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슐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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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고고학자로서의 행적
3. 독특한 외국어 학습 방식


1. 소개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년 1월 6일 ~ 1890년 12월 26일) '''아마추어''' 고고학자.
북독일 메클렌부르크 노이부코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트로이 전쟁의 사실을 발굴, 확인하는 것이 꿈이었다.[1]
1864년 러시아로 이주하고 장사를 하여 거부가 되자, 장사를 접고 1866년 파리로 이주하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였고 그리스 일대를 탐사하면서 호메로스일리아스와 관련된 유적들을 탐구하였다. 그렇게 1870~1873년 히실리크 언덕에서 대규모 발굴작업을 통해 그것이 트로이 유적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후에도 세 차례나 히실리크 언덕 일대를 발굴하여 여러 층에 걸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였다. 슐리만은 이 중에서 제2층에 해당하는 유적을 트로이 전쟁 시기의 유적으로 판단하였다. 사실 그가 발굴한 히실리크 언덕의 제2층은 트로이 시대의 것이 아니고, 제6층[2]이 그것에 해당한다는 것이 1890년 슐리만과 함께 트로이를 재발굴한 빌헬름 데르베르트에 의해 밝혀졌다.
1876년 호메로스의 ‘황금이 풍부하다’고 쓰여진 그리스 아르고리스만 기슭의 미케네 고분을 발굴하였다. 이 발굴에서 경이적인 재물과 보화를 파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이전의 문명인 에게해의 고대문명, 즉 크레타 문명 → 에게 문명 → 그리스 문명으로 흘러가는 에게해 문명의 계통을 밝혀내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슐리만은 미케네에 이어 크레타 유적까지 발굴하려 시도했으나, 이전에 슐리만이 약속을 깨고 트로이에서 발굴된 보물을 국외로 무단 반출시킨 전력이 있어서 터키 정부가 그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왔고, 결국 슐리만은 크레타 발굴을 단념했다. 이후 슐리만은 터키 정부를 설득해[3] 히실리크로 돌아가 여러 차레 트로이 발굴을 했다.
1890년 9월 1일 슐리만은 아테네로 돌아왔고, 귓병이 생겨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되지 못했다. 그는 그 상태로 나폴리 여행을 하던 중 호텔에서 병으로 숨졌다. 그 후 슐리만의 시신은 친구들에 의해 아테네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혀 오늘날까지 그곳에 있다.

2. 고고학자로서의 행적


히실리크 언덕에서 여러 번 발굴작업을 했는데, 발굴과정이 누가봐도 아마추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발굴작업은 야금야금 흙을 붓으로 털어내는데, 이 사람은 고고학의 '고' 자도 모르는 잡부 좀 긁어모아서 언덕을 말 그대로 일도양단했다(...) 언덕 위에서 아래로 단층을 보려는 듯이 마구마구 파냈고, 자신 눈에 유물이 아닌 석조물이나 기초석 등은 파내서 언덕 아래로 굴려 내팽개쳤다. 결국 금제 장신구 등 원하는 것을 찾자, 아무 근거도 없이 "이렇게 우월한 공예물을 보아하니 분명 트로이 문명의 것이 분명하군"이라고 생각한 후 신문사를 불러 아내[4]의 목에 해당 장신구를 걸친 사진을 찍게 했다. 대충 "내 아내가 세계 제일의 미인이었던 헬레네의 목걸이를 하고 있음, 님들아 부럽지 않음?" 하며 자랑질하기에 바빴던 '''아마추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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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만의 부인 소피아가 발굴한 보물을 두르고 찍은 사진
이러한 면 때문에 고고학계에서도 비난을 면치 못했지만 유명세를 타긴 탔고, 일종의 스타가 되자 몇 년 후 발굴작업을 재개한다.[5] 아마추어로 시작했지만 고고학에 대한 열정은 진짜라서,[6] 그 동안 공부를 계속하며 고고학에 대한 견해가 조금 생긴 슐리만은 처음 작업 때 내다 버린 유물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땅을 치며 후회했다. 그럼에도 계속 발굴한 유물의 양이 상당하니..
상인으로 보낸 시기가 길었기 때문에 참다운 고고학자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그리스 선사고고학(先史考古學)의 시조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 게르만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아 자를 '''아리안 민족'''의 상징으로 널리 퍼뜨리고, 이걸 나치스도 써먹게 된다.
슐리만이 몰래 독일로 빼돌린 트로이 시대 유물은 베를린 선사시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탈취되어 현재 러시아에 보관되어있다.

3. 독특한 외국어 학습 방식


고고학에서의 업적도 대단했으나 한편 그의 언어 학습법에 대한 인지도도 굉장히 높다.
그는 '''모국어인 독일어''' 이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스웨덴어, 폴란드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러시아어, 아랍어, 터키어, 네덜란드어대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의 언어학습방법은 배우고 싶은 언어로 쓰여진 소설을 두권정도 구해서 한 문장도 빠짐없이 모조리 외워버리는 것이었다. 소리내서 읽어야 하며 매일 반복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배운 후에는 작문을 해서 원어민에게 첨삭을 받고 그 첨삭받은 내용까지 모조리 외웠다고 한다.
영어소설인 '아이반호'와 ‘웨이크필드의 목사'를 외워 영어를 마스터했고 프랑스어소설인 '텔레마크의 모험'과 '폴과 비르지니'를 외워 프랑스어를 마스터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방식으로 두 언어를 배우는 데에 각각 6개월 정도 걸렸다고 한다. 이 방법이 익숙해지자 이후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데에는 각각 6주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리스어는 '폴과 비르지니'를 외워서 6개월 만에 마스터했다고 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학교에서의 외국어학습법은 전적으로 잘못됐다고 언급했다. 그는 "언어의 기초문법은 단지 고전산문을 주의 깊게 읽고 암기함으로써 체득할 수 있다. 따라서 귀중한 시간을 문법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문법오류를 지적하면 그 언어에 해당하는 소설의 지문을 언급해서 반박했다고 전해진다.
[1] 일설에는 슐리만은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어떤 여자아이와 함께 트로이 유적을 찾아내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가난한 청년기에 그녀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시간이 한참 흐르고 부유한 중년이 되어서야 슐리만 혼자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꿈을 이루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그 소꿉친구에게 자신이 결국 해냈다고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라고 전해진다.[2] 현재는 제7층으로 분류한다[3] 황실 박물관 건립 비용 5만 프랑 기증과 고고학 전문가를 동행한다는 조건을 붙여 승인받았다.[4] 본래 러시아에서 만나 결혼한 부인이 있었지만 그 부인은 트로이를 발굴하겠다는 슐리만과 갈등을 일으키다 결국 이혼했고, 이후 그리스에서 발굴을 하다 만난 그리스인과 결혼했다. 참고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자그마치 30살(...)[5]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인간 때문에 '나도 해볼까'하는 잉여들이 늘어난 것이 악영향이라면 악영향. 17~18세기 영국 귀족 남성들이 몇 천재 귀족들처럼 과학 좀 따라한답시고 돈만 잔뜩 들여서 과학 기구를 사놓고 이론도 이해하지 않으면서 도구나 깔짝대고 앉아있는 잉여들이 생겨난 거랑 비슷하다.[6] 소피아와 만나서 얻은 아들의 이름을 아가멤논이라고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