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
1. 개요
빌헬름 1세의 외아들. 오랜 기간 황제가 되기위해 기다리다 56세에 겨우 제위를 계승했으나 99일만에 사망한 독일 제국의 두 번째 황제.
2. 프로이센 왕세자- 독일 제국 황태자 시절
어린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왕족과 귀족 자제들에게 필수적인 코스로 통하는 군사 학교에 입학해 기초 군사학을 익혔다. 7살 때는 빌헬름 1세 앞에서 군복을 빼입고는 거수 경례를 하며 군대식 보고를 하는 시늉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고 한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다고 하며, 수학과 과학, 지리학, 역사, 예술도 빠르게 깨우쳤다. 이후 본(독일) 대학에 입학하여 역사학, 법학, 공공정책학, 통치학을 전공하였다. 이때 그를 가르치던 교수들과 이 대학 특유의 리버럴적인 학풍에 물들어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왕세자가 되고 나선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맏이인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1] 와 결혼하였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의 뜻이 컸다.[2] 10살 차이로(결혼 당시 28세 - 18세) 나이 차는 났지만 둘 다 자유주의적 교육을 받은지라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등 아주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빌헬름 1세는 섭정으로 세운 자기 동생이 병에 걸려 쇠약해지자 그를 대신해 프리드리히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신뢰에 매우 기뻐했으며, 적극적으로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국왕이 내세운 3년 징병제를 포함한 군제 개혁에 반대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에도 사사건건 정책적으로 충돌하면서 부자 관계는 소원해졌다. 또한 당시 재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내세운 군국주의적인 철혈정책에 대해서도 프리드리히는 반대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막상 프로이센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상대로 잇따라 전쟁을 벌일 때, 프리드리히는 그의 군사적 능력을 마음껏 입증해보였다. 덴마크 원정에서 늙은 사령관과 젊은 장교들의 전술적 논쟁을 중재해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에는 사촌들과 다를바 없는 오스트리아와 싸우는 것은 형제살해 행위와 같은 것이라며 반전 입장을 취했으나,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세당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와 파리 공방전에서 뛰어난 리더십과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인도주의적인 행동으로 국내외로부터 칭송받았다. 특히 뉴욕 타임즈는 1871년 7월자 기사에서 "황태자가 전쟁에서 용감함으로 얻은 명예는 미덕으로 얻은 명예와 같다"고 썼다.
승전 이후 독일 제2제국이 성립되었고 부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에 오르면서 그는 황태자가 된다. 이후 부황으로부터 프러시아 왕립 박물관의 후원자로 임명되면서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문화적인 재능도 군사적인 재능에 못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프로이센 왕립 박물관의 조직 구성 체계는 현대화 되었으며, 예산 규모는 5배로 팽창했고, 사료와 유물 수집, 과학적 연구의 자유성도 보장되었다.
1879년에 독일 제국 내에서 전국적으로 유대인 차별 운동이 벌어지자 프리드리히 황태자 부부는 자유주의적인 사상에 입각해 관용을 내세우며 공개적으로 비난 성명을 내고 시나고그에서의 예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향후 빌헬름 2세가 되는 그의 장남은 이러한 아버지의 태도를 보고는 비굴하고 약해 빠져서 영국인 어머니에게 휘둘린다고 여기게 된다(...).
1888년 3월 9일, 빌헬름 1세가 서거하면서 마침내 제 2대 독일 황제로 즉위하였다.
3. 즉위 이후
프리드리히 3세는 상기했다시피 황태자 시절부터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대립했으며, 제위에 오른 이후 자유주의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황제만이 총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헌법의 조항을 제국 의회도 총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바꾸고자 했던 일이었다. 이랬으면 총리인 비스마르크에게 더 많은 견제가 들어갔을 것이다. 또한 많은 자유주의자 관리들을 요직에 기용하였으며, 아예 영국식 의회 제도 도입도 구상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식 의회 제도 도입은 빼고 다른 것은 아들이 실현해주기는 했다. 재위 초기에 루르 지방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중재해서 비스마르크와 갈등 관계에 직면했고, 비스마르크가 총선 참패로 힘이 빠지자 전격 해임하고 반사회주의자를 폐기해서 사민주의 정당을 주류 정당으로 자리잡게 만들어주는 등 아버지 못지 않은(?) 행보를 보여주기는 했다. 사실 그것이 정치적 센스라기 보다는 독일 제국 시대에 자란 신세대로서 '제국은 황제 것인데 총리가 깝친다'는 지극히 전제적인 감정 때문이었고, 재위 후반엔 나라 자체를 말아먹고 망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4. 사망
불행하게도 프리드리히 3세는 일생동안 심각한 애연가였고, 그 때문에 재위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어이없게 세상을 떠났다. 독일인 의사들은 이미 제위에 오르기 전인 1887년에 정확하게 진단했으나, 5월에 독일에 도착한 영국의 유명한 의사인 매켄지가 세포병리학의 시조인 루돌프 피르호의 생검 견해를 바탕으로 "단순한 인후염일 뿐 암종이 아니므로 수술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다.[3] 그 결과 예정된 수술은 취소되었고, 다음 해 2월에 수술이 집행되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5. 그 후
여하간에 병자인 상태에서 제위에 올라 6월에 사망하였고 제위는 아들 빌헬름 2세가 대신했다. 때문에 1888년은 '세 황제의 해'라는 별명이 붙었다. 특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황후가 영국 의사의 말을 믿고 수술을 미루자고 했는데, 그 당시 의학은 독일이 더 앞서 있었고, 결과도 보듯이 치명적이었던터라 '''"영국 여자가 남편 잡아먹었다!!"'''고 까였다. 다만 현재 의사들도, "그 당시 증상이면 발견이 늦어서 빨리 수술을 했어도 그 당시 의술로는 호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추측한다.
6. 평가
자유주의적 사상을 가졌으며 유능했으나 허무하게 사망한 탓에 여러가지로 역사학자들의 대체역사 떡밥이 무성한 황제다.[4] 한쪽에서는 프리드리히 3세가 조금만 오래 살았거나 일찍 즉위했더라면 '''1차 세계대전은 발발하지 않았고 독일 제국이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반기를 들지 않았다"면서 과대 평가되었다고 주장한다. 해석은 알아서. 예컨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황가의 위엄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었으며 강력한 중앙 정부를 선호하고 여타 독일계 소국들의 군주들에 압력을 가하는 면에 있어서는 비스마르크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말하고 있다.
7. 가족
부왕 빌헬름 1세 : 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
모후 작센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 : 1811년 9월 30일 ~ 1890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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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여동생 바덴 대공비 루이제 : 1838년 12월 3일 ~ 1923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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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 1840년 11월 21일 ~ 1901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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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빌헬름 : 1859년 1월 27일 ~ 1941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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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샤를로테 : 1860년 7월 24일 ~ 1919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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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하인리히 : 1862년 8월 14일 ~ 1929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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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지기스문트 : 1864년 9월 15일 ~ 1866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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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녀 빅토리아 : 1866년 4월 12일 ~ 1929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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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 발데마어 : 1868년 2월 10일 ~ 1879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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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녀 조피 : 1870년 6월 14일 ~ 1932년 1월 13일 - 그리스 왕국의 콘스탄티노스 1세의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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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녀 마르가레트 : 1872년 4월 22일 ~ 1954년 1월 22일
[1] 일명 '비키'라 불렸다.[2] 독일의 소왕국 제후 가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으로, 독일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친프로이센 성향이었다.[3] 비스마르크의 군비 확장에 반대하다 결투 직전까지 갔던 그 루돌프 피르호(1821년 ~ 1902년) 맞다. 정치인으로서도 나름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졌지만 본업인 의학, 특히 근대적인 병리학의 사실상의 창시자로서의 그의 업적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매킨지는 황제의 인후를 수차례 생검해 당시 병리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비르호에게 판독을 맞겼는데, 그때마다 피르호는 이를 악성 종양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황제가 사망한 뒤 부검을 맡은 피르호는 악성 종양이 맞았다고 말을 바꾼다(...) 다만 이는 비르호가 무능한 의사여서 그랬다기보다는, 황제의 암이 당대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마귀 모양 암종(verrucous carcinoma)이었기 때문. 여기서 역사의 아이러니. 피르호가 암종을 알아보았다 해서 황제가 나았을 것이라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만약 프리드리히 3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독일 제2 제국은 파멸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반대파였던 피르호가 비스마르크의 업적인 독일 제국에 엿먹인 결과.[4] 한국으로 치면 조선 문종의 좀더 안습한 케이스라고 하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