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 뱅크스

 


'''어니 뱅크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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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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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어니 뱅크스
Ernie Banks
'''
'''포지션'''
'''유격수'''
'''}}}#ffd700 득표수}}}'''
'''}}}#ffd700 598,168}}}'''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어니 뱅크스'''
헌액 연도
1977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3.8% (1회)

'''1958 ~ 1959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행크 애런
(밀워키 브레이브스)

'''어니 뱅크스
(시카고 컵스)'''

딕 그로트
(피츠버그 파이리츠)

'''196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유격수 골드 글러브'''
로이 맥밀란
(신시내티 레즈)

'''어니 뱅크스
(시카고 컵스)'''

마우리 윌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colbgcolor=#0e3386> '''시카고 컵스 No. 14'''
'''어니스트 "어니" 뱅크스
(Ernest "Ernie" Banks)
'''
'''출생'''
1931년 1월 31일
'''사망'''
2015년 1월 23일 '''(향년 83세)'''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텍사스댈러스
'''포지션'''
유격수, 1루수[1]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53년 자유계약 (CHC)
'''소속팀'''
'''시카고 컵스 (1953~1971)'''
'''수상'''
'''14회 올스타 선정 (1955~1962, 1965, 1967, 1969)
2회 NL MVP (1958, 1959)
NL 골드글러브 (1960)'''
2회 NL 홈런왕 (1958, 1960)
2회 NL 타점왕 (1958, 1959)
1. 개요
2. 프로 데뷔 전
3. 시카고 컵스 입단
4. 평가
5. 일화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7. 은퇴 이후


1. 개요


[image]
[image]
삭스팬에게 자유 훈장을 받으신 컵스의 레전드
또 다른 레전드와 함께

'''It’s a great day for a ballgame. Let’s play two?'''

'''야구하기 좋은 날이군, 한 게임 더 어때?'''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2년씩은 야구를 해봤으면 좋겠다.'''

'''미스터 컵스 (Mr.Cub)'''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 선수. 올스타에 11회나 선정되었으며, MVP 2회, 골드 글러브 1회,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는 후보 첫 해였던 1977년에 83.8%의 득표율로 입성했다. 더불어 시카고 컵스의 첫 번째 흑인 선수이다. 별명은 미스터 컵스, 미스터 선샤인.
통산 성적은 타율 .274, 512홈런, 2583안타, 출루율 .330, 장타율 .500, OPS .830, 순장타율 .225, BB/K 0.62, wRC+ 118, 1636타점

2. 프로 데뷔 전


12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공사장 인부, 시장 인부, 니그로 리그 선수 등 다양한 활동으로 그들을 먹여 살렸다. 운동 신경이 뛰어났던 뱅크스는 20살부터 니그로리그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51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게 되어 그라운드를 떠났다가 1953년 제대하여 다시 니그로리그로 복귀하여 유격수이면서도 3할 4푼 7리에 달하는 뛰어난 타율을 보이며 메이저리그의 관심을 끌게 된다.

3. 시카고 컵스 입단


[image]
당시 시카고 컵스는 키스톤 콤비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의 키스톤 콤비는 유격수 로이 스몰리와 2루수 에디 믹시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스몰리는 1950년 고점을 찍은 이후 수비력에서 문제를 보이며 하강세였던데가 타격도 평균 이하였으며, 에디 믹시스는 베테랑이었지만, 백업 수준의 타격 이상은 보여주지 못하는 선수였다. 마이너 리그에는 진 베이커라는 괜찮은 유격수 자원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컵스에서 용인될 수 없는 문제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가 '''흑인'''이라는 점이었다.
시카고 컵스는 메이저 리그 역사에서 흑인 선수를 받아들이는 데 매우 부정적인 구단으로, 초창기인 1800년대 팀의 전설적인 강타자 캡 앤슨이 메이저리그에서 흑인을 추방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팀의 구단주였던 존 리글리도 흑인 선수를 기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같은 시카고 지역 팀이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1951년 미니 미노소를 첫 흑인 선수로 받아들인 이후였지만, 리글리는 진 베이커를 메이저리그로 콜업하는데 주저하고 있었다. 이는 팀의 지역적 위치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당시 흑백분리 정책이 시행되던 시카고에서 남쪽은 흑인 지역이 많았고, 북쪽은 백인 지역이 많았는데, 화이트삭스가 남쪽에 위치한 반면 컵스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
그러나 1953년 니그로리그를 폭격한 어니 뱅크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시즌 말미에 뱅크스를 메이저리그 경기에 투입한다. 첫 날 야유 속에서 긴장한 뱅크스는 볼넷 한 개를 골라내는데 그치며 시합을 마쳤지만, 다음 날 2안타를 터뜨린 것을 시작으로 고작 10경기를 출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홈런 2개를 포함하여 OPS 0.956에 달하는 활약을 보이며 주전자리를 확정지었다. 어니 뱅크스가 유격수 주전이 확정되면서,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진 컵스는 진 베이커의 포지션을 2루수로 변경하여 콜업하게 되는데, 이들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키스톤 콤비가 되었다.
1954년 뱅크스는 적극적인 타격을 보이며, 로이 스몰리보다 더 나은 선수임을 스스로 증명해냈고, 신인왕 2위에 오른다. 한편 이 해의 신인왕 4위는 역시 흑인인 행크 애런이었고,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3위는 알 칼라인이었다. 한 해에 명예의 전당 타자가 3명이나 등장한 것.[2] 그리고 그는 파격적으로 가벼운 배트로 바꾸고 빠르고 컴팩트한 어퍼컷 스윙으로 스윙폼을 교정한다. 결국 1955년 드디어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해 44개의 홈런을 치며 윌리 메이스와 테드 클루스제프스키[3]에 이은 3위를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40홈런을 친 유격수는 어니 뱅크스가 최초였다. 2015년 현재까지도 유격수로 40홈런을 친 것은 모 약쟁이 외에는 리코 페트로셀리[4] 뿐이며[5], 그나마도 딱 한 번 턱걸이로 걸쳤고 그 이후에는 30홈런도 못 쳤다.
1956년 손목 골절로 인해 신인 연속 경기 출장 기록[6]이 깨짐과 동시에 홈런갯수가 30개 이하로 떨어지며 잠시 주춤했던 뱅크스는 다음 해부터 4년 연속 40홈런 이상을 쳤으며, 1958년과 1960년에는 홈런왕이 되기도 하였고, 1957, 1958년에는 내셔널리그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시카고 컵스는 뱅크스와 난쟁이들 수준의 타격을 보였으며, 투수력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당시 '''론 산토, 퍼기 젠킨스, 빌리 윌리엄스 등과 같이 뛰었다는것.''' 결국 뱅크스 시대 동안 시카고 컵스 팀 자체는 계속 부진했고 뱅크스가 한국 전쟁 당시 군대에서 얻은 무릎 부상이 점점 심각해지며, 외야수나 1루수로 나오면서 포지션 변화를 모색하다가 결국 1루수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그는 유격수로 활동할 때의 전성기에서 점점 하강하게 되며 1960년대는 평범하게 잘하는(...) 1루수로 활약하게 된다. 물론 1961년 1루수 전향 후 1969년까지의 성적도 나쁜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어니 뱅크스의 전성기에는 못 미치는 편. 1969년에는 32홈런을 치며 마지막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1970년에는 500홈런을 기록하였으며, 1971년 마지막 경기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4. 평가


'''컵스와 야구를 너무나도 사랑한 남자'''
그리고 시카고 컵스는 '''그가 활약하는 동안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 했으며'''(...) 어니 뱅크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선수'''로 남아있다. 참고로 두 번째로 오래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선수는 같은 시카고 구단인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영구결번 루크 애플링.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생활 때부터 은퇴 이후까지도 계속 시즌이 시작할 때는 올해는 시카고 컵스가 우승할 듯이라는 말을 하며 컵스 팬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대다수의 컵스 팬들처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컵스가 우승하는 걸 한 번도 못 봤지만(...).
그는 인종차별의 시대를 관통한 선수였다. 흑백차별이 여전히 뜨거운 불씨로 남아있는 동안, 뱅크스는 빈볼과 반칙을 묵묵히 이겨내야 했다. 재키 로빈슨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그에게 말하기보다는 듣고 인내하기를 요구하였으며, 그는 조언을 받아들였다. 또한 뱅크스는 로빈슨의 조언을 뛰어 넘어 온갖 시비에 대하여 항상 웃는 쾌활한 태도로 인종의 벽을 넘어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메이저리그가 사랑하는 미스터 선샤인이 되었다. [7]
타격에 있어서 그는 삼진도 적고 볼넷도 적은 전형적인 올드스쿨 타자로, 볼넷을 지양하고 적극적인 타격을 신봉하는 타자였다. OPS로 보면 낮은 출루율을 높은 장타율로 생산성을 커버하는 타자. 그러나 그 파워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던 것이 오늘날도 뱅크스가 훌륭한 타자로 평가받는 주요 요인이다. 이전까지는 무거운 배트[8]가 대세였으나 행크 애런과 함께 빼어난 손목 힘을 활용할 수 있는 가벼운 배트를 사용함으로써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뱅크스가 은퇴하기 전에는 500홈런 타자가 8명밖에 없었던 것만 봐도 그의 타격에 대해 이론이 나올 수 없게 한다. 뱅크스의 시대에 내셔널리그의 유격수의 평균 홈런 갯수는 고작 10개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소인국에 나타난 걸리버 수준. 다만 1루수로 포지션을 전향하면서 뱅크스를 유격수로 봐야할 지, 1루수로 봐야할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상황. 대체적으로 1루수보다는 유격수로써 더 많은 활약을 했고, 1루수로 뛴 경기와 유격수로 뛴 경기 수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업적을 쌓은 유격수로 더 많이 보는 듯.
유격수로써는 수비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한국 전쟁 참전 이후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갖고 있었으며, 덕분에 좌우 수비 범위가 좁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수비를 향상시켜 골드 글러브를 받는데 성공하지만, 지나친 훈련으로 인해 무릎 부상이 악화되었고, 이는 그의 포지션 변경의 원인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뱅크스는 1루수로써는 넓은 수비 범위, 훌륭한 어깨로 인해 최고의 1루 수비 중 하나로 손꼽혔다. 다만 당시 내셔널 리그에는 빌 화이트[9]라는 최고의 수비를 자랑하는 1루수가 있었기 때문에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지는 못했다.

5. 일화


  • '한 게임 더'라는 말이 나온 것은 1969년 시카고가 42도가 넘는 폭염에 찌들어 컵스 선수들이 클럽하우스로 피해있을 때 뱅크스가 들어오면서 "오늘 날씨 좋은데, 우리 두 경기 뛰는거 어때!"라는 말을 건네면서 생겨난 말이다. 당연히 선수들은 뱅크스를 미친 놈보듯이 쳐다봤고, 그걸 본 기자들이 기사화하면서 알려졌다고 한다. 아예 본인은 한 경기보다는 두 경기가 진짜라며 더블헤더를 정말 좋아했다고.
  •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날 지구 라이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발 밥 깁슨에게 "오늘 날씨 정말 좋지? 신나게 놀아보자!"라고 외쳤다. 당연히 밥 깁슨도 미친 놈보듯이 쳐다봤다고.
  • 마찬가지로 밥 깁슨에게 오늘은 "우리가 너에게 홈런을 칠거다!"라고 외쳤다. 참고로 밥 깁슨은 당대 최고의 헤드 헌터였다(...). 당연히 컵스 선수단은 뱅크스를 끌어냈고 제발 좀 그러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고.
  • 1982년 행크 애런이 단장이 된 마이너 올스타 팀이 프로 야구를 출범하는 한국에 친선 경기를 하러 왔을 때, 마이너 팀에 같은 컵스 출신 빌리 윌리엄스[10] 와 같이 왔는데, 한국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선수로 나서더니 홈런을 쳐버렸다고 한다. 그의 나이 52세.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어니 뱅크스
26
167
170
46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Shortstop (7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어니 뱅크스
67.4
51.9
59.6
유격수 HOF 입성자 평균
66.7
42.8
54.8

7. 은퇴 이후


부시장에 출마하였다 낙선하기도 하였고, 포드 사의 첫 흑인 주주로써 활동하기도 했다. 컵스의 앰배서더로도 오랫동안 활동하였으며, 각종 컵스 행사에 얼굴을 보이기도 했다. 사생활에는 문제가 있었던 지 첫 결혼 이래로 3번 이혼, 4번 결혼이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97년에 마지막으로 결혼한 이후에는 그래도 이혼은 안 한 듯.
1977년 명예의 전당에 첫 해 입성하는데, 명예의 전당 연설에서 그 유명한 '''한 게임 더! (Let's play two!)'''라는 말을 다시 사용하여 특유의 쾌활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82년 시카고 컵스의 영구 결번이 되는데, 이전까지 시카고 컵스에는 영구 결번이 없었다. 즉 시카고 컵스 최초의 영구결번이라는 뜻. 이후 마찬가지로 흑인인 빌리 윌리엄스가 컵스의 영구결번이 되었는데, 흑인 선수를 가장 먼저 추방한 시카고 컵스의 첫 영구결번이 흑인이며, 최초의 백인 영구결번이 2003년에야 생겼으며(론 산토), 지금도 흑인과 백인이 각각 3명씩으로 영구결번 숫자가 같은 것은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점.
2008년에는 리글리 필드 앞에 뱅크스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후 MLB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야구는 놀라운 종목이야. 내 소원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야구를 2년 정도 해 봤으면 좋겠어. 남자든, 여자든 말야."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2015년 1월 23일 향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이후 시카고 시장과 시카고 출신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추도 연설을 바치기도 했다.[11]
[1] 20대에는 유격수였으나 30세를 기점으로 은퇴할 때까지 1루수로 활약한다.[2] 참고로 이 해 신인왕은 뉴욕 양키스의 신인투수 밥 그림이었는데, 25세의 나이로 20승 6패 3.26의 성적을 기록하고 신인왕을 수상했다. 하지만 3년 뒤 팔 부상으로 인해 불펜투수로 전향했고, 61승에 그쳐 결국 명예의 전당에는 입성하지 못했다. 다른 세 타자가 첫 턴에 명전에 입성한 것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 사례 중 하나.[3] 신시내티 레즈의 영구결번 타자로 50년대 공수양면에서 최고의 1루수로 각광받았으나, 갑작스런 부상에 이어진 폭망으로 초라한 선수 생활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빅 레드 머신을 키워내는 타격 코치로 성공하여 최고의 타격 코치로 인정받았고 그 공로가 영구 결번까지 이어진 케이스.[4] 노마 가르시아파라 이전 가장 인기있던 보스턴 레드삭스 유격수이다.[5] 우리나라도 유격수가 40홈런 넘은 것은 2014년 강정호뿐이다.[6] 이후 50년 뒤에 마쓰이 히데키가 이 기록을 경신한다.[7] 2016년 월드 시리즈에서 컵스의 1번타자로 출장한 덱스터 파울러가 컵스 최초로 월드 시리즈 무대를 밟은 흑인 선수가 되었다.[8] 베이브 루스는 1.2kg짜리 방망이를 사용했고 이후 배트의 무게는 그 전후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다만 베이브 루스의 방망이도 그 당시 기준으로는 가벼운 축에 속했었다.[9] 6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1루수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선수 은퇴 이후 내셔널리그 회장이라는 고위직에 오른 것으로도 유명하다.[10] 이 선수도 뱅크스에는 못 미치지만 컵스에서만 15년동안 있었으며 훗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11] 정작 오바마는 2013년에 그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어니는 컵스도 언젠간 반드시 우승할 거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여 많은 청중을 웃겼다. 그러고는 '''저 같은 화이트삭스 팬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라는 잔인한 확인사살을... 그리고 그 해, 컵스는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발을 디디는데 성공했다. 비록 메츠에게 스윕당하며 광탈했지만.......