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튼 피스크

 

'''칼튼 피스크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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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칼튼 피스크'''
헌액 연도
2000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79.6% (2회)

'''197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크리스 챔블리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칼튼 피스크
(보스턴 레드삭스)'''

알 범브리
(볼티모어 오리올스)

'''198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포수 실버 슬러거'''
랜스 페리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칼튼 피스크
(시카고 화이트삭스)'''

랜스 페리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8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포수 실버 슬러거'''
랜스 페리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칼튼 피스크
(시카고 화이트삭스)'''

랜스 페리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88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포수 실버 슬러거'''
맷 녹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칼튼 피스크
(시카고 화이트삭스)'''

미키 테틀턴
(볼티모어 오리올스)

'''197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포수 골드 글러브'''
레이 포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칼튼 피스크
(보스턴 레드삭스)'''

서먼 먼슨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No. 27'''
'''시카고 화이트삭스 No. 72'''
'''칼튼 어니스트 피스크
(Carlton Ernest Fisk)
'''
<colbgcolor=#192c55> '''생년월일'''
1947년 12월 26일 (76세)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버몬트 주 벨로우즈 폴스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7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4번 (BOS)
'''소속팀'''
'''보스턴 레드삭스 (1969~1980)'''
'''시카고 화이트삭스 (1981~1993)'''
'''수상'''
'''11회 올스타 선정 (1972~1974, 1976~1978, 1980~1982, 1985, 1991)
AL 신인왕 (1972)
3회 AL 실버슬러거 (1981, 1985, 1988)
AL 골드글러브 (1972)'''
1. 개요
2. 빨간 양말 27번 시절
3. 하얀 양말 72번 시절
4. 명예의 전당과 영구결번, 그 외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포수.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공수겸장 포수를 꼽으면 빠지지 않는 인물로, 요기 베라 이후 자니 벤치, 게리 카터[1]와 함께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최고 포수의 계보를 이어 간 대선수다.[2] 포수로서 갖추기 어려운 주력까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던 만능 포수였으며, 비교적 단명하는 포수 포지션을 맡고도 무려 '''45세'''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별명은 '''Pudge.[3] The Commander.'''
그 활약에 힘입어 보스턴 레드삭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 두 구단에서 모두 영구결번된 선수이다.

2. 빨간 양말 27번 시절


원래 칼튼은 3형제 모두가 운동선수였고, 형제인 캘빈과 콘라드 역시 야구 선수였고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도 지명되었지만, 캘빈은 베트남전 징병으로, 콘라드는 팔 부상으로 운동선수의 꿈을 접었다. 칼튼은 농구를 주로 했었고, 버몬트주라는 작은 주 환경상 특급 농구 유망주는 아닌 상태로 뉴햄프셔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다. 그런데, 칼튼의 야구선수 포텐셜을 주목한 팀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보스턴 레드삭스. 레드삭스는 칼튼의 포수로써의 포텐셜을 보고 1967년의 1월 드래프트[4]에서 전체 4번 픽으로 고졸 포수로서는 드물게 칼튼을 높은 순위로 지명했다. 더욱이 그는 타격보다는 수비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던 선수기 때문에 더욱 주목받던 지명.
1969년에 데뷔하긴 했는데, 단기간의 국방부 퀘스트가 걸려서 1970년에는 마이너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그렇게 1971년에도 이렇다 할 모습은 없이 그저 빅리그에 잠깐 얼굴 들이민 정도였는데, 1972년에 첫 풀타임 시즌을 맞아 미칠듯한 활약으로 전반기 이후 올스타에 선정되더니, '''신인왕, 포수 골드글러브를 동시에 제패하였다!''' 게다가 딱히 좋지만은 않은 평가를 받던 타격도 향상되어 첫 풀타임 2년간 비록 타율은 낮지만 강력한 펀치력으로 OPS 8할을 찍으며 대성했다.
그러나 1974년 OPS 9할을 찍던 무렵,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레론 리[5]와의 홈플레이트 충돌에서 무릎 인대가 찢어지며[6] 선수생활에 큰 위기를 맞이했지만 수개월 간의 재활을 거쳐 75년 재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1975년에 밟게 된 신시내티 레즈와의 월드시리즈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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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이 2승 3패로 몰려 있던 펜웨이 파크에서의 6차전에서 6-6으로 맞서던 연장 12회에 그는 구사에 길이길이 회자될 홈런을 날린다. 파울라인 바깥으로 휘어져나갈 것만 같았던 피스크의 강한 타구는 좌측 파울 폴을 때리고 홈런이 되어 승부를 끝장 7차전까지 몰고 간다.[7] 껑충껑충 뛰며 타구가 폴대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양팔을 휘두르는 사진의 모습은 피스크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장면이 되었고, 역대 월드시리즈 명승부 하이라이트 등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image]
시대별로 양키스-레드삭스 선수의 라이벌리를 따졌을 때 40년대에는 조 디마지오-테드 윌리엄스, 90~2000년대에는 데릭 지터-노마 가르시아파라가 있다면 70년대에는 서먼 먼슨-칼튼 피스크가 있었다.
특히 앞서 말한 4명은 자신의 라이벌에게 선의의 경쟁자로 대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고 경의를 표하는 등 사이가 매우 좋았으나 먼슨과 피스크는 그런 거 없고 만나기만 하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고는 했다. 이 때문인지 피스크의 양키스에 대한 감정은 대단히 좋지 않아서 '핀스트라이프 저지를 입은 자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당시 양키 외야수였던 루 피넬라와 쌈박질을 벌이기도 했고, 루 피넬라와의 홈 충돌 과정에서 격분하여 매우 격하게 싸우다가 동료 투수 빌 리의 어깨가 망가져 리가 시즌을 마감하는 사태도 있었다. 이 영상을 보면 난투극 영상이 있는데, 오래 전 영상 파트에서 나오는 레드삭스 포수가 바로 칼튼 피스크.
그렇게 레드삭스 통산 타율 .284 OPS .837을 찍고 골드글러브급 명포수이자 레드삭스의 리더로서 이름을 날리던 시기가 저물 무렵, 당시 레드삭스의 다른 미들라인 디펜더인 릭 벌리슨[8], 프레드 린[9]과 합심(세 선수는 에이전트가 같은 인물이었다.)하여 레드삭스 프런트에게 '''"연봉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제 값을 쳐줘야지 이러면 곤란..."'''이라는 항의를 했다. 그러나 프런트와 헤이우드 설리번 GM[10]은 연봉 인상에 인색해했다. 그 결과, 릭 벌리슨은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트레이드되었고, 프레드 린은 벌리슨의 트레이드 이후 한달만에 다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피스크. 설리번 단장은 피스크에게도 우물쭈물한 협상만 하다가 정해진 연봉협상 데드라인에 이르러서야 계약 제안을 발송했다.
그런데, '''이놈의 계약 제안 문서가 피스크의 집에 협상 기한을 넘어서야 도착했다(...)'''
그 결과는 당연히 FA자격 획득. 보삭스는 망했어요.[11]

3. 하얀 양말 72번 시절


FA 자격을 획득한 피스크는 자신이 원하던 몸값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한다. 베이스볼 레퍼런스 칼튼 피스크 페이지에서 1980년 연봉은 조사되지 않고 있지만, 시카고행 FA 계약 이후 79년 연봉 19만 5천 달러에서 81년엔 58만 달러로 확 뛰는 것을 보면, 레드삭스의 연봉이 굉장히 짰던 모양...
보삭스 번호 27번은 시삭스에서는 이미 달던 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72번으로 뒤집어 달았다고. 그런데 27번 선수가 피스크 영입 후 트레이드되었는데도 피스크는 계속 72번을 고수했다.
아무튼 FA 자격으로 하얀양말로 갈아신은 피스크의 데뷔전은 펜웨이 파크에서의 원정경기. 첫 경기에서 8회초 쓰리런을 날렸다.
이후로도 승승장구하고 특히 타격이 일취월장하여 화이트삭스 시절부터 실버슬러거를 4회 따낸다.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고, 1990년에는 자니 벤치의 포수 통산 최다 홈런을 넘어섰다.[12] 또한 40세 이후에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낸 타자이기도 하다. 무려 72홈런(...) 보스턴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인기팀[13]이었던 시카고에서도 4차례 올스타에 선정되었다.(보스턴-시카고 통산 11회 올스타) 91년에 43세의 나이로 출전한 올스타전에서도 안타를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올스타전 최고령 안타 기록이다.
수비도 여전했다. 뉴욕 메츠 레전드 톰 시버가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달성한 300승 경기를 캐치했고, 1993년 제임스 맥도웰이 사이영상을 받을 때는 피스크에게 가장 큰 감사를 표했다. 1993년에는 포수 통산 최다 출장 기록을 갈아치웠다.[14] 1984년 밀워키 브루어스전에서는 단일 포수 경기 중 가장 긴 경기를 캐치하기도 했다. 혼자서 25이닝을 버텼다고... ㄷㄷ[15]
특히 7~80년대 화이트삭스는 평균 연령이 굉장히 어린 팀이었고 강한 아우라를 뿜는 리더가 절실했는데, 그 역할을 피스크가 맡아서 했다. 포수로서 공수를 겸비하고 클럽하우스 내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자랑하는 그의 모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이상적인 포수의 모습이었다 할 수 있다.
특히 포수 포지션의 막중한 체력적 부담을 고려할 때, 40대가 넘어서도 기량을 잃지 않고 주전으로 활약했다는 점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포수가 체력적인 부담이 워낙 심하고 몸을 혹사시키는 포지션이다 보니 40대의 나이에 포수 마스크를 쓰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전설적인 포수들조차도 실제로 30대 중반 정도면 기량을 대부분 잃고 매년 팀을 옮기는 저니맨이 되거나, 은퇴하거나, 포지션 전향을 하곤 했다. 반면 피스크는 43세까지 주전 포수를 맡았고 40~42세 나이의 3시즌 동안 OPS 0.8 이상을 기록했다. 남들 같으면 감독을 하고 있을 나이인 43세에 선수로서 올스타전에서 뛰기도 했다.
나이 들어 더 이상 빅리그에서 버티지 못하자, 말년엔 화이트삭스 루키리그 팀에서 잠시 활동하며 투수들에게 가르침을 줬다.
다만, 하얀 양말로 갈아신었는데도 화이트삭스 구단 수뇌부 측과도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번엔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르프와의 갈등인데, 명예의 전당 헌액식 연설에서도 이를 밝히기도 했다. 심지어 은퇴 후 동료들의 포스트시즌을 격려하기 위해 클럽하우스를 방문했다가 구단주에게 쫓겨나기도 했다고. 많은 이들은 이런 구단주와의 갈등 때문에 더 많은 업적을 쌓은 화이트삭스를 버리고 레드삭스 모자를 쓰고 HoF에 간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거진 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4. 명예의 전당과 영구결번, 그 외


200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당초 첫 해 입성 가능성도 있었지만, 같은 해 은퇴한 선수들이 '''놀란 라이언, 조지 브렛, 로빈 욘트'''라서 첫 해엔 물먹고 두번째 투표에서 턱걸이로 들어갔다.
위에 언급하고 사진에도 나왔듯이 레드삭스 모자가 동판에 새겨졌으며, 은퇴 후 잠시 레드삭스 프런트에서 일했던 인연을 들어 레드삭스에서는 레드삭스 영구결번 규정을 만족한 것으로 인정하고 명예의 전당 입성 즉시 27번을 영구결번시켰다. 양말의 색과 관계없이 양 팀에서 모두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인정받고 있어 화이트삭스 역시 72번을 결번 조치했고, 2005년에는 U.S. 셀룰러 필드 외곽에 피스크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다만 선수생활의 옥의 티로 우승반지가 없었던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되었는데, 두 팀이 2004, 2005년을 각각 우승[16]하면서 칼튼 피스크에게도 우승반지를 선물했다. 레드삭스는 2005년에 신시내티 레즈 빅 레드 머신과의 월드시리즈 명승부를 기념하는 인터리그 경기에서 과거 칼튼 피스크가 날렸던 홈런을 기념하여 좌측 폴대를 피스크 파울 폴로 명명했다.
지금도 요기 베라, 자니 벤치를 계승하는 MLB 역사상 최고의 포수 중 하나로 꼽힌다. 그리고 칼튼 피스크의 계승자는 바로 이반 로드리게스[17].[18] 지금은 이반 로드리게스의 별명인 퍼지의 원조가 바로 칼튼 피스크니까 말 다했다. 사실 퍼지라는 별명은 땅딸보란 뜻인데, 피스크는 어릴 때 그 별명을 얻었지만 커서는 6'3" 200lbs의 우월한 거구가 되었지만 계속 쓴 케이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로드리게스야말로 진정한 퍼지일듯.
로드리게스와 닮은꼴 선수 비교 순위를 보면, 역시 칼튼 피스크가 최고 순위에 나온다.
흑역사로는 2012년 10월 음주운전으로 체포된 것이 있다.

1975년 월드 시리즈의 역사적인 끝내기 홈런은 두고두고 회자되어 보스턴을 배경으로 하는 명작 영화 굿 윌 헌팅에서도 회상 장면으로 등장한다. 극중 윌 헌팅(맷 데이먼)의 닫힌 마음을 열고자 노력하던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 분)의 말에 따르면, 이 시절에 6차전 티켓을 얻었는데 우연히 주변 술집에서 한 여편네한테 꽂혀서는 경기 쌩까고 둘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12회말 정신줄 놓고 필드로 난입해서 홈런 친 퍼지는 사람들 이리저리 치우면서 겨우 플레이트를 밟았고 완전 장난 아니었음ㅋㅋㅋㅋㅋ"

"개쩌네요 선생님이 그 때 직관을 하셨다닠ㅋㅋㅋ"

'''"아니. 난 그 때 여자랑 있었어."'''

"에라이... 어떻게 여자 꼬시려고 그걸 안 볼 수가 있어요? 후회되지 않아요?"

'''"후회 같은 거 전혀 없어. 난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거든..."'''

이런 내용.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칼튼 피스크
1
54
120
49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Catcher (4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칼튼 피스크
68.2
37.5
52.9
포수 HOF 입성자 평균
53.4
34.4
43.9

[1] 카터는 엄밀히 따지면 벤치와는 동시대 선수가 아니지만, 피스크가 선수생활을 워낙 오래 한 덕에 카터, 벤치 둘의 활동 시기와 함께 하게 되었다.[2] 이들의 다음 계보는 이반 로드리게스마이크 피아자가 양분한다.[3] 190cm의 장신인 피스크가 땅딸보라는 뜻의 이 별명을 가지게 된 건 어린 시절 피스크의 키가 작았기 때문. 그리고 이 별명은 2000년대 말 그가 은퇴할 시기에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등장한 푸에르토 리칸 포수 이반 로드리게스에 그대로 전수된다.[4] 원래 이 드래프트는 6월에 열리는 정식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못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번외 드래프트이다.[5] 일본프로야구 통산 타율 2위인 그 레론 리 맞다. 그의 동생 레온과 조카 데릭(레온의 아들)도 야구선수로 활약.[6] 이 부상은 2011년 (역시 당대 최고 공수겸장 포수인) 버스터 포지의 부상으로 홈플레이트 충돌이 논란이 될 때도 회자되었다. 포지 역시 다음 시즌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했지만, 이 사건은 2014년 홈 블로킹 규정이 포수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개정되는 데 영향을 준다.[7] 오늘날 펜웨이 파크의 우측 폴대는 우측 폴대를 맞추는 홈런을 때렸던 조니 페스키를 기려 Pesky's Pole로 불린다. 2005년부터 그린 몬스터 방향의 좌측 폴대는 '''the Fisk Foul Pole'''이라 불린다.[8] 지금도 명 유격수 재목이 나올 때마다 레드삭스 쪽 스카우터들은 벌리슨을 예로 든다. 당대에 손꼽히는 명 유격수였다. 그래도 나중에는 화해해서 92-93 시즌에는 보스턴 3루 주루 코치도 역임했다.[9] 비록 영구결번은 아니지만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 내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중견수. 레드삭스 통산 비율스탯에서 3할 타율과 9할 OPS를 찍었다. 또한 스즈키 이치로와 함께 역대 유이한 신인왕-MVP 동시 수상자(1975년)기도 하다. 거기에 9회 올스타. 4회 골드 글러브까지. 더 이상의 설명이 과연 필요한지?[10] FA 시장에 절대 뛰어들지 않은 짠돌이 GM으로 잘 알려져 있다. 레드삭스는 70년대 커트 플러드 사건 이후 생긴 FA제도의 도입 후에도 1980년대 말까지 선수들의 연봉을 신나게 후려치고 외부 FA 영입을 자제하면서 팀을 운영했는데, 그 결과 80년대 중·후반부터 선수들의 기피대상이 되어 FA시장에 다시 뛰어들었는데도 선수들이 오질 않았고 타 팀 선수들 역시 레드삭스행 트레이드에는 거부권을 행사했다(...)[11] 이 보사구팽은 역대 수많은 보사구팽 중에서도 베이브 루스, 웨이드 보그스, 로저 클레멘스와 함께 역대 최악의 보사구팽으로 손꼽힌다. [12] 2004년 전설의 공격형 포수 마이크 피아자가 이 기록을 넘어섰다.[13]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란거지 흥행 하위권이라는게 절대 아니다. [14] 이는 제2의 퍼지 이반 로드리게스가 경신했다.[15] 이 때 감독이 토니 라 루사였는데 나중에 야디어 몰리나를 20이닝 버티게도 했다.[16] 잘 알겠지만, 이 두 팀은 각각 역사적으로도 흠좀무한 징크스가 있었기 때문에 90년 가까이 우승이 없었다(...)[17] 2011년을 끝으로 은퇴했다.[18] 수비력은 요기 베라-자니 벤치-칼튼 피스크-이반 로드리게스의 역대급 대포수 라인에 떨어지지만, 포수 최초 400홈런이라는(포수 외 출장 경기 홈런을 포함한 것으로, 순수 포수 출장 홈런은 400홈런에 살짝 못 미친다), 그들을 넘어서는 압도적 장타력으로 이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 마이크 피아자를 이 라인에 넣기도 하지만, 대체로 피아자는 저들보다 아래로 치는 추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