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토머스
1. 개요
'''199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오른손 타자 중 한명이자 시카고 화이트삭스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스테로이드 시대에 약물 없이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낸 '''청정타자'''다. 약물이 만연하던 시대를 지나오면서 상대적으로 가장 가치가 하락했던 선수 중 하나이다. 무책임하고 경솔한 언행[3] 으로 구설수에 오르며 2000년대 들어 평가가 극히 나빠지기도 했지만, 한 시대를 지배했던 타자들이 약의 힘을 빌렸음이 드러난 이후, 반대급부로 2010년대부터는 오히려 평가가 대폭 오르며 크게 수혜를 입은 선수. 그리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시카고 화이트삭스 공격 기록의 상당 부분에 이름을 남긴 타자다. 별명은 빅 허트(Big Hurt).'''내가 선수 생활을 시작할 때 30홈런 100타점을 때려내면 대단한 선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40홈런과 120타점을 목표로 했고 그것을 이뤄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수들이 60개씩 홈런을 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나에게 평범한 선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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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성적은 19시즌 2322경기 10075타석 8199타수, 타율 .301, 출루율 .419, 장타율 .555, OPS .974, 순장타율 .254, 1667BB/1397K, BB/K 1.19개, wRC+ 154, 2468안타, 521홈런, 1494득점, 1704타점.
2. 선수 시절
다른 미국의 운동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프랭크 토머스 역시 고등학교 시절 야구와 농구, 미식축구를 병행했다. 그러나 그 중 야구를 가장 좋아했던 토머스는 1986년 드래프트에서 자신을 지명해주는 팀과 무조건 계약하겠다고 결심했지만 196cm, 125kg의 야구 선수보다 미식축구 선수 같아보였던 토머스를 지명하는 팀은 없었다.
결국 미식축구로 유명한 어번 대학교에 미식축구 선수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 토머스는 미식축구 팀의 타이트엔드를 맡았지만 정작 토머스는 본업인 미식축구를 내팽겨치고 야구에만 집중했다. 이에 학교는 토머스의 장학금을 취소했으나 야구 팀 최고의 스타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특별 기금을 조성해 토머스에게 새로운 장학금을 주었다. 그리고 198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지명받게 된다.
마이너 리그를 빠르게 졸업하고 1990년 메이저 리그에 콜업된 토머스는 60경기에 출장해 .330 .454 .529 7홈런 31타점을 기록하면서 빠르게 메이저 리그에 정착했다.
이듬 해인 1991년 첫 풀타임 시즌을 맞이한 토머스는 158경기에 출장해 .318 .453 .553 32홈런 109타점이라는 신인답지 않은 성적을 올리면서 그 해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3위에 올랐다.[4] 이때부터 1997년까지 토마스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한 '''7년 연속 3할 - 20홈런 - 100득점 - 100타점 - 100볼넷'''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92년 160경기 .323 .439 .536 24홈런 115타점으로 자신을 예열한 토머스는 1993년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하게 된다. 이 해 토머스는 153경기에 출장해 '''.317 .426 .607 41홈런 128타점'''을 기록했다.
이듬 해인 1994년은 파업으로 인해 어수선했던 시즌이었지만 토머스는 113경기에 출장해 '''.353 .487 .729 38홈런 101타점'''을 기록해 아메리칸 리그에서 로저 매리스 이후 처음으로 MVP 2연패에 성공했다. 이때 wRC+ 205를 기록했는데 배리 본즈와 마크 맥과이어를 제외하면 2020년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단일시즌 wRC+ 200을 넘겼다. 이때 NL MVP 제프 배그웰도 똑같이 wRC+ 205를 기록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생년월일도 같다.
파업의 여파가 이어졌던 1995년에도 145경기 .308 .454 .606 40홈런 111타점을 기록하고 1996년에도 141경기 .349 .459 .626 40홈런 134타점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보여줬던 토머스였지만 어느새 암운이 몰려오게 되는데 바로 알버트 벨의 영입이었다.
1997년 알버트 벨이 5년 5500만 달러의 사상 최고 계약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하면서 하루아침에 2인자가 되어버렸고 연봉에서도 큰 격차를 느낀 토머스는 팀에 섭섭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해 벨은 자신의 명성에 맞지 않게 조금 부진한 모습이었지만 토머스는 146경기 .347 .456 .611 35홈런 125타점을 기록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3위에 올랐다.[5]
1998년을 앞두고 7년 6440만 달러의 벨에 못지 않은 재계약을 맺은 토머스였지만 스프링 캠프를 앞두고 체중이 크게 불어난 모습으로 나타났다. 결국 후유증이 곧바로 나타나 160경기 .265 .381 .480 29홈런 109타점으로 크게 부진했다. 반면에 알버트 벨은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냈고 시즌이 끝나자 마자 자신의 계약에 삽입되었던 엘리베이터 조항을 발동해 FA가 되어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했다.[6]
1999년 토머스는 자신의 타석 위치를 뒤로 옮기는 조정을 했지만 오히려 전년보다 부진한 135경기 .305 .414 .471 15홈런 77타점에 그치면서 끝물에 접어드는 듯 했다. 하지만 2000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건너 온 폴 코너코의 합류로 지명타자로 자리를 옮겼고 절치부심해 살을 뺀 토머스는 159경기 .328 .436 .625 43홈런 143타점을 기록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MVP 2위에 올랐고[7] 올해의 재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2001년 토머스는 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당시 메이저 리그에는 알렉스 로드리게스, 매니 라미레즈, 데릭 지터 등의 초대형 계약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자신의 계약이 이들에 비해 초라함을 불평하던 토머스는 스프링 캠프에서 무단이탈해버리고 만다. 결국 토머스는 계약 규모를 늘리는 대신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계약 재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기량 감퇴 조항(diminished skills)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오판이었다. 이 과정에서 토머스는 돈을 밝힌다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얻게 됐으며 선수단 내에서의 영향력을 일순간에 잃어버렸다. 거기에 그 난리를 피워 팀 분위기를 망쳐놓고 정작 2001년 시즌이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며 큰 비판을 받았다.
2001년과 2002년을 부상과 부진으로 보낸 토머스는 2003년 153경기 .267 .390 .562 42홈런 105타점을 기록했지만 2004년과 2005년도 앞서와 다른 것 없이 크게 부진했고 결국 계륵이 되버린 토머스는 팀이 블랙삭스의 저주를 깨며 우승한 순간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팀은 내친 김에 토머스에게 은퇴를 종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동안 이기적이고 미운 짓만 골라 했어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과거 엄청난 활약을 한 대선수가 그런 지경까지 몰리자 팬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결국 화이트삭스를 떠난 토머스는 2006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단돈 50만 달러에 계약하게 되는데 이게 웬걸 137경기에서 .270 .381 .545 39홈런 114타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한 번 올해의 재기상을 수상했고[8]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여기에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그 시즌 사이영상 수상자인 요한 산타나와 제시 크레인을 상대로 2홈런을 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듬 해인 2007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에 성공한 토머스는 155경기 .277 .377 .480 26홈런 95타점을 기록하면서 전년도의 기세를 제법 이어갔지만 2008년에는 부상과 부진을 거듭해 방출되었고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갔지만 몇 경기도 소화하지 못한 채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3. 주요 기록과 위상
화이트삭스의 통산기록 상당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홈런, 득점, 2루타, 타점, 총루타, 볼넷, 출루율, 장타율 부분에서 토머스는 모두 1위에 올라있다. 또한 통산 3할 타율(.301)을 유지하면서 500홈런을 동시에 기록한 역대 7번째 선수이며, 500홈런과 1600볼넷을 얻은 여섯 명의 중의 하나이다.
매우 뛰어난 선구안을 가지고 있었다. 통산 볼넷에서 역대 10위(1,667BB)로 1990년대 AL에서 가장 많은 1,076개의 볼넷을 얻어내며 1990년대 출루율 1위를 찍었다.[9] 단일 시즌 볼넷 1위 4번에 탑10에 11번이나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삼진 탑10에 든 적이 없었다. 배리 본즈조차 삼진 탑10에 든 적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수준이다. 단순히 볼넷을 잘 고르는 걸 넘어서 변화구에 대한 선구안도 좋아서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와 요한 산타나의 체인지업도 홈런으로 연결시킬 정도였다. 통산[10] BB% 역시 역대 18위(16.5%)로 매우 높다. 출루율도 통산 .4191로 역대 20위이며 1995~2002년까지 현역 출루율 1위였다. 토마스 위의 19명 중 토마스 세대는 배리 본즈 하나뿐이고 본즈 외에 가장 가까운 선수가 1950~60년대의 미키 맨틀이다.
장타율 역시 통산 .555로 역대 19위라는 높은 순위이며, 1995~1998년엔 현역 장타율 1위였다. 자연스럽게 OPS도 1995~2001년까지 현역 1위였다.
배리 본즈, 켄 그리피 주니어와 1990년대 메이저 리그를 삼분했다고 일컬어지는 최고의 우타자이다.[11] 1990년대에 비록 홈런의 개수는 301개로 역대 9위이지만 wRC(+), 볼넷, 출루율, wOBA 등 여러 지표를 비교한다면 배리 본즈와 더불어 투톱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1994년에 찍은 205의 wRC+는 본즈와 맥과이어를[12] 제외하면 2020년까지 마지막으로 200을 넘긴 기록이며 역대 25위 기록이다. 마이크 트라웃조차 최고 기록이 2018년 191이니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알 수 있다.
토마스만이 가진 기록으로는 1991년부터 1997년까지 7년 연속 3할 - 20홈런 - 100득점 - 100타점 - 100볼넷이 있다.[13] 이 얘기는 명예의 전당 동판에도 적힌 업적이다.
통산 수비 bWAR이 -22.5로 커리어 내도록 -가 아닌 적이 없을 정도로 수비는 별로였다. 비슷한 타자인 짐 토미가 -16.4에 -가 아닌 시즌도 5번이나 있었고, 간판급 악송구를 가진 알폰소 소리아노가 -10.1에 1을 넘긴 시즌도 2번이나 있는 걸 보면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팬그래프의 수비 점수는 지명타자 출장이 꽤 됨에도 불구하고 '''-267.4점'''으로 역대 순위 중 뒤에서 3번째다. 그래서인지 90년대 중반 메이저리그의 평가도 수비와 도루 능력을 빼면 본즈에 필적하고, 수비와 인기를 빼면 그리피에 필적하는 퓨어히터였다. 젊을 때는 그나마 리그 평균 1루수보다 조금 못하는 정도였지만 나이가 점점 들고 98년부터 몸무게가 130kg 이상 늘어나면서 1루수에서도 밀려나 지명타자로 주로 활동했다. 통산 WAR이 커리어에 비해 낮은 것도 이런 이유다.
2010년대로 갈수록 세이버와 2차 스탯을 중시하며 분석에 중점을 두는 성향의 매니아들에게 고평가 받는 추세이다. 출루율과 장타율이 매우 높은데 타율까지도 3할이다. 거기에 홈런도 잘 치고 세이버 스탯들도 값이 높다. 즉 동시대 그의 모습을 지켜본 경우보다 지난 스탯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시점에 더욱 평가가 후해지고 위치가 상승할 수 있는 선수라고 볼 수 있다. 사실 90년대 중반이후에도 토마스의 실력은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았으나, 수퍼스타로서는 뭔가 모자란 위치였고, 2000년대의 토마스는 사고뭉치로 몰려 쫒겨난 소사와 함께 몰락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선수였다. 평판은 바닥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팀과 동료들에게 노골적으로 외면당하고 아예 강제 은퇴와 방출까지 몰린 상황이었으니.... 다만 너무 초라하게 쫒겨났고 오클랜드에 최저가로 이적하면서 그래도 한때 리그를 대표하던 강타자였다며 동정하는 여론이 많이 늘어났다. 배리 본즈와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등이 약물 문제로 개같이 까이는 상황에서, 비록 쫓겨나듯이 이적했지만 약의 힘 없이 청정하게 재기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노장에 대한 격려로 최악이었던 인식도 많이 누그러졌다.
스테로이드 시대를 거치면서 켄 그리피 주니어, 짐 토미와 함께 약물에 대해 가장 당당한 선수다. 약물 조사를 담당했던 미첼 위원회에 자진해서 나가 조사에 응했고, 아예 1995년부터 올림픽처럼 타이트한 '''약물 검사 도입을 주장했던 선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배리 본즈 등의 믿을 수 없는 홈런 기록과, 90년대말~2000년대 초반 토마스의 기록이 대단치 않게 보이는 슬러거들의 타격 인플레가, 사실은 대부분 약물의 힘으로 일궈낸 것이라는 점이 밝혀진 이후, '''반대급부로 오히려 토마스의 평가는 급상승한 바람에 근래는 과대평가 논란까지 나올 정도이다.''' 또한 약물 복용이 의심되는 선수들이 30대 중후반에도 신체능력이 저하되지 않고, 전성기를 계속 유지했던 반면, 토머스는 30세를 기점으로 급격한 노화 현상이 찾아오면서 기량이 들쑥날쑥 해졌기 때문에, 커리어 곡선으로 보아도 약물과 연관성을 더욱 멀리할 수 있었다.[14]
다만 토마스도 한 때 누적 커리어 평가에 불이익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시대의 가장 큰 피해자인 마냥 과장되어 묘사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 미루어 본다면 많은 오류가 있다. 적어도 토마스 본인부터가 1990년대부터 한결같은 주특기인 언론에 징징거리기 신공으로 떠드는 것처럼, 당시 그가 약물 선수들 때문에 당대에도 크게 불이익을 겪고 푸대접 받은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심한 비약이다.
1. 토마스가 처음 30홈런을 기록한 1991년, 언론에서는 23살의 나이에 31홈런 109타점을 기록한 토마스를 메이저리그를 이끌어갈 신예 슬러거로 꽤나 띄워줬었다. 이 해에는 세실 필더가 44홈런으로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 홈런-타점 2연패를 이루었는데, 같은 44개를 날린 호세 칸세코가 공동 홈런왕에 올랐다. 이미 당대의 수퍼스타이자 화려한 사생활로 연예인같은 대중의 인기를 누리던 칸세코 때문에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한 토마스가 평가절하 될 상황도 이유도 없다.
2. 토마스가 40홈런 120 타점 이상을 기록한 1993년(41홈런, 128타점)은 MVP를 수상했다. 또한 단축 시즌인 1994년(타율 .358 38홈런, 101타점)에도 연속으로 MVP를 수상했는데, 106경기만 출전하고도 타율 0.357, 36홈런, 101타점을 기록한 알버트 벨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성적이었음에도 기자들은 기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던 벨을 외면하고 토마스에게 몰표를 주었다. 오히려 MVP에 오른 후 '야구에서 몇 년 더 이룰만한 걸 이루고 30세가 되면 은퇴해서 인생을 즐기며 살겠다.' 이런 인터뷰를 해서 스타로서 책임감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3. 1995년은 40홈런, 111타점을 올렸는데, 알버트 벨은 그해 무려 50 홈런 - 50 2루타의 대기록과 함께, 126타점으로 홈런 타점왕을 동시 석권한 95년 최고의 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다들 약물복용자인 모 본에게 표를 던졌고 결국 39홈런 126타점이라는, 벨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스탯을 기록한 본에게 MVP를 강탈 당했다.
4. 1996년에도 40홈런, 134타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알버트 벨은 48홈런(홈런 2위), 148타점(타점 1위)을 올렸다. 그럼에도 MVP는 134경기만 출전하고도 47홈런, 144타점을 기록한 약물복용자 후안 곤잘레스에게 돌아갔다. 참고로 이 해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은 역시 약물복용자인 52개의 마크 맥과이어.
5. 1997년 타격왕에 오르면서(.357) 35홈런, 125타점을 기록했는데, 새로 합류한 알버트 벨에 밀려 2인자가 되고, 벨의 최고 연봉에 혼자 삐져서 시즌 내내 툴툴거리는 바람에 팀을 골치아프게 했다. 결국 팀은 시즌 종료 후 7년 6,440만 달러라는 당시 최고 규모 연장계약을 체결해 제대로 대접을 해 줬으며, 언론에도 최고 계약으로 대서특필 하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허나 역시 약물과 무관한 청정타자 그리피는 이 해 무려 56홈런을 날리고 147타점, 수비에서도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며 MVP에 올랐다. 토마스의 연봉은 그런 그리피보다 한참 더 높았다.
6. 1998년 스프링캠프에 무려 135킬로가 넘는 파오후가 되어 등장하였고, 시즌 내내 위력이 확 떨어진 모습을 보인 끝에 타율 .267, 29홈런 109타점을 기록했다. 클린업 듀오 알버트 벨은? 타율 .328, 200안타, 48홈런, 49 2루타, 152타점을 올렸다. 그러고도 또 다시 MVP는 1996년과 마찬가지로 45홈런과 157타점을 올린, 약물 슬러거 후안 곤잘레스에게 돌아갔다. 이쯤 되면 진짜 약물의 피해자는 벨이 아닌가? 토마스는 이 해 30홈런 100타점에 근접한 성적을 올리긴 했다. 그러나 폭락한 타격 정확성과 장기계약 후 나태해지는 모습으로 연봉값을 못하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이때는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 레이스 열풍 때문에, 아메리칸 리그의 모든 타자들이 묻히는 비운을 맛봤다. 오히려 98년에도 약물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진짜 피해자는 위에 사실처럼 알버트 벨과, 2년 연속 56홈런과 146타점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고도, 2부리그 홈런왕처럼 별 것 아닌 취급을 당한 그리피였다.
7. 1999년 토마스는 '지명타자로만 출장했으면서도' .305 15홈런 77타점을 기록하는데, 이건 약물 때문에 불이익 어쩌고 할 성적이 아니다. 투고타저가 최악이던 1960~70년대로 가도 이 성적이면 지명타자로선 오히려 너무 초라한 누적스탯이다. 이 해 그리피는 또 다시 홈런 48개로 3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에 오르고,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으나,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 레이스 2탄에 또 다시 묻히는 비운을 맛 보았다.
8. 2000년 토마스는 재기에 성공하여 타율 .328, 43홈런, 143타점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이해 MVP 2위에 오르고 MLBPA 올해의 재기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팬들과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MVP는 0.333 43홈런 137타점을 올리고 오클랜드를 지구우승으로 이끈 제이슨 지암비에게 돌아갔는데, 비슷한 성적이었으나 팀이 우승한 지암비의 공헌도를 더 높이 쳐준 것. 사실상 토마스가 40홈런-120타점을 올리고 약물 선수에게 불이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이 때가 유일하다.'''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청정타자 그리피는, 이 해 신시내티 이적후 40홈런 118타점을 기록하고도, 그 위로 무려 5명이나 되는 약물 선수들에게 밀려 홈런 9위에 그치고 평범한(?) 성적으로 실망스럽다는 쓴소리까지 들었다. MVP는 놓쳤지만 팬과 언론의 극찬을 받은 토마스와, 약물 선수들에게 밀려 저 성적으로도 욕만 잔뜩 먹은 그리피. 대체 누가 더 큰 피해자였나?
9. 2001년 토마스는 이미 맺은 장기계약에 불만을 품고 돈을 더 올려달라는 황당한 꼬장으로 팀 분위기를 망치고, 팀을 무단이탈하는 최악의 판단으로 팬들의 지지와 팀의 신뢰 동료들의 존중을 모두 잃었다. 그렇게 억지 연봉 올리기에 성공해 놓고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부상을 당해 아웃 되었다. 이쯤부터 10년 베테랑이자 팀의 최고연봉자로 격에 맞는 행동과 거리가 먼 토마스는 팀의 골칫덩이로 전락하고, 폴 코너코가 새롭게 팀의 리더로 자리잡았다.
10. 2002년은 타율 .252 28홈런 92타점, 2003년은 타율 .267 40홈런, 105타점을 기록하는데, 펀치력은 있었지만 가장 큰 장점이던 타격의 정확도가 크게 하락했다. 게다가 2004, 2005년은 부상과 부진한 성적에도 정신 못 차리고 계속 팀에 대한 불평불만을 언론에 떠들어대서, 동료들도 완전히 등을 돌리고, 팀에서 처리 1순위로 낙인찍혔다. 심지어 월드시리즈 엔트리에도 완전히 제외되어 팀이 88년만에 우승하는 순간에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는 약물로 저평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자업자득으로 인한 인과응보였다.
11. 결국 팀에서 쫒겨나고 이기적이고 철없는 행동으로 인해 아무도 받아주는 곳이 없자, 50만불 최저연봉에 오클랜드와 계약했으며, 2006년 그간의 악평을 씻고 39홈런 114타점으로 MLBPA 재기선수상을 또 한번 수상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재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호의적으로 대했으며, 팬들도 너무 비참하게 쫒겨난 그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크게 격려하고 박수를 보내주었다. 또한 2005년의 약물 스캔들로 인해 그의 재기에 더욱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이때부터 약물로 인한 불이익은 커녕, 비약물의 상징으로 낙점되어 오히려 고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위의 사실들처럼 프랭크 토마스가 전성기를 누릴 당시, 해당 시즌 약물 선수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받은 불이익은 크게 없다고 봐도 좋으며, 오히려 그리피, 토미, 알버트 벨이 토마스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큰 타격을 받은 경우라 하겠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토마스의 이기적이고 철부지같은 태도가 크게 드러나 평가가 바닥까지 떨어졌으며, 그에 더해 누적 커리어를 놓고 보면 약물 스타들의 성적보다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아 저평가를 받은 현상은 사실이다. 그러나 재기에 성공한 2006년 이후 약물 스캔들이 겹쳐 그런 시각은 빠르게 뒤바뀌었으며, 토마스 본인부터 과장을 섞어 언론에 떠들어대면서 마치 그만 엄청나게 푸대접을 받은 것처럼 과장된 흐름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15][16]
본인의 미성숙한 태도와 약물시대 성적 인플레로 인해 가치가 많이 훼손되었고, 한 때는 팀의 암적인 존재로까지 떨어져 모두에게 외면당하며 은퇴당하고 흑역사로 남을 뻔한 선수.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세이버 매트리션들이 좋아하는 스탯들의 가중치가 높은 선수로 더 평가를 후하게 받게 되었으며, 약물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선수 시절의 사건들도 은근슬쩍 가려지면서 근래는 포장되면서 갈수록 미화까지 되고 있는 선수. 그야말로 근 10여년 사이 인생사 새옹지마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선수이다.
4. 화이트삭스와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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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삭스에서 쫒겨나는 모습으로 안 좋게 결별했지만, 그래도 은퇴 후에는 팀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과거의 구설수들도 다 옛말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2010년 은퇴 선언도 화이트삭스에서 했으며, 그의 등번호 35번은 2010년 8월 30일 성대한 행사 속에서 영구결번 되고, 그의 사진이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 외야에 남게 되었다. [17] 화이트삭스를 나올 당시 팀과 동료, 팬들의 냉랭한 태도와 다른 따뜻한 환영에 격세지감을 느낀 것인지, 영구결번식에서 토머스는 기념 연설 도중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환대에 감사했다. 2011년에는 화이트삭스가 그의 동상을 홈구장인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 외곽에 건립하기로 결정했을 정도로, 팀을 대표하는 레전드로 인정하며 극진히 모시는 중. 토머스가 MLB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자 토머스는 당연히 화이트삭스 모자를 선택했고, 화이트삭스 구단도 이에 관해 별도의 페이지를 만들어 기념할 정도. 팀의 상징에서 암적인 존재까지 몰락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나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토마스는 우여곡절이 많았다지만 화이트삭스 팀 프랜차이즈 기록의 타자부문에서 대부분 1위이기 때문에 구단 입장에서 쉽게 쌩깔 수 있는 선수가 아닌 것도 컸다.
5. 명예의 전당 입성
2014년 명예의 전당 투표 후보로 등록된 첫해, 83.7% 득표율로 당당히 첫 턴 입성에 성공했다. 같은해 첫 턴 입성에 성공한 그렉 매덕스와 톰 글래빈에 묻혀 주목을 덜 받는 감이 있어 아쉽지만, 첫 턴 입성은 그야말로 "명예 중의 명예"이다. [18] 사실 은퇴 직전만 해도 명예의 전당은 당연하겠지만, 첫 해 입성은 어렵다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대형 약물스캔들이 끊이지 않으면서 스테로이드와 무관한 선수들의 대접이 더욱 좋아졌으며, 그만큼 명예로운 선수들에겐 더 큰 대접을 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늘어나, 입회 시점에 상대적으로 많이 이득을 본 셈이다.
5.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First Base (9th)
6. 은퇴 이후
FOX의 MLB 프로그램 패널로 꾸준히 출연중이다. 포스트 시즌 등의 현장 중계 때는 알렉스 로드리게스, 데이빗 오티즈와 함께 하고 스튜디오에서의 분석시간은 주로 돈트렐 윌리스와 함께 한다. 진행을 맡는 케빈 버카트는 토마스를 항상 Hall Of Famer Big Hurt 프랭크 토마스라고 소개하는데, 같이 있는 로드리게스와 오티스는 그냥 이름만 부른다.
7. 연도별 성적
8. 여담
여담으로 별명 '빅 허트'(Big Hurt)에서 풍기는 타석의 포스와 큰 체격의 위압감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성격이 상당히 온순한 걸로 알려져 있다. 실제 1998년 시즌을 앞두고 장기 계약을 체결하기 전만 해도, 집과 연습장 외엔 별 취미도 없다보니, 몸 관리를 매우 잘해서 큰 체구에도 생각보다 날렵한 편이었다. 2000년/2006년 시즌에도 체중 감량에 거듭 성공하여 좋은 활약을 하는 등 프로로서 신경쓸 건 철저히 신경썼다. 어린애처럼 순박한 미소만큼이나 성격은 정말 솔직하고 순수했고, 그만큼 어린애같이 잘 토라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여느 악동들처럼 깽판을 벌이거나, 술마시고 사고 치는 일은 선수생활 내내 없고, 그냥 하소연 하는 것뿐. '''단, 하소연을 장소 못 가리고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이 문제로, 프런트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잦았다. 팀의 상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리그 최고의 강타자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접하는 언론에다 대고 전혀 절제되지 못하고 아무생각 없는 듯한 화법을 사용했다. 이런 점 때문에 툭하면 징징거리는 것으로 비춰져서 철부지 같다는 평이 많았다.
그리고 워낙 순둥이라서 역으로 리더가 갖춰야 할 투쟁심이 부족하다며 지적 되기도 했다. 뭐 이런 정도는 사실 알버트 벨이나 밀튼 브래들리, 칼 에버렛 같은 악동들의 사고에 비한다면 문제라고 할 차원도 아니고, 그냥 좀 성가시거나 철이 좀 없는 대신 순해 빠졌으니. 덕분에 클럽하우스에서 동료들과 다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역사회에 봉사활동을 비롯해 자선사업 활동에 적극적인 선수로도 유명했으니, 잘 삐져서 하소연 늘어놓는 점만 아니었어도 사생활 바르고 순박한 만큼, 실력과 성품 모두 그림에 그린 듯한 모범 선수로만 남았을 듯.
1992년에는 유니버셜 영화사 제작, Fred Schepisi 감독, Tom Selleck 주연의 영화 "Mr. Baseball"에 뉴욕 양키스 루키선수 역활로 출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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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때 연습용 배트가 아닌 철근을 휘둘러대는 것으로 유명하다.
[1] 제프 배그웰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 [2] 1루수 971경기/지명타자 1310경기 [3] 악인이라는 게 아니라 책임감이 부족하고 자기가 당대의 아이콘이자 스타라는 걸 모르는 듯한 언사를 자주 했다.[4] 1991년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자는 칼 립켄 주니어였고 2위는 세실 필더였다.[5] 1997년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자는 켄 그리피 주니어였고 2위는 티노 마르티네즈였다.[6]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벨이 얻은 엘리베이터 조항은 다른 선수들의 연봉이 벨의 연봉액을 초과하는 경우 항상 연봉 랭킹에 들어가도록 차액을 추가로 지급하지 않으면 FA가 되어 자유롭게 타 팀과 계약할 수 있는 극단적인 꿀 보장이었다. 설마 화이트삭스도 5년 내에 더 큰 계약이 나타날까 했지만 당시 메이저 리그의 연봉 폭증과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가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6년 7500만 달러 재계약을 맺으면서 현실이 되어버렸다.[7] 2000년 아메리칸 리그 MVP는 제이슨 지암비였고 3위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였다.[8] 이 상을 아메리칸 리그에서 2번 받은 건 토마스가 유일하다. 내셔널 리그는 크리스 카펜터가 2번 받았다.[9] 2위와 차이가 137개다. 참고로 NL은 배리 본즈의 1146개.[10] 3천 타석 이상. 5천 타석 이상만 보면 11위. 1만 타석 이상만 보면 4위.[11] 마크 맥과이어는 90년대 최다인 415개의 홈런, 새미 소사도 365개의 홈런, 후안 곤잘레스는 2차례의 MVP와 4년 연속 40홈런 130타점 이상을 올린 1990년대 최고의 우타자들이다. 물론 모두 스테로이드 복용이 확인되었으므로 같은 선상에 놓지 말아야 한다. 배그웰은 카더라 정도의 이야기만 나온적이 있었으나, 적발된 사례나 미첼리포트에도 이름은 없었다. 마이크 피아자, 이반 로드리게스와 비슷한 경우.[12] 맥과이어는 1998년에 205를 기록했는데 순위(26위)로는 토마스보다 낮다.[13] 이전 기록은 테드 윌리엄스의 6년 연속[14] 상대적으로 노쇠화가 온다면 한번에 훅 가버리거나 하는 케이스도 많지만 보다 자연스럽게 하락이 진행된 케이스이다. 물론 토마스의 성적 하락은 장기계약 후 나태해진 자기관리도 영향을 미쳤다. 그전까지 토마스는 경솔한 언행이나 불평불만으로 구설수에 오르긴 했어도, 허리가 출렁거리는 모습은 전혀 없이 기량 유지에 충실했던 선수였다. 실제로 젊은 시절의 영상을 보면 덩치는 크지만 꽤 슬림해보인다.[15] 게다가 짐 토미와 같은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저평가가 심했는데, 알버트 벨과 매니 라미레즈라는, 더욱 완성도 높은 슬러거들과 같은 팀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그늘에 많이 가렸다. 설상가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1996년부터 2004년까지가 하필 스테로이드 시대를 관통하는 10년이었다. 토미는 9년 연속 30홈런 이상을 때렸지만 90년대 말의 30홈런은 왠만한 팀의 중심타자로서 평범한 것이었다.[16] 또한 토미는 2001년부터는 4년 연속 40홈런과 함께, 2003년 무려 52홈런을 기록했지만, 약물복용자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57홈런에 밀렸다. 이미 50홈런은 밥먹 듯 나온 바람에 예전만한 가치를 인정 받지도 못하고, 그냥 의외로 많이 친다는 정도의 저평가를 받았다. 2003년 필라델피아 이적 후 47홈런으로 생애 최초의 홈런왕에 오르면서야 겨우 최정상급 슬러거로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토미는 꾸준하게 기량을 유지하면서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2005년을 제외한다면, 38세인 2008년까지 34홈런을 기록하는 등 1996년~2008년까지 모두 30홈런 이상, 1994년~2010년까지 20 홈런 이상을 기록한 동 시대 최고의 슬러거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성기 내내 약물 선수들의 맹활약에 묻혀 직접적인 저평가의 대상이 된, 스테로이드 시대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이다.[17] 프랭크 토머스 사진 위의 'The Catch'는 마크 벌리의 퍼펙트 게임 9회에, 드웨인 와이즈가 홈런성 타구를 잡아낸 위치를 나타낸 것이다.[18] 그 와중에 가장 언론에 떠들어대는 것도 토마스였는데,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크게 높이면서 자랑하는 뉘앙스의 인터뷰는 여전했다. 과연 습성은 어디 안간다. 물론 레전드인 만큼 예우하기도 하고, 예전처럼 철없게 보는 시각은 사라졌다. 은퇴한 마당에 굳이 과거에 징징거린 일들이나 꼬장부리고 무단이탈한 흑역사는 그냥 묻어두는 분위기여서, 약물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미지 변신에 크게 성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