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피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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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루트비히 카를 피르호(Rudolf Ludwig Karl Virchow, 1821년 10월 13일 ~ 1902년 9월 5일)
1. 개요
2. 인류학자로서의 피르호
3. 정치가로서 피르호
4. 흑역사


1. 개요


아이작 뉴턴 이후 과학적 방법론이 모든 학문을 휩쓸며 큰 영향을 미쳤다. 의학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의학은 의사들(특히 귀족 출신의 엘리트들)의 반발에 의해 형이상학에 치우쳐져 있었다. 그러나 젊은 의사들을 중심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르네 데카르트의 근대 철학에 영향을 받아, (현재의 의학과 이전 세대의 의학이 가장 큰 차이가 나는)'과학적 근거에 따른 의학'이 받아들어 졌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피르호라고 할 수 있다. 즉, Evidence Based Medicine은 서양의학에서도 19세기에 와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피르호는 학창시절 데카르트와 근대철학(특히 기계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에 '세포의 병이 신체를 병들게 한다.' 라고 생각, 세포병리학 연구의 장을 열었다. 이는 피르호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세포병리학 연구 이후로 자신은 색전증과 백혈병 연구로 명성을 쌓았고, 후대의 많은 의사와 의학자들이 피르호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빛나는 업적들을 이뤄냈다. 실제로 피르호의 위 업적 덕택에 의학은 과거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현대의학' 이라 불릴 수 있게 되었으며 드디어 '과학' 이라는 범주에 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피르호 사후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의학의 패러다임은 그가 창시한 그것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당장 의 진단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최종 단계의 확진은 암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생검해 세포병리학적으로 암세포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가 의학에 남긴 족적은, 염증의 삼대 임상 소견(발적, 통증, 부종)을 일컫는 '피르호의 삼증상' 등의 명칭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피르호의 가장 큰 의학적 업적은 세포병리학이지만, 예방의학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예방의학의 선구자로는 영국의사 존 스노우가 있었다. 19세기 초 영국을 강타한 콜레라의 피해를 역학적 연구방법을 통해 막아낸 인물로, 당시 의학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명망 있는 마취과 의사였던 존 스노우 덕분에 런던의 콜레라는 진정될 수 있었다. 피르호 역시 위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고, 공중위생이 질병예방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공중보건운동을 직접 진두지휘 했다. 덕분에 독일의 공중보건은 진일보 하였으며, 실제로 전염병을 크게 예방하였다. 이는 전염병이 의학적 현상으로만 여겨질 것이 아니라 공공보건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건에 의해 크게 구애받는다는 것을 파악한 피르호의 혜안에 힘입은 바가 컸고, 질병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아이디어는 피르호의 정치적 입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 인류학자로서의 피르호


당대 피르호는 의사로서 가장 유명했지만 역시 저명한 인류학자였다. 의학적 지식이 뛰어났던 피르호는 각 유럽의 민족들의 해부학적 비교 연구를 실시하였다. 이는 각 지방마다, 민족마다 유골들을 비교연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독일인이 타 인종에 비해 우월하지도 않으며, 순수민족이란 증거가 없다.'였다. 이 연구 결과를 받아 들이지 못한 아돌프 히틀러는 피르호를 후대에 깎아내렸다. 이 외에도 1,180편의 인류학 논문을 썼으며, 하인리히 슐리만과 더불어 트로이 발굴에 참가하였다. 덕분에 베를린 박물관이 풍족해졌다.

3. 정치가로서 피르호


당대 가장 유명한 좌파 정치인이었던 피르호는 군 예산 증액을 항상 반대하였고, 대신 공중보건 및 위생 쪽으로 예산 집행을 하려 하였다. 이에 철혈재상으로 유명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는 정치생활 내내 대립하였다. 군 예산 증액을 언제나처럼 거부한 피르호에게 격노한 비스마르크는 결투신청까지 하였으나, 피르호의 재치[1]로 이는 유야무야 넘어갔다.
피르호는 당대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가 죽자 신문에 '독일은 위대한 인물 4명을 잃었다. 위대한 의사, 위대한 자유주의자, 위대한 인류학자, 위대한 위생학자' 라는 논고가 실렸을 정도였다. 그는 의학자연과학의 꽃이자 가장 중요한 사회과학으로 여겼으며 실제로 두 분야(자연과학으로서의 의학, 사회과학으로서의 의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의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인이다." 라는 신념 하에 수많은 정책을 실시하였고, 일생 내내 사치를 하지 않았다.

4. 흑역사


독일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후두암을 잘못 진단하여 치료 시기를 놓치고 결국 이른 죽음을 맞게 한 흑역사가 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좀 더 오래 재위했다면 그 아들 빌헬름 2세의 온갖 삽질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도 어쩌면 실제보다 덜 참혹하게[2] 일어났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피르호의 오진은 흑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프리드리히 3세의 암이 당대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종류의 암이었다는 사실, 1차대전과 같은 역사적 대사건이 단지 일국의 군주의 성향에 의해서 좌우될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부분에서 피르호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제일 심각한 잘못은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발견되었을때, 이것은 관절염을 앓은 현생인류의 화석이라 주장하며 연구를 막아 독일이 그러한 현장을 두고도 고인류학 학문 주도에서 낙오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 이유는 피르호가 입수했던 화석이 하필이면 생존 당시에 심한 관절염을 앓은 개체였기 때문... 그래도 추가 연구까지 막은 것은 흑역사가 명백하다.

[1] 결투 무기로 메스를 골랐고, 비스마르크는 결투를 취소했다.[2] 비스마르크가 갑작스럽게 물러나지 않고 후대를 준비할 수 있었다면 독일 제국의 외교 정책도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에, 독일 제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지 않거나 전쟁이 국지전에 그칠 가능성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