 유해를 호위하도록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에드위나 개인에 대한 사랑도 있었겠지만 루이 마운트배튼이 공식적으로 인도 자치령의 초대 총독(사실상의 초대 국가 원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위나는 인도 자치령의 초대 영부인이 되며 네루는 인도 자치령을 승계한 인도 공화국의 총리로서 에드위나의 죽음에 대해 인도 자치령 초대 영부인에 걸맞는 예우를 해준 것이다.

[image]
세 인물의 관계가 매우 잘 드러난 사진.

7. 기타


  • 인도에서 떠도는 음모론으론,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인도인들이 인도 독립에 기여한 인물로 존경하는 찬드라 보스를 암살한 인물이 네루라는 설이 있다. 정신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간디를 제외하면 현실 정치에서 네루와 겨룰 인물은 찬드라 보스가 사실상 유일하였고, 이에 네루가 손을 써서 찬드라를 제거했다는 설. 물론 음모론의 특성상 명확한 증거는 없다. 게다가 보스가 죽은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보면...
  • 사진에서 종종 쓰고 있는 네루의 흰 모자를 인도에서는 보통 네루 캡(cap) 혹은 간디 캡 이라 부른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국유학을 갔다가 정계복귀를 하며 창당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새정치국민회의가 이 네루의 국민회의파에서 따왔다는 말이있다.

8. 매체에서


[image]
리처드 애튼버러의 영화 간디(영화)에서는 인도계 영국 배우 로샨 세스가 분했다. 간디의 열렬한 추종자로 묘사되며 영화 막판에 힌두교 급진주의자들이 간디를 죽이자고 구호를 외치자 격노해서 어떤 놈이냐! 날 먼저 죽여봐라! 라고 마구 호통을 칠 정도. 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를 막기 위해 인도의 초대 내각을 무슬림으로 구성하자는 간디의 제안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거절한다.

[1] 영국 특유의 법학원이다. 사르다르 파텔 부총리도 이 과정을 이수하였다.[2] 재임 중에 타계했다.[3] 자치령은 대영제국의 자치공동체지만 이 시기의 자치령은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인해 내정 자치권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갖는 사실상의 독립국가였다. 다만 영국 국왕을 실권 없는 국왕으로 모시고, 형식상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실권 없는 총독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아예 자치령으로 지정하는 법안이 Indian Independence Act 1947이었으니 독립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4] 그러나 이를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 이 문서만 봐도 알수 있듯이 당시 인도의 종교갈등은 아주 극심한 상태였고, 이미 영국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른 상태였다.[5] 힌두 극우파는 1970년대부터 다시 지방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하고, 1980년대 후반 들어 이들이 포함된 정당인 인도 인민당이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여 1991년 총선에서 아요디아 모스크 파괴사건을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으면서 제1야당이 되더니 90년대 중반에 아예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인도 인민당은 여당과 야당을 오가고 있다.[6] 다만 비슷한 시기에 일본이나 북한, 대한민국 등도 2차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었고,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던지라 딱히 네루만 탓하기엔 묘하다.[7] Kamala Nehru. 결혼 전 성은 카울Kaul로서 델리의 브라만이다.[8]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와는 무관하다. 인디라의 남편은 페로젠 간디로, 마하트마 간디와는 단지 성씨만 같은 사람이다. 태어날 때에는 인디라 네루였던 셈. 간디라는 성씨가 꽤 흔하다고 한다.[9] 그러나 딸을 사랑한 것과 별개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직업활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영국 유학을 가서는 1년에 용돈을 800파운드나 쓸 정도로 방탕하게 놀았으면서, 정작 돈을 벌어야 할 때가 되어서는 본업인 변호사는 팽개치고 정치에 빠져 버린 탓이다. "네 어머니, 누이들, 아내, 딸은 도대체 언제 먹여살릴 테냐!"하고 화를 내는 네루 부친의 편지가 남아 있을 정도. 네루의 부친도 변호사로, 평생 근면하게 변호사 일을 했다.[10] 본명은 안토니아 마이노(Antonia Maino)로, 라지브 간디와 결혼하게 되면서 이름을 이탈리아식 이름인 안토니아에서 비슷한 발음의 인도 이름인 Sonia로 개명했다.[11] 일반적인 경우라면 집권당 당수인 소니아 간디 자신이 수상이 될 수 있었지만, 외국 태생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막후 실세가 되는 편을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울러 자신의 시어머니, 남편이 수상으로 재직하다가 피살당했던 위험부담도 고려되었을 가능성도 충분.[12] 원래의 소니아는 모국 이탈리아의 정치에도 큰 관심은 없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결혼 해서도 내조에 충실한 삶을 꿈꾸었다고 한다. 애초에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다 트리니티 칼리지 재학 중이던 라지브 간디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 이른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나 네루-간디 가에 시집 온 이상, 정계 입문의 압박을 계속해서 받아 왔으며,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편 라지브 간디가 암살 당하면서 선택의 여지 없이 정계 입문을 하게 된 케이스. 게다가 일단은 '''외국인''' 출신이기도 하고, 직접 수상이 되는 것 보다 당의 실세로 남는 것이 그녀에게도 최선의 선택이었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그녀는 당 수장이 되기 이전에 그 어떤 공직도 맡은 바 없는 사람이기 때문. 소니아 간디가 집권당의 총재까지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거의 "세습제"처럼 되어 버린 인도의 비정상적인 정치 지형 덕분이다.[13] 그러나 동료 독립운동가 중 1명인 찬드라 보스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일본과 협력했다가 큰코다친다.[14] 대부분이 브라만[15] 정작 동시대 영국에서는 인도풍이 유행하기도 했다.[16] 1900~1979.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인 에드버러공 필립 마운트 배튼의 삼촌이며,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으로 여왕의 친척이기도 했다. IRA의 폭탄테러 공격으로 자신의 요트에서 끔살당했다.[17] 그래도 에드위나 소생의 두 딸은 모두 생물학적으로 루이의 자녀들이 맞다. 특이한 예를 하나 들자면 루이의 정부였던 젊은 여성 중 하나는 동시에 에드위나의 동성애 상대였던 경우도 있었다.[18] 비슷하게 태국의 국왕과 서양여인의 러브스토리인 <왕과 나> 나 <애나 앤드 킹> 같은 작품도 태국인들은 왕실모독이라며 굉장히 싫어하며 상영금지 처분이다. 다만 애나 레오노웬스가 라마 4세와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눴다는 건 애나 레오노웬스 혼자의 주장일 뿐 증거나 증인이 하나도 없는데 비해 에드위나와 네루가 아무리 못해도 플라토닉한 연인 관계였다는 증거와 증인은 차고 넘친다.[19] 파티 도중에 두통을 호소하며 잠을 자러 갔는데 다음 날 아침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