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데카르트

 



[image] [1]
<colbgcolor=#00001b><colcolor=#fff> '''본명'''
프랑스어: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라틴어: 레나투스 카르테시우스 (Renatus Cartesius)[2]
'''국적'''
프랑스 왕국 [image]
'''출생'''
1596년 3월 31일, 프랑스 왕국 라에 엔 투렌
'''사망'''
1650년 2월 11일 (만 53년 317일), 스웨덴 스톡홀름
'''학력'''
라 플레슈 콜레주 (졸업) (1606-1613)
푸아티에 대학교 법학 (학사) (1613-1616)
'''직업'''
물리학자, 철학자, 수학자
'''서명'''
1. 개요
2. 생애
2.1. 철학자로서
2.2. 수학자로서
2.3. 물리학자로서
2.4. 의학자로서
3. 어록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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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gito, ergo sum."[3]

( Je pense donc je suis.[4])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 1637) 방법서설(1657년판) 34쪽 철학의 원리(1656년판) 2쪽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포문을 연 프랑스철학자·수학자 이다.

2. 생애


생가
프랑스 투렌 지방(Touraine)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 에(la Haye)[5]에서 브르타뉴주의 고등법원 평정관이었던 아버지인 조아섕 데카르트(Joachim Descartes)와 잔 브로샤르(Jeanne Brochard)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잔 브로샤르는 데카르트를 낳고 얼마 안 가 죽게 되고,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데카르트 또한 생명이 위태로웠지만 다행히도 살아남는다.[6] 물론 어머니와 같은 결핵 징후를 보이고 있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계속 창백하고 마른 아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고, 자신을 돌봐주던 간호사와 사팔뜨기 소녀 친구 프랑수아즈가 있었다. 후에 시간이 지난 뒤에도, 데카르트는 이 둘에게 놀랄 만한 정도의 충실함과 헌신을 보였다고 하는데, 심지어 유산을 얻었을 때에도 간호사에게 많은 돈을 주었고, 자신의 일생 동안 프랑수아즈와도 우정을 돈독히 하며 지냈다고 한다.
학문적으로는 능력자였으나, 몸이 많이 약한 편으로 그의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듯하다.[7] 이 때문에 데카르트의 아버지는 아들도 아내처럼 일찍 죽을 것을 걱정하여, 그가 학교를 가고 싶다는 것을 말리고 강제로 쉬게 했다. 그래서 8살(또는 10살)이 되던 해에 예수회 계열 학교인 라 플레슈(La Flèche)에 입학해 8년을 공부하는데, 몸이 약해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한다.[8] 그런데 수업을 그렇게 듣지를 못했는데도 철학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공부는 무지 잘했다. 그런 그의 재능을 꿰뚫어 본 어느 관대하신 교장이 수업을 듣는 대신에 그 시간에 데카르트에게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을 허락했다. 데카르트의 늦잠 자는 버릇은 이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그러나 이런 늦게까지 침대에 있는 습관에서 그는 사색과 생각을 많이 했고 이 생각들이 훗날 그의 사상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대표적인 업적이 위에서 말했던 좌표의 발견인데 날벌레가 천장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저 날벌레의 위치를 계산하려다가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좌표의 발견이다.
17세기 프랑스 검술 마스터 [9] 샤를 베나르에게 검술을 배웠다.
20대에는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네덜란드에서 마우리츠 공의 휘하에 군복무를 거쳤다. 그 당시 귀족의 자제는 성직자와 군인 둘 중의 하나를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데카르트는 당시의 전통과 집안의 권유 때문에 군인을 선택하였으나 병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군인은 어울리는 직업이 아니었다. 참고로 당시는 30년 전쟁 초기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프랑스가 대립하던 최전선. 그렇다고 데카르트가 아주 골골대는 사람은 아니었고 사병 복무도 했었고 검술 수련도 열심히 했으며 자신의 애인에게 무례하게 군 주정뱅이에게 기사도의 방식으로 잔뜩 혼을 내주는 등 결투도 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조각배에 침입한 적의 칼을 빼앗았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타고난 체질은 약했다고.
1617년경 이삭 베크만(Isaac Beeckman)과 함께. 삽화가는 쉴라 테리(Sheila Terry). 다만 당시의 그림이 아니라, 21세기에 그려진 상상화이다.
1617년 장교가 되어 네덜란드로 갔을 때 거리에 걸려 있는 네덜란드어로 쓰인 글을 보고 지나가던 행인에게 그 내용을 프랑스어나 라틴어로 번역해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행인은 홀란트 대학의 학장이자 수학자였던 이삭 베크만(Isaac Beeckman)이었다. 베크만은 데카르트에게 ‘자신이 제시하는 기하학 문제를 하나 풀면 청을 들어 주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사실 베크만이 제시한 문제는 그때까지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였으나, 데카르트는 몇 시간 만에 풀어와 베크만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과 베크만과의 친교는 데카르트에게 직업으로서 군인에 회의를 갖게 만들었다.
본래부터 철학보다 과학(수학)에 흥미가 있었으며, 1619년 11월 10, 11일 밤에 생생한 꿈을 세 번 꾸고 일생을 과학에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갖다가 결국 1621년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이후 5년간 여행을 하면서 순수 수학에 몰두하였다. 이때 함수의 원리를 처음 계발하였다. 1626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소일거리로 광학기구를 만들던 중에, 1628년 당시 파리의 추기경이었던 피에르 드 베륄(Pierre de Bérulle)과 만난다. 추기경은 데카르트와의 대화에서 그의 명석함에 감명을 받아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전념할 것을 권했다. 데카르트는 추기경의 충고를 받아들여 모든 간섭과 의무를 피해 다시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회로부터 단죄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과학을 버리고 철학을 선택했다.
1635년 7월 19일, 네덜란드에 있을 때 헬레나 얀스(Helena Jans van der Strom)라는 이름의 전직 가정부[10]에게서 외동딸 프랑신(Francine, 1635년 7월 19일 ~ 1640년 9월 7일)를 얻는다.[11] 프랑신이 수태된 날짜(1634년 10월 15일)를 일기에 기록했기 때문에 친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고 얻었기 때문에 사생아라서 사람들에게는 프랑신이 자신의 조카라고 둘러댔다.
1638년 8월 23일에 메르센[12]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한 남자가 세 살 난 소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박수를 치면, 소녀가 박수 소리를 듣고 정원을 달리는 것에 대한 동화가 써져있는데, 정황상 데카르트 자신이 프랑신과 놀아준 것을 묘사한 걸로 추정된다.
1640년, 데카르트는 프랑신을 프랑스로 데리고 가서 교육을 받게 할 것이라고 기록한다.[13] 하지만 프랑신은 동년 9월 7일,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일찍 뜬다. 데카르트는 친구가 자신의 가족을 여의었을 때, 영혼 불멸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을 말해 가면서 꿋꿋이 슬픔을 참고 이길 것을 간곡한 편지로 써 보냈지만, 그의 전기작가였던 아드리앵 바예(1649년 6월 13일 ~ 1706년 2월 21일)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프랑신의 사후 몇 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 한다.[14]
소문으로는 생전 딸의 모습을 빼닮은 인형을 제작해서 전 유럽을 여행할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15]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했으며, 최후에는 데카르트가 배를 타던 중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선장이 가방을 들추어 보았고, 너무나 사람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보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해 바다에 빠뜨렸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평소 데카르트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 특히 그의 사상에 반기를 든 이들이 지어냈다며 이 일화를 거짓 취급한다. 단, 가정부와의 사이에서 딸을 두었고, 그 딸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얘기를 결부시켜 프란시느 인형 얘기를 꾸며낸 것 같다. 꼭두각시 서커스의 프란시느와 같이,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까뜨린느의 스토리와 리그 오브 레전드의 오리아나구 스토리가 이 소문에서 따온 걸로 추정된다.
몇 년 후 신학자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가 데카르트에게 혼외관계에서 아이가 있지 않냐고 공격을 한다.[16] 이후 데카르트는 헬레나와 헤어진다. 헬레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그 후 데카르트는 평생 독신으로 산다.
1644~49년경. 화가는 얀 리번스(Jan Lievens, 1607.10.24~1674.6.4)
오른쪽에서 세 번째. 탁자 여인 옆.
말년인 1649년에는 스웨덴크리스티나 여왕[17]의 간곡한 초청으로 스톡홀름에 이주하여 여왕에게 자신의 철학을 강의했는데 여왕은 '''새벽 5시부터 강의를 시작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스케줄은 보통 사람이라 해도 체력상 쉽지 않은데 설상가상으로 데카르트는 원래 몸이 약해서 항상 오전 늦게까지 잠을 자던 사람이었다. 수도원 시절에도 (수도원에는 새벽 미사가 있다) 정말로 못 일어나서(...) 담당 신부로부터 특례로 새벽 기상을 면제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 프랑스인들은 본래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서 묘사된 것처럼 타국인들에 비해 느긋한 삶을 즐기는 경향이 있어서, 식사를 해도 적어도 전채-메인 디시-디저트-후식용 치즈 순으로 나눠서 먹어야 제대로 먹었다고 치거나[18], 정말 급한 일이 아닌 이상 아침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마침 늦잠자는 습관이 있던데다, 생활 패턴 자체가 전형적인 프랑스인 스타일이었던 데카르트에게는 그야말로 쥐약이었던 것이다.
결국 과로에다 스웨덴의 혹독한 겨울 날씨에 따른 폐렴까지 겹쳐서 다음 해인 1650년 2월 3일 앓아눕게 되는데, 당시 데카르트의 친구이자 여왕의 시의[19]였던 '뒤 리에'가 없어서 대신 뵐레스를 보낸다. 문제는 이 의사가 데카르트의 극심한 안티[20]였다. 8일 후인 2월 11일에 데카르트는 결국 사망한다. 사망 원인은 과로와 겹친 단순한 병사이지만, 위의 이유로 의사의 진료가 적절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여담으로 1791년 그의 묘지를 인장하던 중 두개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878년 스웨덴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현재는 프랑스 인류학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이마에 "이 두개골은 르네 데카르트의 두개골이 맞다. 스웨덴 근위대장 한스트림이 보증한다."라고 적혀있다. 한때는 전시했으나 지금은 전시하지 않고 나무 상자에 보관하고 있다. 이 부분은 EBS 다큐프라임에서 다루었다.

2.1. 철학자로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프랑스에서 존경받는 철학자 중 하나다.
바뤼흐 스피노자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와 같이 대륙합리론을 대표하는 세 명 중 한 명이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 그가 살았던 시절 유럽대륙은 최후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종교적-정파적-문화적 차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적 진리만이 혼란으로 인한 사회와 역사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생각은 방법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그 당시 회의주의에 반대했던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은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으며 연역법으로 이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고[21] 그 연역의 기반이 되는 제1공리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유명 어록이기도 한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고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후에 《성찰》에서는 '나는 있다, 존재한다.'로 제1명제를 치환하는데 그 이유는 "고로"를 포함한 표현이 전제와 결론처럼 읽히기 때문이라고......데카르트가 자기 견해를 더 표현하는 쪽으로 나아갔음에도 사람들에겐 이전의 공식이 너무 뇌리를 떠나지않아 오늘날까지 제1명제는 보통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알려져있다.
. 데카르트는 원래 불어로 je pense, donc je suis라고 썼으며 학자들이 라틴어로 이를 역번역했을 따름이니, 데카르트가 처음 한 말이 맞다.[22] 이 부분은 코페르니쿠스적 발상(Kopernikanische Wendung)[23]에 포함된다.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러한 생각, 즉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이 명제는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명제이며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이 명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데카르트가 사용한 관념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명제에 이어서,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이를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유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은 본유관념으로써의 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인식한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며 고로 극도로 성실하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실제 존재하지 않는 물체를 배치하여 우리를 기만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세상도 존재한다. 현대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할 지 알 수 없는 실로 엉망인 논증이지만(...), 이 논증 자체는 그것이 진리라고 데카르트가 주장했다기보단 수학적 연역을 통해 세상을 증명하려고 한 데카르트의 새로운 시도 중 하나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수학자 겸업 철학자였던 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이유는 그가 외부세계의 존재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신의 존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한 심신이원론을 주장하였다.[24] 그리고 정신과 육체의 각기 다른 특성상 정신은 송과선을 제외한 육체의 어느 부분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즉, 정신과 육체가 친밀하게 결합되어있기는 하나 그 본질상 정신과 육체는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의심하는 자신이 있다는 것으로 증명 가능하나, 정신은 육체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 반대도 성립되지 않으므로 육체와 물질적인 것들의 실존여부를 결론내릴 수가 없게 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모순점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량하고 완전한 신이라는 존재를 가정하였고, 그러한 주장의 뒷받침을 위해서는 신의 존재증명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주장은 당대에도 까였는데, 피에르 가생디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신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의 경우든 그 존재는 완전성은 아니지만, 존재 없이는 완전성이 없다. (중략) 존재는 완전성과 달리 한 사물 속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떤 사물이 존재를 결여하고 있다면 그 사물은 단지 불완전하거나 혹은 완전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신의 완전성에 관한 정리를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술하려면, "만일 어떤 것이 신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존재한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 진술은 참일 터이지만, 신성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완벽하게 양립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신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신은 없을 것이고, 따라서 데카르트의 증명은 실패할 것이다.[25]
그보다 앞서서 심신이원론 또한 당대부터 까이기 시작했다. 찰스 1세의 조카딸인 팔라틴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분명 운동은 접촉을 필요로 하고, 접촉은 연장을 필요로 하며, 영혼은 연장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영혼이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여기에 대해 데카르트는 중력은 필요로 하는 표면접촉이 없는데도 물체를 아래로 밀어내린다며 반론했지만, 이러한 중력 개념은 데카르트 자신의 현학적인 혼란 상태였다. 엘리자베스는 "나는 비물질적인 존재가 육체를 움직이고 육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보다는 영혼이 질료와 연장을 가졌다는 것을 더 쉽게 용인할 수 있다."고 했다. 거기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영혼을 육체와 결합되어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자유롭게 생각하라는 것이었으며, 그는 '더이상 그 문제로 어여쁜 머리를 괴롭히지 말라'고 대꾸했다.[26]
데카르트는 신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물리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고, 잡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존재할 공간이 없더라도 신은 그 모든 현실적 조건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뜻. 왜 이렇게까지 신의 존재론에 집착했냐면 그렇게 해야만 인간의 영혼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심신이원론에 따라 인간의 영혼은 몸과 다른 존재이지만 신의 존재처럼 현실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구체적으로 존재론의 구분을 이루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분명히 존재하는 '나'와 저 눈 앞에 있는 물컵의 존재는 어떻게 다른가? '나'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가 확실하다면 물체는 존재가 조금 더 불확실한가? 이 문제는 그냥 신의 권능에 맡기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다 보니 이후 철학자들에게 두고두고 비판받게 된다.그래도 이런 비판점도 있지만 만물의 실재성을 오로지 신의 권위에 의지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방법적 회의라는 고찰을 시작한 것은 대단한 사유적 혁명이었다.
제1 철학에 관한 성찰》이 교황청의 금서목록에 포함되었다.
합리론으로 유명해졌다. 따라서 경험론을 주창한 프랜시스 베이컨과는 라이벌과 비슷하다.
토머스 홉스와 교류했는데 특히 학문 접근 방식과 철학과 광학이론 등을 가지고 견해 차이 를 보였다.[27] 홉스는 데카르트를 "기하학만 했으면 위대한 수학자가 될 것을..."이라고 깠고, 데카르트는 그냥 무시했다.
모든 감각을 통해 획득한 정보가 불확실함을 가정했을 때, 어떤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지 추론한 데카르트의 악마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
발터 베냐민이 데카르트를 모티브로 삼아 사람들에겐 매우 친숙하고, 심지어 희망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지는 '유행'과 '새로움', 그리고 '역사적 진보'라는 개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2.2. 수학자로서


여러분들이 받아들이기로는 '''만악의 근원''',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정말 고마운 분'''이라 볼 수도 있다. 만약 좌표계가 없었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능한 한 끝까지''' 사용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가능한 한 끝까지가 어떤 것인지는 메넬라우스의 정리, 체바의 정리를 보면 어느 정도 감이 올...까? 가을마다 중학교 수학 시간에 보조선 어디다 그을지 머리 싸매고 고민하던 우리들 대다수는 지금 수학을 싫어하는 감정 그 이상으로 수학을 더더욱 싫어했을 것이다.
좌표계, 정확히는 직교 좌표계[28]를 도입했으며, 이것으로 인해 수학은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때문에 직교 좌표계를 그의 이름을 따서 'Cartesian coordinate'라고도 부른다.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가 좌표계에 기초한 대수적 함수의 개념이 데카르트에 의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수학에서만 해도 좌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또한 좌표를 통해 기하학과 대수학, 해석학이 결합하면서 해석기하학[29]이란 새로운 학문이 탄생했으니 좌표의 도입만으로도 데카르트는 위대한 수학자의 반열에 들기 충분하다.
또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데카르트는 처음으로 방정식의 미지수에 X를 썼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30]
한편, 계산의 답이 음수로 나오는 경우 이를 '''가짜 답'''이라고 하면서 음수가 아닌 답과 구별한 흑역사가 있다. 데카르트가 살던 시대만 해도 음수가 완벽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3. 물리학자로서


그 당시에는 유명한 물리학자였다.

모든 현상은 3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단순정량자와 몇 가지의 법칙에 지배되는 운동에 의한다.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서 3차원 컴퓨터 그래픽스가 발전한다.
음펨바 효과로 보이는 현상을 기록한 바 있지만, 적절한 설명은 내놓지 못했다.
아이작 뉴턴과 비슷한 시기의 사람인지라 이 사람도 중력을 설명하는 이론에 골몰했다. 이 사람의 주장은 중력=소용돌이인데 물질이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주위를 돌 듯 지구도 태양을 중심으로 한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게 중력이라는 말이다. 뉴턴의 주장에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뉴턴의 역학이 진공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데, 데카르트 본인 생각에는 힘을 전달하는 물질이 없으면 힘도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31] 그는 물질이 힘을 전달하는 일종의 연장이라고 주장했다. 그 외에 원자론을 주장하기도 하고, 물질 간의 운동을 통해 우주 전체적으로 운동량이 보존된다고 하여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일정 부분 예언하였다.[32]

2.4. 의학자로서


네덜란드에 있을 때 해부학에 관심을 두었다. 인간의 영혼을 찾기 위해 인체를 해부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들였고, 윌리엄 하비와 심장의 움직임에 대해 다투기도 했다.[33] 그러다가 송과선이 육체와 정신이 만나는 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마저도 동시대인인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비판받은 흑역사가 있는데, 그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도입한 육체-정신 이분법을 인체에도 적용하느라 생긴 해프닝이다.
대학에서 수업을 하지 않을 때에는 의사가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건강을 상담하고 처방했다. 이 당시에는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는 등의 기본적인 처방이 잘 먹혀들었다.
그러다가 프랑신이 죽은 뒤 의학자로서의 삶을 그만두고 철학자로 살게 된다.

3. 어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하면 생각나는 명언

'''지금까지 철학이라 일컬어온 모든 것들을 가장 적게 배운 사람들이 참된 철학을 배울 능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철학의 원리 서문 中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사유하는 것이다.'''

―성찰 제2 성찰 中

'''오직 나 자신과 대화하고, 내면을 깊이 살피면서, 내 자신을 점점 알려지게 하고, 내 자신과 더 친숙하게 만들어 보자. 나는 사유하는 것이다.'''

―성찰 제3 성찰 中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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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ive her the dick(...)이라는 인터넷 밈이 있다. 2009년 폰허브에서 야동을 감상하던, 데카르트를 프로필 이미지로 쓰던 미국의 모 유저가 'give her the dick'이라며 섹드립을 쳤는데, 뜬금없는 데카르트의 묘한 표정과 은근히 고상한 말투 문구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2012년에 4chan에서부터 유행이 시작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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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 평생동안 사시[34]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살았다. 딸의 이름도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하던 사시인 소녀의 이름인 프랑수아즈에서 이름을 따서 비슷한 이름인 프랑신이라고 붙여주었다. 링크
  • 많은 업적과 대조적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이들 에게는 천하의 개쌍놈이나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는다. 우리나라 동물 관련 잡지에서도 철학자로선 위대하지만 동물학자들에겐 재앙 같은 존재로 바로 그를 언급하며 이러한 말을 한 것을 소개한 바 있다.

>동물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처럼 말도 안 되고 우스운 이야긴 없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만이 고로 영혼을 가진 증거이다.
보통은 동물기계론이라 불리는 사상이다. 그는 이 주장을 더욱 밀어붙여 사고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들 역시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여기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그가 가진 사고가 인간중심적 사고였다기보다는, 이성중심적 사고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를 비롯한 전근대 시대에선 흔한 사상이라 그만 가지고 까는 건 다소 억울한 일이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자 영혼을 가진 유일한 존재로서 20세기 초중반까지, 아니 지금도 이렇게 여기는 시각이 많이 남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여담으로 시튼 동물기로 유명한 어니스트 시튼만 해도 동물이 사람을 이기는 소설이나 그림을 그렸다가 당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었다.
  •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코리아 시즌 4 13회 '진중건의 토론배틀'에서 진중건이 슬기 어린이에게 또 한 번 다그치려 하자 진짜 진중권이 나타나서 '아동학대'를 한 진중건을 내쫓은 후 슬기 어린이를 더 처참하게 다그칠 때 칸트와 함께 언급되었다.
  • 수학동아에서 닥터후의 Blink 에피소드가 통째로 배껴졌는데 이때 우는 천사와 타디스와 함께 나왔다. 링크
[1] 네덜란드의 초상화 전문 화가인 프란스 할스 (Frans Hals)가 그린 데카르트의 초상화.[2] 라틴어 이름에서 "데카르트의", "데카르트적" 같은 의미의 영어 표현인 "Cartesian"이 유래했다.[3] 고전 라틴어 발음은 /코기토 에르고 숨/, 교회 라틴어 발음은 /코지토 에르고 숨/.[4]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 1637)에서는 프랑스어로 적혀있으나, 이후 라틴어로 낸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 1644)에서 라틴어로 적었다. 방법서설 초기본에는 쉼표가 없으며 j를 사용하지 않아 당대 표기를 반영하면 'ie penſe donc ie ſuis'가 된다.[5] 1990년대에 데카르트 시(Descartes)로 이름을 바꾸었다.[6] 이때 살아남았기 때문에 이름을 '다시 태어난다'는 뜻의 레나투스(Renatus)의 프랑스식 변형으로, '르네트르(Renaître)'의 과거분사형인 르네(René)로 지어졌다.[7] 사실 칸트도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걸로 동네에서 유명했지만, 본인이 그걸 일찍 깨닫고 평생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건강에 나쁜 걸 기피하는 생활을 유지하여 장수하였다. [8] 이때 같은 학교에 입학한 마랭 메르센과 교류한다.[9] 취소선이 쳐있긴 하나 '''실제로 소드마스터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10] 어떤 사람의 하녀였다고 한다. 둘은 종교 문제로 결혼은 하지 않았다.[11] 세례 기록에는 프란신트헤 레이너(Fransintge Reyner)라고 되어있다. 데카르트가 종교 문제로 헬레나 얀스와 결혼을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레이너르 요험스(Reyner Jochems), 즉 '조아섕(데카르트의 아버지의 이름)의 아들 르네'의 네덜란드식 이름으로 등록했기 때문이다.[12] 마랭 메르센(Marin Mersenne). 프랑스의 물리학자·수학자. 데카르트의 친구이다. 메르센 소수의 그 메르센이 맞다.[13] Russell Shorto, Descartes' Bones: A Skeletal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Faith and Reason, New York : Random House, 2008.[14] 르네 데카르트, 최명관, 데카르트 연구 방법서설ㆍ성찰, 서울 : 창, 2010, 51쪽.[15] 참고로 꼭두각시 서커스 작가가 직접 인증한 사실로, 프랑신 데카르트를 모티브로 프란시느 캐릭터를 창안한 것이 맞다. 즉 이름이 '프란시느'인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16] 아미르 D.악젤, 김명주, 데카르트의 비밀노트, 한겨레출판, 2005→2007.[17] '북방의 사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딸로 스웨덴의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학구열이 강해 데카르트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을 불러 교류했다.[18] 그래서 프랑스인 가정에서의 일반적인 식사는 대개 2시간은 걸리는 편이다. 식사 시간이 30분 정도 밖에 안되었던 나폴레옹이나 샤를 드골이 특이한 케이스로 간주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19] 우리나라로 치면 임금과 왕족의 병을 고치는 '어의'에 해당한다.[20] '데카르트가 죽는 걸 보고 말겠다'고 할 정도였다.[21] 이런 믿음은 매우 플라톤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모두 잊어버렸을 뿐이며 진실이 '반영'된 곳인 이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통해 진실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이라는 가설을 펼쳤다. 쉽게 말해서 우리 모두는 잃어버린 기억(+진실)을 찾아가는 기억상실자라는 셈.[22] 데카르트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철학서를 쓰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이다.[23] 어느 분야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발상.[24] 육체와 정신은 근본적으로 달라 육체는 물질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반면에 정신, 즉 영혼은 영적인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주장. 몇 백 년 후 이런 주장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나타나며 계속되어오던 이성적 주체라는 존재가 크게 빛이 바라며 심리학이 발전한다. 자세한 건 심리철학 문서 참조.[25] 앤서니 케니 편, 김영건 옮김, <서양 철학사>(이제이북스, 2004), P.187[26] 앤서니 케니 편, 김영건 옮김, <서양 철학사>(이제이북스, 2004), P.183~184[27] 가장 논쟁이 된 데카르트의 저서 성찰에 홉스의 비평문도 같이 실리게 되기도 했다.[28] 다만 이 당시 음수의 개념은 없었다고 한다. 일화로 좌표 개념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몸이 허약해서 병영 내무반에서 누워 지내다 천장의 날벌레의 움직을 나타낼 방법이 궁금해서였다고 한다.[29] 방정식, 함수 등을 이용해 도형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30] 이에 대해서 잘 쓰이지 않는 철자여서 인쇄소에 활자가 많이 남아돌아서 이걸로 했다는 말이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참고로 TED에 미지수로 X를 사용하는 이유에 관한 4분짜리 강연이 나왔다. 링크[31] 박성래 외 2명,'과학사',전파과학사,2013[32] 김국태(2011), '근대 과학철학', In 박영태(Ed.), '과학철학: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창비, 2011[33] 데카르트는 심장이 팽창할 때 혈액이 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하비의 주장이 맞는 걸로 판명되었다.[34] 정확히는 내사시(內斜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